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취재, 백용기 회장의 마잉주 대만 총통 접견기 국제안보

 

 D&D Focus 2009년 6월호


마잉주 대만 총통,

“한-대만 관계의 걸림돌은 없다!”


 

절도봉주(絶度逢舟)! 대만, 끊어진 길에서 조각배를 만났다. 17년 전에 한국의 일방적 국교단절 통보로 한국에서 쫓겨난 대만, 그나마 관계는 유지시켜 온 끈은 정부가 아니라 민간이다. 그 중에서도 20년 이상 대만을 드나들며 양국 간의 관계를 발전시켜 온 숨은 조각배는 백용기 거붕그룹 회장이다. 5월 14일, 대만은 미수교국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대만 최고훈장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백 회장에게 수여했다. 본지는 이 역사적인 현장의 전 과정을 동행 취재했다. 백 회장을 맞이하는데 마잉주 총통을 비롯한 대만의 최고위급 인사들이 총동원되었다. 



총통의 깜짝 환대


초여름의 작열하는 태양이 수은주를 밀어 올리던 5월 14일, 대만의 수도 타이페이의 총통부 접견실.

TTV, CTV, CTS, FTV 등 대만 공중파 방송사 카메라 7대가 전면에 배치되고 그 뒤에 핑궈일보, 자유일보, 주간 타임즈, 일주간 등 대만 유력 언론사 기자들이 도열한  총통부 접견실 앞. 이들은 한국에서 온 한 젊은 기업인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카메라의 앵글을 조정했다. ‘서울-타이페이 클럽’ 수석부회장이면서 거붕그룹을 이끌고 있는 백용기(49세) 회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날은 백 회장이 외국인으로서는 최고 훈장인 ‘경제전문훈장’을 수여받기로 되어 있는 날이다. 오후 1시30분에 인치밍 경제부 장관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는 의례를 가진 백 회장은 곧바로 마잉주 총통을 예방하기 위해 총통부로 출발했다. 백 회장이 총통부에 도착하는 오후 3시는 역사적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대만 유력 언론이 대거 동원되었다. 의장대 사열만 없을 뿐이지 모든 격식은 VIP 영접에 준하는 수준이었다. 

백 회장이 대만에 체류하는 동안에 대만 국가 수뇌부는 한국의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했다. 장 총통 뿐 만 아니라 인치밍 경제부 장관, 하립언 외교부 차관, 왕금평 입법원장과 같은 국가 주요 기관의 장이 2박 3일로 예정된 백 회장의 대만 체류 기간 중 환영 행사를 준비했다. 경제계에서도 국제무역국 국장, 대외무역발전협회, 조동웅 원웅기업 회장, 고렴송 중국신탁그룹 회장 등 대만의 거물 경제인들이 각기 백 회장 영접 행사를 준비함으로써 3일 간의 방문 일정은 그야말로 눈 코 뜰 새 없는 강행군이었다.

오후 3시. 백 회장 일행이 접견실에 도착하는 순간 일제히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잠시 후, 준수한 외모와 온화한 행동으로 인해 '작은형'이라는 뜻의 '샤오마거(小馬哥)'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는 마잉주 총통이 접견실로 들어오자 방송사 카메라는 바삐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 총통은 먼저 미수교국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대만 최고훈장인 ‘경제전문훈장’을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백 회장이 수여받은데 대해 축하의 뜻을 전달했다. 이후 예정된 한 시간을 훌쩍 넘기면서 마 총통은 자신의 양안관계에 대한 비전과 철학, 그리고 한국과 대만의 관계발전에 대한 희망을 피력했다.

마 총통은 전임자인 천수이벤 전 총통이 ‘대만 독립’을 표방하여 중국과 긴장관계를 조성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중국과 적극적인 교류․협력을 추진함으로써 양안관계에서 화평을 이루고, 이를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삼는 자신의 구상을 명료하게 밝혔다. 불과 1년 전의 천수이벤 총통 시절에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특히 이날 마 총통은 지난 4월 19일에 중국과 정기항공편, 공동 범죄소탕 및 사법공조, 금융 협력이라는 3가지 의제에 대한 합의서를 체결(3통 합의)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대륙자본의 對대만 투자에 관해서도 완전한 의견 일치를 보는 등 양안관계에서의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소개했다.


