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 전쟁 상흔에 팔도 이주민 애환 ‘움푹’ 마을을 찾아서

[마을을 찾아서] 양구군 해안면 일명 ‘펀치볼’

 

본디는 피란의 명당…운명인듯 민들레 지천
안보관광지에서 축제의 동네로 탈바꿈 한창


 

untitled-10_copy.jpg


펀치볼. 강원 양구군 해안(亥安)면 지역을 이르는 별칭이다. 한국전쟁 때 이곳 지형을 본 미국 군인들이‘화채그릇’을 닮았다 해서 붙였다. 대암산(1304m) 대우산(1179m)·도솔산(1148m)·가칠봉(1242m) 등이 둘러싸 거의 완전한 모양의 원을 이룬다. 동서 8.5㎞에 남북 7㎞, 평균 고도 400m인 분지다.

 

을지전망대에 오르면 북쪽으로 코앞에 북한땅이 펼쳐진다. 일교차가 큰 날 아침 고지대에 오르면 특이한 광경을 만날 수 있다. 분지 안에 흰 구름이 가득 들어차, 마치 아이스크림이 담긴 그릇을 연상케 한다. 오랜 세월 침식작용의 결과로 생긴 지형이다. 아주 오래 전엔 호수였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 특이한 분지 안에 500여가구 1200여명의 주민이 산다. 마을 수는 여섯이지만, 주민이 사는 마을은 현리·오유리·만대리 세 곳이다. 해안분지 안엔 중학교·초등학교가 하나씩 있고, 주유소도 하나 약방도 하나 여관도 하나 절도 하나요 성당도 하나다. 교회는 셋, 민박집은 여러 곳 있다.

 

인민군이 태우고, 국군이 태우고…역사 완전 단절

 

해안은 특이한 지형만큼이나 남다른 아픈 역사를 품고 있다. 해방 뒤 5년간 북한의 통치 아래 있었고, 6·25 전쟁 때는 도솔산 전투로 대표되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수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전쟁은 이 마을의 역사를 거의 완전히 단절시켰다.

 

"왜정 때만 해도 900여 호가 살았다는데 우린 아는 게 별로 없다. 전쟁 때 주민 80%가 북으로 갔다. 나머지 원주민도 이제 거의 다 세상을 떴다." "옛 마을은 다 불탔다. 인민군은 국방군 온다고 태웠고, 국군은 인민군 숨는다고 태웠다."

 

지금 주민은 전쟁 직후 들어온 이주민들이다. 전쟁 뒤 정부는 해안분지를 개간키로 하고, 신청을 받아 3차에 걸쳐 각지의 주민을 집단 이주시켰다. 1956년 1차로 965명이 들어왔다.

 

untitled-13_copy.jpg

 

홍천에 살다 1차로 들어온 최종식(84·현3리 노인회장)씨가 말했다. "사상 검사, 짐 검사하고 제무시(GMC)에 세간만 싣구 들어왔지유. 십년만 살자구 맘먹구 왔는데 여지껏 살아유." 최씨의 허리에서 파스를 떼어주며 부인 이춘심(76)씨가 말했다. "츠음엔 열달 넘게 천막살이를 했어유. 천막 하나에 열두세 가구씩 들어가 남의 다리 밟구 댕기메 살았지유."

 

군인들이 들에 불을 놓고 지뢰를 제거한 땅을 분배받아 농사를 지었다. 2년 동안은 배급되는 밀가루·옥수수가루와 산나물로 연명했다. 군인들이 통나무와 진흙으로 '구호주택'을 지어줘 한 집에 두 가구씩 입주했다.

