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한 서린 임존성에 오르다 길따라 삶따라

전망 빼어난 예산 봉수산 자락
임존성과 대흥면의 문화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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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부흥운동군의 최후 격전지였던 임존성. 충남 예산군 대흥면과 홍성군 금마면 사이에 솟은 봉수산(대흥산·484m)에 쌓은 둘레 2.4㎞의 석성이다. 일부 복원된 구간을 제외하면 무너져내린 옛 성곽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백제 유민의 한과 투혼, 그리고 배신과 좌절이 겹겹이 서리고 맺힌 성이다. 울창한 숲길이 있고 전망도 빼어나, 한나절 성곽 및 역사 탐방 코스로 추천할 만하다.
 
임존성은 주류성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지이자, 백제 역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석성이었다.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무릎을 꿇은 660년, 흑치상지와 의자왕의 사촌 복신, 승 도침이 임존성에 백제 유민을 이끌고 모여 3년 반에 걸쳐 결사항전을 벌였던 곳이다. 당나라 소정방 군대도 신라 김유신 군대도 “군사가 많고 지세가 험해 이기지 못하고”(삼국사기) 퇴각해야 했던 성이다. 그러나 결말은 허무했다. 복신·도침·풍왕자의 대립과 유혈극, 흑치상지의 당나라 투항에 이은 역공으로 성은 함락(663년)돼 백제 부흥운동은 끝난다.
 
임존성의 남서쪽 일부 성곽은 최근 복원해 옛 모습이 사라졌다. 봉수산 동북쪽과 북서쪽 나머지 구간에서 무너져내린 옛 성곽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봉수산 등산로는 봉수산휴양림 쪽으로 오르는 코스와 대련사 쪽 코스, 마사리(광시면) 쪽으로 오르는 임도 등 5개 코스가 있다. 마사리 쪽에선 굽이 심한 임도를 따라 차로 성벽 밑까지 오를 수 있다. 성곽 복원 공사장 팻말 옆 주차장에 차를 대고 성안으로 든다.
 
 
나당연합군이 임존성 공격한 산은 '웬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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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은 봉수산 정상 남동쪽 사면에 동서 방향의 길쭉한 타원형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바깥쪽만 성돌을 쌓고 안쪽은 자연지형을 이용한 테뫼식 석성이다. 복원한 성벽 아래쪽에선 옛 수로 모습이 보이고, 성 안쪽 바위 밑엔 꽤 많은 물이 고인 샘터가 있다. 왼쪽 성곽을 따라 오르다가, 중앙 숲길을 관통해 북쪽 성곽에 오른 뒤 북문터를 거쳐 서남쪽 성곽을 타고 내려올 수 있다. ‘웬수산’(원수산). 임존성 남쪽에 바라다보이는 내상산(384m)의 별칭이다. 이 산에 오르면 임존성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나당연합군이 이를 활용해 임존성을 공격해 함락시켰기 때문에, 주민들이 이 산을 ‘웬수’로 여기게 됐다고 한다.(주민 이수씨·86)

