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인터뷰 한묘숙 위트컴 희망재단 이사장 인터뷰

 

 


“마미”를 외치며 죽어간 미군병사 유해를

죽을 때까지 찾겠다


리처드 위트컴 장군은 한국전쟁 중에 부산의 미 2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근무한 인물이다. 전쟁 후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고문으로 경무대에 근무하면서 백악관과 중요 연락업무를 수행했다. 그 미망인인 한묘숙 여사는 “한국전쟁 시 죽어 간 미군병사의 유해를 고향으로 돌려보내 달라” 위트컴 장군의 유언에 따라 30년이 넘도록 북한과 중국을 오가며 사재를 털어 미군 유해 발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여사는 미군 유해발굴을 추진하는 『위트컴 희망재단』의 이사장이다. 본지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6월 13일, 한 여사의 자택을 방문하여 한국전쟁 시 사망한 미군 유해 발굴 사업의 비사를 들을 수 있었다. 여사의 삶은 파란만장한 고난으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의 깊은 사연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23번 북한을 방문

한국전쟁 시 부산에서 제2군수사령관을 역임한 리처드 S. 위트컴 장군의 미망인인 한묘숙 여사(85세)는 충북 청주가 고향이다. 젊은 시절 고아원과 병원을 운영하면서 사회사업에 투신했던 한 여사가 리처드 S. 위트컴 장군을 만난 때는 1963년. 그리고 1964년에 그와 결혼했다. 1916년생인 위트컴 장군은 2차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부산에서 2군수기지사령관을 역임했다. 전쟁 직후인 1954년 전역한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고문으로 경무대와 백악관의 주요 연락업무를 맡았다.

위트컴 장군 생전에 “한국전쟁 때 죽어 간 미군병사 유해를 꼭 고향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말을 한 여사에게 자주했다. 1982년에 위트컴 장군이 미8군 영내 내자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할 당시에도 한 여사는 중국에서 북한 측 인사를 접촉하고 있었다. 그 이후, 한 여사는 당시 위트컴 장군의 유지에 따라 사재를 털어 미군 유해 발굴 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여사는 『위트컴 희망재단』의 이사장으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미군 유해 발굴 및 송환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있다.


- 북한에 자주 다녀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초로 유해발굴 및 송환 사업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장군께서는 “한국전쟁 때 죽어 간 미군병사들의 시신을 꼭 찾아서 본국으로 보내 달라”고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제가 중국에서 천진에서 제일 부자라는 왕광영 씨의 도움으로 북한 측 인사를 접촉하기 시작한 것이 1979년 4월입니다. 1984년경에 중국에서 허담 부총리를 연결시켜 준 겁니다. 여기에서 최초로 미군 유해발굴 사업이 시작된 겁니다. 당시에는 북한은 2백만달러만 내면 유해 다 가져가라고 했어요. 그만한 돈이 없어 애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북한에 들어갈 수는 없었어요. 실제로 북한을 출입하기 시작한 것이 1990년부터였습니다. 당시 북한의 허담 부총리와 한시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의 초청으로 가서 미군 유해 발굴과 송환을 타진했습니다. 주로 북에서 돌아다닐 때는 한시해 부위원장과 같이 돌아다녔습니다. 북한에서는 91년 11월에 저에게 노력훈장이라는 걸 주었습니다. 92년에는 주로 함경도 나진으로 들어갔습니다. 중국의 금천을 통해 들어갔어요. 이때부터 95년까지 총 23번 북한에 갔다 왔습니다. 북경, 길림 등 중국에 다녀온 회수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한시해는 내가 미국 사람하고 산다니까 굉장히 화장하고 꾸미고 오는 줄 알았나봐요. 손바닥에 얼마나 향수를 뿌렸는지 악수하고 나서 그 냄새가 며칠을 가더군요.“


