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에 서면 하늘이 어딘지 땅이 어딘지 걷고 싶은 숲길

태백 두문동재~함백산
아스라히 산줄기는 첩첩…한없이 뽀드득 싸르륵
해돋이 해넘이 모두 일품, 볼수록  ‘크게 밝은 산’
 

img_01.jpg

천제단이 있는 민족의 영산 태백산. 태백산 북쪽 5㎞ 거리에 함백산이 있다. 두 산은 모두 ‘한밝산’ ‘한박달’ ‘한배달’ 등으로 불려왔다. ‘크게 밝은 뫼’라는 뜻이다. 함백산은 예부터 태백산(1567m)에 딸린 산으로 쳐왔지만, 높이는 함백산(1573m)이 더 높다. 한라산(1950m)·지리산(1915m)·설악산(1708m)·덕유산(1614m)·계방산(1577m)에 이어 남한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산이다. 태백산의 유명세에 밀려 산행객의 발길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나 정상에서의 전망은 주변 산들을 압도한다. 멀리서 바라보아도 눈에 띄지만 직접 올라보면 왜 ‘크게 밝은 산’인지 느낌이 온다.
 

 
남한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산…두문동엔 망국의 한
 
태백시 호명골과 정선군 고한읍의 경계를 이루는 두문동재(1275m)를 출발한다. 은대봉과 함백산 정상을 거쳐 만항재 쪽으로 내려서는 눈길 트레킹이다. 백두대간 주능선의 한 구간이다. 장쾌하게 펼쳐지는 첩첩 설산들을 좌우로 거느리고 오르내리는, 비교적 완만한 능선길이다. 눈길 헤치며 걷는 동안 몸과 마음은 맑아지고, 둘러보고 뒤돌아보는 사이 눈은 더욱 밝아진다.
 
해발 1400~1500m의 산길이지만, 높은 고도에서 출발하므로 가파른 구간은 많지 않다. 무릎까지 눈에 빠지는 구간이 일부 있으나, 길 안내 표지가 잘 돼 있어 길 잃을 염려는 없다(거리 표시는 일부 잘못된 부분이 있다). 거리는 6㎞ 남짓, 두문동재~은대봉~중함백~함백산~만항재 들머리 코스다.

 
두문동은 정선 쪽의 옛 마을 이름이다. 고려 말 개풍군의 두문동에서 일곱 충신이 망국의 한을 달래며 숨어들어와 살았던 데서 비롯했다고 한다. 싸리재라고도 부르지만, 부근 싸리밭골 쪽에 있는 전혀 다른 고개다. 두문동재는 봄부터 가을까지 무수히 피고 지는 분주령·금대봉의 야생화 탐방길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눈이 쌓여 얼어붙는 한겨울엔 차량통행이 매우 어려워진다. 지금도 두문동재 터널 입구에서 두문동재 옛길 정상까지의 산길은 눈에 덮여 체인을 장착한 4륜구동 차량만 오를 수 있다. 고개 위 휴게소도 문을 닫았다.
 

 
img_02.jpg

 
상함백·중함백·하함백…맑고 찬 공기에 정신이 번뜩
 
아이젠·스패츠를 차고 은대봉을 향해 올랐다. 섭씨 영하 18도. 바람이 거세지 않아, 체감온도가 걱정했던 것만큼 매섭지는 않다. 그래도 손끝 발끝은 출발 전부터 이미 얼어들어왔다. 눈을 뒤집어쓰다 만 참나무 숲길을 20여 분 걸어 은대봉에 이르러서야, 손도 발도 풀려 한결 걸을 만해졌다. 은대봉엔 꽤 널찍한 빈터가 있고, 한구석에 작은 표석이 세워져 있다.

 
함백산 봉우리는 상함백·중함백·하함백으로 나뉜다. 하함백이 정상인 함백산(1573m), 상함백이 은대봉(1442m)이다. 중함백에 별칭이 없다. 은대봉은 북쪽의 금대봉(1418m)과 마주하는 산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이에 비해 ‘금대봉’엔 뜻이 있다. 본디 ‘신이 사는 곳’을 뜻하는 ‘검대봉’에서 변한 말이다. 한때는 ‘황소만한 금’이 묻혀 있다고 알려져, 금꾼들이 몰려들어 곳곳에 굴을 뚫다가 포기했다고 한다. 은대봉 밑으로는 태백선 정선 고한역과 태백 추전역을 잇는 정암터널이 뚫려 있다.

