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가 흐른다, 봄바람이 살랑인다 길따라 삶따라

통영 도심걷기
조선시대 충청·전라·경상 수군 총괄하던 군사도시 
연애편지 ‘5천통’, 우체국엔 유치환의 사랑 ‘절절’

 
 
Untitled-5 copy 4.jpg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나온 지명이다. 조선시대 충청·전라·경상도의 수군을 총괄하던 ‘해군본부’가 삼도수군통제영이다. 임진왜란 뒤인 1604년(선조 37년) 거제(경상우수영)에 있던 통제영을, 당시 고성 두룡포로 옮기며 건설한 새 군사도시가 통영이다. 1895년 폐영되기까지 약 300년간 삼도 수군의 중심기지였다. 제6대부터 208대까지의 통제사(초대, 3대는 이순신, 2대는 원균)가 이곳을 거쳤다.
 
통제영 안팎에서 전승돼온 숱한 전통문화유산들이 오늘날 무수한 예술인을 배출한 밑바탕을 이뤘다. 시인 유치환·김춘수, 작곡가 윤이상, 소설가 박경리를 비롯한 숱한 작가·예술인과 전통문화 장인들이 통영에서 나왔다. 200여개의 크고작은 섬무리는 놓아두고, 문화유적 즐비한 통영 옛도심 골목길로 들어간다. 강구안 문화마당(병선마당)에서 출발해 남망산·동피랑마을 지나 세병관·충렬사 거쳐 강구안으로 돌아온다.
 
‘톱 장수’도 시 짓고 노래 부르는 ‘예술인’
 
강구안은 통영 도심에 둘러싸인 내해를 말한다. 동충(현 항남동 끝) 일대와 남망산 자락이 천혜의 방파제 구실을 하면서, 통제영시대에 주요 대형 병선 7척을 대놓던 곳이다. 이 주변을 매립해 만든 광장이 이른바 문화마당인데, 향토사학자 등 일부 주민들이 “쌔깔도, 어이미도 없는” ‘문화마당’ 대신 ‘병선마당’이란 이름을 고집하는 것도 이때문이다.
 
병선마당 선착장에 지금은 거대한 거북선 한 척이 닻을 내리고 있다. 서울 한강에 있던 것(1990년 건조)을 2005년 서울시로부터 기증받아 옮겨왔다. 길이 34m, 폭 10m의 거북선 안에서 임란 때 썼던 천자총통·지자총통·현자총통·황자총통 등 크고작은 총통들의 모형, 이순신 장군에게 내려진 각종 교지 등을 볼 수 있다. 병선마당 한쪽에 한산대첩 주제 홍보관이 있다. 상주하는 해설사가 임진왜란과 이순신 관련 전시자료를 꼼꼼히 설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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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관 뒤 화장실 옆에 자리를 편 톱장수 어르신을 만난다. 40여년간 만들고 고치며 톱날을 세워온 ‘톱의 달인’이다. “전기톱 저리 가라랠 정도”라는 수제 톱 장수 강갑중(74)씨가 말했다.
 
“군대 갔다 와가 인자 벌도 키우고 염소도 키우고 이래쌓다가 고마 조실부모 하고, 그래또 묵고 살라꼬 마 궤짝 짊어지고 칼도 갈고 하다가 톱 씰는(톱 만들고 가는) 일만 인자 사십 한 오년 한기라.” 40년 전부터 써왔다는, 낡고 닳아빠진 ‘문화재급’ 궤짝(연장통이자 작업대)이 그의 이력을 말해준다. 줄로 갈고 망치로 두드려 톱을 만들고 고치는 틈틈이, 시도 짓고 노랫말도 만들어 부른다.
 