- 일은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세 사람이 따라 붙어요. 참사가 하나, 지도원 하나, 운전수지요. 대강 여기 외국사람 묘가 어디 있느냐고 탐문합니다. 그런데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찾아와 말을 해요. 장전호에 있다는 거예요. 장전호 한군데다가 다 몰아서 수장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찾을 수 없으니까 제가 군번표, 도그택(Dog Tag)을 갖다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도그택을 가져오는데 주로 중국에 가서 조선족을 통해 받았습니다. 그런데 조작된 가짜입니다. 하도 속아서 그 다음부터는 조선족에게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재벌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레나 한이라는 여자가 삼성의 중국지부장이었는데, 이 여자가 제 행세를 하고 다녔습니다. 자기가 장군 부인이라고 떠벌리고 다닌 거죠. 언론에서는 가레나 한과 저를 동일인물로 오인하더군요. 박철언 씨가 저에게 이상한 여자라고, 조심해야 할 사람이라고 말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가레나 한은 북한에 한 달 간 억류당한 후에 정신이 이상해졌습니다. 제가 가장 가슴 아픈 것은 한국 사람이건 조선족이건 북한사람이건 동포 끼리 거짓말을 한 겁니다.”


미군 송환 유해 99%가 가짜

- 유해발굴이라는 어려운 일을 추진하시는데 그동안 겪은 고초도 이루 말할 수 없죠?

“한시해 위원장은 저 말고도 3명을 더 초청했는데 김복동 씨, 김구 선생 아들 김신, 그리고 문명자씨였어요. 제가 북한에 들어가서 그 초청장을 가지고 국내로 들어왔습니다. 김일성은 죽기 전에 김신을 한 번 보고 싶어 했습니다. 이걸 안기부가 문제를 삼아 제가 안기부 지하실에 끌려간 게 89년 8월 4일입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초청장은 빼았겼구요. 저를 이중간첩으로 몰더군요. 김일성 앞잡이래요. 장군이 살아가실 때는 저를 건드리지 못하더니 장군이 돌아가시자 저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조사관들에게 “저는 마타하리가 아닙니다”라며 저항했어요. 독일과 프랑스를 오가며 이중간첩을 했던 그 유명한 미인 마타하리 말입니다. 항상 정부로부터는 이런 식으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보다도 더 힘든 것은 북한에 드나드는 사업가나 정치인들이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봅니다. 정부에서 도움은 일체 받지 않았습니다. 안 받기를 잘 했지요. 그러면 더 큰 말썽이 났었을 겁니다. 일본의 아베 신따로 외상과 미국의 밥 돌 상원의원이 도와주셨습니다.”

- 그렇게 중국과 북한을 오가면서 유해 송환은 주로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중국에 가면 조선족들이 미군 전사자 군번표, 일명 ‘도그택(Dog Tag)'을 찾았다며 가져옵니다. 그리고 유골을 받습니다. 그러면 군번표와 유골은 주한미군을 통해 화와이에 있는 ’전쟁포로/전사자(POW/MIA) 회계사령부(JPAC)‘로 보내집니다. 화와이에 있어요. 여기서 명단과 대조하고 유전자 감식을 통해 진위 여부를 밝혀냅니다. 충남대에서 우연히 고고학 발굴을 하다가 우연히 발굴한 것 포함에서 남한에서 3~4번 발굴된 것이 전부인데, 전부 우연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 그래서 얼마나 성과를 거두었습니까?

“거의 다 가짜예요. 도그택은 가짜로 만들어 흙을 묻혀서 조작합니다. 사례금을 노린 것이지요. 북한 당국에서 정식으로 미국에 유해를 인계한 것이 2백여구 정도인데 거의 다 가짜로 판명되었습니다. 북한은 아예 창고에다가 유골을 모아놓고 미국과 거래할 준비를 해 놓았어요. 송환된 유해 중 진짜로 밝혀진 것은 단 2구정도 밖에 안됩니다.”

이 대목에서 인터뷰에 동석한 위트컴 희망재단의 김인식 부이사장이 한마디 거든다.

