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돌면 이난영, 저리 돌면 게다짝 ‘시간여행’ 길따라 삶따라

목포 원도심 걷기 여행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낭만 ‘홀짝홀짝’
점점이 눈물 자국…출출할 때쯤이면 먹자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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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는 신의주·부산으로 이어진 1, 2번 국도의 기점이다. 영산강을 통해 내륙 깊숙이 드나들던 뱃길의 길목이기도 하다. 목포란 이름 자체가 중요한 길목, 요충지를 뜻한다. 일찍부터 왜구들이 자주 설쳐대고, 세종 때 목포진(만호진)을 설치한 뒤 연산군 때 돌성을 쌓아 침입에 대비한 데서도 드러난다. 강제합병 뒤 일제는 기름진 호남평야 생산물들을 목포를 통해 제나라로 가져갔다. 호남선의 종착지이자 출발점인 목포역이 그 길목이었다. 거리와 골목에 즐비한 일제 흔적과 근대문화유산들을 둘러보는 목포 원도심 걷기여행의 출발점도 목포역(1914년 완공)이다.
 
일본인과 목포주민의 경계였던 오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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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맞은편 골목은 젊음의 거리다. 주말 밤이면 골목마다 색색의 조명이 켜지고 쌍쌍의 발길이 이어진다. 오거리 쪽으로 걷는다. 오거리 주변부터 거리는 고색창연한 분위기를 띠기 시작한다. 이곳은 일제때 일본인 거주지(유달동)와 한국인 거주지(북교동·죽교동)의 경계지역이었다. 상권이 발달하면서 날선 대립과 공존이 교차하던 곳이다. 목포 주먹들이 세력화한 시발점이 됐다고 알려진다.
 
당시 사정을 보면 이렇다. 일제는 목포항이 문을 열자(1987년 개항) 이듬해, 유달산 남동쪽 평지에 새 거리를 조성해 후쿠오카·나가사키 지역의 가난한 일인들을 이주시켜 살게 했다. 일제 침탈의 가시화와 함께 일인들의 유입이 늘면서, 당시 목포 주민들은 만호진이나 북교·죽교동 등 유달산 기슭으로 밀려나야 했다. 그 경계가 오거리 주변이다.
 
오거리를 건너 옛 일인들의 거리로 접어든다. 곧 왼쪽으로 낡은 빈 건물이 다가온다. 일제때부터 목포극장(1926년 설립)과 함께 공연·영화 보급에 큰 구실을 했던 평화극장(당시 평화관·1927년 설립) 자리다. 목포극장을 한국인들이 주로 이용했다면, 평화관은 일본인들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최승희의 무용, 홍난파의 공연도 평화관에서 열렸다. 두 극장은 광복 이후 90년대까지 목포 극장가의 쌍벽을 이뤄오다 현재는 모두 간판을 내린 상태다.
 
잠시 걸으면 오른쪽 길건너로 초원실버타운(초원호텔) 간판을 단 건물이 보인다. 일제때 소방서 자리다. 여기서부터 일제 관청 거리가 시작된다. 소방서 옆엔 경찰서가, 그 옆엔 목포우체국(현 유달산우체국)이 있었다. 국도1·2호선 기점 기념비와 도로원표 표석 뒤로 보이는 붉은벽돌 건물이 옛 일본영사관이다.
 
일제 영사관에서 소박한 얼굴의 조선시대 선정비 두 기를 만난다. 덮개돌에 새겨진 꽃무늬·구름무늬가 정겹다. 목포진에 근무한 방씨 성을 가진 만호(관직)의 덕을 기리는 비(1714년)와 신광익이라는 수군절도사가 베푼 은정을 기린 선정비(1763년)다. 본디 만호진 터에 세워졌던 것으로, 일제가 영사관 뒤뜰에 묻은 것을 광복 뒤 우연히 발견해 현위치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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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일본영사관(사적289호)은 일제가 1900년에 지은 2층짜리 붉은벽돌 건물이다. 목포의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고 큰 건물이다. 광복 뒤 목포시청·시립도서관·목포문화원 등으로 쓰이다, 현재는 전시관 용도로 쓰기 위해 내부 공사중이다. 일본영사관 건물 뒤 산밑엔 일제가 40년대초 미군 공습에 대비해 파놓은, 82m 길이의 방공호가 있다. 산 위쪽엔 일인들이 아침·저녁으로 참배하던 봉안전이 있었다(1996년 철거).
 
원형 간직한 적산가옥 골목, 일제시대 배경의 영화세트장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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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와 가던 길로 200여m쯤 가면 오른쪽 골목 안에 호남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일본식 정원이 남아 있다. 1930년대 일인이 만든 이 정원은, 광복 뒤 한 국회의원의 손을 거쳐 지금은 향토기업인 이훈동(93)씨가 사들여 소유하고 있다. 정원을 둘러보려면 정원 옆에 있는 성옥(이훈동의 호)기념관에 들러 허락을 받아야 한다.
 
