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꽃 향기 솔솔, 미인송은 고와서 서러워 걷고 싶은 숲길

   [외씨버선길] (1) 경북 봉화 춘양면사무소~서벽리 금강소나무숲
 ‘억지춘양’ 태생지…고택·정자 등 문화유산도 즐비
 울울창창 춘양목숲길엔 꿩·청설모·고라니가 툭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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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개 도(경북·강원), 4개 군(청송·영양·봉화·영월)의 마을길·산길을 잇는 ‘외씨버선길’ 일부 구간(49㎞)이 열렸다. 외씨버선길은 4개 군 연계협력사업단이 3년 계획으로 조성중인 170㎞ 길이의 탐방로다. 옛길을 이용했다는 점, 주민이 직접 참여해 코스를 짜고 다듬었다는 점, 4개 군이 힘을 모았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역사·문화유산, 깨끗한 자연, 주민들 삶의 현장이 어우러진 탐방로다. 길 이름은 영양 출신 시인 조지훈의 시 <승무>에 나오는 ‘외씨버선’에서 따왔다. 4차례에 걸쳐 외씨버선길 개통 구간을 따라 걷는다.
  
 외씨버선길 봉화 춘양면 코스는 17.4㎞에 이른다. 사과꽃 향기, 솔향기 따라 쉬고 먹으며 6시간을 걷는 탐방로다. 마을길·강변길, 완만한 숲길로 이뤄져 큰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마을길은 시멘트길이지만, 좌우로 쉴새없이 논밭과 사과나무밭이 펼쳐지고, 옛 모습 그대로의 낡은 흙벽집들이 이어지는 정겨운 길이어서 피로감은 적다.
 마을길·산길에선 수시로 날고 기고 달리는 꿩·청설모·고라니들을 만날 수 있다. 주민들은 친절하고도 정답게 탐방객을 맞아준다. 전망 좋고 공기 맑은 완만한 고개들은 춘양목의 고장답게 솔숲으로 덮여 있다. 목청껏 울어대는 산새 소리를 압도하는, 거센 파도 소리를 품은 울울창창한 숲이다.
 
 주변 산세가 봉황을 닮았다고 봉강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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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9시 춘양면사무소 앞. 어린 ‘춘양목’들이 빽빽이 자라고 있는 밭에 봄볕이 가득하다. 춘양 일대에서 생산된 금강송(적송·황장목·홍송)이 춘양목이다. 50~60년대 춘양역을 통해 질 좋은 금강소나무가 전국으로 실려나갔던 데서 연유했다. ‘춘양목 양묘장’에선 해마다 가을에 금강송 씨앗을 뿌려 2년쯤 묘목으로 키운 뒤, 밭이나 군락지로 옮겨 심는다.
 외씨버선길 초반 볼거리가 춘양시장과 문화유산들이다. 춘양시장으로 들어간다. 80년 유래를 가진 오일장(4·9일장)이다. 요즘 장날이면 두릅·엄나무순 등 봄나물들이 깔린다. 시장골목 들머리엔 ‘억지춘양 오일장’이라 쓰였다. 주민들은 ‘어떤 일을 억지로 이뤄내는 것’을 뜻하는 ‘억지춘양’(또는 억지춘향)이란 말이 춘양에서 유래했다고 말한다.
 한국전쟁 직후 옛 영암선(영주~철암, 현 영동선) 철도 건설 때, 이곳 출신 국회의원이 힘을 써, 직선으로 계획된 철로를 ‘억지로’ 춘양면 소재지를 거치는 오메가(Ω) 형으로 바꾼 데서 비롯했다고 한다. 다른 지역 소나무를 춘양목으로 속여 판 데서 연유했다는 설도 있다.
 춘양은 조선말 봉화현 관아를 두었던 고을이다. 고택·정자·절터 등 문화유산이 즐비하다. 100년 역사의 춘양초등학교가 옛 현청 자리로, 주변 지명이 현마(현마을)다. 조선말 지어진 사대부 가옥 만산고택·권진사댁과 정자인 한수정·와선정·태고정 등이 면소재지에 있다.
 통일신라 때 절 람화사 터(춘양상고 자리)에 남은 ‘서동리삼층석탑’ 2기는 훼손된 모양까지 비슷한, 한 쌍의 멋진 석탑이다. 석탑 뒤 작은 나무 밑에는 두상을 새로 얹은 오래된 돌부처가 앉아 있다. 의양2리 이장 서헌수(55)씨는 “저 돌부처는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도 저 자리에 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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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곡마을로 오르는 길, 눈을 지그시 감은 개 또는 돼지 머리 모양의 바위가 눈길을 끈다. 이 바위에 ‘봉강동천’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주변 산세가 봉황을 닮은 수려한 골짜기라는 뜻으로, 오래전 한 노승이 새겼다고 전한다. 거곡마을은 옛날 스님들이 물건을 거래하던 곳이다.
 