 

적진 가까운 마을이라, 행동 제약은 상상을 넘어섰다. 밤에 불도 못 켜고, 오줌 누러도 못 갔다. "불 새나가면 끌려가 욕먹고 기합 받았죠. 여자가 변소 가겠다 해도 군인들은 '그 자리에서 누라'고 했어요." 당시엔 "북쪽에서 넘어와 소대장 목 잘라가던 때"였으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이주한 정대원(61)씨도 당시를 떠올렸다. "하루는 우리 아부지가 꼬질대(소총 청소용 쇠막대)를 잘라 날카롭게 갈드니 옛날 집터 뒤란을 쑤시고 다니는 거야. 움푹 꺼지는 데를 파 들어가면 항아리가 묻혀 있어. 원주민이 떠나면서 묻어 논 거지. 여기서 썩어가는 좁쌀이 나오드라구. 이걸 갖다 볶아선 질경이를 넣고 죽을 끓여 먹었지."

 

“땅 절반이 등기 안 된 미복구땅” 설움은 현재진행형

 

이주민의 설움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면사무소 직원이 말했다. "이곳 땅 절반 이상이 등기가 안 된 미복구땅이다. 등기부가 소실됐다. 많은 주민들이 개간권만 갖고 임대료 내며 경작하고 있다. 고질적인 민원사항이다."

 

최종식씨가 말했다. "땅 일궈 농사짓다 보면 옛날 땅 주인이 나타나 내놓으라고 한다. 다른 땅 찾아가 빚내서 개간하면 또 땅 주인이 나타난다. 이렇게 옮겨 다니면서 빚만 늘었다."

 

이춘심씨도 말했다. "우리네는 그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남의 땅만 파다 볼장 다봤어유."

곳곳에 쳐진 철조망과 '지뢰' 표지판도 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처'를 대변한다. 요즘은 없지만 예전엔 산나물 뜯다 지뢰를 밟아 다친 사람들도 많았다.

 

정리되지 않은 '과거사'에 가위눌려 있는 이 지역은 본디 명당으로 불린 땅이었다.

 

몇 안 남은 원주민 중 한 사람인 정하승(80)씨가 말했다. "'금강지남 오대지북 두리허 피난지라'(금강산 남쪽 오대산 북쪽의 둥근 지역이 난을 피할 만한 곳이다)는 말이 있지. 그래서 옛날 팔도에서 사람들이 여기로 모여들었어. 특히 함경도 평안도 사람들이 많았지."

'난을 피할 수 있는 명당'을 차지하려 남북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니, 주민들은 난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마을 전체가 풍비박산 나고 이주민들이 전쟁의 고통을 떠안고 사는 형국이 됐다.

 

함경도 말 같기도 하고 충청도 말 같기도 한 투박한 사투리

 

untitled-11_copy.jpg이런 가운데서도 주민들이 희망을 잃지 않는 건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이주민들끼리의 독특한 동지의식 때문이다. 1차 입주 때 들어온 영산약방 주인 이병철(77)씨가 말했다. "사람들이 다 착해요. 어렵게 살아도 험악한 일 없이 열심히들 살지."

 

논밭에서 일하던 어르신도, 자전거 타고 가던 아주머니도 길을 묻거나 마을 이야기를 청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반긴다. 함경도 말 같기도 하고 충청도 말 같기도 한, 투박한 강원도 산골 사투리로 마을 자랑을 늘어놓는다.

 

"뭐이가 볼만 하냐구? 구름바달 사진 찍을램 제4땅굴쪽 산길이나 도솔령 쪽으루다 올래가이지. 올래가다나문 내리다비켜(올라가다 보면 내려다 보여). 민들레꽃밭을 볼램 저짝 포도밭으루 가이지."

 

해안면은 이제 을지전망대·제4땅굴 등이 있는 '안보관광지'라는 고정틀을 벗고 있다. 주민들이 힘을 모아 봄엔 산나물축제를, 가을엔 시래기축제를 열어 관광자원을 키워간다. 올해 안에 도솔산 터널이 개통되고 도솔천 저수지가 완공돼 농업용수 걱정도 덜게 되면, 주민들의 생활여건은 한결 나아질 전망이다.

