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내린 풍경의 '바다', '한계'넘은 산길 물길 길따라 삶따라

img_01.jpg

강원도 내륙 깊숙이 자리한 인제.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고장이다. 원시림과 청정계곡 등 깨끗한 자연환경이 자랑거리다. 인제군 공무원이나 주민들이 지역 자랑을 할 때 ‘하늘 내린’  ‘청정 웰빙’ 등 수식어를 앞에 놓는 이유다. 좋은 경치마다 선인들의 발자취도 즐비하다. 깊어가는 가을, 청정 인제의 산길·물길과 문화유적들을 두루 감상하는 드라이브를 즐겨볼 만하다.

 
인제를 대표적인 볼거리 ‘인제 8경’ 중 세 경치(합강정·대승폭포·내린천)를 거치는 66㎞ 코스를 차로 돌았다. 인제읍~합강정~한계리 황장금표~장수대 한계사·대승폭포~한계령~필례약수~하추리 계곡~내린천~인제읍. 차 몰고 가다 멈추어 산길도 오르고 물길도 거닐며 경치와 유적을 둘러보는 여정이다. 차 마시고 점심 먹는 시간까지 7~8시간. 취향에 따라 일부 일정을 생략하며 시간을 조정하시길. 이 코스의 올가을 단풍 절정기는 10월 중순~25일 무렵이 될 전망이다.
 

img_02.jpg

 
인제읍~합강정과 합강미륵~한계리 치맛골 절터와 황장금표~장수대·한계사지·대승폭포~한계령·설악루(29㎞)

 
인제읍에서 출발해 한계령 쪽으로 오른다. 양양으로 넘어가는 고개 한계령은 몇년 전 속초로 곧바로 통하는 미시령 터널이 뚫린 뒤로, 차량 통행이 부쩍 줄어 비교적 한적한 길이 됐다. 먼저 인제읍내 번지점프대 지나 합강정휴게소에 차를 대고 합강정을 만난다. 합강이란, 설악산에서 내려오는 한계천(북천)과 내린천 물길이 만나는 것을 말한다. 합강 아래쪽부터는 소양강으로 불린다. 1676년 처음 현 위치 아래쪽 물가에 합강정이란 정자를 세운 뒤 도에서 주관하는 큰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몇차례 중수와 소실·이전을 거쳐 최근 현위치에 다시 지었다. 누각 앞엔 300여년전 한 목재상이 현몽을 받아 물속에서 건져낸 돌을 다듬어 만들어 세웠다는, 코도 입도 희미해진 미륵불(합강미륵)이 서 있다. 옆의 제단은 제사를 받지 못하는 신들에게 별도로 제사(별여제) 지내던 ‘강원도 중앙단’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

 
코스모스 만발한 국도 따라 원통리 지나 한계삼거리로 간다. 한계령 길과 미시령·진부령 길이 갈리는 삼거리다. 한계령 길로 차를 몬다. 잠시 가면 왼쪽에 호두나무집 식당이 보인다. 호두나무집 뒤에 300년 된 아름드리 돌배나무가 눈길을 끈다. “먹어볼 것도 없는 자잘한 돌배들”이라지만, 익어가는 배들을 무수히 달고 섰다. 오래 전 집주인 여동생이 앓아눕자 밤마다 돌배나무가 울었는데, 굿을 해도 소용없다가 죽은 뒤에 울음을 그쳤다는 얘기가 전한다. 도로변 급경사길을 100여m 걸어오르면 마을에서 봄·가을로 제를 올리는 아담한 산신당(한계2리 산제당)을 볼 수 있다.(차를 갓길 없는 국도변에 대야 하므로 조심!)