“노래가 되것는가 함 보소. 으흠.” 그가 만들었다는 “갈매기 배고파 먹이 찾아 날고 있네. 똑딱선 오고가는 통영항 연안부두”로 시작하는 ‘통영의 여인’이란 노래를 듣고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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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문화회관 건물이 짓누르고 있는 남망산 자락으로 오른다. 10개국 15명의 조각가들 작품이 전시된 조각공원을 둘러보며 대숲·솔숲을 거니는 맛이 바로 봄맛이다. 목련꽃·동백꽃 그늘이 그윽하고, 봄볕에 반짝이는 통영항 바다 전망은 후련하다. 초정 김상옥 시비와 청마 유치환 시비도 만난다. 청마 시비 맞은편엔 동랑 유치진 동상이 있었으나, 친일 행적이 문제돼 철거됐다고 한다.
 
‘기림을 온 베르빡에 기려서’ 관광객 사로잡아
 
다시 시민문화회관 앞으로 내려와 큰 길 건너 김춘수 시인 생가를 보고, 벽화마을로 이름난 동피랑마을로 간다. 마을 들머리엔 옛 통제영 안에 있던 9개의 샘 중 하나인 통새미가 있다. 해산물 담는 나무 통을 만들던 공장 부근의 샘이어서 통새미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샘 앞 명호슈퍼 주인 최이일(70)씨는 “이순신 장군과 병사들이 배 대놓고 퍼다 마시던 샘물”이라며 “20년 전까지 우리도 식수로 썼다”고 말했다.
 
명호슈퍼와 이어진 낡은 2층 집은 오래된 일본식 가옥이다. “한 백년은 됐을끼라예. 우리가 한 오십년 살았은께네.” 2층에 걸린 ‘컴퓨터학원’이란 간판은 몇년 전 영화를 찍느라 걸어놓은 것이다. “집도 차암 좋았는데 손또 안보고 이렝께, 고마 낡아 이래 돼삐린기라예. 인자 다 허물고 마 새 집 지아갖고 여 살라꼬예.” 최씨는 4월중에 ‘100년 됐다’는 이 집을 헐어내고 새 집을 지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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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피랑마을로 오른다. 동피랑은 동쪽 벼랑을 뜻한다. 비탈을 따라 50여채의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이 산동네는, 몇년전 시에서 철거한 뒤 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었다. 2007년 시민단체 ‘푸른통영21’이 공공미술을 통한 마을가꾸기에 나서면서 마을이 살아남았다. 벽화 그리기 전국공모를 통해 골목 담벽은 멋진 그림들로 채워졌고, 관광객들이 몰리면서 마을은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떠올랐다. 지난 2월엔 방문객들에게 차와 간식을 파는 동피랑구판장도 문을 열었다. 주말이면 사진기 든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골목길을 누빈다.
 
동피랑 마을로 오르는 길 옆 난간을 따라, 토박이 어르신들의 통영 사투리를 그림과 함께 적어놓은 팻말들이 눈길을 끈다.
 
“쌔기 오이소! 동피랑 몬당꺼지 온다꼬 욕 봤지예. 짜다리 벨 볼끼 엄서도 모실 댕기드끼 어정거리다 가이소.”(어서 오세요. 동피랑 언덕까지 오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별 볼거리가 없어도 마실 다니듯이 천천히 둘러보세요)
 
“기림을 온 베르빡에 기리노이 볼끼 쌔빗네.”
 
“무십아라! 사진기 매고 오모 다가? 와 넘우집 밴소깐꺼지 디리대고 그라노. 내사 마, 여름내도록 할딱 벗고 살다가 요새는 사진기 무섭아서 껍닥도 몬벗고, 고마 덥어 죽는줄 알았능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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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 쫓는 장승 송곳니 들어낸채 ‘헤~’

 
지난 2월 통영시는 마을의 작은 집 한채를 사들이고 단장해, 간이매점인 ‘동피랑구판장’ 문을 열었다. 커피도 타고 라면도 끓여 파는 운영자 박부임(59)씨가 말했다. “가정집맹이로 해노이께네 손님도 잘 안들어오데예. 겨우 전기세 내고 사는기라예.” 커피 1천원, 카페라테 2천원, 라면 2천500원.
 
