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연탄 공장, 양조장…, 옛 풍물 느릿느릿 길따라 삶따라

  경북 의성읍 도심걷기 여행
 장날엔 기름집·대장간·솜집·뻥튀기집…, ‘북적’
 소금 안주에 막걸리 한 사발 “다 이래 묵어예”

 
문소루-1.jpg

 “의성읍 서쪽을 보하는 산(비보산)이 구봉산이라. 아홉번 ‘승기’가 있다꼬, 육상선수·씨름선수 벨벨 운동선수들이 다 와가 뛰고 합숙훈련하는 산이요.”(의성 향토사연구가 김종우씨·71)
 경북 의성군 의성읍. 남대천 물길 건너에 남북으로 길게 구봉산이 뻗어 있다. 아담한 언덕같은 봉우리 아홉개가 이어진다. 구봉산은 본디 구성산이었으나 일제 때 이름이 바뀌었다. 구봉산 북쪽 끝 아홉 번째 봉우리에 아름다운 누각 문소루가 앉아 있다.
 
 구비구비 아홉 봉우리, 별별 선수들이 합숙훈련하는 이유
 
 문소(聞韶)란 의성의 신라 때 이름이다. 고려 태조 12년, 후백제 견훤의 공격을 막다 전사한 홍술 장군의 충절을 기려 지명을 ‘의성’(의로운 성)으로 바꿨다고 한다. 신라 이전엔 이 지역에 부족국가인 조문국이 있었다. 볼거리 많고 이야깃거리 푸짐한 의성읍내 골목길을 걷는다. 먼저 문소루에 올라 의성읍내를 내려다본 뒤, 남대천과 지류인 아사천을 거치며 읍내 거리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한 바퀴 돈다.
 문소루 밑 산길 들머리에 차를 대고 벚나무길을 걸어오른다. 문소루는 본디 옛 현청(현 경찰서 옆) 자리에 있던 관아 문루였다. 한국전쟁 때 불타 지금의 자리에 복원(1983년)한 것이다. 고려 중엽 처음 지어진 문소루는 한때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안동 영호루와 함께 조선시대 ‘영남 4대 누’로 일컬어지던 누각이다. 포은 정몽주도, 학봉 김성일도 지역 오가는 길에 들러 문소루에 올랐다고 한다. 이들이 읊은 시를 새긴 시판이 누각에 걸려 있다. 정몽주의 시판은, 쇠락해가는 고려의 국운을 걱정하며 쓴 시를 새긴 것이다. 누에 오르면 남대천 물줄기를 따라 발달한 의성읍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육상·씨름 선수가 아니더라도, 문소루 주변과 구봉산 능선길을 따라 걷고 뛰는 주민들이 줄을 잇는다.
 누각 부근에 의성 현령들의 행적을 기린 선정비·거사비 13기를 모아놓았다. 김종우(전 의성문화원장)씨가 한 빗돌(현령 김후진화 휼민선정거사비)을 가리켰다. “이 거사비가 서포 김만중의 아들 김진화 비입니다. 현령으로 재직할 당시 부친의 문집인 <서포집>을 여기서 간행했죠.”
 산을 내려가 의성교 건너 남대천 물길을 따라 걷는다. 물길 상류쪽으로, 막 초록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구봉산 봉우리들이 굽이치며 매혹적인 곡선미를 드러낸다. 고물상 지나 연탄공장을 만난다. 의성에 있던 연탄공장 3곳 중 살아남은 1곳이다. 물 오른 수양버들 우거진 폐공장 앞에서 만난 한 어르신이 말했다. “여서 저까지가 다 연탄공장이었는기라. 다 부도나 가 문 닫아뿌고 이기 한나만 죽다말고 살아난 기라.” 서민 살림살이가 어려워진 덕에 겨우 살아난 연탄공장 뒤쪽엔 장애인연합회 건물이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채 겨우 버티고 서 있다.
 
 32년째 대 이은 장작불 소머리곰탕 지글지글
 
 일제강점기 번성했던 장터(구장터)였다는 성문마을 거쳐, 낡은 상점 건물(옛 8·15기름방) 앞에서 좌회전해 굴다리 지나 시내로 들어간다. “안 되는 구멍가게 10년째 붙들고 있다”는 사거리 담배가게 거쳐 지적공사 지나 옛 맛이 느껴지는 향토민속사료관 건물을 만난다. 일제 때 재판소(법원) 건물이다. 남대천 지류인 아사천 물길을 건넌다. 상류인 왼쪽은 복개돼 주차장이 됐다. 조선시대 의성 관아 건물들은 이 하천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나뉘어 배치돼 있었다고 한다. 아사천 물은 구봉산 밑에서 남대천과 만나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무너지다 남은 낡은 한옥 옆쪽에서 600년 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기다린다. 15m가 넘는 밑둥 줄기 절반 이상이 수목 보호용 보완재로 메워진 나무 밑에선, 600번째 봄이 밀어올린 어린 풀꽃들이 일어서느라 재잘재잘 야단이다. 
 
