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유명한 나주 배는 그 배가 아닌갑소잉 길따라 삶따라

나주 도심 걷기
풍수상 ‘배’ 형국…서울 빼닮아 ‘대리 한양 구경’
곳곳 항일 흔적…진한 곰탕길 옆 진한 연애고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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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는 백여년 전까지 전라도의 중심 도시였다. 전주와 함께 호남지역의 행정·군사·지리적 거점 구실을 했다. 전라도란 명칭이 전주·나주에서 나왔다. 고려 초 전국 12목 중의 하나로 나주목이 설치된 뒤 조선 말까지 912년간 300여명의 목사(수령)가 거쳐간 ‘천년 목사 고을’이다. 나주 배도 맛있고, 나주 곰탕도 좋지만, 유서깊은 도시의 골목들을 기웃거리는 맛도 진진하다. 나주읍성 동문 밖에서 출발해 남문과 도심 골목을 거쳐 서문터 밖의 향교까지 걷는다.
 
전라도는 전주의 ‘전’ 나주의 ‘나’에서 따와
 
나주시내를 감싸고 에돌며 호남의 젖줄 영산강이 흐르고, 옛 나주읍성 안쪽으론 나주천이 가로지른다. 나주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 영산강과 몸을 섞는 하류 부근에 읍성의 동문인 ‘동점문’(東漸門)이 자리한다. 동점이란 서경에 나오는 ‘동점우해’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나주천이 동쪽으로 흘러 영산강을 만나 바다에 이르름을 뜻한다. 동점문은 옹성이 설치된 2층 문루다. 고려 말 삼봉 정도전이 원나라를 멀리하고 명나라와 가깝게 지내야 한다는 ‘배원친명책’을 주장하다 1375년 나주 회진현(현재 다시면 운봉리 일대)으로 귀양살이를 오게 된다. 이때 나주읍성 동문 누각에 올라 ‘나주 주민들에게 드리는 글’(등나주동루유부로서)을 읽었다고 한다. 동점문 현판 글씨는 2005년 문 복원 당시 도올 김용옥씨가 썼다.
 
동문밖 북쪽 길가엔 높이 11m의 돌기둥 ‘동문밖 석당간’(보물 49호)이 있다. 나주가 풍수상 배의 형국이어서 돛대 형상을 만들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절 앞에 세웠던 당간을 닮아 ‘석당간’으로 불리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옛 지도엔 ‘석장’(石檣)으로 표시돼 있다. 본디 성밖에 석장을, 성 안쪽(동문 옆)에 ‘목장’(木檣)엔 세웠다고 하나 목장은 사라졌다. ‘동문밖 석장’은 현재 보수공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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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천 건너(죽림교) 물길 옆 돌계단을 올라 남산시민공원으로 오른다. 늦가을 낙엽 깔린 계단길은 동문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옛 성곽터다. 꼭대기에 최고정이라 불리는 시멘트 팔각정이 있다. 오래 전에 최고정이란 나무 정자가 있었고, 일제강점기엔 신사가 세워졌던 곳이다. 여기서 동문 쪽을 내려다보면 멀리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 줄기가 눈에 잡힌다. 금성은 나주의 옛 이름이다. 나주시청 학예연구사 윤지향씨는 “나주는 서울의 지세를 닮아 예로부터 ‘소경’(작은 서울)으로 불렸다”며 “서울에 북악산·남산이 있고 청계천·한강이 있다면 나주엔 금성산·남산, 나주천·영산강이 있다”고 설명했다. 옛날엔 ‘물 아래’(영산강 이남 지역) 주민들은 나주를 둘러본 뒤 ‘한양 구경’을 한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광주학생운동으로 번진 일본 남학생 성희롱 사건은 나주역사에서
 
최고정에서 내려서면 최근 세운 빗돌 ‘나주사적비’가 있고, 그 앞엔 용 무늬가 섬세하게 새겨진 멋진 비석 머릿돌이 하나 덩그라니 놓여 있다. 옆엔 나주시내 금성관 앞에 있던 것을 옮겨다 지은 내삼문 건물이 있다. 안내 팻말엔 금성관의 정문인 망화루라고 적혀 있지만 윤씨는 “고증 결과 정문과 금성관 사이에 있던 내삼문이라는 게 정설”이라고 말했다. 빛바래가는 단청이 아름다운 고색창연한 건물이다.
 