마을 꼭대기 언덕은 통영성의 3대 포루(일종의 경비초소) 중 하나인 동포루가 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3포루 중 북포루만 1992년 복원했다. 서포루는 현재 복원공사중이고 동포루도 곧 복원할 예정이다. 허물어진 옛 집터의 구들장을 밟고 서서 내려다보면 남망산과 강구안, 미륵도, 통영대교 쪽 경치가 볼만하다.
 
Untitled-7 copy 3.jpg동피랑마을 벽화는 다음달 새롭게 단장된다. 통영시와 ‘푸른통영21 추진협의회’는 전국공모로 선발한 미술팀들을 통해 마을을 새단장하는 ‘제2회 동피랑 벽화전’을 벌인다. 벽화 및 설치미술 작업은 4월3~11일 이뤄질 예정이다.
 
동피랑마을을 내려와 통영성 동암문(동쪽 샛문) 터를 보고 중앙시장으로 들어간다. 중앙시장은 서호시장과 함께 통영의 양대 재래시장이다. 서호시장이 일제강점기 매립지(새터)에 들어선 시장인데 반해, 중앙시장은 조선시대부터 형성된 전통의 옛 시장이다. 장날(2, 7일)이면 요즘도 주변 도로까지 상인들로 덮인다. 가장 북적이는 곳이 활어시장이다. 도다리가 제철. 1㎏ 3만원.
 
종합상가인 충무데파트 지나 길 건너 세병관을 향해 걷는다. 세병관 들머리에서 높이 2m에 이르는 커다란 돌장승(벅수)이 기다린다. 1906년 액운과 전염병 등을 물리치기 위해 세운 채색 장승이다. 눈은 부릅떴으나, 입은 큼직한 송곳니 두개를 드러낸 채 환하게 웃는 모습이다. 길 건너 네거리 모퉁이에 있던 것을, 도로 확장공사로 옮겨 세웠다.
 
세병관이 있는 통제영 터로 간다. 1604년부터 1895년까지 조선 삼도(충청, 전라, 경상)의 수군을 총지휘했던 삼도수군통제영 본영 자리다. 본디 100여동에 이르는 관아 등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고 하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세병관(국보 305호) 하나뿐이다. 세병관 주변에선 현재 발굴 및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다. 옛 통제영 3분의1 규모의 건물 복원이 추진되고 있다.
 
전쟁 그만하고 싶은 선조들의 염원 담긴 지과문·세병관
 
24절기·24방위를 뜻하는 24계단(아래 2계단이 땅에 묻혀 실은 22계단)을 올라 망일루로 들어서면 지과문까지 다시 24계단이 펼쳐진다. 지과문(止戈門)은 세병관으로 드는 문이다. 김영국 문화관광해설사는 “지과문은 전쟁(戈)을 그친다(止)는 뜻을 담고 있다”면서 “그러나 두 글자를 합치면 무(武)자가 되어, 무력에 대비한다는 뜻이 된다”고 설명했다.
 
문턱을 넘어서면 50개의 아름드리 기둥으로 이뤄진 거대한 객사 세병관(洗兵館)이 모습을 드러낸다. 통제영을 설치한 이듬해(1605년) 지어진 건물로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루와 함께 조선 3대 대형 누각으로 꼽힌다. 이곳은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군사가 머무는 객사 구실외에 회의장소와 회식장소로도 쓰였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을 향해 올리는 망궐례를 행하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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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병관 내부엔 역대 통제사가 함께 근무했던 참모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다. 6~208대의 통제사들이 거쳐갔으니, 편액도 200개는 돼야 하나, 현재 남은 것은 43개뿐이다. 김 해설사는 “세병(洗兵)이란 두보의 시에서 따온 말로, 갑옷과 병기를 씻어 영원히 사용하지 않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세병관 옆 뜰엔 동백나무 몇 그루가 붉은 꽃그늘을 드리우고 서 있다. 세병관을 나와 복원해 놓은 수항루를 본다.  왜장에게서 항복을 받는 과정을 재현하는 행사를 치렀던 곳이다. 본디 남문밖에 있던 것을 망일루 옆에 복원하고 옛 자리에 ‘수항루 터’ 표석을 세웠다. 그러나 도로 확장공사로 이 표석마저 설자리를 잃어, 이전복원한 이곳 수항루 앞으로 옮겨다 놓았다. 본디 것은 사라지고 없는데, 엉뚱한 곳에 이전복원된 누각과 옛 누각 자리를 알리던 표석이 한 자리에 서 있는 모습은, 우습고 또 슬프다.
 