복원한 계단식 성곽길을 잠시 오르면 널찍한 풀밭이 나타난다. 40년 전까지도 봉수산은 “나무 한나 없던 아주 벌거숭이 민둥산”이었다. 60년대까지 주변 초등학교의 단골 소풍 장소가 바로 억새 우거진 널찍한 봉수산 자락이었다고 한다. 성벽 밑(또는 성밖 숲속)에 ‘묘순이 바위’로 불리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엄청난 힘을 가진 장사 남매가 한집에 태어났는데, 한집에 장사가 둘이 나면 하나를 반드시 희생시켜야 한다는 관습 때문에, 내기 끝에 성을 다 쌓고도 오빠에게 져 희생된 여동생 묘순이의 전설이 깃든 바위다. 이 바위에 올라 돌로 두드리며 묘순이를 부르면, 흐느끼는 듯한 울림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관광안내 팻말 오른쪽에 돌판으로 두르고 덮은 샘터가 있다. 성안에 있었다는 3곳의 샘 중 하나다. 교촌리(향교말) 주민 현종대(64)씨가 말했다. “거기 샘은 세상읍서두 마르덜 안히야. 암만 가물어두 그대룬 겨.” 샘터 옆으로 오르면 울창한 오르막 숲길이 이어진다. 움푹 파인 모습의 골짜기 길을 잠시 걸으면 북쪽 성곽으로 올라서게 된다. 오른쪽은 남문터, 왼쪽 길이 정상 쪽인 북문터로 오르는 길이다. 정상 쪽으로 오르는 길에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예당저수지와 그 너머 예산 읍내 일부를 내려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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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시원한 전망은 헬기장 주변에서 만난다. 성 안쪽 숲길을 걸어 무덤과 소나무숲 지나면 헬기장이 나온다. 헬기장 옆 장군바위(상여바위)에 서면, 예당호 끝자락과 대흥면·광시면 일대 들과 산줄기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옛 성벽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은 북문터 지나 남서쪽 성곽길을 따라 내려오는 하산길이다. 곳곳에 돌무더기가 쌓여 있고, 일부 성벽은 거의 원형을 유지한 모습이다. 성안 어딘가엔 병기를 보관하던, 물이 고인 커다란 바위굴이 있었으나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임존성은 부흥운동 이후에도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 왕건이 패권을 다투고, 몽고 침입 땐 대몽항쟁의 거점으로 격전을 치렀던 곳이다. 갈림길에 안내판이 설치돼 있어 길 잃을 염려는 없다. 봉수산 정상 봉우리가 건너다보이는 북문터를 거쳐 내려오는 서남쪽 길은 다소 가파르고 좁다.
 
일제강점기 예산군에 편입되기까지 대흥현(대흥군)은 덕산·예산 일대 행정·교육의 구심점이었다. 임존성 숲길 탐방을 전후해 대흥면 소재지인 동서리·상중리와 교촌리 일대에 깔린 문화유적들을 둘러본다면 여정이 한결 풍성해진다.
 
교촌리에 덕산·예산보다 100년 앞서 1405년 문을 연 대흥향교가 남아 있고, 향교 앞쪽에 600년 된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다. 이 나무 위엔 약 200년 됐다는 느티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어 눈길을 끈다. 향교 뒷산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우거져 솔바람이 청량하다. 향교 앞에도 오래된 우물이 있다. “바우를 깨갖구서니 뚫은 샘이유. 물이 아주 시원햐. 이것두 세상읍서두 안 말라.”(현종대씨) 향교 뒤쪽 골짜기가 선학골이다. 지금은 수량이 적고 바위는 땅에 묻혀 볼품없는 물길로 전락했지만 옛날엔 수려한 골짜기였다고 한다. 향교 앞에서 왼쪽으로 잠시 오르면 민가 뒤의 커다란 바위에 ‘이모암’이란 글씨가, 그 뒤 산자락 바위엔 ‘선학동천’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600살 은행나무 위에 뿌리 내린 200살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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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건설된 예당저수지 물길(무한천)은 예산읍내를 거쳐 삽교천으로 흘러든다. 수백년 전엔 교촌리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땅을 깊이 파면 펄흙이 쏟아져 나온다고 한다. “가물어갖구 샘을 파잖야. 그럼 자꾸만 그 시커먼 뻘흙이 나오는 겨.”(김완진씨·77) 바닷물이 들어왔었다는 흔적은 곳곳에서 나온다. 교촌리에 딸린 강골이란 마을 이름도 바다 물골을 가리킨다. 이웃 상중리 봉수산휴양림 들머리엔 ‘배 맨 나무’로 불리는 거대한 느티나무(성황목)가 있다. 소정방 군대는 서해 뱃길을 타고 와 벼룩부리란 곳에 배를 댔는데, 임존성 공격 때 이 나무에 배를 묶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면소재지 동서리엔 옛 대흥현의 동헌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까지 읍성과 객사·옥사 등 관아 건물이 있었으나 사라졌다. 동헌 뒤뜰에서 영조 옹주(추정)의 태실, 척화비를 볼 수 있다. 동헌으로 드는 ‘임성아문’ 앞 240년 된 느티나무 옆엔 ‘이성만 형제 효제비’가 있어 눈길을 끈다. 우애와 효성이 지극했던 형제를 세종대왕이 불러 격려한 내용 등이 171자의 이두·속자·고자·기호 등으로 적혀 있다 하나 마모가 심하다. 예당저수지에 잠긴 개뱅이교(가방교) 부근에 있던 것을 옮겨놨다. 교과서에도 실렸던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여기서 비롯했다. 예산군은 해마다 9월 의좋은 형제 이야기를 소재로 내건 ‘예산 옛이야기 축제’를 대흥면 일대에서 펼친다.
 
