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공부, 밑줄 쫘~악 박물관 기행

백범 김구 기념관
외모 컴플렉스에 과거도 떨어진 이전의 김구 더 볼만
100년 전 치욕의 길 더듬어 가면, 피의 투쟁 고스란히
 

 <백범 김구 기념관>
개관=2002년 10월
주소=서울 용산구 효창동 255 
주요 전시물=근현대사 사진과 기록물, 백범일지·유품 등 복제본
휴관일=매주 월요일, 1월1일, 설날, 추석날
관람료=무료
관람시간=오전 10시~5시(3월~10월엔 오후 6시까지)
전화번호=(02)799-3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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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은 안중근 선생이 일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지 100돌 되는 해이자, 3·1독립만세운동 90돌 되는 해이며, 백범 김구(1876~1949) 선생 서거 60돌이 되는 해다. 그리고 2010년은 우리 민족이 일본에 국권을 유린당한 지 100년이자, 일본이 안중근 선생을 사형시킨 지 100년이 되는 해다.
 
100년 전의 치욕을 더듬으며 백범 김구 기념관을 찾아간다. 서울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에 있는 근현대사 역사박물관이다.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역 1번 출구에서 10분 거리. 한 시간 정도면 2층으로 이뤄진 백범기념관 전시실을 둘러보며 외세에 의해 얼룩진 우리 근현대사를 찬찬히 짚어볼 수 있다. 1층에 백범의 유년시절부터 일제에 저항하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드는 과정이, 2층에는 임시정부와 광복군에서의 시기별 활동 및 광복과 서거까지의 과정이 사진과 기록물 위주로 전시돼 있다. 빛바랜 사진들과 도표, 문서, 영상물들이 잠시 역사공부에 빠지고 싶은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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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까지 공부한 끝에 생각 바꿔 好心人으로

 
기념관 1층에 들어서면 먼저 중앙홀에서 대형 태극기를 배경으로 놓인 백범 좌상을 만난다. 관람객들은 흔히 선생의 좌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마침 방학을 맞아 기념관을 찾은 천안 쌍용고등학교 학생 20여명이 단체사진을 찍고 학예사의 안내로 전시관 탐방을 시작했다. 학생들은 “겨레의 스승 백범 선생에 대해 자세히 알고싶다”며 진지한 표정으로 학예사의 설명을 들었다. “백범 선생의 일생을 알면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의 큰 줄기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선생의 자서전 <백범일지>에 삶과 사상, 근현대사의 전개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요.” 학예사가 백범의 연보와 근대사 연표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임시정부시절부터 서거까지에 이르는 백범의 중후반기 삶은 자세히 알려진 반면, 초중반의 과정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백범은 일본의 강요에 의해 강화도불평등조약이 체결되던 해인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평민의 외아들로 태어난다. 아명은 창암이다. 양반이 되고자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서당 공부를 시작하지만, 과거에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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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청소년기에 외모에 자신이 없었다고 해요. 관상까지 공부한 끝에 ‘(외모가 아닌) 마음이 좋은 사람(好心人)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고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동학에 입문한 뒤 이름을 창수로 바꾸고 1894년 동학농민군의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공격한다. 의병활동을 하다 1896년 안악 치하포의 한 주막에서 조선인으로 변장한 일본군 중위를 발견하자 ‘명성황후를 시해한 적에 대한 응징’으로 그를 처치한다. 주막 벽에 ‘국모의 원수를 갚을 목적으로 이 왜놈을 죽였노라’는 포고문을 붙이고 당당히 자신의 주소와 이름을 밝힌 뒤 고향으로 돌아와 체포된다.
 
사형을 선고를 받고는 2년 뒤 탈옥해 숨어지내다 마곡사 등에서 승려생활을 하기도 한다. 백범은 이후 교육활동에 전념하다 1907년 안창호 선생에 의해 발의된 신민회에 참여한다. 이때 안악사건·양기탁보안법사건 등으로 다시 4년8개월간 감옥에 갇힌다. 백범은 20~30대 청년기에 세차례에 걸쳐 7년간 옥살이를 한다. 호와 이름를 백범 김구로 정한 게 바로 이때 감옥에서다. 일반 백성보다 못한 천민인 백정(白丁)에서 백을 따왔고, 평범한 이를 뜻하는 범(凡夫)에서 범을 따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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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한국전쟁 직전 다양한 흑백사진 다양

