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엔 솔바람 소리 너럭바위엔 피리 소리 길따라 삶따라

함양 화림동계곡 ‘선비문화 탐방로’…물길 따라 거니는 정자 탐방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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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양 화림동계곡(금천)의 농월정 앞 물길과 너럭바위. 농월정은 2003년에 불탄 것을 최근 복원했다.
‘좌 안동, 우 함양’이란 말이 있다. 출중한 선비를 많이 배출한 대표적인 고장으로, 낙동강 동쪽(한양에서 볼 때 왼쪽)에선 안동, 서쪽에선 함양을 꼽는다는 뜻이다. 안동의 퇴계 이황과 서애 유성룡, 함양의 일두 정여창, 탁영 김일손 등이 대표적이다. 지리산 북동쪽 자락 경호강 상류 함양 땅 곳곳에 선비들 발자취가 뚜렷하다. 배우고 가르치며 토론하는 한편, 노닐고 마시며 읊던 흔적들이다. 함양 북부 안의면 일대 물길의 정자들을 찾아간다. 연초록 새순들 물결치는 강변길을 걸으며, 푸르고 맑은 바람 쐬는 정자 탐방 여행이다.

남덕유산(1508m)에서 흘러내려와 함양 서상면·서하면을 거쳐 안의면을 지나는 물줄기가 금천(남강천)이다.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경호강의 지류다. 선인들이 일찍이 ‘안음(안의현의 옛이름) 삼동’으로 불렀던, 풍광 좋은 세 골짜기(화림동·심진동·원학동) 중 하나인 화림동 계곡이 이곳이다. 거연정·동호정·농월정 등 함양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정자들이 화림동 물줄기에 다 있다. 옛 선비들이 혼탁한 세상을 등지고 내려와 은거하며 소일하던 곳들이다.

안의면소재지 갯버들(물버들) 숲 옆에 늘어선 선정비 무리.
안의면소재지 갯버들(물버들) 숲 옆에 늘어선 선정비 무리.
정자가 아름답다는 말은 주변 경관이 수려하다는 말과 같다. 정자 들어선 곳마다 왜 이곳에 정자를 지었는지 대번에 알아챌 수 있는 멋진 바위 경관들이 펼쳐진다. 조선시대엔 이들을 ‘8담 8정’(여덟 곳의 못과 정자)이라 일컬었다.

서하면 봉전리 거연정에서 안의면 농월정을 거쳐 안의면 소재지의 광풍루까지, 물길 따라 10㎞ 구간에 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나무데크길·계단길과 간단한 설명을 곁들인 이정표도 설치돼 있어 어렵지 않게 탐방을 누릴 수 있다. 이른바 ‘선비문화 탐방로’다. 거연정에서 출발해 농월정까지 6㎞ 구간의 경관이 좋다. 2시간 걸린다. 봉전리 주변 이면도로나 선비문화광장(옛 봉전초교) 등에 차를 댈 수 있다. 탐방을 마친 뒤엔 30분 간격으로 오가는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 된다.

거연정은 물길 가운데 솟은 암반 위에 올라앉아 있다. 찻길에서 아름드리 느티나무들 늘어선 물가로 내려서면, 물길 건너편에 아담한 정자가 보인다. 강변과 정자 쪽 암반 사이의 물길은 좁고 깊고 푸르다. 옛사람들은 이 좁은 물길을 배를 타고 건넜다지만, 지금은 나무다리가 놓여 있다.

‘선비문화 탐방로’ 시작점에 있는 거연정.
‘선비문화 탐방로’ 시작점에 있는 거연정.
거연정은 조선 중기의 선비 전시서가 억새를 엮어 초막을 짓고 머물던 데서 비롯했다. 그는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에 굴복하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내려와 서원(서산서원)과 억새집을 짓고 후학을 길렀다. 서원철폐령으로 서산서원이 훼철(1868년)되자, 후손들이 1872년 억새집 자리에 서원의 목재들을 이용해 지은 누각이 거연정이다. 자연암반의 높이에 맞게 다듬어 세운 다릿발(누하주, 누각을 받친 기둥)들이 볼만하다. 물길 건너편 바위벽엔 ‘방수천’(訪隨川)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송나라 시인 정호의 시구 ‘방화수류과전천’(傍花隨柳過前川)에서 따온 말로, ‘꽃을 찾고 버들을 좇아 물길을 노닌다’는 뜻이다.

