삐삐의 추억과 한강 오리 보트의 매력 양 기자의 육아의 재발견

 삐삐.jpg » 말괄량이 삐삐. 한겨레 자료사진

 

당근처럼 빨간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묶고, 주근깨 가득한 얼굴이지만 항상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삐삐. 닐슨이라는 원숭이와 항상 다니고, 별장에서 혼자서 생활하는 삐삐는 용감하고 씩씩하며 모두가 놀랄만한 괴력을 지녔다. 얌전하고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 애니카와 토미라는 옆집 친구들은 처음엔 삐삐를 이상하게 보지만, 결국 삐삐의 매력에 빠져들고 만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나. 어렸을 적 티비에서 본 삐삐의 얼굴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과 더불어 삐삐는 어렸을 적 내게 뭔지 모를 해방감을 느끼게 해준 캐릭터였다고 할까. 어렸을 적 추억의 인물을 지난 주말 뮤지컬을 통해 다시 만났다. 서울 여의도 63빌딩 앞 한강 선착장 ‘파라다이스 선착 극장’에서 오는 10월31일까지 공연하는 가족 뮤지컬 <삐삐 롱스타킹>(주최는 극단 푸른 광대, 주관은 극단 은행목)을 아이들과 함께 보러 가서다. 딸의 어린이집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맞춰 세 가족이 모두 공연을 보러 갔다. 아빠들까지 함께.
 
바쁘게 돌아가는 하루하루, 아무리 주말에 쉬더라도 공연을 보러 갈 맘이 성큼 생기지는 않는다. 보통은 큰 맘 먹고 공연표를 예매해서 보거나 동네 엄마들과 약속을 해서 보러 가거나 누군가 선물을 해주면 공연을 본다. 이번에는 아주 특별한 공연이라서 보게 됐다. 바로 친구가 공연에 출연해서 꼭 보고 싶었다. 딸이 다니는 어린이집을 통해 알게 된 친구인데, 서로의 일상사를 모두 공유하거나 서로 바빠서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다. 카카오톡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고, 카스토리로 서로의 일상사를 공유한다. 어린이집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함께 의견을 나누고,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놀이 정보를 함께 공유한다. 말하자면 딸 친구의 엄마인데, 이제는 딸들보다 엄마들끼리 더 가까운 사이가 되버렸다. 친구의 이름을 대면 공연값 할인이 가능했고, 우리들은 각자 친구가 동료들과 함께 먹을 수 있는 간식을 준비했다.

오리 보트.jpg

 
일단 한강 고수부지의 공연 장소는 애들 아빠와 내가 연애할 때 한번 식사를 했던 곳. 식사를 하고 나와 밖에서 한강을 바라보며 남편이 내게 화려한 프로포즈를 약속했던 장소다. (물론 약속만 하고 이행은 하지 않았다. 뻥쟁이!) 그런데 그때는 이곳에 공연하는 아트홀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밥 먹는 식당과 까페만 있는 줄 알았더니 작은 공연장이 있는 것이 아닌가. 검은 커튼을 걷으면 한강과 오리 배가 둥둥 떠나니는 것을 볼 수 있는 곳에 공연 장소가 있었던 것이다. 장소 자체만으로도 아이들과 나를 흥분시켰다.
 

공연을 보는 내내 아이들도 나도 깔깔깔 많이 웃었다. 차파테티 여사가 방귀 소리가 나는 방석에 앉을 때나 삐삐가 즐거운 노래를 친구들과 할 때, 또 나쁜 도둑들을 혼내줄 때 통쾌했다. 삐삐는 내 상상속의 삐삐와 일치했고, 오랜만에 만난 삐삐는 여전히 천진난만하기만 했다. 공연 속에서 삐삐는 어른들이 중시하는 덧셈 뺄셈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돈을 달라고 하는 도둑들에게 서슴치 않고 돈을 건넨다. 그리고 그토록 보고싶어하던 삐삐의 아빠가 찾아와 함께 떠나자했지만 자신이 떠나는 것에 슬퍼하는 친구들때문에 친구들과 함께 살기를 선택한다.
 

1945년에 스웨덴의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가 써서 전 세계적으로 폭풍적인 사랑을 받은 이 이야기는 2013년의 유아들에게도 사랑을 받았다. 다시 한번 동심의 세계로 갈 수 있었던 부모들도 대만족. 공연을 본 뒤 무대 위에서 무료로 배우들과 함께 사진도 찍을 수 있어 기념사진도 남겼다.  

