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 흔적 뒤로 막창 냄새 '솔솔' 길따라 삶따라

울산 중구 울산읍성·학성·병영성
'고복수 노래비'부터 울산읍성 성곽터
외솔 기념관 거쳐 산전샘까지 9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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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시는 현대화된 지 오래다. 구석구석 공단이 들어서고, 개발되고 재개발돼 선인들 자취는 많이 사라졌다. 고색창연한 모습은 드물지만 태화강 북부 중구 옛 도심 속에 둘러볼 만한 것들이 흩어져 있다. 옛 울산도호부(학성도호부)의 동헌 앞에서 출발해 임진왜란 때 격전지 학성공원(도산) 거쳐 병영성 밑 산전샘까지 걷는다.
 
동헌 옆 북성공원 지하 공영주차장에 차를 두고 동헌 앞의 ‘고복수 노래비’부터 만난다. 1933년 발표된 대중가요 ‘타향살이’의 가수 고복수(1912~1972)는 울산 중구 병영동 출신이다.
 
‘부평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 쪽…”(2절). 가사 읽으며 노래를 흥얼거려 보니 코끝에 찡해진다. 일제강점기에 나라 잃고 고향 떠나 사는 서민들의 설움이 담겼다.
 
‘학성도호부아문’ 현판이 걸린 문을 들어선다. 동헌 건물은 보수공사중이다. 학성은 울산의 고려시대 별칭이다. 동헌은 옛 울산읍성(둘레 1.7㎞)의 중심 건물로, 조선시대 수령이 공무를 보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군청 회의실로 쓰기도 했다. 건물 내부에 ‘일학헌’ ‘반학헌’ 등 동헌의 옛 현판이 걸려 있다. 동헌 주위를 한바퀴 돌며 300년 묵은 향나무, 효자 송도 정려비, 선정비·불망비 무리를 살펴본다.
 
송도는 병든 부모를 극진히 섬겼다는 세종 때의 인물. 정려비는 본디 효문동(이 지명도 송도 정려 때문에 생겼다)에 있었으나 도로공사 등으로 우정동으로 옮겼다가 다시 이곳으로 왔다. 오송정 밑에 늘어선 31개나 되는 선정비 무리가 볼 만하다. 비의 머릿돌에 새겨진 용무늬·꽃무늬·물결무늬 등이 다채롭고도 아름답다. 친절하게도 각 빗돌 앞에 비에 대한 설명 팻말을 설치했다. 1586년(선조19년) 세워진 ‘군수 김복일 선정비’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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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무늬·꽃무늬·구름무늬…선정비 머릿돌 각양각색

 
고복수 노래비 뒤 북정공원으로 간다. 본디 아전들의 집무실인 작청이 있던 곳인데, 일제강점기 이후 들어섰던 경찰서를 옮기고 공원으로 만들었다. 공원은 동헌과 함께 어르신들이 장기·바둑 두고 막걸리잔도 기울이는 쉼터다. 한쪽에 독립운동가 박상진 의사 동상이 있다. 박 의사는 대한광복회 총사령으로 활동하다 체포돼 1921년 일제의 사형 집행으로 순국한 분이다. 추모비가 학성공원에 있고, 생가는 북구 송정동에 있다.
 
길 건너 울산초등학교로 들어간다. 객사인 학성관이 있던 곳이다. 옛 흔적이라곤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 그루뿐이다. 객사로 드는 2층 누문 이휴정이 있던 학교 정문 계단을 통해 남문길로 내려선다. 뒤뜰 자그마한 정원이 아름다운 카페 ‘쿨앤핫’(옛 마로니에커피공원)에 들러 돌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5백년 된 회나무 그늘이 짙다. 옛 일인 가옥을 수리한 집이다. 원두커피 4천원.
 
70~80년대까지 울산에서 가장 번화했다는 시계탑네거리 지나 ‘젊음의 거리’를 걷는다. 즐비하던 옷가게·병원들이 강남(태화강 남쪽) 삼산동으로 빠져나가면서 한때 상권이 쇠퇴했으나, 최근 10·20대들이 다시 몰려들며 활기를 되찾고 있는 곳이다. 월드컵 거리 응원도 젊음의 거리에서 벌어진다.
 
중앙시장 곰장어 골목 보고, 남녀 차별을 원칙으로 삼고 장사한다는 할매칼국수집으로 간다. 중앙상가 건물 뒷골목인데, 문이 닫혀 있어 아쉽다. 80대 할머니 혼자 40여년째 칼국수를 끓여 온다는 곳이다. 남녀가 줄을 서면 여자는 쏙 빼놓고 남자들 먼저 “퍼뜩 묵고 가 돈 벌그라” 하며 칼국수를 듬뿍 퍼준다고 한다. 이 집 단골이라는 강귀정(삼일여고 국어교사)씨는 “맛은 둘째 치고 양이 엄청난데, 남기면 곧바로 호통이 날아온다”고 전했다.
 