거연정~농월정 6㎞ 강변길
빼어난 경관마다 정자 우뚝
동호정 앞 너럭바위 차일암엔 
옛 선비 풍류 즐긴 흔적 뚜렷

정자에 앉아 주변을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좀 떨어져서 정자와 물줄기 경관을 감상하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다. 거연정이 그렇다. 정자에서 떨어진 바위 자락에 앉거나, 돌아나와 물길에 걸린 다리(봉전교) 위에서 감상하는 게 좀 더 운치 있다.

봉전교를 사이에 두고 군자정도 있다. 여기서 ‘군자’는 일두 정여창을 가리킨다. 정여창이 봉전마을의 처가를 방문할 때 찾아와 노닐던 바위 위에, 정여창을 흠모하던 전시서의 후손이 정여창 사후 300년 뒤인 1802년 세운 정자다.

일두 정여창을 기려 세운 군자정.
일두 정여창을 기려 세운 군자정.
물소리 자욱한 물길 건너편 바위벽엔 ‘영귀대’란 글씨가 보인다. ‘영귀’(노래를 부르며 돌아온다는 뜻)는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이상향’을 설명하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선인들은 정자에 앉거나, 바위 위에 올라 세상 시름 잊게 하는 물소리에 젖어들었을 터이다. 영귀대 옆에 보이는 정자는 개인이 최근 지은 것이다.

봉전교 건너 왼쪽으로 물길 따라 이어진 나무데크길을 걷는다. 산길 좌우로는 온통 연초록 새순들의 숲이 우거졌다. 숲에선 새소리·바람소리가, 왼쪽 물길에선 짙은 물소리가 번갈아가며 다가와 발길을 이끌어준다. 물빛은 그리 깨끗하지 않아 아쉽지만, 강변엔 철쭉 무리가 눈부시고 길섶엔 제비꽃 등 야생화들이 지천이다.

선비문화탐방로의 데크길.
선비문화탐방로의 데크길.
탐방로는 숲길을 벗어나 흰 꽃들로 화사하게 덮인 사과나무밭과 인삼밭을 지난다. 탐방로 화살표가 사과나무밭길이 아닌 위쪽 시멘트길을 가리킨다. 본디 사과나무밭길을 탐방로로 이용했으나, 가을이면 오며 가며 사과를 따가는 탐방객들 때문에 길을 바꿨다고 한다.

금천 강변길은 육십령을 넘어 전북 장수로 이어진다. 이춘철 함양군 해설사는 “과거 보러 가던 선비들은 금천(화림동 계곡) 물길에서 머물며 쉬다가, 육십령을 넘어 장수·전주 거쳐 한양으로 향했다”고 말했다. 멋진 정자와 바위 자락은 옛 선비들이 고개를 넘기 전에 쉬며 재충전하던 장소였던 셈이다.

물길 건너 동호정이 보인다.
물길 건너 동호정이 보인다.
탐방로의 나무 난간이 밧줄 난간으로 바뀌고 물길로 내려서는 계단이 나오면 동호정에 닿은 것이다. 건너편 물가의 멋진 소나무들을 거느린 2층 누각이 동호정이다. 흥미로운 게 돌다리를 건너 올라서게 되는 ‘차일암’이란 너럭바위다. 물살에 닳고 파인 너럭바위 곳곳에 ‘금적암’ ‘영가대’ 등의 글씨가 보인다. 금적암은 가야금·피리를 연주하던 장소, 영가대는 노래 부르고 시를 읊던 장소를 가리킨다. 옛 선비들이 노닐던 흔적이다. 인위적으로 파낸 듯한 지름 1m쯤의 둥근 웅덩이도 있다.

이춘철 해설사는 “이곳에 술을 부어놓고 둘러앉아, 놀이를 하며 번갈아 떠 마시던 장소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50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다는 이 너럭바위에서 얼마나 호화로운 음주가무가 펼쳐졌던 걸까. 한편으론, 양반들의 음풍농월을 위해 바쳐졌을 수많은 서민들의 고통도 짚어보게 하는 장소다.