한말 일제에 항거하다 순절한 두 의병장 김태원 선생, 조정인 선생의 기념비를 보고 나주중학교 쪽으로 걷는다. 왼쪽 멀리 국궁장이 보인다. 성 안에 있던 인덕정이란 활터를 옮겨온 것이다. 옛 성곽터를 따라 이어지는 학교 옆길을 걸어 ‘남문’(남고문·南顧門) 밖 골목으로 들어선다. 주민들이 ‘남밖에’라 부르는 남외동 거리에선 광복 뒤 나주 최초로 세워진 민립중학교 터를 볼 수 있다. 학교 교실로 썼다는 낡은 건물이 있는데 지금은 창고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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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나주역은 마네킨 역무원들이 지킨다. 1913년 호남선 개통 당시 지은 건물(도 기념물)이다. 일제강점기 3·1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3대 독립운동의 하나로 꼽는 11·3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가 이곳이다. 1929년 10월29일 오후 하교길에 나주역사에선,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하던 한·일 학생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일인 남중생이 한국 여고생을 희롱하자 이를 목격한 광주고보생이 격분해 꾸짖으면서 싸움이 시작돼 광주학생운동 등 전국으로 학생봉기가 이어졌다. 역사 옆에 당시 이를 기념하는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을 세웠다. 월요일 휴관.
 
나주역에서 남문 밖에 이르는 거리는 일제강점기 일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곳곳에서 낡아가는, 이른바 2층 적산가옥들을 볼 수 있다. 구세군교회 앞골목의 나무판자로 벽을 한 주택이 대표적이다. 나주초등학교 옆 네거리에서 윤씨가 빈터를 가리켰다. “구한말 단발령 거부 시위를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로, 나주의 향리 정석진 등이 참수된 곳입니다.” 당시 정석진은 나주성에서 동학군의 공격을 막아낸 공로로 해남군수에 임명돼 부임한 직후였다. 나주는 단발령 저항운동 근거지로 지목돼 이듬해 관찰부를 광주로 옮기면서 천년 목사고을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마음 어지러울 땐 120년 된 초가에서 잠자며 다스려
 
Untitled-3 copy.jpg1907년 개교한 나주초등학교 터는 앞서 전라지역 12개 군·현의 병마를 지휘관할하던 전라우영이 있던 자리다.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과 동학혁명군들이 잡혀와 이 자리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나주초등학교 앞에서 오른쪽 비좁은 골목으로 들어선다. 작은 빈터는 옛 우물 자리다. 윤씨는 “일제강점기 지적도를 보니 지금 이 일대 골목과 집들의 위치가 달라진 게 거의 없다”며 “전라우영이 있을 당시 군졸·군속들이 이 일대에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골목 안쪽엔 독립운동가 조정인의 고택이 있다.
 
다시 남문 앞으로 나가 ‘5·18 항쟁 당시 나주 시민군 활동 거점’임을 알리는 표지석을 보고, 길 건너 일제강점기 경찰서 쪽으로 걷는다. 다시 옛 성곽 터를 따라 가는 길이다. 일제는 성곽을 허물고 경찰서 건물을 지었다. 광복 뒤에도 경찰서로 쓰이다 소방서를 거쳐 지금은 시민단체들이 입주해 있다. 일제가 뚫은 신작로 국도 1호선(당시엔 1등 도로)을 따라 나주천 금성교 쪽으로 걸으면 멀리 금성관 정문인 망화루가 보인다. 금성교도 국도 건설 때 놓은 다리다. 다리 밑에 당시 다릿발(교각) 일부가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나주천 주변엔 양조장이 즐비했다고 한다.
 