학성로 건너 칠성슈퍼·성인나이트 네거리에서 우회전해 왼쪽 골목길로 들어간다. 울산읍성 성곽터로 추정되는 곳으로, 성곽길을 따라 길바닥에 ‘읍성지’ 표시를 해 놓았다. 수십년 전부터 춤바람을 몰고왔다는 미나리카바레 뒷골목이다.
 
홍성한의원(옛 중구청) 네거리 지나 장춘로를 만난다. 30년 됐다는 88곰장어집 네거리가 옛 동문터 추정지다. 왼쪽 골목 안 주차장 옆에 오래된 샘 옥골샘(옥골새미) 터가 있다. 동네 이름이 옥골인데, 조선시대 감옥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뚜껑 덮인 네모난 시멘트 구조물이 옥골샘 우물이다. ‘3년간 이 샘물을 마시고 벙어리가 말을 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70~80년대까지 홍등가였던 옛 7번국도변엔 연인·둘리·약속 등 문은 닫힌 채 간판만 남은 술집들이 즐비하다. 겹처마 지붕의 일제강점기 가옥과 옛 한옥에 차린 한식집 ‘외가집’ 건물을 보고 8차선 대로 번영로를 건너 구역전시장으로 든다. 여기서부터 울산역이 있던 현 이마트 주변까지 역전시장이 번성했었다. 철로를 옮기고, 번영로가 확장되면서 중앙시장과 이어졌던 역전시장의 상권이 단절됐다. 지금도 번영로 길가에선 매일 새벽 농산물시장이 열린다.
 
신중앙시장에서 옛 울산역에 이르는 골목엔 지금도 여인숙이 성업중이다. 한 여인숙 주인은 “저녁 숙박손님은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역에서 올라온 상인들이 새벽시장을 본 뒤 잠 자고 가는 곳이다.
 
새벽 농수산물 도매시장인 학성시장 거쳐 시장 상인들이 식사하는 제일·한가위·선불이·산해진식당 지나, 학성공원으로 이어지는 도로인 구교로로 나선다. 재개발이 추진되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중단된 흔적이 을씨년스럽다. ‘무엇이든 다 산다’는 학성고물상 앞에서 성호고물상 쪽으로 길을 건너 학성공원 입구로 걷는다.
 
img_03.jpg해발 50m 높이의 학성공원(도산)은 수천년 전엔 섬이었다. 임진왜란 막바지 정유재란때 왜군과 조선·명 연합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당시 왜적장 가토 기요마사는 왜병 1만6천명을 동원해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헐어낸 성돌로 40여일 만에, 세 겹의 왜식 성을 쌓았다. 곳곳에 경사지게 쌓은 왜성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을 계변성(개변성)이라고도 하나, 동촌 서쪽 반구동 일대에 있던 별도의 토성이 계변성이라고도 전한다.
 
계단길을 따라 공원으로 오르면 동요시인 서덕출(1906~1940)의 ‘봄편지 노래비’, 박상진 의사 추모비, 개인 땅이었던 학성공원 일부를 기증했다는 친일파 김홍조(1868~1922) 공덕비, 낙산대 빗돌 등을 볼 수 있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태화사지 십이지상 부도’(보물 441호)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돌종 모양의 부도이자, 십이지상이 새겨진 유일한 부도다. 두 손을 앞으로 모은 12 동물상이 선명하고, 위쪽엔 불상을 모셨던 감실이 있다. 태화동에 있었던 신라 선덕여왕 때의 절 태화사 터에서 나온 부도로 추정된다. 1962년 태화동 반탕골에서 발굴됐다.
 
  
왜군 1만6천명 읍성·병영성 헐어 40일만에 왜성 쌓아
 
학성공원에서 내려와 반구 사거리 거쳐 ‘구철길 사거리’로 간다. 길메리병원 앞쪽 길가엔 반구2동 주민들이 정월 보름 동제를 지내는 사당이 있고, 그 옆엔 움푹 파인 바위절벽 일부가 남아 있다. 울산향토사연구회 한석근 회장은 “이 해식애가 바로 이 일대까지 바닷물이 들어찼었다는 걸 말해준다”며 “원래 절벽 안쪽으로 움푹 파인 동굴 모습이었는데, 도로공사를 하며 위쪽을 깎아냈다”고 말했다.
 
구교로를 따라 병영오거리 쪽으로 다소 지루한 찻길을 걸어간다. 구교란 옛 향교가 있던 동네를 말한다. 구교 소공원에 이를 알리는 마을유래비가 있다.
번듯한 케이티 건물과 초라한 해장국집 ‘전화국 옆집’ 앞을 지난다. 전화국 옆집 간판을 자세히 보면 이전엔 쉼터 실내마차였고, 그 이전엔 불티 포장마차였음을 알아챌 수 있다. 지금은 가게 앞에 다시 시골집이란 둥근 간판을 매달았다. 쇠퇴해가는 상권에서 돌고돌며 간판을 바꿔달아온 한 가게의 내력을 생각하며 천천히 걷는다.
 