 
44번 국도 오른쪽 한계천 물길엔 2006년 강원 중북부 일대를 휩쓸었던 대홍수 피해 흔적이 역력하다. 국도 한계1교 앞에서 조선 중기 황장금표(황장목 즉 금강소나무를 나라에서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의 벌목을 금한다는 내용을 새긴 표석)와 옛 절터를 보기 위해 왼쪽 치마골(큰절골) 산길로 오른다. 치마골관광농원 옆에 차를 세워두고 널찍한 흙길 따라 10분 가량 오르면 왼쪽에 오래된 석축 위의 밭 너머 산자락에 큼직한 돌로 쌓은 또다른 석축이 보인다. 앞쪽이 트인 장방형 석축 앞에, 이 주변이 절터(치마골사지·운흥사지)임을 알리는 불좌대 등 석물들이 흩어져 있다. 정면 석축 위쪽 큼직한 돌에, 황장목 벌목을 금하는 산임을 알리는 ‘황장금표’(황장목 벌목을 금하는 산이다. 서쪽으로 옛 한계에서부터 동쪽 이십리까지가 경계이다)가 새겨져 있다(조선 중기). 곳곳에 야생동물을 퇴치하기 위해 설치한 전기선 조심.

 
돌아나와, 다시 차를 몰아 옥녀탕을 찾는다. 선녀가 내려와 목욕했다는 옥녀탕은 4년전 대홍수의 직격탄을 맞았다. 옥같이 맑고 깊던 소는 토사에 묻히고, 찾는 이가 없어 휴게소도 주차장도 텅 비었다. 옥녀탕 위 안산(1430m) 자락엔 고려 초기(또는 통일신라) 석성인 한계산성이 있으나 길이 매우 험해 출입을 막고 있다.

 
석이버섯이 많았다는 하늘벽을 보고 장수대에 도착한다. 한계령길 휴게소 겸 남설악 등산로 들머리 중 한 곳으로, 국내 3대 폭포로 꼽히는 대승폭포 아래쪽, 신라 때 절터 한계사지 옆이다. 장수대란 명칭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육이오 때 설악전투 승리를 기념하고, 희생된 장병들을 기리는 뜻에서 1959년, 당시 3군단장(오덕준)이 한계천 물가에 건립했다는 단층 한옥의 이름이다.

 
철문을 열고 한계사 터로 걸어오른다. 널찍한 숲길을 잠시 걸으면 무너져가는 옛 산장 건물 위쪽에 절터가 나타난다. 두 개의 아담한 탑과 무너진 불좌대, 그리고 다양한 무늬가 조각된 무수한 석물들이 흩어진 절터의 주인은 잠자리·메뚜기·사마귀 들이다. 두 탑은 절터와 바로 위 산자락에 각각 세워져 있다. 한계사는 백담사의 전신이 되는 사찰이다. 자장율사가 647년 창건한 뒤 불에 타 790년 아래 30리 지점(황장금표 표석이 있는 곳)에 절을 옮겨 운흥사로 개명했다고 한다. 운흥사도 고려 때(985년) 불타 주변 여러 곳으로 절을 옮기며 개명을 거친 뒤 조선 세조 때 현재의 백담사로 옮기게 됐다.

 
 
img_04.jpg

 
설악산국립공원 장수대분소 옆 소나무숲길이 대승폭포·대승령 가는 길이다. 대승폭포까지는 왕복 1시간30분(약 1㎞). 가파른 나무계단길을 40여분 올라 전망대에 서면, 건너편 절벽에 걸린 대형 폭포(높이 88m)가 모습을 드러낸다. 금강산 구룡폭포, 개성의 박연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명폭으로 꼽히지만, 수량이 적은 때여서 장관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폭포 전망대에 서면 한계천 물줄기와 장수대·한계사터·하늘벽 그리고 가리봉·주걱봉·삼형제봉 산줄기가 한눈에 잡힌다.

전망대 옆 바위 바닥엔 ‘구천은하(九天銀河)’ 대형 글씨가 새겨져 있다. 조선의 명필 양사언의 글씨로 전하는데, ‘구천은하’란 이백의 시 ‘여산폭포를 바라보며’의 한 구절인 ‘의시은하락구천’(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져내리는 듯하구나)에서 따온 말이다. 개성 박연폭포 앞 용바위, 금강산 구룡폭포 앞 바위에도 이 시 일부를 인용한 대형 글씨가 있다. 설악산국립공원관리소 장수대분소 관리인은 “올가을 한계령 일대 단풍 절정기는 10월 중순부터 20일 전후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장수대에서 8㎞쯤 굽잇길을 오르면, 동해바다 쪽 전망이 시원한 한계령 정상(950m)이다. 인제군 북면과 양양군 서면의 서면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다. 기암괴석이 늘어선 봉우리들과 굽이치는 찻길이 그림같다. 한계령휴게소 건물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것이다. 한계령 명칭과 관련해 최근 논란이 있다. 양양군 쪽이 옛 기록을 내세워 한계령 대신 ‘오색령’으로 쓰자는 ‘옛 이름 찾기 운동’을 펼치자, 인제군 쪽은 ‘한계령 이름 지키기 운동’으로 맞대응에 나섰다. 한계령(옛 이름 소등라령·필여령·오색령)은, 인제 쪽의 한계리와 한계산에서 따와 정착된 이름이다.