시장-1.jpg

 6월 말부터 8월까지 마늘장이 열리는 마늘시장으로 간다. 일부 상인들이 냉동마늘을 꺼내 손질하는 모습이 보인다. 의성명품마늘영농조합법인 대표 김욱진씨는 “생마늘만 해갖곤 몬살지예. 건조마늘·분말마늘도 상품화했고 약초를 곁들인 마늘비누도 내놨심더.”
 의성전통시장은 2·7일에 열리는 재래시장이다. 금성방앗간 앞 골목길엔 소금포대·쌀포대로 감싸인 낡은 의자 9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장날 참기름 짜고, 고춧가루 빻고, 미숫가루 장만하러 오는 어르신들이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대기소다. 인터넷 지도 위성 사진에도 어렴풋이 나타나는 의자들이다.
 장날이면 기름집·뻥튀기집도 붐비고, 닭발구이집도 북적인다. 아무리 붐벼도 벌이가 예전같지는 않다는 게 상인들의 중론이다. “이래 한 지 한 사십년 됐는갑네. 인자 먹을기 많아노니 강냉일 누가 찾나?”(뻥튀기집 권오중씨·71) 권씨는 그래도 “농사짓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했다. “농사 지봤자, 수매 끝나모 바로 돈 꾸러 다닌다카데요. 비료값 농약대 값고 나모 남는기 또 빚인기라.”
 시장 명물이었던 닭발구이집도 몇년새 8곳에서 3곳으로 줄었다. 지붕을 해 덮었어도, 기름집·대장간·문짝집·솜트는집 등 시장 뒷골목 분위기는 수십년전 옛 장터를 닮았다. 장날이면 남선옥에서, 32년째 대를 이어 장작불에 끓여내는 소머리곰탕을 맛볼 수 있다.
 
 “전국에 남은 유일한 ‘풀 세트’ 성냥공장”
 
 의성향교를 향해 걷는다. 낡아가고 무너져가는 옛 한옥들이 눈에 띈다. 향교로 들기 전에 성냥공장으로 들어간다. ‘성냥공장’ 하면 ‘인천 성냥공장’이 떠오르지만 이미 다 사라졌다. 이곳 의성 성광성냥 공장은 “전국에 남은 유일한 ‘풀 세트’ 성냥공장”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뭐냐카모 아름드리 뽀푸라 나무를 잘라 성냥까치를 맨들고, 유황 묻히고, 성냥곽까지 인쇄해가 포장까지 다 해뿌는 공장은 여뿐이라예.”(성광성냥 대표 손진국씨·75) 다른 지역에도 한두 곳 성냥공장 이름을 단 공장이 있으나, 수입한 성냥알을 포장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성냥-1.jpg

 손씨는 1954년 창업 당시 18살에 사원으로 들어와 일을 배운 뒤, 30년전 대표 자리에 오른 외길 ‘성냥공장 아저씨’다. 60~70년대엔 공장 직원이 160여명에 이를 정도로 성가를 누렸으나, ‘불’이 흔해지면서 사양길로 들어선 지금은 일부 업소들에서 들어오는 주문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거대한 기계가 천천히 돌아가며 보여주는, 꼿꼿한 자세로 행진하는 붉은투구·흰투구 병정들의 행렬 모습이 이채롭다. 성냥가치 하나엔 9가지의 재료가 들어간다고 한다.
 손씨는 “망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국내 유일한 성냥공장을 지킨다는 자부심 하나로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마이들 와가 성냥 만드는 모습 보고 가라 카는기 내가 바라는 깁니더. 미리 연락하고 방문하시모 지가 다 안내하고 설명해드릴끼라예.” 토·일요일엔 공장이 쉰다.
 의성향교에선 대성전과 명륜당, 명륜당으로 드는 문인 광풍루, 동재·서재 등 조선 중기 양식의 건물을 볼 수 있다. ‘현령 장현광 거사비’는 주변 길가에 있던 것을 옮겨놓은 것이다. 향교 뒤 동산(東山) 자락엔 벌떼 소리가 요란하다. 향교 주변에서 태어나 살고 있다는 김수호(59·양봉업)씨는 “대성전 아래 산수유나무 옆으로 전사청 건물이 있었는데, 멀쩡한 건물을 철거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김씨는 “양봉 500~600통을 치며” 간이주택에서 사는 서예가다.
 100년 역사를 지녔다는 의성교회 밑엔 해주 오씨 입향시조를 기리는 금운정이 있다. 옛 약전골목에 남은, 40년 된 안동이발관 옆의 일제 때 가옥을 보고, 아사천 옆에서 의성탁주 합동제조장을 만난다. 일제강점기부터 있어온 양조장인데, 지금은 “주류의 지역제한이 풀리 가 사업이 옳게 안되이께네” 근근이 버티는 수준이다.
   