과거로 회귀는 없다


상전벽해(桑田碧海)!

영원히 연결될 것 같지 않았던 중국과 대만 간의 하늘 길, 바다 길이 열리고 돈과 사람이 자유롭게 오고가는 작금의 변화는 충격적이다.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대만의 경제성장 동력으로 활용하는 마 총통에 대한 대만 국민의 지지는 기자가 타이페이를 방문한 그 시점에도 계속 상승하여 이미 50%대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불과 1년 전의 대만 독립을 주장하던 천수이벤 전 총통 시절의 양안 간 긴장상황과 비교해 볼 때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마 총통은 “이러한 중국과의 관계개선으로 인해 대만과 한국 간에 놓여있던 장애물도 완전히 사라졌다”며 지난 17년 동안 한국이 일방적으로 국교를 단절시킴으로서 초래된 불행한 한․대만 관계를 복원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피력했다. 이것은 한국에 대한 준엄한 선언이자 메시지다. 막강한 화교자본을 앞세운 대륙진출을 통해 고양된 대만의 국가적 에너지와 자신감을 이제 한국도 주목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더 이상 중국 눈치를 보지 말고 이제는 당당히 한국과 대만이 형제의 관계를 회복하자는 새로운 복음이다.

너무나 강렬한 그 메시지는 아직도 냉전의 유산이 남아있는 이 나라에서 정치 지도자가 피력할 수 있는 최고의 낙관적 표현이었다. 대만의 최고 권력자가 한국의 민간인에게 이처럼 명료하게 관계개선 의지를 피력한 것은 파격적이다. 이날 마 총통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시종일관 양안관계 회복과 한국과의 관계개선에 대한 신념을 담고 있었다는 참석자의 반응이다. 특히 마 총통은 “한국은 대만의 5대 무역국으로 문화교류에서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며 “최근 한국의 중국어 열풍으로 교육과 문화에 더 많은 교류가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과거 식민지시대 항일투쟁을 함께 했던 형제로서, 공산주의와의 투쟁 전선에 함께 했던 동지로서 한국에 대한 기대와 향수와 존경의 뜻이 가득 담긴 그의 말에 참석자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마 총통의 이러한 환대 및 관계계선 의지에 대해 백 회장 일행은 한편으로는 감사하면서도 착잡하고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밀려왔다. 한국은 일찍이 장개석 총통의 도움으로 자주독립을 한 나라다. 그러나 1992년에 우리가 대만에 일방적으로 국교단절을 선언하면서 “일주일 안에 대사관을 비우라”고 통보했던 것이다. 한국이 형제국을 매몰차게 배신하고 폭력적으로 내쫓았다는 이 엄연한 역사적 진실이 깊은 양심의 가책으로 되돌아오면서 백 회장 일행은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총통 예방 자리에는 대만 최고의 갑부이자 ‘아시아 금융의 황제’라고 불렸던 고렴송(辜濂松) 중국신탁그룹 회장,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수석자문위원인 양영명(楊永明) 대만대학교 정치학과 교수가 배석했다.

백 회장은 마 총통에게 “경제, 문화, 교육을 포함한 한․대만 판 新3通을 활성화하자”고 제안했다. 20년 전의 외교관계로의 급격한 복원이 단시간 내에 이루어지지 못할 바에야 양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세 분야에서의 협력을 먼저 이루어 냄으로써 장차 정치적 관계의 복원까지도 내다보는 지혜를 발휘하자는 뜻이다.


   

기업인의 눈에 보이는 것들


그러나 이날 마 총통과 백 회장의 역사적 만남에는 몇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첫 번째는 정작 한국 내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백 회장을 대만이 국가적으로 환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백 회장은 거제 백병원과 경기도 화도 중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문화예술계에서 발이 넓은 인사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백 회장 자신이 지난해 말, 기자에게 의미 있는 말을 한 바 있다.