 
img_05.jpg

 
‘백팔계단’을 따라 설악산 등산로로 잠깐 오르면, 한계령 도로를 건설한 군인들이 1971년 세운 시멘트 정자 설악루(현재 보수공사 중)와 도로 공사 희생 장병 위령탑이 있다. 설악루 현판은 당시 지휘관 김재규가 썼다고 하는데, 설악루 뒤쪽 ‘설악루 표석’엔 ‘…위대한 영도자의 휘호를 받다’(1971년)라는 글이 보여,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로 보는 게 옳을 듯하다. 이런 저런 논란 속에서도, 10월 중순이면 한계령 주변 산들은 온통 단풍으로 불타오르는 장관을 보여줄 전망이다.


 
⊙ 한계령 휴게소~현리 방향 갈림길~필례약수~군량밭~하추계곡~용화사 앞 소나무~내린천~노루목산장~합강교(37㎞)
 


img_06.jpg

 
한계령을 넘어 양양 쪽으로 500m쯤 가다 현리 쪽으로 우회전하면 필례약수에 이르는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굽이와 경사가 심하므로 저단 기어를 사용해 천천히 내려가야 한다. 필례약수까지 5.4㎞. 단풍이 한창 물들 때면 매우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가 된다. 특히 큰길에서 필례약수로 오르는 짤막한 들머리길엔 심어놓은 단풍나무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송어회, 산채비빔밥을 내는 은비령(필례식당)이란 식당이 있고, 식당 앞 다리 건너에 필례약수가 있다. 약수가 톡 쏘는 맛이 예전같지 않다고는 하나, 여전히 마실 만하다. 위장병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1900년대초 심마니들이 발견했다고 한다. 약수터 위쪽엔 산나물과 약초를 파는 가게가 있고, 펜션·민박집도 있다. 육이오 전까지 약수터 주변에 70여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원주민은 없고 도시에서 들어온 이들만 살고 있다. 한계령에서 필례약수로 내려오는 고갯길을 은비령으로 부르는 이도 있으나, 한 소설가가 이 약수터에 와 머물며 썼다는 소설 이름에서 비롯한 것이다.

 
한계령 쪽으로 뻗은 골짜기 옛 이름은 원진계곡이다. 큰원진계곡과 작은원진계곡이 있다. ‘원진개’ 식당 지나 군량밭 마을을 지난다. “불르는 건 군량밭이라래는데, 행정상으루다가는 귓둔1리 5반이야요.” 필례약수 쪽도 원진개 식당 쪽도 다 귀둔리에 속한다. 모두 열 여섯집이 산다.

 
쌍다리(가리산1교·가리산2교) 삼거리로 내려와 좌회전해 잠시 가다, 다시 삼거리(31번 국도) 만나 인제·하추리 쪽으로 우회전한다. 구석구석 들어선 펜션들 지나 내려가면 왼쪽 물길 다리 건너 하추 자연휴양림이 나타난다. 10월 주말 예약은 끝났고, 평일엔 여유가 있다. 통나무집 평일 3만원부터 8만원까지.

 
더 내려가면 배나무골 마을 부근 오른쪽 길가에 식물원 안내 빗돌이 있으나, 문 닫은 지 오래된 사설 식물원이다. 고개(싸리목재) 넘어 내려가면 길 왼쪽 물가로 뜬금없이 큼직한 일주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최근 ‘으리으리하게’ 지은 선원인 기린산 용화사 들머리다.