 너울너울 봄햇살 따라 밭둑길 골목길 휘적휘적
 
 “함 드시소. 안주는 소금뿌이라예. 다 이래 묵으요.” 대표 장지환씨가 따라주는 진한 ‘구봉산 생막걸리’를 한 잔 맛보고 일어나, 의성노인회 건물 뒤 아사천 물가에 선 ‘양태훈 선생 공덕비’를 만난다. 고 양태훈 선생은 앞서 들렀던 성광성냥을 창업한 분. 수시로 발전기금을 내놓고, 노인회관도 세워 지역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충효당 현판. 10세 필.921O8033-1.jpg 봄 햇살 따사로운 밭둑길·골목길을 지나 충효사에 이른다. 임진왜란 때 7년간 전투에 참가해 당시 상황을 매일 기록한 <정만록>(보물 880호)을 지은 이탁영이 뒷날 모친을 봉양하며 살던 곳이라고 한다. 충효당 마루 위에 걸린 ‘13대손 종해 10세 서’라 쓰인 ‘충효당’ 현판이 눈길을 끈다.
 큰길 건너 두충나무숲 옆으로 들어 태평양지아파트 앞으로 내려간다. 규모 있는 옛 한옥 ‘의성 김씨 종친회관’을 보고 의성고교·의성교회 지나 대도빌라 옆, 2층짜리 일제가옥 흔적을 만난다. 아래층은 개조해 소주방이 됐지만 2층 목재 가옥은 옛날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의성군청 앞을 지나면 100여년 역사의 의성초등학교다. 교문과 안내소 사이 비좁은 공간에 빗돌 하나가 우뚝 서 있다. ‘공양탑’이라 쓰인 이 빗돌은 “의성초교 설립(1906년) 당시 비용을 십시일반으로 모은 것을 기리는 탑”이다. 김종우씨는 공양탑이 설명판 하나 없이 방치되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축협 옆에 일제강점기 건물인 엽연초조합 건물이 있과, 의성역 옆 명품모텔 앞에는 의성역 역무원들이 머물던 일제강점기 사택이 1동 있다. 두 건물 모두 안팎의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사택엔 지금도 50~60년대 역장을 지낸 분의 부인(정성순·84)이 살고 있다.
 90년대까지 삽겹살집 10여곳이 몰려 인기를 끌다 사라져갔다는 시외버스터미널 앞길을 지나 북원사거리 만나 다시 의성교로 향한다. ‘북원’이란 조선시대 관리들이 묵어가던 원이 있던 데서 나온 이름이다. 김종우씨는 “50년대까지도 주유소 부근에 누각 형태의 건물이 남아 있었다”고 기억했다. 북원사거리는 본디 삼거리였다. 삼거리 주유소, 삼거리식당 등 삼거리 상호를 단 집들이 많다. 약 8㎞를 걸어 다시 구봉산 끝머리로 왔다.
 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 여행쪽지
 
 ⊙ 가는 길/수도권에서 영동고속도로 타고 원주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대구 쪽으로 내려간다. 남안동나들목에서 나가 5번 국도 따라 의성읍내로 간다. 의성나들목에서 나가 5번 국도 타고 가도 된다.
 ⊙ 먹을 곳/복 전문식당 일산복집 (054)834-4948, 갈치찜·해물찜을 내는 해성식당 (054)832-7080.
 ⊙ 여행 정보/국내 유일의 성냥공장 성광성냥공장에선 방문객들에게 공장시설을 안내하며 성냥 제조과정을 설명해준다. 의성군청 새마을문화과 (054)830-6096, 의성문화원 (054)834-5048, 성광성냥공장 (054)834-2440, 문흥 작은도서관(향토사료관·조문국 연구원) 011-820-4010.
  이병학 기자

Leave Comments


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