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안개 숲 가지마다 눈꽃 송글송글 ‘무릉설원’ 길따라 삶따라

울릉도의 겨울
무릎까지 푹푹 성인봉 정상 얼음소주 한잔 캬~
향따라 맛따라 무치고 절이고 싸먹는 나물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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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가장 이색적인 두 섬, 제주도와 울릉도. 두 섬은 이맘때 저마다 꽃잔치를 펼친다. 제주는 봄꽃잔치를 시작하고, 울릉 성인봉은 한창 눈꽃잔치를 이어간다. 육지 관광객들의 눈길이 남해안 봄처녀 발끝을 좇고 있을 때, 검푸른 동해 중앙의 바위섬은 묵묵히 눈꽃 수묵화를 완성한다.
 
울릉도의 겨울은 길고, 쌓인 눈은 두껍다. 국내 대표적인 ‘설국’ 울릉도의 겨울 이야기를 들으러 간다. 울릉눈축제가 2월21일까지 열리고, 성인봉 골짜기 눈 이야기는 6월 중순까지 여운을 남긴다.
 
성인봉은 전국 최다 강설 지역이다. 울릉도 해안에 구름만 껴도 성인봉(聖人峯·984m) 정상엔 눈발이 날린다. 겨울철 중산간 위쪽 산비탈엔 1월말 현재 1m 안팎의 눈이 쌓여 있다. 올해 눈은 (아직은) ‘아주’ 적은 편이다. 지난해엔 제대로 내렸다. 온 섬이 눈에 덮였다. 나리분지엔 2m 가까이 쌓여 지붕·굴뚝 빼곤 온통 하얬다고 한다. 1962년엔 한해 동안 3m 가까운 적설량을 기록한 바 있다.
 
◈ 성인봉 겨울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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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렁하면서도 풍성한 게 울릉도의 겨울이다. 여름 성수기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도동항 골목, 저동 어판장이 한산해지고, 아귀다툼을 벌이던 식당·민박·상가 주민들은 다시 따뜻하고 푸근한 ‘섬 가족’으로 돌아온다.
 
40여명의 울릉산악회 회원들만 해도 그렇다. 한겨울에 더 화기애애해진다. 매주 한 번씩 ‘성스러운 설산’ 성인봉 눈길을 찾으며 따뜻해진다. 성인봉 진경 감상을 별러온 육지 산꾼들도 한겨울을 골라 포항에서 배를 탄다. 요즘은 성인봉 자연설에서 산악스키를 즐기려는 이들의 발길도 이어진다. 지난 1월17일엔 성인봉 일대에서 처음으로 ‘익스트림 산악스키 시범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아이젠·스패츠 다 챙기셨죠. 어제 내린 비로 눈이 많이 녹았지만, 허벅지까지 빠질 걸 각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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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끗하면 골짜기 아래로 초고속 슝~
 
지난 1월31일 오전 9시30분, 울릉초등학교에 18명의 산객들이 모였다. 울릉산악회 회원들과 육지에서 온 산행객이다. 산악회 이경태(49) 부회장과 최희찬(41) 구조대장은 등에 스키를 메고 있다.
 
Untitled-7 copy.jpg케이비에스 중계소~사다리골~팔각정~바람등대~정상~알봉분지~나리분지 코스의 산행을 시작했다. 초반은 다소 완만한 소나무숲길, 오를수록 산길의 눈이 깊어지며 발이 눈 속에 빠져든다. 해발 650m, 성인봉 1.5㎞, 도동 2.5㎞ …. 안내판은 곳곳에 설치돼 있다. 그러나 최종술(42) 등반대장은 “눈보라 치는 때는 발자국이 지워져 길을 잃기 쉽다”고 말했다.
 