 
은대봉을 내려가 제1쉼터 지나 제2쉼터까지 길은 비교적 완만하게 오르내린다. 설경은 애초 기대한 것에 못 미쳤다. 나뭇가지의 눈은 녹았고 서리를 맺히게 하는 칼바람도 불지 않아, 화려한 눈꽃도 상고대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맑고 찬 공기가 폐부를 씻어주고 머릿속을 헹궈준다. 적막 속에 한없이 따라오는 뽀드득 뽀드득 싸르륵 싸르륵 눈 밟는 소리를, 칼바람 가는 쪽으로 몸 낮춘 신갈나무도 듣고 새파랗게 질린 산죽 이파리도 듣는다.
 
 
img_03.jpg

 
무릎까지 눈이 푹푹…뒤돌아 보니 집들이 아득히 점
 
제2쉼터는 정암사의 암자인 적조암으로 내려서는 갈림길이다. 산길이 눈에 덮였을 경우 능선길을 포기하고 적조암 쪽으로 내려설 계획이었지만, 백두대간 산행객들이 다져놓은 길이 뚜렷해 능선을 따라 나아가기로 했다. 멋진 좌우 전망은 중함백을 향해 가파른 언덕길을 치고 오르면서 나타난다. 응달진 언덕 일부에선 눈이 무릎까지 빠져, 앞사람 발자국을 따라 발을 집어넣고 또 빼내야 한다. 눈 쌓인 산비탈 응달 쪽으로 하얀 서리를 뒤집어쓴 나무들이 우거져 제법 그림을 보여주지만, 눈이 깊어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고사목들 늘어선 언덕길, 사나워진 바람을 등에 지고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다. 하이원리조트 쪽 산줄기와 비좁은 골짜기를 따라 들어선 정선 고한읍의 집들이 아득하다. 중함백 정상은 해발 1505m. 정면으로, 방송 중계용 철탑들이 세워진 함백산 정상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와 있다. 매봉산 능선의 풍력발전기들과 오투리조트의 스키 슬로프 일부도 보인다.

 
오른쪽이 더 볼만하다. 아스라이 깔린 연무 속에 파도처럼 밀려오는 산줄기 풍경을 만난다. 백운산·청옥산·노추산·석병산·가리왕산 등 대부분 1200~1400m급 고봉의 산줄기들이다. 다소 가파른 눈길을 조심스레 디뎌 내려가면 제3쉼터를 만난다. 여기서부터 함백산 자락에 자생하는 주목 무리의 일부가 모습을 드러낸다.
 
img_04.jpg
 
img_05.jpg

 
살을 에는 칼바람에 눈물바람…어디서든 해돋이

 
함백산 정상으로 오를수록 바람은 매서워진다. 함백산엔 중계탑 주변까지 찻길이 나 있어, 봄~가을엔 손쉽게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다. 그러나 길이 가팔라, 눈이 쌓이는 한겨울엔 4륜구동 차량도 무용지물이 된다. 눈길을 걸어올라야 만날 수 있는 겨울 함백산 정상의 전망은 그래서 각별하다. 함백산 표석이 선 정상 주변의 전망은 말 그대로 거칠 게 없다(괴물처럼 솟은 철탑 쪽 풍경만 빼면). 사방이 하늘이요, 첩첩 산줄기들이다. 온몸을 후려치는 매서운 바람에 흐르는 눈물 씻고 또 씻으며 바라보노라면, 갈 데까지 다 나아간 하늘과 땅이 어떻게 서로 아스라이 만나게 되는지를 알 수 있을 듯도 하다.

 
해발 1330m의 만항재 고갯길도, 고원지대 운동선수 훈련장인 태백선수촌도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인다. 정상 부분엔큼직한 바위 무리들이 모여 ‘함백산’ 표석을 떠받치고 있다. 바위더미 밑에서 다소나마 바람을 피할 수 있다. 태백시청 관광문화과 이상철씨가 동쪽 산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흔히들 태백산 해돋이를 제일로 치지만, 함백산은 산꼭대기든 산자락이든, 주변이 다 해돋이 감상에 좋은 곳입니다. 쾌청한 날 아침엔 정상에서 동해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돋이도 볼 수 있지요.”
 