공연 끝나고 배우들과.jpg  
 
공연을 보면서 한편으로 나는 마음이 울컥하면서 눈물이 찔끔 나올 뻔 했다. 친구와 눈을 마주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일부러 눈을 마주치는 것도 피하며 박수를 쳐댔다. (눈물을 쏟으면 뭔가 ‘오버스러움’이었다. 내가 그 친구의 엄마도 아닌데 즐거운 공연 보면서 청승맞게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는 것은 좀 아니지 않은가.)  아마도 내 눈물샘이 자극 받은 이유는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인 친구가 일인 다역을 해내는 모습이 자랑스럽기도 했고, 또 `저 정도로 하려면 얼마나 열심히 연습을 해야했을까' `아이 돌보랴 집안일 하랴 얼마나 많은 밤을 새우며 연습을 했을까' 등등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기 때문이리라. 또 자신이 정말 원하는 일을 찾아 부단히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보이기도 했고, 엄마를 자랑스럽게 쳐다보는 친구의 딸과 그 딸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친구의 눈빛이 감동 그 자체이기도 했다. 열정적으로 자기 삶을 살아내는 누군가의 모습은 날 이토록 감동시킨다. 그런 사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큰 힘을 얻는다고 해야할까. 즐겁게 배역을 소화해내는 그녀가 내게 마치 “네 꿈을 펼쳐라”라고 말해주는 느낌을 받았다. 무뚝뚝한 남편도 집에 돌아와서는 "대단하다. 그 엄마. 그 열정은 정말 인정할 만하더라"라고 말했다. 나 혼자만의 느낌은 아니라는 생각에 위안을 받았고, 남편과 뭔가 공감할 거리가 생겨 좋기도 했다.
 

즐겁게 공연을 본 뒤 아이들이 모두 오리 보트를 타고 싶다고 우겨댔다. 아빠 엄마는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끌려가 결국 오리 보트를 타게 됐다. 한 번도 오리 보트를 타본 적 없는 나는 타기 싫다는 남편을 홀로 놔두고 두 아이를 데리고 자동 보트를 탔다. 많이 비쌀 줄 알고 한 번도 타보려 하지 않았는데, 대당 2만원으로 40분을 탈 수 있었다. 어렸을 적 보트를 타다 보트가 뒤집혀 물을 먹고 물에 대한 공포증을 가지게 됐던 나로서는 오리 보트를 타는 것은 매우 용감한 도전이었다. 그것도 6살, 4살 두 아이를 데리고.

 즐거워하는 민지민규.jpg

 
후덜덜 하는 다리를 어쩌지 못했지만, 아이들에게 무섭다는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의연한 척 대범한 척 하면서 보트 운전을 했다. 강바람은 시원했고, 수면에 비친 햇볕은 반짝반짝 빛났다. 엄마를 철썩 같이 믿고 아무 두려움없이 배를 탄 두 아이는 마냥 신나해했다. 다른 가족들은 스마트폰으로 사진도 찍고, 물 위에서 서로 다른 배로 아이들을 이동시키고, 수중에서 범퍼카처럼 부딪히며 즐겁게 논다. 20분 정도 지났나. 조금 익숙해지고 한결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나도 소심하게 핸드폰을 꺼내 아이들 사진을 찍어보지만 여전히 긴장감을 감출 수 없다. 그러다 한 10분 정도 지나니 이제는 조금 자신감이 생긴다. 다른 배에 타서 즐거운 표정으로 우리쪽을 바라보는 다른 가족 사진 한 컷도 찍어보고 좀 더 멀리 배를 몰아본다. 아이들은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배를 운전한다.
 
9월의 시작, 이 정도면 아주 즐겁고 유쾌하게 시작한 것 같다. 하루하루가 너무 빨라 시간이 손가락 틈새로 모래알이 흩어져버리는 것처럼 훅훅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느끼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삐삐의 추억과 오리 보트의 매력을 함께 발견한 시간, 그렇게 주말이 휘리릭 지나갔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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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알듯말듯한 육아에 대해 함께 알아가고 고민합니다. 불안한 육아가 아닌 행복한 육아를 꿈꿉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삶을 지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