사다리골(나무다리 계단)을 지나면서 눈 덮인 가파른 비탈길이 이어진다. 앞사람 발이 빠졌던 깊은 구멍을 피해 다져진 발자국을 골라 발을 옮긴다. 그래도 네댓 걸음에 한 번은 정말 무릎 위까지 발이 푹 꺼져든다. 표면은 얼고 속은 젖은 두꺼운 눈길이다. 오르는 산길 내내 오른쪽으로만 급경사다. 잘못 넘어지면 얼어붙은 눈 위를 미끄러져, 골짜기 아래로 최악의 가속도 여행을 하게 될 수도 있다.
 
한 회원의 푸념 섞인 말이 튀어나왔다. “무신 눈이 이래 벌써 다 녹아 뿟나. 4월 같네.” 지난주까지도 눈이 제법 쌓여 있었는데, 어제 비로 녹아 산행 맛이 덜하다는 말이다.
 
Untitled-4 copy.jpg점점 숨이 턱에 차고 발끝이 얼어 들어왔다. 침착한 최희찬 구조대장은 스키를 타고 나무 사이를 누빈다. 급경사 눈길을 거침없이 오르내리며 선두와 후미를 점검하고 일행을 이끈다.
 
산비탈에 세워진 쉼터, 팔각정을 지나니 비탈은 더 심해지고 쌓인 눈은 더 깊어진다. 눈을 다져가며 한발 한발 옮겨 딛는다. 언 발이 무게를 더하고 다리엔 경련이 인다. 바람등대까지 200여m를 오르는 데 30분이나 걸렸다.
 
바람등대는 안평전에서 오르는 등산로와 만나는 삼거리다. 도동 쪽 바람, 사동 쪽 바람이 마주 불어오는 곳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정상까지는 약 1㎞. 여기서 산행객들은 한숨 돌리며 몸을 녹인다. 평상 옆에 누군가 ‘무릉도원’이라 쓴 팻말을 세웠다. 무릉은 울릉의 옛 이름 중 하나다.
 
매운 눈보라 눈구덩에 푹 빠지고 해야 제 맛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나무들은 굵어지고 칼바람이 거세진다. 날리는 눈가루로 숲은 안갯속이다. 안개가 걷히는 순간순간 눈부신 꽃나무들의 세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빈 가지마다 날린 눈가루가 맺혀 화사한 서리꽃·얼음꽃을 피웠다. 꽃나무 향연의 절정은 정상에서 거센 바람과 함께 내뿜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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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나무들로 둘러싸인 정상, 10여평 눈마당 한쪽에 정상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강풍 휘몰아치는 정상 밑 전망대에 서니 말잔등·알봉분지·송곳산 등 눈 덮인 주변 산줄기가 은갈색으로 빛난다. 송곳산 쪽 바다 경치가 살짝 모습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금세 안갯속에 숨는다.
 
Untitled-8 copy.jpg상쾌한 피로감이 엄습할 무렵, 회원들은 뜨거운 물과 커피를 곁들여 도시락·컵라면 잔치를 마련했다. 한 회원이 나무 밑 눈 속에서 큼직한 자루를 찾아내 한되짜리 소주병을 꺼낸다. 찬 소주 한 잔을 받아든 회원이 말했다. “이 맛에 자꾸 산에 오지예. 자루를 이래 줄로 매달아 눈에 파묻어 놓고, 올라와 가 꺼내 묵고, 또 지고 와 가 보충해 둡니더.”
 
하산을 시작하자 이경태씨와 최희찬씨는 스키 활강을 준비했다. 눈 덮인 나무계단 길을 내려와 신령수(알봉분지의 샘)로 목을 축이고 나리분지에 도착하니 4시. 나리동 식당에서 씨앗술(황기·더덕 등 약초로 담근 술)을 들며 산행을 정리했다. 지친 몸을 추스르고 먼저 일어서려는데, 50대 아주머니 회원들이 쌩쌩한 목소리로 한마디씩 한다.
 
“오늘은 차암 힘 한나 안 들이고 쉽게 갔다 왔다이. 눈또 별로 없고.”
“그 매운 눈보라 쫌 더 쐬고 눈구딩이 함 푹 빠지고 해야 맛인데, 그자.”
“그런 소리 마라. 1년에 한두번씩 사고 안 나나.”
 