“대부분이 사기인데 우리 한묘숙 이사장님께서는 번번이 돈을 줘버릇 해서 조선족들이 가짜를 가져옵니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러면 이사장님은 없는 돈을 털어 수고했다고 돈을 주어요. 버릇을 잘못 들인 거죠. 조선족뿐만 아니라 북한에서 나온 사람들도 이 짓을 합니다. 아예 소문을 듣고 이사장님을 찾아옵니다. 주로 돈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돈을 주고 도그택이나 유골을 가져오면 우리는 그 유품을 미 8군에 있는 담당자에게 가져가서 한국전쟁 때 실종자 명단과 대조를 하도록 합니다. 미군은 이미 육․해․공군, 해병대 별로 실종자 명단을 정리해서 컴퓨터에 다 입력시켜 놓았어요.”

 

- 그러면 판문점에서 가끔 미군 유해송환이다 뭐다 하는 것도 대부분 그런 식인가요?

“그렇죠. 송환 당시에는 진짜인 줄 알고 송환받지만 얼마 후에는 가짜로 밝혀집니다. 진짜로 판명된 사례는 극히 드믑니다.”

충격적인 내용이다. 가끔 언론에 판문점에서 유해 송환 장면이 보도되곤 하는데, 그것이 거의 전부 가짜였다는 얘기다. 돈을 노린 브로커들이 지금도 가짜 미군 유해 송환에 뛰어들고 있는데 한두 명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도 한 여사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저 가짜들 사이에서 아직도 고향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미군 병사의 영혼이 어디엔가 숨어있겠지, 하면서.


장군의 유훈


- 그렇게 수없이 속고, 정부로부터는 어떤 인정도 받지 못하면서 굳이 계속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장군의 유언에 따르는 것입니다. 언젠가 장군은 북한의 장진호에 수천 구의 미 해병대 병사 유해가 있을 거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중공군에 밀려 남하하면서 거기서 많이 죽었다는 거예요. 제가 북한에 들어가 장진호에 갔습니다. 거기서 북한 사람으로부터 증언을 들었는데, 한국전쟁 당시 미군 병사들이 죽을 때 ‘마미’하고 외치더래요. 북쪽 사람들이 저에게 ‘오마니, 마미가 뭡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그건 엄마라는 뜻이라고 말해주니까 이 사람들 말이 ‘아 그 새끼들이 죽을 때 마미라고 하면서 죽더’라는 거예요. 그 순간 제가 가슴이 얼마나 뭉클해지던지. 장군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하염없이 북받쳐 오르는 슬픔에 젖었습니다. 아직도 엄마를 그리워하는 그 불쌍한 영혼들의 흔적이 있었던 겁니다. 당시 사망한 미군은 장진호에 수장되었는데, 그 숫자가 8000~9000명 정도라고 얘기를 들었습니다. 막상 현장에서 이런 사실을 접하고 나서 저는 한평생 이 일을 포기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장진호 전투는 한국전쟁 중인 1950년 겨울, 미 1해병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중국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위기를 겪었다가, 간신히 성공한 후퇴작전이다.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진행되었다. 1950년도 사건 당시, 뉴스위크지는 미군의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하고 되어 있다. 1해병사단 외에 미국 육군 7사단 병력 일부도 함께 한 후퇴작전으로 알려져 있다.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국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국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미 해병1사단의 이 퇴각작전으로 중국군을 저지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 피란민 등 20만 명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으며, 서부전선의 미 8군이 중공군을 방어할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로 인해 중국군의 함흥 지역 진출은 2주간 지연됐고 중국군 7개 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 그러면 위트컴 장군에 대해 몇 말씀 여쭤보겠습니다. 그렇게 한국을 사랑하고, 차마 한국을 떠나지 못했던 위트컴 장군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아주 핸섬 했어요. 애국심이 정말 대단한 인텔리였습니다. 그 형이 2차 대전 종군기자였는데 드골 대통령하고 친했지요. 대령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하여 불란서 최고훈장을 받았습니다. 장군으로 진급해서 후방기지사령부, 부산의 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왔지요. 태평양사령부 산하부대입니다.