 
청계교 다리 건너 들어가면 거대한 절집이 보이는데, 절 못미쳐 왼쪽 물가 언덕에 눈에 띄는 고사목 소나무가 있다. 살아 있다면 주변의 수려한 하추계곡(가리산계곡) 물길과 어우러져 실로 멋진 경관을 보여줬을 소나무다. 거대한 바위의 틈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오른 모습이다.

img_08.jpg
 
img_07.jpg

 
바위에 뿌리를 내린 크고 작은 소나무 중 세 그루는 말라죽고, 젊은 소나무 하나만 살아남았다. 말라죽은 가장 큰 소나무는 마을의 성황목이었다. 하추리 2반(샛말)로 들어가, 샛말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오신 박성기(81) 어르신에게서 이 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아주 좋았지유. 삼복더위가 아무리 더운 때도 거기 그늘에 가 드러누워 있으면, 서늘해져서 오래 있지를 못했어유.”
“그 나무가 우리 마을이 모시는 성황당 나무인데, 해마다 삼월삼짓날과 구월구일날 두 번 제를 올리지유. 얼마나 신령한 나무인지 몰라유.”
“저 고개 우에서 75년인가 겨울게 지에무씨가 부레키가 고장나, 그 높은 소나무 앞 개울루다가 그냥 떨어졌는데, 사람두 차두 아주 말짱했어유. 아, 운전사가 한군데 다친 데두 없이 제발루 걸어나와 툭툭 털구선, 다시 시동 걸어 차 끌구갔어유. 글쎄, 그게 다 나무가 보살핀 거지유. 또 할머니 한 분이 그 고개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도 하나도 다치지 않고 말짱했어유. 동네 사람들이 다 지켜봤어유. 할머니가 일어나서 걸어나오는 걸. 희한해유. 옛날 주변에 옘병이 돌아 다 죽어나갈 때두 여기 마을 사람들은 다 말짱했어유.”

 
이랬던 나무가 지난 2006년 인제·홍천·양양 대홍수 때 강물이 넘치면서 나무를 휩쓴 뒤 말라죽은 것이다. 샛말 주민들은 나무가 말라죽은 지금도 해마다 두 차례씩 제를 올리고 있다. 나무를 살리려 주사를 놓고 거름을 주고 법석을 떨었지만 살리지 못했다고 한다. 말라죽었어도 소나무의 위용은 여전히 늠름하다. 절집이 들어섰지만 물가 경치도 여전히 아름답다.
샛말은 위쪽 싸리목과 아래쪽 거무석(흑석동) 마을 사이의 마을이다. 하추의 옛 이름은 가래울이다.

 
하추리 1반 지나 삼거리에서 내린천을 만난다. 내린천은 상류 지역인 홍천군 내면과 인제군 기린면에서 한 자씩 따서 지은 청정계곡 이름이다. 여름 내내 래프팅 인파가 모여드는 골짜기다.

고사리 노루목 산장은 푸른 내린천 물길을 내려다보며 차 한잔 하기 좋은 전망 좋은 찻집 겸 산장. 노루목산장에서 3㎞ 더 달리면 인제읍 합강에 이른다. 차 몰고 산길 걷고 밥 먹고 쉬며 여기까지 7시간쯤 걸렸다.
 

인제/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인제 여행쪽지>
 
⊙ 가는 길|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강일나들목을 나가 춘천행 고속도로를 타고 동홍천나들목에서 나간다. 인제·속초 쪽 팻말 보고 44번 국도 타고 인제로 간다.
⊙ 먹을 곳|  인제읍 합강3리 옛 국도변의 다들림 막국수 (033)462-3315, 필례약수터 필례식당(033-463-4665)의 산채비빔밥, 인제읍 상동리 궁궐해물탕 (033)463-9800. 
⊙ 묵을 곳| 읍내의 하늘내린 호텔(033-463-5700), 스카이락 모텔(033-462-5551), 내린천 고사리의 노루목산장(033-461-1966), 하추리의 하추자연휴양림(033-461-0056·10월 주말은 예약 완료). 
⊙ 여행 문의| 읍내 44번 국도변 정중앙휴게소(농산물판매장) 옆의 인제관광정보센터(033-463-4870)에 들르면 인제군 지도와 여행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인제군청 문화관광과 (033)460-2081, 인제버스터미널 (033)463-2847.
 
이병학 기자

Leave Comments


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