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들 마음의 뿌리, 전통문화 1번지 길따라 삶따라

  전주 도심걷기
  전란과 일제에도 수백 채 한옥 살아남아
  걸음 걸음마다 예스런 멋과 맛 고스란히

 
 전주는 조선시대 전라도와 제주도를 관할하던 전라감영이 있던 곳. 전주 이씨 조선왕실의 본향으로, 조선 역대 임금들이 몸과 마음의 뿌리로 여긴 고장이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5곳(전주 경기전·영흥 준원전·개성 목청전·경주 집경전·평양 영숭전) 중 한 곳이다.
 숱한 전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전주부성과 감영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으나, 경기전과 그 주변 마을을 이룬 수백 채의 옛 한옥들이 살아남아 전주를 전통문화의 본고장으로 자리매김시키고 있다. 경기전에서 출발해 한옥마을 골목과 한벽당·풍남문·객사를 거쳐 경기전 앞 전동성당으로 돌아온다.
 
 4대 사고 중 유일하게 보전된 전주사고 실록
 
a8.jpg 경기전으로 들기 전에 정문 앞에서 멋진 하마비부터 감상한다. 1614년 세운, 사자(또는 거북)를 닮은 두 마리의 동물 석상이 받치고 있는 아름다운 빗돌이다. ‘이곳에 이른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은 출입하지 말라’(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는 글을 새겼다. 기단석 양쪽에 사각형 홈이 파여 있어, 작은 보호각이 설치돼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경기전은 경사스런 터를 뜻한다. 볼 것 많고 숲 아름답고 쉴 자리 많은 도심 속 ‘경사스런 쉼터’다. 어르신들도 젊은 남녀도 거닐고 또 앉아 쉬며 싱그러운 봄 바람을 즐긴다. 경기전 본전에 태조 이성계의 전신 어진(진품은 전주박물관)이 있다. 태종 때 6곳에 모셨던 어진 중 유일하게 남은 초상화다.
 이민숙 해설사는 “비단에 그려진 옛 어진이 빛 바래고 낡자, 1872년 어진을 모사해 새로 그린 뒤 옛것은 태워 백자항아리에 담아 경기전 뒤뜰에 묻었다”고 설명했다. 본전 앞 좌우 회랑엔 세종·정조·고종, 영조·철종·순종의 어진을 전시했다.
 별전에서 소나무를 감싸고 자라오른 거대한 능소화나무와 일제강점기 분재 형식으로 줄기를 휘어 키운 매화나무를 보고, 복원해 놓은 전주사고로 간다. 조선1473년(성종4년) 이곳에 실록각을 짓고 태조~명종 대의 실록 784책 614권을 보관했다. 임진왜란 때 다른 사고들이 불타 소실됐지만, 전주사고 실록은 정읍·강화도·묘향산 보현사 등으로 옮기는 필사적인 노력 끝에 살아남았다. 왜란 뒤 이를 바탕으로 재출판해 실록이 보전될 수 있었다.
 일본 침탈의 흔적이 이어진다. 예종대왕 태실과 태실비다. 본디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에 있던 것이다. 일제 총독부가 태항아리를 탈취해가며 파괴한 것을 1970년 옮겨와 복원했다고 한다. 전주 이씨 시조 이한 부부의 위패를 모신 조경묘(1771년 건립) 옆에선 경기전 유물전시관 공사가 한창이다.
 