나주천 물길이 한구비 휘도는 옛 상나무골(뽕나무골)엔 잘 보전된 전통 한옥 박경중 가옥(도 문화재자료)이 있다. 1914년 지은 안채의 방과 대청마루, 부엌이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부엌에선 지금도 장작불을 때 온돌방을 데운다. 부뚜막 위엔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는, 조왕신(부엌신)을 위해 냉수를 떠 바치는 조왕중발이 놓여 있다.
 
흥미로운 건 안채 뒤쪽 봉당에 놓인 거대한 수조(돌확·확독)다. 집터의 기운이 너무 세어 자손이 귀하고 독자가 이어지자, 이를 누르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주인 박경중(63)씨가 말했다. “요것이 그랑게 나으 4대조 재짜 규짜 어른께서 안채를 새로 짓고 상량도 갈면서 금성산 채석장서 맹길어 갖다놓은 확독이여.” 확독을 갖다놓은 뒤로 2대 독자이던 4대조 어른은 6명의 손자를 봤다고 한다. 돌확은 다른 구실도 했다. “그 양반이 비올 땐 요로콤 마루에 앉자갖고 지붕서 돌확으로 떨어져 고이는 물으 양을 봄시로 논밭 농업용수 관리를 지시했당게라.”
 
더 볼만한 게 뒤란에 소박하게 들어앉은 세칸짜리 초가다. 1884년 박씨의 6대조 어른이 이곳에 처음 들어와 짓고 살던 그 모습 그대로라는 아름다운 초가다. 6대조 어른은 매우 가난했지만 부부 금슬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이 집 어르신들은 마음이 불편할 때면 이 초가에서 잠을 자며 선조의 가난했던 삶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스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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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궁궐 지키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두 그루

 
나주천 남내교 건너 시내 번화가로 간다. 나주천엔 조선시대엔 학다리(학교)란 단 하나의 다리만 있었다고 한다. 하류쪽에 ‘학교’란 이름의 다리가 있지만, 남문의 위치 등으로 볼때 남내교 부근에 옛 학다리가 있었을 것으로 윤지향씨는 추정했다.  
 
오래된 흥아사진관이 있었다는 골목을 지나 30년째 한다는 ‘왔다식품’을 보면서 1번 국도로 나선다. 왔다식품 주인 최영윤(63)씨가 말했다. “여그가 나주극장도 있었고, 종합터미널도 있었고 70년대까진 아주 번성했던 곳이요. 나가 영산포서 열일곱에 들어와 쩌그 터미널서 께끼도 팔고 빵도 팔고 그랬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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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에서 가장 반듯하고 길었다는 진고샅(긴 골목), 이름난 나주곰탕집이 몰린 곰탕골목, 일제강점기 최대 번화가였던 본정통 골목 들을 좌우로 보면서 망화루 앞마당으로 간다. 조선 말기까지 널찍한 광장이었으나 일제가 한쪽에 은행 건물(18은행·현재 금남동주민센터)을 세우면서 축소됐다. 앞서 곰탕골목 초입엔 강점기 금융조합 건물도 남아 있다. 망화루를 통해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최근 새로 지은 문 뒤로 금성관의 자태가 모습을 드러낸다. 금성관은 고려~조선시대 전국 주요 거점도시에 짓고 왕을 상징하는 전패·궐패를 모셨던 지방궁궐의 하나다. 여기서 매달 초와 보름에 임금에게 올리는 망궐례를 지냈다고 한다. 금성관 좌우에 있는 객사 건물은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들이 묵었던 곳으로 최근 복원한 것이다. 안마당 한쪽엔 불망비·선정비·기념비들을 한데 모아 놓았다. 금성관 뒤뜰엔 아름드리 은행나무 두 그루가 키자랑을 하고 서 있다.
 