길 건너 오른쪽 유달초등학교 안엔 일제의 교육기관이던 심상학교의 강당(1929년)이 남아 있다. 완공 뒤 이곳에서 최승희의 무용공연이 벌어져 인파가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나 한국인 입장은 철저히 막았다고 한다. 현 유달초교엔 1908년 영광 불갑산에서 잡힌 한국호랑이의 박제가 보존돼 있다. 당시 일본인이 사들여, 일본으로 가져가 호랑이값보다 돈을 더 들여서 박제로 만든 뒤 목포의 일본인 교육기관이던 심상고등소학교에 기증한 것이다. 언젠가 그 일인의 후손이 유달초등학교를 찾아와 돌려줄 것을 요구해, 거부하자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가겠다’며 소유권을 주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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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초교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서면 1930~40년대 거리 풍경이 펼쳐진다. 원형을 간직한 이른바 적산가옥들이 자주 눈에 띈다. 목포근대역사관 네거리 모퉁이의 카페(행복이 가득한 집)는 일인이 살던 집과 정원 모습이 그대로 남은 곳이다. 카페 주인 이영철씨는 “일본 상인이 1930년대에 지은 집”이라며 “광복 뒤엔 해군부대가 의무대 건물로 썼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차와 와인·스파게티 등을 내는 이탈리아식 찻집이다. 고전음악을 들으며 차 한잔 마실 만하다. 마키야토 6천원.
 
앞쪽의 근대역사관은 일제 수탈기관의 대명사였던 옛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 건물이다. 이곳은 전남 17곳의 농장을 관리하며 전국 동척 지점 중 가장 많은 소작료를 거둬들였던 곳이라고 한다. 1921년에 지어진 이 건물엔 목포 근대사 모습과 일제가 저지른 온갖 만행이 담긴 사진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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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의 거리 쪽으로 가다 중앙방앗간 네거리에서 우회전한 뒤 왼쪽 비탈길(만호로)로 오른다. 언덕 정상엔 향토사학자들이 ‘목포답사 1번지’라 부르는 목포진(만호진) 터가 있다. 500여년 역사를 지닌 서남해안 방어기지로, 둘레 400여m의 성벽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성벽의 흔적은 사라지고, 목포진 터임을 알리는 빗돌과 안내판이 서 있을 뿐이다. 당시 성벽을 이루던 돌들은 주변 주택들 축대마다 무수히 박혀 있다.
 
독립하면 찍겠다던 ‘포’의 한 획 아직도 빠져 있어
 
비좁은 골목길을 돌아 다시 민어의 거리 쪽으로 내려서서 일인들이 거주했던 평탄한 거리를 걷는다. 일제때 혼마치(본정)로 불리던 옛 번화가다. 옛 화신백화점(김영자 화실)까지 양품점·모자점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갑자옥모자점은 85년째 대를 이어 한자리서 모자만을 팔고 있는 모자 전문점이다. 건물에 새긴 상호가 옛 글씨체다. 모친에게서 가게를 이어받았다는 주인 이태훈(66)씨는 “처음 목조건물에서 시작했으나 60년대 화재 뒤 시멘트로 다시 지은 건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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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세트장같은 거리 중간에 백반집들이 이어진다. 돌집식당 등 백반 전문식당 6~7곳이 몰려 있다. 바지락맑은탕에 10여가지의 반찬이 나오는 6천원짜리 밥상이 훌륭하다.
 
50여m쯤 가다 김영자화실 보고 왼쪽으로 잠깐 걸으면, 지난 4월1일 목포문화원으로 새단장한 옛 호남은행 목포지점 건물이 다가온다. 일제때 호남인들이 힘을 모아 설립한 은행으로, 건물은 1929년에 지은 것이다. 정문 머리 위 돌에 새겨진 ‘…목포지점’(木浦支店)이란 한문 글씨 중 ‘浦’ 자의 맨 위 1획이 빠져 있다. 이는 당시 설립자인 현준호가 ‘목포지점이 번창하면 그때 찍겠다’(또는 일제로부터 독립을 이루면 찍겠다)며 일부러 뺐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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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리 쪽엔 오래 묵은 ‘묵 다방’이 있다. 54년간 여섯번 주인이 바뀌며 한자리를 지킨 1층 ‘옛날식 다방’이다. 목포 문화예술인과 유지들이 모여 전시회도 하고 세상사를 논하던 사랑방이다. 지난해 한때 폐업 위기를 겪었으나, 다방 문화를 살리자는 운동이 일며 명맥을 잇고 있다. 커피 2천원(어르신은 1천500원, 단골 작가들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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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리에서 10시 방향 길로 들면 고소한 냄새가 번져온다. 제철 생선회·구이와 흑산홍어를 내는 집으로 이름난 덕인집이 있다. 딱돔(금풍생이)구이·서대조림·은학상어회·강달이(황석어)조림 등을 먹을 수 있다.
 