 이성계가 유방 시 읊으며 건국의 속내 내비쳐
 
 경기전 동문을 나서 한옥마을 골목 탐방을 시작한다. 한옥이 700여 채에 이른다지만, 원형이 바뀌거나 새로 지어진 집들이 많다. 깔끔하게 단장된 골목마다 카페·공예품점이 즐비하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 문학관과 생가를 보고 대리석 실개천을 건너 ‘전주최씨종대’(종대:대를 이어 살아온 터) 앞 600년 된 은행나무 그늘로 간다. 5년 전 나무 밑둥에서 어린 새 은행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해 눈길을 끌었던 나무다. 길 건너엔 동학혁명기념관이 있다.
 전주기전대학 부설 한옥생활체험관인 동락원을 보고 ‘방’이란 아담한 간판이 이어지는 한옥 민박집 골목을 나가 전주한옥생활체험관으로 간다. 재현된 고래등 같은 양반집에 머물며 공예·다례 등 전통생활 체험을 할 수 있다. 1박 6만 원부터(조식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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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술박물관을 거쳐 새 단장된 흙담벽 이어지는 골목길을 걷는다. 전주 전통문화의 맥과 향기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엿보이는 골목들이다. ‘공예공방촌 지담’ 마루에서 한지목걸이를 만들던 조민경(6·전주시 호성동)양이 말했다. “만드는 게 재밌고 쉬워요.” 황손 이석 씨가 머무는 승광재 등을 들여다 보고 큰길로 나선다.
 문 연 지 30년 됐다는 굴다리슈퍼에서 캔커피를 사들고 주인 할머니 말씀을 들었다. “저 기린로가 철길이었을 때 요 앞에로다가 굴다리가 있었응게, 그래갖고 인자 여가 굴다리슈퍼제.”
 한지체험장 즐비한 골목길 돌아 명품관·한지관·공예품전시관 들여다보고 오목대로 오른다. 나무계단 전망대에서 기와지붕 바다의 일부가 눈에 들어온다. 오목대는 고려말 이성계가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개경으로 가는 길에 들러 종친들을 모아 잔치를 벌였던 곳이다. 이곳에서 이성계가 한나라 유방의 시(대풍가)를 읊으며 나라를 세우겠다는 속내를 내비치자, 함께 왔던 정몽주가 이를 간파하고 전주 남고산성에 올라 고려의 운명을 생각하며 우국시를 읊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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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목대엔 태조가 머물렀던 곳임을 알리는 ‘태조고황제주필유지비’(고종황제 친필·1900년)가 있다. 오목대 뒤 육교를 건너 가면 이성계의 4대조 목조(이안사)의 유허지 이목대가 있다. 이곳에도 고종 황제가 쓴 ‘목조대왕구거유지’ 빗돌이 있다.
 오목대·이목대는 각각 오동나무·배나무가 많았던 봉우리를 가리킨다. 견훤궁터가 있는 승암산 줄기다. 본디 산줄기가 오목대까지 이어져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철길을 내며 끊겼다. 1980년대 철길을 옮기며 기린대로가 만들어졌다.
 
 중국 7현과 동방 18현 등 50인 유학 성인 위패 모신  향교
 
 이목대 앞 길 건너에 원광슈퍼가 보인다. 자판기 커피가 맛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택시 운전사들이 자주 들러 쉬어간다는 곳이다. 오목대 앞으로 돌아나와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가 양사재로 간다. 향교의 부속건물로, 서당공부를 마친 유생이 본격적으로 진사시험 등을 준비하던 장소다. 1950년대엔 전북대 문리대의 전신인 명륜대학의 사택으로 쓰이며, 학장이던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가 머물기도 했다(왼쪽 끝방). 한옥 숙박체험 시설로 활용된다. 1박 5만~10만 원.
 고종 황제가 세수할 때 쓰던 받침돌을 가지고 내려온 궁녀가 살았다는, 한옥 오 교장댁(전 중앙여고 교장 오근풍씨 댁)을 찾았으나 문이 잠겼다. 공원 밑 담벽을 따라 전주향교 쪽으로 걷는다. 동헌(전주부성 안에 있던 동헌을 이전 복원해 놓은 곳) 왼쪽 길로 내려가 골목길을 오르면 남안재 팻말이 나온다.
 한말 유학자 간재 전우의 제자인 고재 이병은이 향교를 지키며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고택은 개조돼 옛 모습은 거의 없다. 원두막 모습의 허름한 정자에 걸린 ‘봉상천겁 용집구연’(봉황은 천길 낭떠러지에서 날개짓 하고 용은 깊은 연못에 엎드려 있다)는 편액이 눈길을 끈다. 언덕 위 전망 좋은 자리에 고재를 모신 사당이 있다. 고재의 손자 이남안 어르신이 집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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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향교는 중국 7현과 동방 18현 등 50인의 유학 성인의 위패를 모신 큰 규모의 향교다. 애초 경기전 옆에 있었으나, 한차례 외곽 이전 뒤 1603년 현위치로 옮겼다. 대성전 뒤의 명륜당과 300~400년 된 거대한 은행나무들이 아름답다.
 명륜당은 세칸 건물 좌우에 눈썹처마를 덧대어 실내공간을 넓힌 모습이다. 앞쪽 대성전보다 크게 지을 수 없었던 데 따른 고심의 흔적이다. 양반 자제들이 공부하던 동재 댓돌에 작고 앙징맞은 색색의 운동화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녹차를 마시면, 머리가 맑아져요, 감기에 안 걸려요.” 방문 틈으로 선생님 말씀 따라 외치는 낭랑한 어린이들의 합창이 흘러나와 400년째 봄을 맞은 은행나무 그늘이 한결 싱그럽다.
 