망화루를 나와 미향곰탕 옆 연애고샅으로 든다. 연인이 거닐기 좋다는 비좁은 골목길이다. 금성관 뒷길은 옛날 곡식창고가 있었다는 사창거리다. 400살 난 당산나무(느티나무)가 있어 주민들이 당산거리라고도 부르는 이 길도 예전엔 좁은 골목이었으나 10여년 전 길을 확장했다. 사매기떡방앗간 앞길, 사매기길은 고려 현종이 거란족 2차 침입 때(1011년) 피난와 건넜다는 사마교에서 유래한 길이다.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건넜던 다리 이름이다. 이 사마교를 보수하고 내력을 적어 다리 옆에 세웠던 비석이 사마교비(1651년 건립)인데, 금성관 경내에 옮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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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성곽 복원 옛 정취 없앨라

 
나주의 막노동꾼에서부터 문화예술인까지, 학생에서부터 은퇴한 어르신들까지 남녀노소가 밤낮으로 즐겨 찾아 잔을 기울인다는 수미소주방을 지나 정수루로 간다. 정수루는 나주관아로 드는 정문이다. 70~80년대까지 공연장 무대 구실을 했다. 각종 공연과 콩쿨대회가 누 위에서 진행되고 관객들은 누 주변에 앉고 서서 감상했다고 한다. 지금은 커다란 북이 누 위에 설치돼 있다. 한국전쟁 전에도 누에 큰 북을 매달아 시민들에게 시간을 알려줬다고 한다. 누 옆에 나주목문화원이 자리잡고 있어 나주 역사 문화에 대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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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루를 들어서면 오른쪽에 나주목사가 거쳐하던 목사내아(금학헌)가 있다. 조선시대 20개 목 가운데 온전히 남아 있는 유일한 내아라고 한다. 내아는 여행객들에게 숙소로도 제공된다. 내아 돌담을 비집고 솟은 500년 넘은 팽나무 자태가 그림같다. 내아 맞은편엔 동헌이 있었다.
 
내아 옆길을 돌아 서문길을 따라 나주 향교 쪽으로 가면 나주읍성의 옛 성벽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무너지다 남은 커다란 성벽 아랫부분이 수십m 가량 남아 있다. 이나마 성곽이 남아 있는 건 무너진 성곽 안팎과 위로 빽빽하게 들어서 있던 무허가 주택들 덕분이다. 나주시는 일부 성곽을 본모습대로 복원할 예정이라지만, 번듯하게 꾸며질 성벽보다는 무너진 채로 낡아가는 지금 모습이 훨씬 아름답고 정취 있어 보인다. 서문 밖엔 나주향교가 있다. 동문에서 향교까지 5㎞ 남짓, 향교 하마비 앞에서 걷기를 멈추자 줄곧 따라다니던 빗줄기도 바람도 잠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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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주 여행 쪽지
 
수도권에서 서해안고속도로 타고 함평분기점에서 광주 쪽으로 가다 동함평나들목에서 나가 1번 국도 타고 나주로 간다. 서울 용산역에서 나주역까지 하루 7차례 열차가 운행된다. 용산역에서 나주역까지 하루 4차례 고속열차(KTX)도 운행된다.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나주터미널까지 고속버스가 하루 6차례 운행된다.


먹을거리는 우선 나주곰탕이 유명하다. 소뼈를 곤 뒤 다시 양지·사태를 함께 고아 내는 국물 맛이 진하다. 금성관 앞 매일시장 부근에 오랫동안 곰탕을 끓여온 집들이 있다. 남평곰탕 (061)334-4682, 노안곰탕 (061)333-2053. 1인분 7천원. 나주 전통 비빔밥집도 있다. 청옥 (061)331-9391. 고추장이 아닌 고춧가루를 써서 주방에서 밥을 비벼 나오는 게 특징. 28년 동안 연탄구이 돼지불고기를 해온 동신대 후문쪽 도로변 송현불고기(1인분 7천원), 나주 술꾼들이 모인다는 사매기길 부근의 25년 된 주막 수민소주방(고추튀김 5천원)도 있다.

나주목사 내아 (061)330-8542. 나주시청 문화관광과 (061)330-7892.


 
나주/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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