수항루 맞은편 통영시향토역사관은 통영의 역사와 문화유적,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 관련 유물과 자료 2천500여점을 소장,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부채·갓·그림·목가구·장석·나전칠기·장신구 등 통제영 12공방 생산품과 이순신 장군 기록물, 통영의 다양한 민속품들이 볼만하다.
 
복원공사가 한창인 세병관 옆 골목길을 돌아 서문 터를 향해 걷는다. 수십년 전 모습을 간직한 골목이 이어진다. 동네 이름이 간창골인데, 관청이 있던 고을을 이르는 관청골에서 변한 말이다. 사투리 발음이 그대로 굳어졌다. 김 해설사가 골목 안의 한 집을 가리켰다.
 
“이 부근에 초정 김상옥 시인이 한때 살았다고 해요. 저 집이 시인이 살던 집으로 추정됩니다. 그 무렵 석류나무가 등장하는 시를 썼는데, 이 주변에서 석류나무가 있는 집이 저 집뿐이죠.”
 
이순신 장군 만나러 충렬사 가볼까
 
서문 추정 터를 건너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위패를 모신 충렬사로 간다. 입장료 1천원. 정문을 들어서자 3백~4백년 된 동백나무들이 꽃길을 밝히고 있다. 사당의 영정 뒤에 펼쳐놓은, 명나라 신종이 충무공의 공적을 기려 보내온 여덟 의장품들을 병풍으로 그린 팔사품도가 볼만하다. 1861년 무렵 통제사 신관호가 직접 그리고 내력을 적은 병풍이다. 명필 통제사 신관호는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다.
 
느티나무 기둥이 단단한 사당 건물은 1606년에 지은 것이다. 사당 건물 좌우엔, 늦가을 향기로운 꽃을 피워 겨울이 왔음을 알린다는 ‘금목서’ 두 그루가 서 있다. 충렬사 현판은 동춘당 송준길의 글씨다. 사당 문 좌우 비각 안엔 충무공을 기린 충렬묘비와 통제사 사적비 등 대형 빗돌이 즐비하다. 충렬묘비는 이항복·송시열·김수항 등 당대의 명필·지식인들이 참여해 세운 것이다. 팔사품전시관에선 의장용칼 등 모조품과 함께 통제영 병선 548척이 참가해 훈련하는 모습을 그린 수조도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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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루 뒤엔 돌계단이 있다. 일제강점기, 20대 청년 시인 백석이 통영을 찾아와, 명정골에 산다는 처녀를 생각하며 우두커니 앉아 있던 계단이다. “란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든데/…/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여가며/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백석 시 <통영> 일부, 1936년)
 
충렬사 앞 길 건너에 백석 시비가 세워져 있다. 시비 맞은편 길 건너엔 정당샘으로 불리는 명정이 있다. 1670년 충렬사에서 쓰기 위해 판 우물이다. 일정·월정 두개 의 우물이 나란히 있는데 위쪽의 일정은 충렬사에서, 아래쪽 월정은 민가에서 사용했다.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도 명정골 우물 이야기가 나온다. 백석 시비 뒤엔 고종 때의 열녀 ‘함안 조씨 정려’가 있으나 관리가 안돼 허물어져가고 있다. 명정을 달리 정당샘이라고도 부르는 것도 정려 앞에 있는 샘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경리 생가터·김상옥 생가 돌아보며 마무리
 