성인봉 겨울산행 알아두기
 
아이젠·스패츠는 필수 준비 품목. 도동항 낚시점에서도 판다.(각각 1만5천~2만원) 두툼한 방한복과 모자·방수장갑·등산지팡이는 기본 차림이다. 특별히 험한 구간은 없으나, 두껍게 쌓인 눈길이어서 체력 소모가 심하다. 초행자는 반드시 경험자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산행엔 세 가지 코스가 많이 이용된다.(시간은 겨울 기준) 도동 중계소~팔각정~바람등대~정상~나리분지(5시간20분), 도동 대원사~팔각정~바람등대~정상~나리분지(5시간40분), 사동 안평전~바람등대~정상~나리분지(5시간).


◈ 울릉도 겨울 이야기
 
울릉도는 가기도 어렵고 돌아오기도 힘들다. 풍랑이 거세게 일면 몇 날 며칠 발이 묶인다. 한겨울 울릉도는 관광객이 부쩍 준다. 식당도 여관도 한산하다. 예측불허의 바다날씨 탓이 크다. 포항~울릉도를 하루 한 차례 오가는 여객선은 결항하기 일쑤다. 지난 1월 결항 일수가 17일이다.
 
▷ 도동항·저동항
‘지들 나오고 싶을 때 나오는’ 철없는 고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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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선 결항 뒤 첫 배가 들어오면 도동항에선 화물 싣고 내리기 전쟁이 일어난다. 밀려 있던 생필품·부식이 한꺼번에 들어오고, 나갈 때도 뭍으로 부치는 물건들이 몰리기 때문이다.
 
도동의 한 식당 주인이 말했다. “결항도 결항이지만, 육지에다 배추 한 상자 주문할라캐도 운임이 원캉 비싸노니 음식값을 이래 안 받을 수 없는 기라.” 울릉도의 비싼 물가가 조금은 이해된다. 생필품·약·음식·택시비 등 대개 뭍의 1.5배쯤 된다. 관광객들도 놀라고 주민들도 인정한다. 주민들 스스로 꼽는 ‘울릉도의 3고’가 ‘산 높고, 파도 높고, 물가 높고’다. 평지가 적고, 기름진 땅도 적으니 쌀을 비롯한 곡식, 채소들을 뭍에서 들여와야 한다. 어선들이 잡은 해산물도 울릉도에서 소비되기보다는 대부분 뭍으로 대량 판매된다. 섬에 남는 일부 해산물들이 관광객들에 의해 소비된다.
 
울릉도 최대 어항인 저동항에선 지구 온난화의 영향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이곳 배들은 요즘 2월 초에도 오징어잡이에 나선다. 오징어철은 본디 12월에 마무리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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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동항에서 복어·꽁치를 파는 아주머니에게 요즘 많이 나오는 고기가 뭐냐고 물었다. 퉁명스런 대답. “그거야 고기가 알아서 하는 기지, 내 어찌 아나. 인자 철도 없어요. 지들 나오고 싶을 때 나오는 거니까.”
 
저동항에서 만난 어민 임승택(50·황주호 선장)씨도 철 모르는 고기들에 대해 말했다.
 
“새치(이면수어)가 한창 날 철인데 잘 안 나요. 복어철도 예전엔 12월 전후였는데, 이제야 슬슬 나옵디다. 종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해산물은 도시보다는 싸고 싱싱하다. 손질해 놓은 생복(밀복)이 세 마리에 1만원, 반건조한 임연수어를 2마리에 1만원, 말린 가오리를 1만~3만원에 판다.
 