“한국에서는 폼이 나야 하는데 여기(대만)은 폼의 문화가 아닙니다. 어떤 한 개인의 타이틀, 예컨대 국회의원, 검찰총장, 이런 것들이 아니라 인간 백용기가 누구냐, 이런 걸 중시합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인간적인 의미를 잘 만듭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사람을 대접하고 그 사람의 가치를 알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한국과 다릅니다. 이게 바로 그들의 인간경영, 대국경영적 관점입니다. 제국을 경영해 본 오랜 역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백 회장의 설명은 계속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절도봉주(絶度逢舟)!

중국에 밀려 외교적으로 고립된 대만은 1992년에 한국으로부터도 국교단절의 아픔을 겪는다. 이로 인해 건너갈 길이 끊어진 곳에서 대만은 한 조각배를 만났다. 백 회장은 지난 20여년간 한국과 대만 사이에 놓인 동중국해를 오고 간 하나의 조각배였다. 비록 국교는 복원되지 않았지만 백 회장이 이끈 서울-타이페이 클럽을 비롯한 경제단체는 보이지 않는 다리였다. 어떤 때는 중국의 눈치를 보면서 불이익을 감수하고 대만과 인간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8년 전 백 회장은 대만에 건너가서 유력인사들과 함께 서울-타이페이 클럽 행사를 가지면서 소외된 대만 관계를 민간이 창구가 되어 주자고 결의했다. 정기 항공노선을 복원하고 경제사절단, 무역사절단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이에 힘입어 2004년 양국 간 국적기 복항과 상호비자면제 협정 체결로 양국 관계는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현재 대만은 한국의 제5위 무역상대국이자 연간 인적교류가 69만 명에 달하는 주요 국가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외교관계 없이 이러한 성과가 나오게 된 것은 모두 민간의 노력 덕분이다. 그 중에서도 백 회장이 그 중심인물이었다는데 대만 정부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리고 선뜻 백 회장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국가적으로 그를 환대하기로 결정했던 것.

두 번째 의문은 백 회장은 왜 대만을 주목했는가, 라는 것이다. 이 젊은 기업인은 무엇을 보았을까? 이에 대한 백 회장의 설명.

“우리는 유대인이 세계경제를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세계경제에서 화교자본, 즉 화상은 무시할 수 없는 큰 손입니다. 그런데 화상의 핵심은 대만이 주축입니다. 주로 중국에 자금을 투자한 기업이 대만기업기도 하고요. 제가 오랜 전에 현장에서 깨달은 것은 언젠가 대한민국이 저 친구들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한국은 아웃될 것이다, 라는 겁니다.”

대만과 친해야 중국 진출도 가능하다는 얘긴데, 이제껏 우리는 그 반대로 알고 있지 않았는가? 백 회장은 고렴송 회장이 주재한 15일의 만찬에서도 이러한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는 틈만 나면 중요한 자리에서마다 이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소위 대만자본에 편승한 대륙진출의 비즈니스 전략이다.

이제는 기자에게도 당연시 들리는 이 주장도 처음 들을 때는 생경하기만 했다. 우리 기업이 이미 중국에 많이 진출하고 있는데 왜 대만을 활용해야 하나? 이에 대해서는 최근 중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이 상당수 사업에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 볼 필요가 있다. 현지의 법률과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채 싼 노동력이라는 유혹에 빠져 진출했다가 실패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화교자본을 등에 업으면 문제가 달라진다. 이미 중국 투자에 2조 달러가 넘는 화교자본이 들어가고 있고, 이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중국 현지에 깊은 뿌리를 내렸다.

이러한 경제적 통합이 소리 없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제껏 중국과 대만의 정치적인 관계와 군사적 긴장에만 주목해왔다. 우리의 의식에는 갈등관계를 먼저 보고자 하는 원초적 냉전의식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래서 이제는 변화된 현실마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한 예로 우리가 중국을 의식한 나머지 외교부조차 대만을 중화민국이라는 정식 명칭으로 부르지 않고 차이나라고 하고 그 옆에 괄호치고 타이페이라고 적고 있다. 마치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대신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하고 그 옆에 괄호치고 서울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한 호칭에는 오직 강한 자에게 줄서고 약자를 배제하는 우리의 잘못된 근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양안관계가 개선되고 난 이후에도 이렇듯 고루한 인식이 설 자리가 있겠는가?