 조선왕조실록 보관했던 태백산사고가 있던 각화산
 
w6.jpg 탐방로엔 상큼한 꽃들을 피운 사과나무밭이 이어진다. 사과나무밭길은 눈부시게 노란 민들레밭길이기도 하다. 춘양면 마을사업 사무장 곽진희씨가 사과나무 가지에 걸린 플라스틱 통을 가리켰다. 우체통이란다. “농업기술센터 직원들이 방문해 사과꽃 상태를 점검한 결과나 병충해 정보 등을 기록해 저 통에 넣어둡니다.”
 ‘양반걸음 걸어보기’ 쉼터에서 ‘여덟팔자걸음’을 걸어보고, 소금장수들이 살았다는 염장마을 거쳐 “인심이 억수로 좋다”는 거포마을(진입로 6월 말까지 공사중)로 오른다. 마을 이장 이병욱씨가 직접 만든 ‘사과즙’을 권하며 마을 뒤 고갯마루 소나무숲 이야기를 꺼냈다.
 “몇백년 되는 소나무들이 울창해요. 길가의 소나무 중간에 옻나무가 요맨한 게 뿌릴 내려 자라고 있어요. 해마다 4월에 알을 낳는, 큰 강아지만한 수리부엉이 둥지가 부러진 가지에 있고요. 그게 천연기념물이라. 올핸 벌써 알 낳고 날아갔죠. 저번에 얘기 들으니 알이 떨어져 깨져 있었다카데요.”
 무당들도 자주 와 기도하고 간다는, 고개 위 소나무숲 구경하고, 멀리 각화산·왕두산 바라보며 사과나무밭 사잇길을 천천히 내려간다. 각화산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태백산사고가 있던 곳. 산자락엔 ‘옛 람화사를 생각한다’는 뜻을 가진 고찰 각화사가 있다. 왕두봉은 “산에 불이 나면 왕이 바뀐다”는 얘기가 전하는 산이다.
 밭에선 어르신들이 고구마도 심고, 고추도 심는다. 검은 그늘막에 덮인 인삼도, 검은 비닐 뚫고 심어진 고춧대도 시시때때 푸릇푸릇 자라고 있다. 감자밭도 지천인데 주민들 걱정이 태산이다. “올해 감자값 폭락할끼다. 작년에 비쌌다꼬 할마이들이 감자 억수로 마이 심었다.”
 전나무숲 거쳐 노부부가 사는 외딴 농가 지나 운곡천변 새터마을(신기)로 내려선다. 여기서부터 운곡천을 따라 걷는 2㎞가량은 다소 지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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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당리에 식당들이 있다. 30년 동안 직접 메밀묵을 쑤어 묵조밥을 차려내 온 애당식당에서 묵조밥에 막걸리 한 잔 곁들여 점심을 먹었다. 1946년 개교해 1999년 폐교한 애당초등학교 ‘교적비’ 옆을 지나 물길 건너 다시 운곡천 물길을 따라 걷는다. 애당교 건너편은 조선 중기의 학자 서애 유성룡이 한때 살았다는 곳. 최근 세운 빗돌이 있다.
 춘양목 나뭇조각에 소원을 적어 매다는 ‘춘양목 소원 걸이대’ 지나 “인심 좋고 활기 넘치는 장수마을” 도심2리로 들어선다. 주민 김해수(91) 어르신이 말했다. “여기가 ‘죽기’(죽터)인데, 오래 사는 사람이 참 많아요.” 죽터는 옛날 삼척·울진의 해산물과 순흥(영주) 등 내륙의 공산품·농산물 교역이 이뤄지던 마을이다.
 