▷ 나물 열전
눈개승마·전호·명이·부지깽이…, 홍합밥 한그릇 뚝딱
 
Untitled-1 copy 2.jpg울릉도 숲에 나는 풀은 80%가 약초라는 말이 있다. 식용식물이 많다는 건, 그만큼 먹을 만한 건 다 찾아내 먹어 왔다는 걸 뜻한다. 식당들에서 반찬으로 내는 재미있고 독특한 나물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삼나물(눈개승마)·참고비(섬고사리)·전호·명이(산마늘)·부지깽이(섬쑥부쟁이)·울릉취(미역취)…. 이름만 들어도 섬나물 향기가 물씬 난다. 도동항 골목 어느 식당에서든 흔하게 만나는 나물이다.
 
명이와 전호는 이맘때 겨울 막바지 무렵부터 눈을 헤치고 채취하기 시작하는 나물들이다. 명이나물은 ‘목숨 명’(命) 자를 쓴다. 고종 때 울릉도 개척령으로 뭍에서 이주해 온 이들이, 굶주리다가 눈 속에서 싹튼 산마늘을 찾아내 삶아 먹으며 목숨을 부지하면서 붙었다는 이름이다.
 
명이는 30년 전까지도 주민들의 요긴한 구황식으로 쓰였다. 잎을 간장·된장에 절여 뒀다가 반찬으로 먹는데, 깻잎처럼 밥에 싸 먹으면 독특한 향과 함께 새콤달콤하고 사각거리는 맛까지 느껴진다.
 
전호는 뿌리를 약으로 쓰는 약초이기도 하다. 역시 눈 속에서 싹을 틔운다. 잎을 양파와 함께 겉절이 식으로 무쳐 먹는데, 쌉싸름하면서도 톡 쏘는 약초향이 입을 개운하게 해준다.
 
삼나물은 삶아 내면 고기 맛이 나 주민들이 좋아하는 나물이다. 무쳐 먹거나 찌개에 넣어 끓여 먹는다. 인삼처럼 사포닌이 함유돼 있고 잎이 삼을 닮아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 고사리와 비슷하지만 고사리보다 다소 굵고 맛도 연한 참고비, 뭍의 미역취보다 크고 부드러워 쌈 싸 먹기도 하고 말려 무쳐 먹기도 하는 울릉미역취도 밥맛을 돋운다.
 
이런 이색적이고 맛도 좋은 나물 반찬들을 곁들여 홍합밥·따개비밥·대황(다시마의 일종)밥·오징어내장탕 등 울릉도의 독특한 음식을 먹다 보면 음식 값이 비싸다는 느낌도 어느 정도 상쇄된다.
 
울릉/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 여행쪽지
 
가는길
포항 여객선터미널에서 매일 1회 여객선이 울릉 도동항을 오간다. 포항 오전 10시 출발, 도동항 오후 3시 출발. 매일 당일 아침 7시에 기상상황을 보아 출항 여부를 결정한다. 기존의 2400t급 썬플라워호가 정기점검을 위해 2월25일까지 운항을 멈추고, 이 기간에 대체 선박으로 기존 묵호~울릉 항로의 440t급 한겨레호(별도 화물칸 없음)가 포항에 투입된다. 일반석 5만8800원, 우등석 6만4400원. 3월부턴 동해 묵호항~울릉 여객선 운항이 재개(한겨레호)된다. 한겨레호는 매일 독도 운항(4만5천원)도 하게 된다. 대아고속해운 (054)242-5111.
 
울릉눈축제
나리분지에서 2월21일까지 제2회 울릉눈축제가 진행된다. 설피 체험, 설피 신고 달리기, 달구지 체험, 썰매타기 등 다양한 체험행사가 열린다. 울릉군청 문화관광과 (054)790-6700.
 
묵을 곳
 
도동항, 저동항 등에 민박·여관들이 있다. 민박은 2만원, 모텔은 3만~4만원. 도동에서 도동터널 지나 사동리엔 대아리조트호텔이 있다. 비수기(3월31일까지) 별관 121실만 운영한다. 한·양실(2인1실) 주중 6만5천원, 주말 9만5천원. 패밀리실 주중 9만5천원, 주말 14만5천원. (054)791-8800.
 
이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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