 

지금 해안면 산자락엔 민들레꽃이 지천이다. 팔도에서 이주해와 '한 그릇'에 담겨 50여년 애환을 함께 한 해안분지 주민들. 홀씨로 떠돌다 한데 모여 눈부신 꽃밭을 이뤄가는 민들레를 닮았다.  


◈마을의  역사에 얽힌 이야기들

 

바다 해(海)자가 아닌 돼지 해(亥)자가 된 전설
석조물엔 총탄 자국 그대로…곳곳 선사 유적도

 

숙제는, 끊어지다시피 한 이 마을의 전통을 일부라도 되살리면서 새 전통을 쌓아가는 일이다. 전쟁 전부터 해안면에서 살아온 원주민 가구가 몇 남아 있지 않은데다, 어르신들은 거의 세상을 떴다. 왜정 때 900여 호가 살았고, 영조 때에도 500~600명의 주민이 살았다는 마을의 내력, 구석구석 서려 있을 옛 이야기들이 묻혀가고 있다.

 

해안면 총무민원담당 정충섭(51)씨가 말했다. "일제 때 작성한 토지대장을 보면 산 밑 구석구석까지 전과 답이 깔려 있어요. 오래 전부터 상당히 많은 주민이 살아 왔던 걸로 보입니다."

 

해안이란 지명은 돼지 해(亥)자와 편안할 안(安) 자를 쓴다. 오래 전엔 바다 해(海) 자를 썼다고 한다. 당시 이 지역엔 주민들이 나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뱀이 많았는데, 한 스님이 '바다 해(海)자 지명을 뱀과 상극인 돼지 해(亥)자로 바꾸라' 해서 바꾸고 돼지를 많이 길렀더니 뱀이 사라졌다고 한다.

 
untitled-14_copy.jpg해안분지가 오래 전엔 거대한 호수였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산 중턱에서 조개껍데기가 발견된 적도 있다고 한다. 원주민 정하승씨는 "보통 개간할 때 평지에서 산 쪽으로 올라가며 경작하는 게 상례인데, 여기 산자락의 옛 경작지를 보면 위에서부터 개간해 내려온 흔적이 뚜렷하다. 물이 고여 있다가 빠지면서 차차 아래로 경작해 온 게 아닌가 여겨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안지역의 선사시대 유적들은 분지 한가운데 평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만대리 구시장(왜정 때까지 시장이 섰던 자리)은 청동기시대~초기 철기시대의 '점토대토기'(점토 띠를 두른 토기)가 발견된 지역이다. 지난 4월부터 국립 춘천박물관 쪽이 선사유적지 발굴작업을 진행(5월말 1차 완료)하고 있다.

 

이현리의 논 옆에 있는 일명 돛대바위의 갈라진 바위들엔 선사유적의 하나인 성혈(다산을 기원하며 바위에 파놓은 구멍) 수십개와 석기 따위를 갈아서 파인 흔적으로 여겨지는 홈들이 여러 개 보인다.

 

옛 마을 흔적으론 현리 주유소 앞 화단에 모아 놓은 선정비와 불망비, 해안면사무소 앞 화단에 모아둔 석조물 등이 남아 있다. 모두 총탄 세례를 받아 상처투성이 몰골들을 하고 있다. 주유소 건너편 부대 초소 자리에 옛 면사무소가 있었고 그 이전에도 관청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옛 관청 자리는 해안의 중심이어서, 각 마을과의 거리가 10리 안쪽이었다고 한다.

 

untitled-9_copy.jpg


현재의 해안면사무소 앞 석조물 중에 부도가 하나 있다. 부도 앞면에 '정약당(또는 정야당)'(定若堂)이라 새겨져 있다. 받침돌은 작은 사각형인데 네 면과 모서리 네면 등 여덟 곳에 작은 불상 형상들이 보인다. 면 직원들의 말에 따르면 오유리 저수지 위쪽에서 굴러온 것을 가져다 세운 것이라고 한다. 해안엔 오유리의 절터, 만대리의 탑골, 이현리의 절골(사곡·절터골) 등 절 관련 지명이 몇개 남아 있다.