 2008년 여름 시간당 200㎜ 폭우 때도 피해가 전혀 없었던 마을
 
 논갈이 중 논둑에 앉아 문어 안주에 소주잔 기울이다, 덥석 잔을 건네는 어르신들께 인사하고, 논길 건너고 산길 돌아 도심3리(황터)로 들어간다. 오래된 흙벽집들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띈다. “2008년 여름 시간당 200㎜ 폭우 때 주변 마을들과 달리 피해가 전혀 없었던 마을”이다. 여기 얽힌 이야기가 흥미롭다.
 황터 일대는 삼국시대 이전 ‘소라국’이란 부족국가가 있던 곳이다. 주민들은 소라국 유물이라 전해오는 2필의 청동말과 비석, 두루마리 기록문서를 모신 사당(성황당)에 정월 열사흗날 밤 제를 올려 왔는데, 70년대 새마을사업 때 사당을 부수고 기록문을 불태웠다. 그 뒤로 마을에 우환이 잇따르고, 사당을 부쉈던 사람은 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5년 전 마을 계모임에서 사당을 복원하고 다시 제를 올리자 우환이 사라졌고, 폭우 때도 물난리를 피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사당에 있던 청동말 둘은 “사당 부술 때 뱀장수가 가져갔다”고 한다. 150년 수령의 80여그루 느티나무숲 안에 돌담과 금줄을 두른, 새로 지은 사당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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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었으나 따뜻해 보이는 흙벽집들과 오래된 잎담배 건조장 지나, 사방댐이 설치된 골짜기 위로 오르면 서벽리로 넘어간다. 산자락으로 드넓은 사과꽃밭이 펼쳐진다. 서벽1리 이장 장성철씨 부부가 사과나무밭에서 새로 뻗어나온 가지에 핀 꽃을 따고 있다. “하세월이래도, 묵은 가지만 남기고 이래 따줘야 해요. (열매를) 다 달아부리모 세력이 없어져삐요.”
 시루봉·각화산 건너다보며 사과나무밭을 지나면 울창한 소나무숲이 열리고 반가운 흙길이 시작된다. 문수산 자락의 ‘서벽리 춘양목 군락지’다. 문화재 복원용 금강소나무를 생산하는 숲으로, 곧고 바르게 자란 수령 50~100년의 금강송 1500그루가 우거져 있다. 나무들엔 번호가 적혀 있다. 이 숲 최고 ‘미인송’으로 꼽히는 소나무는, 74년 수령에 높이 25m인 482번 소나무다. 숲해설가가 상주(09~17시)한다.
 향기로운 숲길을 600m쯤 걸으면 탐방로의 종점인, 2년 전 문을 연 춘양목산림체험관이 나온다. 춘양목과 송이 등 숲을 배우며 나무공예 등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5분쯤 더 걸어 내려가면 서벽3리, 알싸한 물맛을 자랑하는 두내약수가 기다린다. 5~6시간 코스라지만, 주민과 이야기 나누고 사진 찍다 보니 7시간30분이 걸렸다.(점심 포함)
 봉화/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 여행쪽지
 ⊙ 가는길/수도권에선 영동고속도로 원주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 이용해 영주 쪽으로 내려간다. 풍기나들목에서 나가 5번 국도를 타거나, 영주나들목에서 나가 28번 국도를 타고 영주로 간 뒤 36번 국도 따라 봉화읍 거쳐 법전 지나 춘양으로 간다.
 ⊙ 먹을곳/애당리에 직접 만든 메밀묵·조밥(5000원)과 손칼국수(〃)를 내는 애당식당(010-4731-8213), 백반·토종닭을 내는 수진식당(054-672-0690)이 있다. 춘양면 소재지 춘양시장 안에 엄나무순(개두릅)돌솥밥(1만원)을 잘하는 동궁회관(010-3533-3340), 주문받아 정식(1인 1만원 안팎)을 내는 교야네식당(010-4654-7920)이 있다.
 ⊙ 묵을곳/운치 있는 옛 한옥 만산고택(054-672-3206)·권진사댁(054-673-5800)에서 묵을 만하다. 1박 4만원부터. 식사 5000원. 춘양면소재지에 동아모텔 등 모텔이 2곳 있다.
 ⊙ 체험거리/‘춘양목 송이마을’에서 운영하는 ‘한옥 레고 조립체험’이 흥미롭다. 정교하게 짜인 가로 3m, 높이 2m의 한옥 모형을 분해하고 조립해 보는 체험이다. 40분 소요. 가족당 5만원.
 ⊙ 여행문의/춘양목 송이마을(054-674-1030)에 예약하면 외씨버선길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도착점에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교통편 문의도 가능하다. 사무장 곽진희씨 010-9187-1070, 춘양면 의양2리 이장 서헌수씨(숲해설사) 010-3820-6080, 서벽리 금강소나무숲 해설 안내 054-635-4253.
 
이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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