국제 비즈니스의 현장은 탁상의 이론가들보다 역동적이며 또한 정확하다. 정치권력이 절대로 볼 수 없는 것을 기업인들은 본다. 대만은 정치적으로는 약자일지 모르나 경제적으로는 이미 강자다. 화상자본의 엄청난 위력을 체험한 백 회장은 그들과 손잡지 않으면 언젠가 중국 진출도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러한 ‘동반전략’은 양안관계 개선 이후를 내다보는 대륙진출의 새로운 전망과 비전이다. 더 늦기 전에 그러한 지론을 구체화하는데 온 몸을 던진 백 회장의 목소리는 국내에서는 미약할지 모르나 대만에서는 그 울림이 컸다. 



머나먼 양안관계


그러면 중국과 대만은 과연 얼마나 가까워지고 있는지,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살펴보자. 이번에 백 회장을 수행한 ‘정예민간교류단’이 둘러 본 타이페이 시내 곳곳에는 대륙에서 온 관광객들이 곳곳에 넘쳐났다. 이들로 인해 관광수입이 급증함은 물론이고, 과거에는 대만과 중국이 빙 돌아서 투자하던 것이 이제는 서로 직접 투자가 가능해진 단계에 이르렀다. 지난 4월 19일 양안 간에 합의된 ‘포괄적 경제협력합의’에 따라 대륙자본의 대만 투자의 문도 열리는 중이다. 중국의 양안관계위원회는 5월 5일 자동차를 포함한 중국의 65개 산업에 대만 투자를 허용하는 방안을 확정지었다. 중국의 최대 토종업체인 치루이(奇瑞) 자동차의 잉통위에(尹同躍) 회장은 4월 27일, “대만의 셩룽자동차와 협력해 전 세계 시장을 상대로 새로운 모델을 내놓겠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지리(吉利)자동차 역시 대만 상륙 초읽기에 들어갔다. 리슈푸(李書福) 회장은 지난 3월 “자동차 수출을 위해 대만의 수입업체와 접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대만 투자기회를 물색하던 철강업체인 중강그룹(中鋼, 시노스틸)은 타이베이에 조만간 사무소를 개설하기로 했다. 또 중국의 최대 이동통신업체 차이나모바일(中國移通)은 중국 국영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대만 투자를 실시하기로 했다.

경제와 사회문화 분야에서 급속한 개방이 이루어지는데 반해 정치문제, 즉 중국과의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문제에 대한 갖가지 논란에 대해 마 총통은 역사 후에, 즉 후세로 미루어버렸다. 철저히 경제 중심으로 접근하여 평화는 저절로 점진적으로 달성되도록 하는 조용한 실용주의 전략이다. 중국 대해서는 독립도 주장하지 않고 통일도 주장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마 총통의 노선에 대해 야당인 민진당을 비롯한 체제 안보세력은 대거 반발하고 있다. 무엇보다 마 총통이 대만 독립 노선을 포기함으로써 신성한 국가 주권을 스스로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로 전몰자들이 중심이 된 호국안보세력들은 입법원 앞에서 상시 옹성을 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는 양상은 한국에서 보여지는 남남갈등과 유사하다. 기자는 입법원 앞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대만 국립대학교 한 학생에게 마 총통의 노선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그는 “독립이라는 국가 주권을 포기한 마잉주는 우리의 총통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기자가 대만을 떠난 직후인 5월 20일, 민진당이 주축이 된 8만명의 시위대는 타이페이에서 국가주권을 포기한 마 총통을 규탄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외로웠다. 이러는 동안에도 마 총통의 지지도는 계속 올라가 56%에 육박하고 있다.

기자가 만난 하립원 외교부 차장이나 안국서 경제부 일등상무비서, 소이문 중화경제연구원 분석관, 그 외에도 많은 전문가들은 “이제는 절대 과거의 긴장상태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5월 15일 저녁, 백 회장은 기자에게 “대만과 중국을 가로막던 마지막 먹구름이 걷혔다”고 말한다.

