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도 사람도, 봉화산 돌아 막걸리 한잔 ‘캬’ 제철여행

은은한 매향과 바다 낀 트레킹 코스, 전남 여수 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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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여수 개도 ‘개도사람길’ 2코스에서 만나는 등대섬(고여). 해질 무렵 등대를 가로질러 철새떼가 날고 있다.

우리 땅의 봄은 남도의 섬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미 쑥·달래·냉이가 지천이다. 나뭇가지마다 새순이 돋고, 유채·매화도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섬마다 풍경 다르고 봄빛도 다르다. 각자 봄마중 취향은 다르겠지만 가장 좋은 건, 경관 좋은 섬을 골라 걸어서 여행하는 일이다. 구석구석 걸으며 들여다보고 뒤돌아보면, 눈길 닿는 곳마다 이미 봄이 와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전남 여수 돌산도 서남쪽, 화정면에 속한 섬 중 하나인 개도가 있다. 여수 백야 여객선터미널에서 배로 1시간25분 거리다. 3시간 걸리는 봉화산(335m) 산행코스 말고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다고 알려져 있던 섬이지만, 지난해 해안 산길을 따라 섬 둘레를 걸을 수 있는 ‘개도사람길’ 일부가 개통돼 숨어 있던 해안 경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개도는 한자로 ‘덮을 개(蓋)’ 자를 쓴다. 그러나 2개의 산봉우리가 개의 귀를 닮았다거나, 섬에서 길게 튀어나온 지형이 개 꼬리 모습이라 개도라는 얘기가 있다. 지도를 보면 섬 동쪽 월항리 일대의 지형이 정말 개의 형상을 하고 있기도 하다. 우스갯소리도 있다. 주민들이 뭍에 나가 “개도에서 왔다”고 하면, 종종 듣는 말이 “개도 사람이냐”였다고 한다. 한 주민은 배표를 끊을 때 “개도 가는데요” 했다가 “개는 표 안 끊어줘요” 하는 소리도 들었다며 웃었다. ‘개도사람길’을 걷다 보면 물론 개도 만나고 사람도 만나지만, 무엇보다 봄빛에 감싸인 해안 풍경이 있어 걸어볼 만하다.

개도 여석리 선착장.
개도 여석리 선착장.

개도사람길은 개도 주민들이 오래전부터 이용해온, 마을과 마을을 잇는 통로를 따라 만든 둘레길이라는 뜻이다. 둘레길은 현재 화산선착장~호령마을 사이 4.5㎞ 구간 1코스, 호령마을~상수도용 저수지(배성금) 사이 3.14㎞ 구간 2코스가 마련돼 있다. 저수지에서 월항리 적목마을을 잇는 3.5㎞가량의 3코스는 현재 공사 중이다. 1코스보다 2코스의 해안 경관이 좀 더 나아 탐방객이 몰린다.

개도사람길 2코스는 소나무 말고는 아직 빈 나뭇가지들만 우거진 썰렁한 산길이다. 하지만 가지 끝마다 초록빛·붉은빛으로 잔뜩 힘주며 달아오른 낌새가 머잖아 새잎, 새 꽃봉오리를 환하게 피워 올릴 게 분명해 보인다.

편도로 1시간50분 걸리는 2코스 경관의 핵심은, 길게 튀어나온 ‘뭍고여’(육고여)와 등대섬(고여), 그리고 바닷가 절벽이다. 줄곧 오른쪽에 바다를 두고 산길을 오르내리게 되는데, 망원경이 설치된 전망대도 1곳 마련돼 있다. 전망대에서 2개의 바위로 이뤄진 등대섬과 뭍고여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멀리 고흥의 외나로도와 팔영산 일부까지 눈에 잡힌다.

‘개도사람길’ 2코스 경관 뛰어나
외나로도·팔영산까지 한눈에
매화 피고 방풍 새순까지 ‘봄’
달달한 ‘개도 막걸리’도 인기

개도사람길 호령전망대 해넘이.
개도사람길 호령전망대 해넘이.