 전주 8경 중 3경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한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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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교 정문 왼쪽 담 앞엔 아주 오래된 효자비가 있다. 태조 이성계가 내린 정려다. 비각 안에 1398년 세워진 ‘효자군수 박진지려’ 빗돌이 있다. 박진은 조선 초 청도·영암 군수를 지낸 이로, 정몽주의 외손자다. 영암군수 때 부친이 위독하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병수발을 들었다. 그 부친도 훌륭하신 분이다. 병이 깊어지자 아들에게 시를 남겼다.
 “나이 80에 평상에 누워 있으니, 60살 늙은 아들이 약을 먼저 맛보네. 죽고 사는 것은 피하기 어려우니, 네 어미 무덤 가까이 내 무덤이나 준비하거라.”(<전주 한옥마을과 산성 이야기> 참조) 빗돌은 본디 풍남문 부근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
 맑고 푸른 전주천 둑길을 걸어 오모가리탕을 내는 식당들 지나 컴컴한 굴다리 밑을 걷는다. 육중한 시멘트 더미를 따라 차량들이 내달리는 다리 옆 바위에 겨우 버텨 선 한벽당이 보인다. 정자 안 난간에 서면 모두 상류 쪽 푸른 강줄기를 감상한다. 하류 쪽은 다리가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반토막 경관이지만, 전망이 빼어나다. 전주 8경 중 세 가지를 한꺼번에 느끼고 감상할 수 있다는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한벽당을 헐어내고 철길을 내려던 것을, 유학자들이 나서서 반대해 막아냈다. 한벽당은 살려두고 일제는 정자 밑에 굴(한벽굴)을 뚫어 철길을 냈다. 지금은 철길도 옮겨가고 기린로와 전주천 상류 둑길을 잇는 통로로 쓰인다. 위쪽 요월대는 일제 때 새로 지은 정자다.
 돌아나와 다시 전주천 둑길을 걷는다. 향교 들머리 홍살문 옆엔 키 큰 하마비가 서 있다. 고리타분하고도 정겨운 좁은 골목을 통과해, 40년 된 고리타분한 간판을 달고 있는 현대수퍼를 만난다. “그라제, 오래 되았지. 전화번호 국번이 홀수인 간판이 이거 하나랴. 뜯도 못허게 혀.”(주인 소순구·73)
 옛날 이발소 분위기가 물씬한 청수이용원, 50~80년대 생활용품·학용품·장난감·잡동사니들을 가득 전시한 추억의 박물관, 문닫은 코티미용실과 목공소로 바뀐 무진장수퍼를 지나, 50년 전통의 중국집이라는 교동집을 만난다. 자장면 2천 원.
 