장군은 누가 오면 대접하고 무엇을 싸주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정부 재산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외국에 나가 종이에 무엇을 끄적거리니까 ‘그렇게 정부 재산을 낭비하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장군 때문에 애국심이란 걸 갖게 되었습니다. 

옷도 한 번도 훌떡 벗는 걸 본적이 없습니다. 양말도 그렇고요. 속 옷 빨래는 자기가 직접 하지 절대로 남을 시키지도 않았어요. 손수건을 빨아서 전등 옆에 걸고 말렸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일을 하루 중에 반드시 마무리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가사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미8군에서 저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옆으로 사령관의 차가 와 서더군요. 사령관은 장군에게 ‘부인을 자기 차로 모시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장군은 이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미국정부의 재산인 사령관의 차를 이용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렇게 원칙에 철두철미했어요.

반듯한 자세로 식사를 하면서 절대로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한 번 책을 손에 잡으면 다 읽기 전까지는 절대로 잠자리에 들지 않았습니다. 무척 노력하고 명예를 지키는 그 모습에 저는 큰 감명을 받았어요. 그 당시부터 제가 보아왔던 미군의 장군들은 대부분 위트컴 장군과 비슷했습니다. 제대하고 나서도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미군 장군들, 3성 장군 하고 나서 전역해도 생활은 지극히 검소합니다. 승용차 한 대 사는데 6년 동안 돈을 모아 사요. 아주 서민적입니다.”


미군은 쿠테타를 혐오했다


- 결혼은 어떤 계기로 이루어졌습니까?

“제가 고아원을 하면서 스폰서를 찾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63년에 만났는데 결혼을 하기 전에 저에 대한 신원조회를 하더군요. 그래서 이듬해인 64년에 했습니다. 그런데 장군은 ‘반드시 100% 순수 한국인과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었답니다. 경무대에 드나들 때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인하고 결혼하라고 권했는데, 자기는 서양 물들은 한국인이 아니라 진짜 한국인하고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답니다. 지조가 있고 남편 말에 순종하는 진짜 한국 여자 말이죠. 그게 바로 제가 결혼한 이유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그게 어떤 이유죠?

“장군은 제가 반드시 미군 유해를 찾아내 본국으로 송환할 거라고 믿었던 겁니다. 그걸 확신하고 결혼을 했던 거죠. 사실 저의 집안이 좀 유복한 편입니다. 그래서 정부가 도와주지 못해도 저의 힘으로 유해 송환 사업을 할 수 있었어요. 82년에 장군이 작고하는 그 순간에도 저는 북한에 있었습니다.”


- 그러면 장군은 계속 경무대에서 정치고문 일을 하셨나요?

“아니예요. 5․16 쿠테타가 나서 박정희가 집권하자 미련 없이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쿠테타를 일으킨 사람들을 혐오했어요. 이승만 대통령은 ‘탱크 한 대만 있어도 북진하겠다’며 큰 소리 쳐서 면담하던 하지 장군이 얼굴이 시뻘개져서 나오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큰일 났다’는 말을 여러 번 하더군요. 장군도 이 대통령 때문에 많은 마음고생을 했지만 정말로 가깝게 지냈어요.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을 용납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5․16 쿠테타 후에 3년 정도 공직에 있다가 부산에 가서 메리놀 병원을 세우고 고아원 봐 주셨습니다. 그렇게 3년을 보내다가 미국으로 귀국했습니다.”


- 한국의 장군들에게 아쉬웠던 점은 어떤 것입니까?

