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가 손맛으로 재탄생한 들판 농꾼들의 밥 우리땅 이맛

[우리땅 이맛] 강릉 서지초가뜰 못밥·질상


창녕조씨의 종갓집 상차림 그대로
못밥 위에 질상, 질상 위에 진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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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마다 민가에 전해 내려오는 전통 음식들이 있다. 특정지역 주민들이 즐겨온 음식이 있는가 하면 특정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음식도 있다. 집안에 전해져 오는 음식이란 주로 권세 있던 양반 가문의 여성들에게 대물림돼 온 음식이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규범 있는 상차림과 정갈한 손맛을, 끊임없이 되풀이되며 이어지는 시어머니-며느리 관계를 통해  전승시켜 온 것이다. 엄중한 위계질서 속에서 혹독한 훈련을 통해 전수되는 손맛이다. 이른바 ‘종갓집 맏며느리’란 이름 속엔 동전의 양면처럼 ‘명예’와 ‘멍에’가 함께 존재한다. 우리나라 ‘고난의 여성사’를 대표하는 이 숙명적 이름 아래, 가문의 흐트러짐 없는 상차림과 정갈한 손맛도 대물림되며 우리 땅 참맛의 한 졸가리를 이뤄온 것이다.

 

강릉시 난곡동의 서지초가뜰이란 음식점도 이런 대물림 손맛을 바탕으로 차려진 한정식집이다. 서지초가뜰을 운영하는 최영간(61)씨가 말했다.

 

“집안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대접해 오면서 저희 집 음식이 맛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어요. 여기저기서 음식점을 차리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처음엔 집안에 전해지는 음식들을 가지고 장사를 한다는 게 조상들께 누를 끼치는 것 같아 한참을 망설였지요. 물론 시어머님의 반대도 심했고요.”

 

난곡동 서지마을은 창녕 조씨가 10대째 살고 있는 곳이다. 최씨는 이 집안 9대 종손 맏며느리다. 시어머니 김쌍기(86)씨로부터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음식과 손맛을 이어받았다. 그가 차려내는 음식들은 집안에 대물림되는 빼어난 손맛을 바탕으로 강릉지역 양반가 상차림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생한 남편을 위해 부인이 마련한 음식”

 

9년 전 집 앞의 농막을 고쳐지어 서지초가뜰이란 간판을 걸고 음식점을 시작했는데, 그가 처음부터 관심과 정성을 기울여 내건 상차림이 못밥과 질상이었다. 못밥이란 무엇인가. 모내기철 일꾼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해, 광주리에 함지박에 이고 가 들판이나 논두렁에 펼쳐놓고 먹던 들밥이다. 모내기하고 수확하느라 바쁜 시기에, 두레·품앗이 등으로 이웃끼리 서로 도우며 살던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에서 비롯한 독특한 식문화다.

 

질상도 농삿일의 연장선에 있는 상차림이다. 

 

“예전엔 이웃들의 도움으로 모내기가 끝난 뒤 다시 일꾼들과 어울려 한 상 차려 먹었어요. 이걸 질상이라 부릅니다. 논에서 모내기하느라 고생한 남편을 위로하는 뜻으로 부인이 마련한 음식이죠. 일꾼들에게 집안의 음식 솜씨를 자랑하는 뜻도 담겨 있고요.”

 

질상이란 이름은 이웃끼리 모내기를 도울 때 꾸려진 한 무리의 일꾼을 한 질이라 부른 데서 나왔다. 대개 논 주인의 부인이 남편과 일꾼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한 뒤 마을 당산나무 밑이나 숲속 널찍한 곳에 모여앉아 풍년을 기원하며 먹고 마시는 자리였다. 때에 따라선 일꾼들이 저마다 한두 가지씩 마련해 온 음식을 함께 나눠먹기도 했다고 한다.

 

최씨가 관심을 기울인 음식들은 이렇게 농경사회의 일과 생활에 뿌리로 두고 있다. 양반가의 손맛과 농촌의 식문화를 자연스럽게 결합시켜 한정식의 새 지평을 열고 있는 셈이다. 이 집에 가면 비록 야외 식사 분위기는 아니지만, 그 옛날 차려먹던 흥미로운 음식들을 맛보며 옛 우리 농촌생활 모습의 한 자락을 더듬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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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그릇에 나오는 팥밥과 경포호 부새우탕

 

먼저 못밥 차림을 만나보자.

