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락 마을여행 지루할 틈 없네 길따라 삶따라

함양 지안재·오도재 넘어 금대암 올라볼만
칠선계곡 입구 벽송사 목장승 한쌍 눈길
닥종이 이름났던 세동마을선 염색체험 진행 

함양 금대암에서 바라본 지리산 능선.
함양 금대암에서 바라본 지리산 능선.

함양은 산청·하동·구례·남원과 함께 지리산을 둘러싸고 있는 다섯 시·군 중 하나다. 칠선계곡과 백무동계곡으로 드는, 지리산 북동부의 관문이 되는 고장이다. 지리산 고장답게 함양엔 경관 좋은 물길 산길이 수두룩하고 오지 마을도 많다. 함양읍내에서 ‘지리산제일문’ 문루가 세워진 오도재를 넘어 엄천강변 상류의 산촌생태체험마을 송전리를 찾아갔다. 백무동 들머리의 전망 좋은 암자 금대암, 칠선계곡 입구의 고찰 벽송사 등도 지리산 북동부 여행길에 빼놓을 수 없는 곳들이다.

지안재~오도재~금계마을 고갯길은 길도 전망도 멋진 드라이브 코스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오른 산길이다. 지안재 경관이 가장 먼저 다가온다. 가파른 산비탈을 일고여덟 번이나 좌우로 급회전하며 오르는 고갯길이다. 고개 위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겹겹이 쌓인 굽잇길이 아름답다. 사진작가들이 모여들어 밤에도 찍고 새벽에도 찍는 ‘출사 명소’다. 지안재(지안치)라는 이름은 ‘제한치’가 변한 것이다. 고개 밑 조동(대추징이) 마을에, 말을 쉬어 가게 하던 조선시대 역인 제한역이 있었다.

함양읍에서 오도재 오르는 길에 만나는 지안재 굽잇길.
함양읍에서 오도재 오르는 길에 만나는 지안재 굽잇길.

‘도를 깨친다’는 뜻을 지닌 고개 오도재(773m)엔 ‘지리산 제일문’이라 현판을 내건 대형 문루가 세워져 있다. 옛날 벽소령·장터목을 거쳐 온 하동·광양의 소금과 해산물이 이 고개를 넘어 경북 지역으로 운송됐다고 한다. 조선 중기의 승려인 청매 인오조사가 이 고개를 넘나들며 도를 깨쳤다는 데서 고개 이름이 유래했다. 고개 넘어 ‘조망공원 휴게소’에서 장엄하게 펼쳐진 지리산 능선을 감상할 수 있다. 왼쪽 천왕봉(1915m)에서 오른쪽 반야봉(1732m)까지 27㎞에 이르는 고봉준령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갯길을 내려가 금대암으로 향한다. 지리산 조망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금대(암)다. 흔히 지리산 조망 명소로 금대·마적대·문수대·연화대·묘향대·만복대·수성대·청신대 등 ‘지리산 8대’를 꼽는다. 이곳에 모두 올라봐야 비로소 ‘지리산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중에서도 금대 전망을 제일로 꼽는 이들이 많다. 오도재에서 내려가 마천면 소재지를 지나 인월 쪽으로 가다 보면 금대로 오르는 비탈길 입구가 나온다. ‘다랭이 논’ 경치로 알려진 도마마을 건너편이다.

금대암 오르는 길에 볼 수 있는 도마마을 다랭이논.
금대암 오르는 길에 볼 수 있는 도마마을 다랭이논.

금대암은 신라 때 처음 창건된 사찰 터에 자리한 암자다. 높이 40m에 이르는 500여년 수령의 전나무와 나한전 뒤 바위 밑에 놓인 작은 삼층석탑이 인상적이다. 석탑은 받침돌 없이 너럭바위 위에 바로 1층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지리산 능선을 바라보기 좋은 장소는 나한전 옆 커다란 너럭바위다. 하봉·중봉·천왕봉이 정면으로 손에 잡힐 듯 다가와 감동을 준다. 암자 앞에 솟은 늘씬한 전나무가 경관을 돋보이게 해준다. 종무소 문에 내붙인 글귀가 귀에 박혀 빠지지 않았다. ‘말의 화살을 가벼이 던지지 말라. 한번 사람 귀에 박히면 힘으로는 빼낼 수 없다.’