 

만대리 3반 반장 이해수(45)씨 집 앞 논엔 두 그루의 커다란 느릅나무가 마주 서 있다. 주민들은 이 나무를 '형제목', 이 지역을 느릅나무뜰이라고 부른다.

 

부친 때부터 해안에 살았다는 논 주인 조규학(60)씨가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어렸을 때도 저 나무 굵기가 저 정도였다고 해요. 키가 엄청 컸는데 몇 년 전에 태풍으로 부러졌어요. 옛날 저 자리에 연못이 있었는데, 형제가 빠져죽은 뒤 연못을 메웠더니 나무 두 그루가 자라났다는 전설이 있죠. 전에는 저 두 나무 사이에 나무를 걸쳐 그네를 매놓고 탔어요."

 
untitled-15_copy.jpg이해수씨 말은 좀 다르다. "저 두 나무 사이에 깊은 우물이 있었어요. 땅을 파고 돌을 쌓아 만든 우물인데 나도 봤어요. 총각·처녀가 그네를 타다 거기 빠져죽었다는 얘기가 있죠."

 

3대째 해안면에 살고 있다는 정하승씨를 논·밭으로 찾아가고 집으로도 찾아가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 몇 토막을 들었다. 그는 팔순의 나이에도 새벽 4시반에 일어나 저물 때까지 4륜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며 논밭일을 해치웠다. 이현리에서 태어나 같은 마을에서 살던 부인과 결혼한 그는 옛 마을 모습과 마을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상히 기억했다. 전쟁 때와 전쟁 뒤 춘천에서 산 10년간을 빼곤 해안에서 살았다고 한다.

 

"지금 해안에 드나드는 고개는 동면으로 가는 도솔령과 인제 서화로 가는 물골 길 둘밖에 없지만, 전쟁 전엔 넷이었다. 북쪽의 진고개(이현·서희령), 고성 쪽으로 가는 달산령(월산령)이 있고 인제 쪽으로도 지금 길이 아닌, 봉수대가 있던  멧멧치(먼멧치) 쪽으로 넘어 다녔다. 도솔령도 지금 길이 아니고 터널 뚫고 있는 쪽에 옛길이 있어. 운천리 위쪽으로 해서 대암약수터 뒷길로 넘어 다녔다. 도솔령 가기 전에 운천리에 양씨 집 주막이 있었고, 동면 쪽으로 넘어가면 거긴 또 고상근네 집이라구 주막이 있었다."

정씨는 왜정 때 '공출 바치러' 도솔령 옛길로 동면까지 걸어갔다 오는데 하루 종일 걸렸다고 말했다. "새벽 4시에 쌀 반 가마씩 지구 떠나면, 갖다 바치고 오는 길에 비료 한 푸대를 사 짊어지고 오곤 했는데 밤 11시에야 집에 도착했지."

 

광복 뒤 38선 이북에 속했던 해안지역에선 전쟁이 나자 주민들 대부분이 북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당시 미군이나 국방군한테 잽히면 사지를 묶고 전기 찜질해서 죽인다는 소문이 퍼졌어요. 그러니 거의 다 올라갔지."

 

다음날 아침 돛대바위를 찾아가는 길에 4륜오토바이를 탄 정씨를 다시 만났다. 그는 벌써 고추밭 이랑에 비닐 씌우기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저짝 저 바우 무더기 있잖우. 거기가 돛대바우야."

 

4륜오토바이 가속기를 밟던 그가 다시 멈춰섰다. "그리구 말유. 옥녀산발형 언덕은 저 바우 너머로 보이는 도톰한 언덕배기야. 거기 방씨 시조묘가 있었지. 잘 보구 가우."

'친절한' 정하승 할아버지의 4륜오토바이는 집을 거쳐 산소로 향할 것이다. 전날 밤 정씨가 말했었다. "내일이 우리 아부지 기일이거든."