 전통 한옥 기본으로 양옥·왜식가옥 형식 덧붙여진 학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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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거리에 정말 볼 만한 건물이 있다. 전통 한옥을 기본으로 양옥·왜식가옥 형식이 덧붙여진 학인당이다. 고종 때 인물인 인재 백낙중이 부친을 위해 지었다는 큰 규모의 살림집으로, 본채와 부속건물·정원·연못·우물 등이 있다.
 본채는 2층 다락방과 3층 다락방까지 있는 독특한 구조로, 들문을 올리면 대청마루와 방들이 이어져 널찍한 공간이 만들어진다. 국악공연장 등으로 활용됐다고 한다. 돌계단을 통해 깊은 우물 밑까지 내려갈 수 있게 한 점도 특이하다.백범 김구 선생이 전주를 찾았을 때 묵었던 곳이다. 일제 때 맥이 끊길 위기에 있던 전주대사습놀이가 백씨 집안의 후원으로 이곳에서 이어졌다. 학인당이란 현판 이름은 ‘인재 백낙중’의 효심을 배우라는 뜻으로, 그의 아들이 지었다. 학인당 솟을대문에 효자 백낙중을 기리는 정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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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달로 건너 풍남문 쪽으로 걷는다. 문이 보일 무렵 왼쪽 남부시장으로 들어선다. 피순대식당·콩나물국밥집이 즐비하다. 전주 술꾼들이 해장국을 먹으러 자주 찾는다는 현대옥도 시장골목에 있다. 6시~14시 영업. 시장을 나와 풍남문 옆모습을 보며 성 안길로 든다. 2층 누각·홍예문의 멋진 풍남문 안쪽 현판엔 ‘호남제일성’이라 적혔다. 고려말 전주부성이 만들어질 때 처음 지은 것으로, 전란·화재 등으로 소실돼 지금 문루는 1760년대에 지은 것이다.
 아름다운 가게를 지나 60년째 모자를 전문으로 팔고 있는, 아담한 전주모자점을 들여다 보고 전주감영 터를 향해 걷는다. 2년 전까지 전북도청으로 쓰던 건물 자리가 옛 감영터다. 옛 도청건물로 들어서면 반질반질하게 닳은 바닥돌들이, 눈길을 끈다. 일제강점기에 지은 건물이다.
 안쪽은 주차장이다. 경비 아저씨가 말했다. “암것두 읍서. 저 나무밖에.”  170여 년 됐다는 회화나무다. 감영의 정청인 선화당 주변에 있던 나무인데, 선화당은 51년 경찰 무기고 폭발 화재로 소실됐다. 회화나무만 시멘트건물에 둘러싸여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모습이다.
 젊은이들이 넘치는 도심 한복판의 객사(보물)로 간다. 좌우 익랑을 거느린 웅장한 건물 정면에 ‘풍패지관’이란 커다란 현판이 걸려 있다. 사대주의의 산물이다. ‘풍패’란 한나라 태조 유방의 고향이다. 유방이 한나라를 일으켰듯이, 이성계가 조선을 일으킨 곳이란 뜻을 담고 있다.
 현판 글씨를 쓴 이도 명나라 재상을 지낸 주지번이다. 주지번이 어린 시절, 사신으로 중국에 갔던 송영구란 이가 자신을 도와준 것을 잊지 못해, 조선에 사신으로 왔을 때 그를 찾아 전라도에 들렀다가 이곳에 찾아와 남긴 현판이라고 전한다. 풍남문이란 이름도 ‘풍패’의 남쪽 문을 뜻한다. 전주부성의 서문도 패서문이었다.
 