일본식 절 동봉원사는 최근까지 중앙교회 건물로 쓰였는데 현재 보수공사중이다. 중앙교회는 5·18 당시 목사·재야인사들이 모여 시민투쟁을 결의했던 곳이다. 일제 패망 뒤 일인들이 떠나면서 건물 지하에 보물을 숨겨뒀다는 설이 나돌기도 한 건물이다. 고층 상가건물이 지어지고 있는 옛 목포극장 옆으로 들면 패션·쇼핑의 중심가인 젊음의 거리다.
 
쉬엄쉬엄 6km 걷다보면 어느새 목포역
 
Untitled-4 copy.jpg수문통으로 간다. 오래전 바닷물이 이곳까지 들어와 수문을 설치했던 곳이다. 일제땐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옛 조선인 거리가 이어졌었다. 목포 청년운동의 산실이던 신안군청 옆 목포청년회관(1929년 건립)과 군청 안의 옛 무안감리서 건물을 보고 북교초등학교로 향한다. 1897년 개교한 유서깊은 교육기관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가수 이난영이 이 학교를 거쳤다. 학교 앞 길 건너로 우회전해 150m쯤 걸으면 왼쪽 언덕 기슭에 목포 최초의 교회 양동교회가 있다. 1897년 교회가 창립됐고 현 건물은 1910년에 지었다. 건물 왼쪽 창문 아치형 돌에 ‘대한융희사년’(大韓隆熙四年)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유달파크맨션 옆길을 끼고 오르면 왼쪽에 ‘목포의 눈물’을 부른 대중가수 이난영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의 생가터다.
 
한약방과 전당포를 지나니 ‘체 내립니다’라는 간판을 내건 가정집이 보인다. 10여년 전까지도 양동 대성쌍샘길 일대엔 민간요법으로 식체·급체를 낫게 해주는 집과 한약방, 전당포가 많았다고 한다. 어린시절 엄마 손 잡고 이곳에 들른 적이 있다는 곽순임(52) 목포역사길라잡이 대표가 말했다.
 
“목포는 말입니다잉. 개발과 발전이 늦어분 게, 그게 덕이랑게요. 딴디서 온 분들이 보곤 으째 요런 것이 고대로 남아있을까 하고 놀래부요.”  
 
농협 대성지점 앞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틀면 정명여중고 담을 따라 정문쪽으로 내려간다. 100여년 역사를 지닌 정명학교에도 옛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중학교 도서관으로 쓰는 건물 천장에선 1990년 ‘목포 4.8만세운동’ 참가자와 투옥자·사망자 명단이 발견되기도 했다. 정명여중고 학생들은 해마다 유달산축제(4월) 때 만세운동 재현행사를 벌인다.
 
학교를 나와 왼쪽으로 10여분 걸으면 창평동 중앙공설시장에 이른다. 35년째 실과 단추, 자크만을 팔고 있다는 제일실집 주인 송수진(59)씨를 만났다.
 
“실, 단추 집은 목포에 딱 두 집뿐이랑게. 장사 잘될 때도 두 집이고, 안될 때도 두 집 고대로여.” 송씨가 35년 손때 묻은 주판을 매만지며 덧붙였다. “이제 이 짓두 못허것어라. 단골로 오던 이도 안와부링게.”
 
발걸음도 느려지고 출출해질 시간. 제일실집 앞 중앙식료시장(먹자골목)으로 들어섰다. 순대집·떡집·홍어가게·생선가게들이 이어진다. 간을 푸짐히 썰어주는 선지순대 한 접시가 5천원. 여기서 목포역까지는 10분 거리다. 어느새 6㎞ 가까이 걸었다.
 

◈ 골목여행 쪽지
서울 용산역에서 목포역까지 케이티엑스(KTX)가 새벽 5시20분부터 밤 9시30분까지 하루 아홉 차례 운행한다. 월~목요일 4만500원, 주말 4만3300원. 3시간10분 걸린다. 새마을호 하루 2차례(오전 8시55분, 오후 5시05분) 운행. 월~목 3만6600원, 주말 3만8300원. 4시간50분 걸린다. 무궁화호 하루 6차례(오전 7시5분부터 밤 10시5분까지), 월~목 2만4600원, 주말 2만5700원. 5시간10분.
 
목포문화원에서 매달 셋쨋주 토요일, 목포 원도심을 걸으며 근대문화유산을 둘러보는 ‘목포 골목길 답사’를 진행한다. 1시간30분~2시간 걸린다. (061)244-0044. 시민단체 ‘문화역사 길라잡이’에서도 목포 근대문화유산 탐방행사를 준비중이다. 곽순임 대표 016-871-8885.


목포 KYC 남도역사문화사업단도 매주 토요일 2시 목포역에 모여 목포의 옛 일본인거리와 조선인거리 골목 투어를 무료로 진행한다. (061)242-1282
목포=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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