금대암의 500여년 된 전나무. 높이가 40m에 이른다.
금대암의 500여년 된 전나무. 높이가 40m에 이른다.

칠선계곡 초입엔 고찰 벽송사가 있다. 한국전쟁 때 빨치산 근거지로 이용되자 이를 막기 위해 불태워졌는데, 1960년대 중건 때 절터에선 수많은 유골이 나왔다고 한다. 벽송사의 볼거리는 100년쯤 된 목장승 2기와 고려시대 삼층석탑, 300여년 된 소나무 등이다. 금호장군·호법대신 두 고색창연한 목장승을 들여다볼 만하다. 악귀를 막기 위해 절 입구에 세웠던 것으로, 훼손이 심해져 경내에 전각을 지어 옮겨놓았다.

벽송사 목장승 한 쌍.
벽송사 목장승 한 쌍.

칠선계곡 들머리의 고찰 벽송사의 ‘도인송’(앞)과 ‘보살송’(뒤).
칠선계곡 들머리의 고찰 벽송사의 ‘도인송’(앞)과 ‘보살송’(뒤).

절을 지키는 건 도인송이라 불리는 300여년 된 소나무다. 축대 위의 또 다른 늘씬한 소나무가 이 소나무를 향해 기울어진 모습이다. 옛날 이 절의 한 고승과 고승을 사모했던 보살이 환생한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벽송사 들머리의 서암정사는 한국전쟁 희생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조성한 석굴 사찰이다. 아미타불을 모신 굴법당, ‘금니사경’(아교 섞은 금가루를 붓으로 찍어 불경을 베껴 쓴 것) 등을 전시해 놓은 ‘사경수행 참배관’을 둘러볼 만하다.

벽송사 밑 서암정사의 굴법당.
벽송사 밑 서암정사의 굴법당.

엄천강 물길 따라 내려가 용유교 건너면 송전리다. 송전리는 세동·송대·마적동·고양터·모전 5개 마을로 이뤄졌다. 지리산 둘레길 금계~동강 구간(제4구간)이 지나는 곳이다. 모전마을 앞 물길의 커다란 소가 송전리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용유담이다. 다리(용유교) 위에서 보면 특별할 것 없는 물길이다. 반야정사 쪽으로 내려서 물가로 다가서야 기암괴석 우거진 용유담의 제 모습이 드러난다. 바위 여기저기에 지리산을 찾았던 옛 선비들의 자취가 새겨져 있다. ‘일두 정여창, 탁영 김일손, 남명 조식 장구지소’란 글씨 옆엔 점필재 김종직 이름도 보인다. 정여창과 김일손은 함양 출신의 대표적인 유학자들이다. 함양군수를 지낸 김종직은 가뭄이 들었을 때 이곳을 찾아와 직접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엄천 용유담 바위에 새겨진 선인들 흔적. 정여창, 김일손, 조식, 김종직 등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엄천 용유담 바위에 새겨진 선인들 흔적. 정여창, 김일손, 조식, 김종직 등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지리산 들머리 엄천의 용유담. 경남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모전마을 앞 물길이다. 아홉마리 용과 마적도사 이야기가 전해온다.
지리산 들머리 엄천의 용유담. 경남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모전마을 앞 물길이다. 아홉마리 용과 마적도사 이야기가 전해온다.

용유담 등 송전리 주변에선 마적도사와 아홉마리 용 이야기가 전해온다. 마적동은 말발굽 자국이 있는 커다란 바위가 있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신라 무열왕 때 마적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지금 마적사 터 부근엔 방치된 대종교(단군을 교조로 삼는 전통 종교) 시설이 남아 있다. 마적동 오르는 길에 절벽 너럭바위인 세진대가 있다. 400여년 수령의 멋진 소나무가 볼만하다.

세동마을에서 마적동 오르는 길에 만나는 세진대.
세동마을에서 마적동 오르는 길에 만나는 세진대.

송전리 마적동 주민 황백합자(78)씨가 지붕에 널었던 고추를 거두고 있다.
송전리 마적동 주민 황백합자(78)씨가 지붕에 널었던 고추를 거두고 있다.