대흥면의 또다른 볼거리로 백제시대 고찰 대련사, 조선말 학자이자 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 묘소, 고부군수 조병갑이 동학군에 쫓겨 숨어 있었다는 200년 된 이한직 가옥, 예당저수지 수변생태공원 등이 있다. 낡았으나 정겨운 옛집에서 수십년째 영업을 해오는 떡방앗간·미용실 등이 늘어선 면소재지 거리 모습도 매력적이다.
 
매력 또 하나. 대흥면엔 마을 역사문화를 꿰고 있는 어르신이 한둘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동서리 주민 이수(86) 할머니는 자타가 공인하는 ‘역사문화 정보통’이다. 향토사학자 수준의 지식과 경험을 자랑하는 분이다. 수십년에 걸친 역사유적에 대한 관심과 애착, 탁월한 기억력으로 찾아오는 교수·학자들과 여행객들을 감동시킨다. 대흥면 문화해설사 박효신씨는 “고령인데도 산과 들을 가리지 않고 다니며 유적을 확인하고 연구하시는 분”이라며 “오래전 남편이 운영하던 병원 자료를 바탕으로 박물관 개원도 준비중”이라고 귀띔했다.
 
예산/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다음주 옛이야기 축제

⊙ 가는 길| 수도권에서 서해안고속도로~당진분기점~당진·대전고속도로~예산 수덕사나들목. 21번 국도 타고 응봉에서 619번 지방도로 좌회전해 직진, 예당저수지 만나 대흥면 소재지로 간다. 임존성은 619번 지방도~광시쪽~마사리·홍성 팻말 우회전 2.2㎞ 직진해, 마을회관 지나 전봇대 옆 작은 건물(배수펌프장) 끼고 시멘트길로 우회전, 첫 삼거리에서 우회전, 왼쪽에 파란집 지나 올라가다 삼거리 만나 우회전, 다시 삼거리 만나 좌회전해 오르면 성곽 복원공사 팻말이 나온다. 급경사·굽잇길 조심. 마을회관 옆 시멘트길부터 임존성까지 2.3㎞.

img_05.jpg⊙ 먹을 곳| 대흥면 상중리의 민물고기 매운탕 전문 서하가든(041-332-0102), 예산읍 예산리 상설시장 앞 40년 전통의 할머니장터국밥(041-334-2401), 예산리 한우 생고기 전문 한우리(041-334-6733), 오가면 역탑리 45년 전통의 돼지곱창 전문 할머니딸숯불곱창마을(041-334-9999). 대흥에서 10분 거리의 광시면 소재지는 60여개 한우 전문식당이 몰린 한우촌이다.

⊙ 예산 옛이야기 축제| 예산 대흥면은 ‘의좋은 형제 이야기’ 발상지다. 9월10일~12일 대흥면 의좋은형제공원과 예당호조각공원 일대에서 옛이야기 축제를 펼친다. 물이 테마다. 심청전의 원전 격인 원홍장전과 온천 설화를 배경으로 용궁을 꾸민 입체전시관 ‘물속나라 예산 이야기’, 옛이야기 속 세트를 돌아보며 체험하는 ‘옛이야기 체험마을’, 비밀코드 지도를 들고 각 지점을 둘러보는 ‘숨겨진 물의 힘을 찾아서’ 등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임존성수레타기·그림자극장·또랑광대놀이·관아체험 등도 있다.

⊙ 여행문의| 예산 옛이야기축제 위원회 (041)331-2244, 대흥면사무소 (041)339-8641, 예산군청 문화관광과 (041)339-7303.
 
이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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