 총각귀신이 붙어 있어, 처녀들이 밤엔 피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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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객사 옆 골목이 객사길이다. 이름은 고풍스럽지만, 젊음이 물결치는 넘치는 최신 유행의 거리다. 패션점·카페·휴대폰점·식당·노점들이 즐비한 거리를 20대 전후 봄나무들이 음악에 휩싸여 쓸고 다닌다. 팔달로로 나와 전주에서 한때 땅값이 가장 비쌌다는 충경로 사거리 거쳐 기업은행으로 간다. 기업은행 자리는 옛날 전주관아 동헌이 있었던 곳으로 전한다. 전주 도로원표가 이곳에 있다.
 전북은행 쪽으로 길 건너 헌책방 거리를 걷는다. 80년대까지 헌책방이 즐비했다지만, 지금은 오래된 새 책방인 홍지서림과 몇몇 헌책방들이 남아 있다. 이 거리는 콩나물국밥집 거리이기도 하다. 왱이집·풍전 등 이름있는 식당이 이곳에 있다.
 최근 개업한, 어르신들이 운영하는 한식당 겸 막걸리 주막 ‘천년누리봄’(주안상 1만5천 원부터 시작)을 들여다 보고 경기전 북쪽 담길을 걷는다. 담 옆에서 거대한 참죽나무를 만난다. 경기전 조경묘 조성 때 심은 250년 된 나무다. 여기 총각귀신이 붙어 있어, 처녀들이 밤엔 이 길로 다니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담을 따라 걸어 서문 지나면 길 끝에 우아한 전동성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른쪽 건물 2층의 목판·서화체험관에 들러볼 만하다. 우리 고인쇄문화를 감상하며 목판화 찍기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경기전 앞으로 나간다. 전주 옛 도심을 한바퀴 돈 셈이다. 길 건너에 우뚝 선 돌집 전동성당을 둘러볼 차례다. 본당은 1908년부터 7년 공사 끝에 지었다는 건물인데, 주춧돌 등은 전주부성에서 나온 성돌을 이용했다. 호남지역의 첫 서양식 건물이라고 한다.
 한말 전동성당 건립 추진 당시 이야기가 전한다. 애초 성당은 오목대가 있는 언덕에 세울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전라감사가 상소를 올려 ‘왕조의 탯자리에 서양 종교 건물이 들어설 수 없다’며 반대해 무산됐다. 이 전라감사가 일제 앞잡이 이완용이다. 성당 건물은 앞에서도 봐도 뒤에서 봐도 매우 아름답다. 한국 천주교 첫 순교지다.

 전주/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전주 여행쪽지>
 
● 호남고속도로 전주나들목을 나가 1·21번 국도 타고 전주시내로 들어간 뒤 경기전 팻말 보고 간다. 경기전 주변에 공영주차장들이 있으나 붐빈다. 경기전 뒷길 등 길가에 차를 댈 수 있다. 한옥마을 관광안내소에서 한옥마을 지도와 둘레길 코스 지도를 얻을 수 있다. 지도에 공용화장실 위치가 표시돼 있다.
 
● 경기전과 걷기 코스 주변의 먹을 만한 식당들. 가족회관(063-284-2884), 한국집(063-284-2224) 전주비빔밥 1만원. 왱이집(063-287-6979), 풍전(063-231-0730) 콩나물국밥 5000원. 남부시장 안 콩나물국밥집 현대옥은 전화가 없고, 6~14시까지 영업한다. 어르신들이 개업한 한옥마을 주막 천년누리봄(063-288-8813) 술상 한 상(막걸리 1주전자)에 1만5000원부터. 삼천동 등 이름난 막걸리 골목도 찾아볼 만하다. 동문 쪽에 한울집·영산포 등 허름한 막걸리집이 있고, 영상포 옆 2층 새벽강에도 술꾼들이 모여든다. 갑오징어·황태구이 등을 안주로 병맥주를 파는 전일슈퍼·신신슈퍼·경원슈퍼 등 ‘가맥집’(가게 맥주집 또는 길거리 맥주집)도 유명하다.
 
● 한옥마을의 숙박체험시설이나 골목 안의 민박(게스트룸 등)은 1박에 대개 6만~10만원 선이다. 한옥생활체험관 (063)287-6300. 한옥마을 안내소 (063)282-1330, 경기전 안내소 (063)287-1330.

이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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