 
눈 반 얼음 반, 밧줄로 계단으로 엉금엉금 하산길
  
해돋이뿐 아니라, 겹쳐진 산줄기들을 붉게 감싸며 잦아드는 해넘이도 장관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상에 오래 머무는 것은 칼바람이 용납하지 않는다. 20분쯤 사진 찍고 쉬는 동안 손끝 발끝은 다시 얼어들어오기 시작했다.

 
img_06.jpg영월 쪽을 향해 굽이쳐 오르는 만항재 자락 산길을 굽어보며 산을 내려간다. 밧줄과 계단에 의지해 내려가는 하산길은 눈 반 얼음 반의 미끄러운 비탈길이다. 내려가며 뒤를 돌아보니, 눈 덮인 능선 너머로, 눈 시리고 마음까지 시려지는 새파란 하늘이 드리웠다. 함백산은 크고 밝게 빛나는 한밝산이 분명했다.

 
정상에서 30분쯤 내려오면 만항재 고갯길에서 태백선수촌과 태백시내로 이어지는 도로에 닿는다. 두문동재에서 여기까지 쉬는 시간 포함해 약 4시간이 걸렸다. 눈이 새로 쌓였을 경우라면 1~2시간 더 잡아야 한다. 여기서 만항재까지는 산길을 따라 1.5㎞가량 더 걸어야 한다. 태백·정선·영월 지역이 갈리는 만항재 고개 위에, 커피·컵라면 등을 파는 간이매점이 있어 몸을 녹일 수 있다.

 
만항재는 우리말로 늦은목이재(또는 낮은목이재)다. 영월·태백 지역과 정선을 함백산 옆으로 에돌아 잇는 고개였다. 여름엔 고개 산자락으로 둥근이질풀 등 야생화가 만발한다. 해마다 야생화축제를 벌인다. 고개 밑 정선 쪽으론 탄광마을로 이름 높았던 만항마을이 있다.
 
 
태백=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여행쪽지
 
⊙ 가는 길| 수도권에서 영동고속도로~만종분기점~중앙고속도로~제천나들목. 38번 국도 타고 영월과 정선 사북·고한 지나 두문동재로 간다. 두문동재터널 입구에서 오른쪽 길로 빠지면 옛 고갯길이다. 만항재 쪽에서 함백산으로 오른 뒤 두문동재로 내려오는 것도 방법이다. 눈이 쌓였을 경우 승용차론 고개까지 오르기 어렵다. 고개 들머리에 차를 세우고 걸어오르면 고개 위까지 1시간 가까이 걸린다.

 
img_07.jpg⊙ 먹을 곳| 한우식당은 황지동 한우마을숯불갈비(033-552-5349), 상장동 배달실비식당(033-552-3371). 한우식당들에서 내는 된장국수도 별미다. 국물이 푸짐한 태백식 닭갈비집으론 황지동 대명닭갈비(033-552-6515), 황지동 태백닭갈비(033-553-8119), 직접 두부를 만드는 순두부집은 황연동 구와우순두부(033-552-7220), 화전동 태백순두부(033-553-8484) 등. 문곡소도동 무쇠보리(033-553-2941)의 나물밥, 삼수동 감자옹심이(033-554-0077)의 감자옹심이, 화전동 초막손칼국수(033-553-7388)의 매운 갈치찜·고등어찜·두부찜도 맛볼 만하다.

 
⊙ 주변 볼거리| 석탄산업 변천사와 탄광의 모든 것을 살펴볼 수 있는 태백석탄박물관, 옛 갱도와 선로, 광원 샤워실·탈의실·사택촌 등 옛 탄광 시설을 그대로 남겨둔 태백체험공원, 구문소 주변 고생대 지층에서 발견된 화석 등을 전시한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 등. 고한 쪽 함백산 자락엔 국내 5대 적멸보궁 사찰(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찰) 중 한 곳인 정암사가 있다. 태백시청 관광문화과 (033)550-2085.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Leave Comments


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