가장 빼어난 경관은 봉화산 갈림길 지나 내려가서 만나게 된다. 전망대가 마련돼 있지는 않지만, 절벽 쪽에 서서 바라보는 신흥리 청석포 해변과 그 너머 월항리 쪽 해안 경관이 아름답다. 여기서 가파른 산길로 내려서면, 절벽을 따라 상수도용 저수지가 있는 청석포 해변 옆 바위자락인 배성금에 도착한다. 저수지와 청석포 해변 사이 해안은 커다란 자연동굴인 청석금 등 멋진 바위 경관을 품고 있다. 탐방 뒤에는 온 길을 되돌아가거나, 신흥마을로 나가 하루에 4번 순환하는 마을버스를 타면 된다.

개도사람길 2코스 절벽 위에서 바라본 청석포해변과 달이목마을 쪽 해안 풍경.
개도사람길 2코스 절벽 위에서 바라본 청석포해변과 달이목마을 쪽 해안 풍경.

개도사람길이 아니더라도 섬은 구석구석 꽤 볼만한 경관들을 품고 있다. 차를 가지고 들어갔다면, 섬에서 가장 큰 마을인 화산리부터 신흥리 거쳐 월항리까지 차를 몰며 해안 경관을 감상해볼 만하다. 특히 월항리 일대 해안에 멋진 바위 경관이 많다. 신흥마을 들머리 밭둑과 월항리 산자락의 매실나무밭에는 청매·홍매가 벌써 꽃망울을 터뜨려 매향이 은은하다.

월항은 본디 ‘닭목’, 닭의 목처럼 가늘고 긴 지형에서 비롯한 지명이다. 달목·달이목으로 불리다, 한자로 적으며 월항이 됐다. 주민들은 지금도 월항리 일대를 달이목으로 부른다. 긴 목 주변에서 바라보는 내해의 바위자락 경관과 섬들 모습이 아름답다.

개도 신흥리 밭에서 만난 홍매.
개도 신흥리 밭에서 만난 홍매.

개도 월항리(달이목) 방풍밭에서 할머니가 잡풀을 골라내고 있다.
개도 월항리(달이목) 방풍밭에서 할머니가 잡풀을 골라내고 있다.

월항리 산자락 밭에서 허리를 굽히고 김매는 할머니를 만났다. “요것이 방풍이제라. 지신 매고 있소. 방풍 잘 크라고.” 새순 올라오기 시작한 방풍나물 밭에서, 역시 새순을 내밀기 시작한 작은 풀들을 뽑아내신다. 할머니 손길이 땅에 닿을 때마다, 흙 속에 숨었던 봄내음이 툭툭 터져나와 밭둑으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월항리에서 잠시 산길을 타면 아담한 용암산(150m) 꼭대기에서 월항포구와 주변의 작은 바위섬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개도에 전해오는 전설 한 토막. 6개 마을 중에서 가장 큰 화산리(큰마을)의 한복판, ‘화정면 개도출장소’ 옆에 ‘마녀목’이라 불리는 300여년 된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악마’를 뜻하는 마녀가 아니라, 말을 좋아했던 소녀를 뜻하는 마녀(馬女)다. 전설이 있다. 조선시대 개도에서 군마들을 키웠는데, 한 소녀가 어린 말 한 마리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전쟁이 나자 조정에서 군마를 동원했는데 이 어린 말도 끌려갔고, 소녀는 슬픔에 잠겼다. 그런데 얼마 뒤 어린 말이 바다를 헤엄쳐 섬으로 돌아와 소녀와 만났고, 끝내 소녀의 품에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말의 주검을 묻은 곳에서 나무가 자라 올랐는데, 이것이 ‘마녀목’이라는 얘기다.
막걸리 애호가들 사이에 잘 알려진 개도 막걸리. 단맛이 있어 여성들도 좋아한다.

막걸리 애호가들 사이에 잘 알려진 개도 막걸리. 단맛이 있어 여성들도 좋아한다.

전복, 멸치 말고도 개도의 자랑거리 중엔 개도막걸리가 있다. 봉화산 등산객들을 통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해 이제 여수는 물론, 전국 막걸리 애호가 사이에서도 꽤 인기 있다. 단맛이 있어 여성들이 더 좋아한다고 한다. 화산리의 주조장 ‘개도 도가’에서 빚어낸다.

개도(여수)/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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