세동마을에서 마적동을 지나 더 오르면 일고여덟 집이 사는 송대마을, 펜션 건물을 개조해 법당으로 쓰는 견불사를 거쳐 모전마을로 내려서게 된다. 송전리의 송대마을과 마적동은 1967년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화전민들을 철수시켜 한데 모여 살게 했던 이른바 ‘독가촌’의 일부다. 현재 마적동에 2가구, 송대마을에 7~8가구가 산다. 송대마을 이름은 ‘송은대’라는 바위에서 나왔다. 견불사 법당 뒤 바위에 ‘송은대’ 글씨가 보인다.

세동마을 주민들은 지리산 자락 여느 마을들이 그렇듯,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큰 고통을 겪었다. 지리산 빨치산과 국방군의 치열한 공방전으로 밤낮으로 불안에 떨어야 했다. 밤엔 빨치산들이 내려와 곡식·가축을 빼앗아가거나 주민을 끌고 갔고, 낮엔 경찰이 찾아와 빨치산에 협력했다며 주민을 닦달하고 잡아갔다고 한다.

송전리 세동마을 어르신들이 마을 길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이 김승열(80·)씨, 오른쪽은 하두라(81)씨.
송전리 세동마을 어르신들이 마을 길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이 김승열(80·)씨, 오른쪽은 하두라(81)씨.

세동마을의 과거를 지배하는 또 다른 단어가 ‘닥종이’다. 40여년 전까지 닥종이(한지) 생산으로 이름난 마을이었다. “하이고 마, 참말로 고되다. 추수 끝나모 닥나무 해와 가, 삶아 가 방에 앉아 종일 껍디를 뻬끼냈다. 그래 가 넙덕한 바우에 올려 큰 몽디로 뚜디리가지고 딱풀 삶은 물에 섞어 풀어 종이를 뜨는 기라.” 주민 석달막(72)씨의 말이다.

초겨울이면 온 마을 주민이 달라붙어 공동 작업을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잡아당기면 쇳소리가 팡팡 나는 질긴 한지”는 전국 곳곳으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구덩이 파고 커다란 쇠솥을 묻어 닥나무를 쌓은 뒤, 가마니 씌우고 흙을 덮은 다음 불을 때서 닥나무를 찌던 시설이 세동마을 길가에 방치돼 있다. 이름났던 ‘한지 마을’의 소중한 마을 유산이다. 불을 때던 쪽 석축 일부는 최근 훼손됐다. 석재로 쓰기 위해 누군가 돌을 빼냈다는데 보존이 필요해 보인다.

송전리 세동마을에 남아 있는 ‘삼굿터’. 닥종이(한지)를 만들기 위해 닥나무를 쌓아놓고 찌던 곳이다. 주민 석달막(72)씨가 불을 때던 아궁이 쪽을 가리키고 있다.
송전리 세동마을에 남아 있는 ‘삼굿터’. 닥종이(한지)를 만들기 위해 닥나무를 쌓아놓고 찌던 곳이다.
주민 석달막(72)씨가 불을 때던 아궁이 쪽을 가리키고 있다.

송전리는 최근 산촌생태마을로 거듭났다. 도시민을 맞아 철마다 농산물 수확 등 다양한 체험행사를 펼친다. ‘쪽’을 이용한 천연 염색 체험도 진행한다. 손수건·스카프나 옷에 직접 물을 들이고 말린 뒤 가져갈 수 있다. 박달나무로 만든 방망이로 다듬잇돌을 두드리며 음악을 연주하는 ‘다듬이 공연’도 이 마을의 자랑거리다. 군 지역 축제가 벌어질 때마다 초청돼 공연을 펼친다. 세동마을에선 지금 오미자 수확이 한창이고, 앞으로 호두 수확도 이어질 예정이다.

Jirisan

지리산. 1967년 12월 한국 최초로 지정된 국립공원 1호.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는 뜻. 남악, 두류산, 방장산으로도 일컬음. 가장 높은 봉우리는 해발 1915.4m의 천왕봉.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남도 3개 도에 걸쳐 있으며 면적은 483.022㎢에 이름. 동식물 1200여종이 서식하는 한반도 생태계의 보고이자 등산 애호가들의 성지.

함양/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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