Untitled-7 copy 7.jpg비좁은 골목길을 따라 서문고개를 올라 윤보선 전 대통령 부인 공덕귀 옛집, 박경리 생가터를 찾아간다. 박경리 생가는 사라지고 새로 지은 벽돌집 벽에 생가임을 알리는 팻말을 붙여 놓았다. 다시 큰길 건너, 길이 가팔라 ‘서문까끄막’ 으로 불리는 서문고개 옛 골목길로 들어간다. 습기차고 이끼낀 골목 담벽을 한굽이 돌아 내려가면 일제강점기 통영청년단 건물(현 통영문화원)을 만난다. 일제의 방해를 무릅쓰고 1923년 민간자금으로 지은 건물이다. 통영청년단은 비밀항일조직으로, 통영 3·1만세운동도 이곳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문화원 앞엔 통영성 9개 우물 중 하나인 ‘간창골 샘’이 있다.
 
세병관 들머리와 이어지는 남문로로 내려서면 일본식 집들이 몇채 눈에 띈다. 충무교회 지나 주차장 부근이 옛 통영성의 남문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중앙동우체국 앞으로 청마 유치환 거리가 이어진다. 중앙동우체국은 유치환이 찾아와 사랑하던 여인 이영도(시조시인·당시 미망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또 썼던 곳이다.
 
1947년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함께 만난 뒤 그는 1967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뜰 때까지 쉬지 않고 이영도에게 편지를 써서 붙였다. 20년간 5천통이 넘는 편지를 받은 이영도는 그것을 고스란히 보관해 뒀다. 이영도는 67년 청마 사후 200통의 편지를 추려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서한집을 냈다. 중앙동우체국 앞 우체통 옆에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하는 그의 시 <행복>을 적은 시비가 세워져 있다.
 
다음은 초정 김상옥 거리다. 이곳은 20여년 전까지 통영의 명동으로 불릴 만큼 번화했던 거리다. 상권이 정량동·무전동 등 신시가지 쪽으로 넘어간 뒤 수십년 역사의 레코드가게·책방들만 옛 명성을 지키고 있다. 동진여인숙 골목 모퉁이의 김상옥 생가(부친이 갓을 팔던 갓점이었다) 표석 보고 항남오거리를 건넌다. 농협중앙회 지나 이중섭이 한국전쟁 피난 시절 머물렀다는 일본식 건물(현 21C DVD방)로 간다. 한국전쟁때 이중섭이 피난와 1년반 동안 지내며 작품활동을 한 곳이다.
 
저물어가는 강구안 병선마당으로 다시 나오니 배들도, 남망산 시민문화회관도 막 환한 불을 밝히고 있다. 6.5㎞를 걸었다.
 
 
※ 통영 워킹 쪽지
 
⊙ 가는 길 l 대전~통영 고속도로 타고 통영나들목에서 나간다. 통영시청 지나 북신사거리에서 좌회전, 중앙로 따라가다 시민문화회관 또는 중앙시장 팻말 보고 좌회전해 들어가면 강구안 문화마당(병선마당)이다. 중앙활어시장 앞 선착장 쪽에 문화마당 주차장이 있다. 1시간 1000원. 주말엔 매우 혼잡하다.
 
Untitled-7 copy 4.jpg⊙ 먹을거리 l 충무김밥(중앙시장·서호시장 부근에 즐비) 말고도 도다리쑥국, 졸복국·해물탕이 있다. 도다리쑥국(4월 초까지 제철)과 졸복국은 통영항 일대 대부분의 횟집에서 먹을 수 있다. 1만원 안팎. 서호시장의 분소식당(055-644-0495), 부일복국(055-645-0842), 만성복국(055-645-2140). 항남동 문화마당 뒷골목의 새집식당(해물탕·055-645-5608), 중앙시장 뒷골목의 분이분식(삼색칼국수·055-648-1668), 남망산공원 입구의 소라식당(해산물백반·055-644-8978).
 
⊙ 여행정보 l 통영관광안내소 (055)650-4681, 통영시청 관광과 (055)650-4610, 통영종합버스터미널 (055)644-0017.
통영/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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