불개미·연정·초원 등 문닫힌 코딱지만한 옛 술집 간판들을 지나 번영로 큰길 건너 병영 막창 골목으로 들어간다. 막창(소 내장)을 내는 식당은 10여년 전까지 몇집 안됐으나 손님이 몰리면서, 삼겹살집도 조개구이집도 국밥집도 노래방도, 앞다퉈 막창집으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이젠 ‘막창 드라마’ ‘압구정 막창’ ‘대구막창 1번지’ 등 20여집이 성업중이다. 1인분 7천원. 막창을 시키면 칼국수는 무료다.
 
언덕길 올라 병영천주교회 뒷길로 간다. 여기서 병영성 남서쪽 성곽의 일부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주변 마을 옛 이름이 곽남이다. 성곽의 남쪽이란 뜻이다. 개똥밭 옆에 무너져가는 성돌 무더기를 사진 찍자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한 마디 하신다.
 
“저걸 퍼뜩 없애뻐리얄틴데 몬하게 하는 기라. 돌떼이가 머시 그래 중하다꼬. 그래 노이 마을이 발전을 몬하는기라.” 일상생활과 ‘개발’ 앞에서 문화유적은 늘 고민거리로 떠오른다.
 
민가의 일부 담벽에서도 축대에서도 옛 성돌을 이용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병영초등학교 앞으로 간다.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가수 고복수가 이 학교(옛 일신학교)를 다녔다. 이곳이 병영성의 객사 터였다. 정문 계단 오른쪽에 서 있는 하마비가 그 흔적이다. 병영성은 조선 태종 때 이곳에 설치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을 말한다. 학교 안엔 외솔 최현배 흉상, 수류탄을 몸으로 막아내 순직한 육군 중위 차성도 흉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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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앞으로 내리 뻗은 골목길들엔 고복수길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고복수 생가가 골목 안쪽에 있었다고 하나 위치는 알 수 없다. 지금의 치킨집·네일아트 가게 자리가 고복수의 모친이 국수장사를 했었다는 곳이다.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 기념관으로 걷는다. 외솔은 일생을 오로지 한글 연구에 바친 대학자다. 그의 생가터 앞에 지난 3월 외솔회에서 유품과 원고·저서·타자기 등을 기증받아 개관했다. ‘한글이 목숨’이라고 쓴 선생의 휘호가 서늘하게 다가온다. 밀랍인형 디오라마, 외솔의 일생과 한글 관련 영상물도 있다. 복원한 생가는 기념관 뒤쪽에 있다.
 
1919년 봄 병영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때 일제에 의해 희생된 분들을 모신 삼일사를 보고, 병영성 북문터로 오른다. 병영지하차도 앞에서 오른쪽 길로 올라야 한다. 북문터 옆에 성벽 일부가 남아 있다.
 
성곽 위에 서면 동천과 그 너머로 펼쳐진 울산비행장, 멀리 경주쪽 기박산까지 바라다보인다. 한눈에도 이곳이 동천 물길을 따라 쳐들어오는 왜적을 감시·공격하는데 적지임이 느껴진다. 병영성곽 흔적 따라 걸어 홍일아파트 옆길로 내려와 옛 7번국도와 동천 물길을 만난다. 낡아 보행전용으로 쓰이는 산전교(1957년)의 가늘고 긴 다릿발이 이채롭다. 옛날엔 이 다리를 건너야 방어진 쪽으로 갈 수 있었다.
 
길 따라 내려오면 400년 유래를 가진 산전샘(산전새미)에 이른다. 병영성곽 밑에서 솟아 주민들은 물론 병영의 군사들이 식수로 썼던 샘이다. 수량이 풍부한 데다 여름엔 차고 겨울엔 따뜻해 아낙네들이 물을 데우지 않고도 빨래를 했다고 한다. 40여년 전 주변에 상수도용  파이프를 박아 지하수를 뽑아 쓰면서 물이 고갈돼 한때 폐쇄됐으나, 최근 다시 샘터를 복원해 놓았다. 샘 뒤쪽에 물을 받아갈 수 있게 수도꼭지를 설치했다. 찬 물 한잔 마시고 앉아 쉰다. 여기까지 9㎞ 남짓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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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울산 중구 여행쪽지>
복탕에서 짚불곰장어까지
   
⊙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언양분기점에서 울산고속도로로 바꿔타고 끝까지 간 뒤 북부순환도로(7번국도)를 만나 좌회전해 삼호교 건너 직진, 경찰청입구오거리에서(고가 타지 말고) 오른쪽으로 빠져 우회전해 북정공원(동헌)·울산초등학교 쪽으로 간다. 동헌 옆에 북정공원 공영주차장(지하)이 있다. 1시간 1천원. 도착점 병영 산전에서 출발점인 동헌까지 택시(기본요금 2천200원)로 4천원 안팎.

img_05.jpg⊙ 먹을 곳| 옥교동 향촌식당(복탕·대구탕·명태탕) (052)246-3414, 성남동 쿨앤핫(솔잎약초삼겹살) 211-4446, 옥교동 88곰장어(곰장어) 246-6765, 학산동 외가집(한정식) 246-2352, 병영 산전 산곰장어·고디탕(짚불구이곰장어·다슬기탕) 292-7225.

⊙ 여행 문의| 울산시 중구청 (052)290-3661, 울산시청 229-3851~6.
    
이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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