한편 마 총통은 천수이벤 전 총통과 그 친척들을 부패 혐의로 구속시켰으며, 천 총통 시절에 군 내부에서 벌어진 매관매직, 즉 인사비리를 조사하면서 현직 3성, 4성 장군들을 대거 구속시켰다. 구속된 장군들 대부분이 천수이벤 전 총통의 핵심 측근들이다. 마치 김영삼 정부 시절에 벌어진 군 인사비리 조사와 하나회 척결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대규모 부패척결은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더불어 양안의 평화를 낙관적으로 전망하면서 군 병력을 20만명 수준으로 감축함으로서 소수 정예화된 국방태세로 전환하고 있는 중이다.

평화체제가 구축되지 않으면서도 사실상의 평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정치지도자들의 인식은 우리와 비교해 볼 때 사뭇 특이하다. 천수이벤 총통 시절에는 대만 건국 기념일인 쌍십절 행사에서 군사 퍼레이드를 하면서 내풍, 웅풍 미사일을 과시한 바 있다. 유사시 핵 탑재가 가능한 무기다. 대만은 유사시 3~5개월이면 핵무기 개발이 가능하다고 말해왔다. 한반도에서 북한이 핵을 개발하면 제일 먼저 대만이 핵을 개발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군사력 증강은 천 전 총통이 정치적으로 활용한 카드에 불과하며 양안관계 긴장이라는 것은 일시적 착시현상으로 치부하고 있다. 국민당 정부로 교체되면서 안보를 정치에 이용하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어졌다. 이에 대한 백 회장의 설명.

“마잉주 총통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순간 양안의 긴장을 조성하던 모든 원인이 제거되고 있다. 대만 국민 중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은 3~5%도 안 된다. 양안은 이미 평화로 가고 있었는데 천수이벤 전 총통이 정치적 이유로 대만 독립을 들고 나와 일시적으로 긴장상태가 조성되었을 뿐이다. 앞으로 그런 것은 없다.”



중국식 실용주의


한편 이번 대만 방문에 참여한 임혁백 고려대 정외과 교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의 경우는 평화체제다, 국가주권이다 하는 논란이 매우 많고 남북 간에 대화도 많은데 실질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그런데 중국과 대만은 정부 차원에서 정치적인 문제를 논의하지 않으면서도 사실상의 평화체제로 가고 있다. 이렇게 대외적으로 거창한 슬로건을 제시하지 않고 조용하게 평화로 가고 있는 것을 보면 광대한 제국에서 여러 민족을 경영해 본 경험에서 나오는 중국식 실용주의가 느껴진다.”

대만과의 정치문제에 대해 별다른 논의가 없다는 것은 제3자가 보기에는 대만의 외교안보전략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기자는 소이문 중화경제연구원 외교분석관에게 “도대체 마 총통의 국가안보에 대한 전략과 정책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자 그녀는 한참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경제전략 만으로도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데 거창한 안보정책이 왜 필요 하느냐는 투였다. 대외 경제상황도 어려운데 국방비를 많이 배정할 의사도 없다. 이에 걸림돌이 되는 천수이벤 전 총통이나 고위 군 장성 상당수는 구속시켜 버렸다. 중국 위협을 과대포장하며 안보논리를 정치적으로 활용할 여지는 이제 없다. 그런 정책이나 슬로건으로 쓸데없이 중국을 자극하고 국론을 분열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대만의 고위층 누구를 만나더라도 양안 간의 화평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넘쳐났다. 군사적인 문제는 가급적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적 묵계이자 합의된 정서라고 보여 진다. 한국적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국토의 곳곳에 조성된 방어 요새와 군 기지, 그리고 아직도 징병제가 유지되는 이 나라는 그 자체가 냉전의 유산이다. 그 유산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과감히 초월하면서 새로운 활력과 에너지로 채워지는 이 급격한 변화에 대만 국민들은 어느 정도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일까? 동북아의 국제질서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이에 대해 대만의 정치지도자들은 말한다.

“그런 문제는 후세에 물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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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월간 군사전문지 <디펜스21+> 편집장, 한겨레 군사사이트 <디펜스21> 전문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