동호정은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 선조를 업고 뛰었다는 동호 장만리를 기려 후손이 1895년 지은 정자다. 선조는 장만리에게 ‘영세불망인’(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람) 호칭을 부여하고, 충신 정려를 내렸다고 한다. 이 정려각이 황산마을 도로변에 있다. 동호정은 2층 누각 안의 단청과 조각이 매우 아름답고 다채로워 감상할 만하다. 공자의 일대기를 묘사한 그림도 볼 수 있다. 누를 받치고 있는 다듬지 않은 아름드리 기둥들, 2층으로 오르는 통나무 계단도 이채롭다.

동호정은 내부 장식과 단청이 아름답다.
동호정은 내부 장식과 단청이 아름답다.

동호정 옆 사과나무밭에서 만난, ‘사과꽃 따기’ 작업중인 주민.
동호정 옆 사과나무밭에서 만난, ‘사과꽃 따기’ 작업중인 주민.
다시 돌다리 건너서 물길 따라 숲길·논길을 한동안 걸으면, 호성마을 지나 경모정과 남천정이 차례로 나온다. 최근에 지은 정자라 볼 것은 없다. 남천정에서 다리 건너 둑길 따라 1㎞쯤 걸으면 황석산 자락 황암사에 이른다.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에서 왜적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다 희생된 수백명의 주민·의병·관군을 기려 세운 사당이다.

찻길 따라 서하교 건너, 왼쪽의 옛 도로를 따라 한 굽이 돌면 물길로 내려서는 입구가 있다. 다시 굽이치는 물줄기 따라 광대한 너럭바위 무리가 펼쳐진다. 계곡 자체가 거대한 암반이다.

농월정 상류 쪽 경관.
농월정 상류 쪽 경관.

안의면소재지 광풍루 앞 금천 건너편의 갯버들(물버들)숲. 강을 따라 150m쯤 이어진다.
안의면소재지 광풍루 앞 금천 건너편의 갯버들(물버들)숲. 강을 따라 150m쯤 이어진다.
바윗길을 걸어 내려가면, 물길 경치 감상의 정점에 정자가 나타난다. 농월정이다. 2003년에 불타, 최근 다시 지어진 2층 누각이다. 본디 선조 때 예조참판을 지낸 지족당 박명부가 벼슬에서 물러나 지었던(1637년) 것이다. 정자 주변 물길의 바위들엔 화림동·월연암 등 지역과 장소를 뜻하는 글씨들과, 노닐다 간 선비들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여기까지 6㎞. 탐방로는 안의면 소재지의 광풍루까지 이어져 있지만, 농월정에서 걷기를 마치고 나머지는 차로 둘러보는 이들이 많다.

함양/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함양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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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곳 안의면은 ‘안의갈비’로 이름난 고장이다. 면소재지에 옛날금호식당 등 한우 갈비탕·갈비찜을 내는 집이 4~5집 있다. 함양읍 상림 앞 음식점거리에는 다양한 전문음식점들이 모여 있다.예다믄의 한정식, 늘봄가든의 오곡밥정식, 옥연가의 연잎밥상 등.

묵을 곳 함양읍에 유일한 호텔 라온호텔이 있다. 읍내 곳곳에 모텔 7~8곳이 흩어져 있다. 안의면 쪽엔 용추계곡 들머리에 펜션이 몇 곳 있다. 지곡면 개평마을의 ‘일두 정여창 고택’ 등에서도 묵을 수 있다.

주변 볼거리 안의면소재지의 광풍루·허삼둘가옥, 안의향교, ‘효자 백정비’(효자백정조귀천지려). 용추계곡의 용추폭포와 연암 물레방아공원 부근 물가의 정자 심원정, 지곡면의 개평마을(일두 정여창 고택, 솔송주 체험 등)과 수동면의 남계서원, 함양읍내의 학사루와 상림 숲탐방 등.

여행 문의 함양군청 (055)960-5555, 상림 종합관광안내소 (055)960-5756, 일두 홍보관 (055)964-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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