“한국 장군들은 미군 장군 못 따라 갑니다. 미군 장군들의 근검절약에 비해 한국 장군들은 돈도 좋아하고 낭비도 합니다. 미국 장군들은 자기 빨래는 반드시 자기가 하고 별 계급장도 자기가 닦습니다. 그리고 밤늦도록 일을 합니다. 타이프 치는 소리가 밤늦도록 계속 나요. 엄청나게 노력을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과거에 군에서 한 몫 챙겨서 나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군에서 꽤 존경받는 분도 있었습니다. 월남 전 때 보면요, 사이공에서 장군들이 귀국하는데 엄청 많이 갖고 들어와요. TV를 비롯한 값나가는 것들 잔뜩 비행기에 실어서 들어오는데, 반드시 목록을 작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뱀을 잡아서 실어 옵니다. 그것도 산채로. 사이공 뱀이 크고 힘이 좋거든요. 너나 할 것 없이 짐을 실으면서 목록에 꼭 ‘스네이크’라고 쓰여 있어 미군이 이를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산 채로 가져오려니 개구리까지 뱀 먹이로 같이 가져오는데, 미군 조종사들이 신경을 쓰여 제대로 조종을 못하겠더라는 겁니다. 저는 한국 장군들의 이런 행태에 대해 말을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위트컴 장군이 말리더군요. ‘당신이 한국인인데 같은 국민에게 그러면 못 쓴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한국 장군들은 미군 장군들처럼 노력하지 않습니다. 수준 차이가 많이 났어요.”

    

남다른 생활의 에너지


- 그러면 위트컴 희망재단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어떤 일을 하는 곳이죠?

이 질문에 대해서는 김인식 부이사장이 답변했다.

“이사장님께서는 재단을 통해 유해송환 사업에 전 재산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재로 운영하고 있는 이 재단이 하는 일은 첫째가 유해 송환이고 둘째가 주한미군 장병 위문입니다. 최근에는 한국문화를 알리기 위해 남사당패나 판소리 명창까지 동원하려 하는데, 미군 장병들이 한국문화를 얼마나 이해 할런 지 걱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주한미군의 ‘좋은 이웃(굿 네이버)’ 사업과 연결되어 주한미군과 한국이 친구 되는 여러 가지 일에 참여합니다.”

계속되는 한 여사의 말.

“8군에서 크리스마스 때면 저를 초청합니다. 얼마 전에 월터 샤프 사령관이 초청해 갔더니 기념 메달을 주더군요.”

한 여사는 한남동의 한 원룸의 아파트에서 매일 그림을 벗으로 혼자 살고 있다. 그런데 집안에 걸린 한 여사의 그림을 보면 비전문가인 기자가 보아도 그 솜씨가 아마추어가 아니다. 벽 한 켠에 걸려있는 미인도는 자꾸만 눈길을 끈다. 햇볕이 드는 베란다에 혼자만의 작은 작업실에서 작품들이 탄생한다.

한 여사의 라이프 스타일은 언젠가 국내에서 화제를 모은 바 있는 ‘타샤 할머니’와 많이 닮아있다. 타샤 할머니는 전원에서 자연을 벗 삼아 소박하게 지내는데, 현대 소비주의를 배격한다. 그녀의 작품은 80대 할머니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생기발랄하다. 한 여사의 경우는 그 타샤 할머니의 동양적 버전이라고 할 만하다.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 스타일에 중후한 미와 세밀한 묘사, 그리고 꿈을 그리는 듯한 그 몽환적 작품들에는 ‘나비부인’의 우수가 서려있는 듯하다.

식탁보 하나에도 한 여사가 틈틈이 그려 넣은 예쁜 나비 그림이 구석구석까지 채워져 있다. 방 전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이 방의 주인공이 바로 80대 할머니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초라하지만 동시에 기품이 서려있는 이 방 안에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삶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헌신과 봉사, 소박함과 열정이 어우러지는 이 방의 주인은 영원히 젊은 날을 사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러나 한 여사의 귓전에는 장전호 전투에서 미군 병사들이 죽어가면서 외친 “마미”소리가 들린다. 바로 그것이 이 작은 체구의 할머니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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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월간 군사전문지 <디펜스21+> 편집장, 한겨레 군사사이트 <디펜스21> 전문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