 

3대째 사는 정하승씨 전설과 추억 버무려 3시간 ‘산 증언’

 
untitled-12_copy.jpg정하승씨가 저녁 7시반부터 밤 10시반까지 풀어놓은,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들을 간추리면 이렇다.

 

"절터골이라구, 피난터골이라구두 했는데. 오유리 뒤로 들어가다나문(들어가다 보면) 돌탑이 있었어. 쬐끄만 3층 석탑인데 나중에 탑은 없어지구 바닥돌만 남았더라구."

 

"저기 가칠봉이라구 있지. 그 이름이 원래는 과칠봉이야. 산 밑에 또 작은 가칠봉이 있는데, 그 중턱에 옛날 서당터가 있어. 거기서 공부한 이들이 과거를 봐서 일곱명이나 합격했다는 거야. 그래서 산 이름이 과칠봉이야. 금강산 1만2천봉 중에 맨 마지막 봉우리가 과칠봉이지."

 

"처음 우리 할아버지가 세 살 난 우리 아버지를 데리고 함흥에서 여기 들어왔대. 내가 이현리 583번지에서 났어. 아버지가 전해들은 말로는 여기가 옛날엔 늪이었대. 또 옛날 노인네들 말로는 저 가칠봉 중턱에서 나룻배 같은 배 조각을 봤다는 이도 있어. 그건 공갈이겠지. 물이 찼었다는 얘긴데 지금은 물이 적어 지하수를 퍼 올려서 농사짓지. 그래도 골짜기로 올라가면 아직 물이 많아. "

 

"저 전망대 아래쪽 산자락에 '옥녀산발형'이라구, 처녀가 앉아 머리를 빗고 있는 형국의 언덕배기가 있는데, 거기에 방씨 집안의 시조묘가 있어. 거기서 이현리 쪽에 있는 바위(돛대바위·선사시대 유적인 성혈이 있는 바위)를 내려다보면 그게 돛단배가 나아가는 모습으로 보이는 거야. 한 중이 찾아와 방씨 집에 시주를 청했는데, 거절한 거라. 그러자 이 중이 '저 바위를 잘라내야 집안이 잘 될 것'이라고 하고 떠난 거야. 방씨 집안사람이 결국 그 돛 모양의 바위를 잘랐는데, 거기서 피가 흘렀대. 그리고 나선 어떻게 되긴, 방씨 집안은 망했지. 거꾸로 알려준 거지. 그 바위가 돛대바위야. 지금도 있지. 거기가 송정말인데, 바위 옆으로 아름드리 소낭구(소나무) 한 열 그루가 줄지어 있었어. 아주 멋있었지. 인공 때 그걸 잘라다간 중학교 짓는 데 썼어."

 

"지금 해안중학교 앞 길 옆이 외솔배기야. 거기 엄청나게 큰 소나무가 있었어. 길 쪽으로 늘어진 가지가 멋있었는데 거기 올라가 누워 잠도 잤지. 여학생 지나가면 친구들과 밑으로 오줌을 싸며 짓궂게 굴었지. 피난 갔다 와보니 없어졌어."

 

"이현리엔 또 팔송정이라구 큰 소나무 여덟 그루가 둥그렇게 모여 있었는데, 거기서 그네를 매구 타면 앞 소나무 늘어진 가지까지 이래 치고 올라가곤 했지. 다 없어졌어."

"대암산 밑 골짜기, 도솔천 상류에 사당이 있어. 엄청나게 큰 당나무 아래서 4월에 제를 올리고 '갈령'(모내기에 앞서 가죽나무·떡갈나무 따위 새 가지를 꺾어다 논에 깔고 갈아엎어 거름을 삼는 날을 받는 일)을 받지. 소만에 갈령을 받아 망종 때 모를 심었는데, 요즘엔 한달 이상 모내기가 일러졌어."

한겨레 이병학 여행전문기자 leebh99@hani.co.kr

 

Leave Comments


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