 
1층에서 2층을 거치며 백범과 독립운동을 위해 몸바친 숱한 선열들의 면면과 활동내역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확대해 전시한, 구한말에서 한국전쟁 직전에 이르는 시기의 다양한 흑백사진들은 대부분 우리 근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장면들이다.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 내용과 기록문서·편지, 임시의정원 회의록과 임시정부 시정방침, 각종 증명서와 수료증 등도 볼거리다. 이봉창 의사가 백범에게 보낸 편지, 윤봉길 의사의 이력서 등도 있다.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전시물은 <백범일지>다. 원본<백범일지>(보물 1245호)는 수장고에 보관하고, 복제본을 전시하고 있다. <백범일지>는 백범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이 된 뒤 1928년부터 쓰기 시작한 자서전이다. 상·하권으로 된 이 필사 자서전의 상권은 인과 신, 두 어린 아들에게 남기는 유서의 형식을 빌려 집안의 내력,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기록한 것이고, 하권은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사 의거 뒤 중국에서의 피신생활과 독립운동에서부터 광복을 맞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것이다. 손수 붓과 펜으로 빽빽하게 적어내려간 <백범일지>는 광복 뒤인 1947년 12월15일 처음 출간된 이래 최근까지 원본 중심의 단행본만 60여종이 출판됐다. 200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한국의 책 100’에 선정되기도 했다. 1997년 보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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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건 2층 전시실 한 구석에 걸려 있는 ‘윤봉길 의거 후 백범 김구의 현상금 60만원은?’이란 제목의 이야기다. 백범은 1932년 이봉창·윤봉길 두 분의 잇단 의거 뒤 그 배후로 지목되면서 1차로 20만원의 현상금이 붙었다고 한다. 그래도 체포가 어렵자 일본은 외무성·조선총독부·상하이주둔사령부 등과 합작해 현상금을 대폭 올려 60만원을 내걸었다. 당시 60만원은 요즘(2002년 현재) 가치로 환산할 때 무려 198억원에 이르는 거액이라고 한다. 80㎏짜리 쌀가마로 환산해 따지면 56만2천500가마나 되는 엄청난 양이 된다. 당시 일본이 백범 체포에 얼마나 혈안이 됐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백범은 중국에서 미국인과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피신한 뒤 임시정부를 옮기며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다 광복을 맞게 된다.
 
‘추모 공간’에 서면 백범 묘소가 한눈에
 
Untitled-5 copy.jpg또하나 인상적인 볼거리가 2층 전시실 한쪽에 마련된 ‘추모 공간’이다. 사무사·민족정기 등 백범의 글씨가 내걸린 벽면을 따라 들어가다 환한 창가에 서면 백범의 묘소가 내다보인다. 의자도 마련돼 있어, 평생을 민족 독립을 위해 살았던 백범의 삶을 되새기며 잠시 쉴 수 있는 곳이다.
 
전시관 탐방의 마무리는 백범 유품과 마지막 입었던 피묻은 윗옷, 백범 관련 서적들로 장식된다. 아쉽게도 모두 복제품들이다. 백범이 쓰던 회중시계·도장·신발과 안두희에게 피살될 당시 입었던 옷 등을 똑같이 만들어 전시해 놨다. 원본은 수장고에 있다. 사실 이것들뿐 아니라, 백범 동상, 백범의 모친 곽낙원 여사 동상, 기록물들 등 전시물의 거의 대부분이 복제품이다. 그래서 근현대사 박물관이라기보다는 이름 그대로 기념관이 맞다.
 
전시관 안내소에서 <백범일지>를 처음 펴낼 때 백범이 뒤에 덧붙였던 ‘나의 소원’ 소책자를 얻을 수 있다. 우파 민족주의자이자 자유민주주의자로서 백범의 정치철학과 사상을 밝힌 글이다. 정치이념을 드러낸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물론 당시 좌우 대립의 정치상황을 빗댄 표현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사진촬영은 할 수 없다. 사진 찍으려면 일주일 전에 기념관 사무실에 공문을 보낸 뒤 허가를 얻어야 한다.
-학예사 1명이 있다. 학예사의 해설은 단체관람객에만 진행한다.
-유치원·초등생을 대상으로 한 교과과정 연계 및 현장학습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가족단위 체험프로그램은 3~10월에만 한다.
      
글·사진/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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