 

밥과 국은 나무그릇에 담겨 나와 들밥 먹는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밥은 팥을 섞어 짓고, 국은 주로 미역국을 끓인다. 붉은 색의 팥이 액을 물리친다는 속설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내기 일꾼들의 영양 섭취를 고려한 배려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평범해 보이는 상차림이지만, 모두 깔끔한 맛을 자랑하는 토속 음식들이다. 곁들여지는 부새우탕은 강릉지역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음식이다. 경포호에서만 잡힌다는 부새우(작은 민물새우)를 끓여낸 탕이다. 초당두부 또한 강릉지역의 대표적인 전통음식이다. 여기에 갖가지 나물들과 해산물, 묵은김치, 장아찌 등 10여가지 반찬이 따라 나온다.

 

질상은 못밥보다 한 등급 높은 상차림이다. 못밥 차림을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씨종지떡이 더 나온다. 이 또한 농촌생활의 단면이 엿보이는 음식이다. 모판에 뿌리고 남은 볍씨를 찧어 만든 떡으로, 곡식이 소진돼 가던 모내기철 귀하게 여기며 만들어 먹던 음식이다. 이 마을에선 조상 대대로 모내기철마다 씨종지떡을 해먹었다고 한다. 쑥, 호박, 대추, 밤 등을 넣어 찌는데, 영양은 물론 졸깃한 맛도 향도 빼어나다.

 

한 등급 더 높은 상차림으로 진지상이 있다. 말린 송이버섯, 삶은 문어 등 지역 특산물 요리에다 갈비찜 등이 곁들여지는 강릉지역 전통 한정식이다.

 

이 집의 또 다른 독특한 음식으로 황태와 대추, 부추, 능이버섯, 더덕 등 몸에 좋고 약이 되는 다섯 가지를 데친 곰취에 싸서 먹는 서지오약쌈, 명태포를 썰어 넣고 찹쌀밥과 무, 고춧가루, 엿기름을 섞어 삭힌 포식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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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 전해 내려오는 송죽두견주까지

 

조씨 집안에서 300년을 전해 내려온다는 송죽두견주도 빼놓을 수 없다. 댓잎, 솔잎과 다섯 가지 곡식을 섞어 빚은 약주로, 마실 때 진달래꽃잎을 띄워 송죽두견주로 부른다. 가을철엔 국화꽃을 띄우는데, 이땐 송죽국화주가 된다. 은은한 솔향과 쌉쌀한 맛이 어우러진 기품 있는 술이다. 반주로 곁들이면 음식 맛을 한결 돋워준다.

 

최씨가 상에 올리는 야채와 나물들은 대부분 텃밭에서 직접 기른 것들이다.장도 직접 담근다. 최씨는 “집안에서 전해오는 음식들로 옛 농촌 풍습의 한 단면을 재현해 낸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농막을 고쳐 지은 음식점 뒤쪽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창녕 조씨 종택이 있다. 조선 말기 강릉지역 양반가옥의 전형을 보여주는, 아름답게 낡은 한옥이다. 최씨에게 손맛을 전수한 김쌍기 할머니가 지금도 살고 있다. 서지마을이란 이 지역이 ‘상서로운 기운을 간직한 땅’이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마을이 ‘쥐가 곡식을 물어와 저장하는 형세’인 데서 연유했다고도 한다. 


<서지초가뜰>
못밥 8천원, 질상 1만원, 진지상 2만원. 100명 가까이 동시 식사 가능. 설날과 추석에만 쉬고 연중 영업. 주차장 50대. 한동안 산길을 돌아 들어가야 하므로 찾아가는 길이 다소 복잡하다. 서지초가뜰 쪽에 전화해 현위치를 알려주면 길을 상세히 안내받을 수 있다. (033)646-4430. 
 
<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타고 대관령 넘어 강릉나들목을 나간다. 시청 지나고 강릉대학 지나 옛 영동고속도로 끝나는 지점과 7번 국도가 만나는 지점에서 직진해 경포대·선교장 쪽으로 들어선다. 작은 다리 건너 경포동사무소 앞에서 마을길로 좌회전한 뒤 곧 우회전한다. 1km쯤 소나무숲 사이 시멘트 포장된 좁은 길을 따라 올라 팻말 따라 한굽이 돌면 서지초가뜰이 나온다.
 
<주변 볼거리>
경포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사대부 가옥 선교장(열화당 활래정 등), 신사임당과 이율곡의 오죽헌, 허난설헌과 허균 유적지 등  
 

한겨레 이병학 여행전문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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