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손, 두 다리 없는 나겉은 사람도 사는디” 길에서 만난 사람

[길에서 만난 사람] 담양 대덕면 매산리 김순용씨

 

건달생활 ‘환락’ 끝에 살 썩어들어 16번 수술

35년 휠체어 인생 “맘 바꾸니께 살만 해부요”

 

 

“몽한각을 보러 오셨구먼.”

 

Untitled-2 copy.jpg전남 담양군 대덕면 매산리. 몽한각(夢漢閣, 지방유형문화재) 문 앞을 기웃거리는데 ‘스르르’ 그가 다가왔다. 미남형 얼굴에 활기찬 표정, 자신감 넘치는 말투의 어르신이었다.

 

당당한 자세로 전동휠체어에 앉은 그에겐 두 손이 없었다. 그가 팔목으로 담 안쪽의 오래된 건물을 가리켰다.

 

“저것이 양녕대군의 증손 이서 선생의 재실이여. 나가 요기 매산리 14번지에서 태어나 지금껏 사는디, 저 후손들 제사 지내는 거 많이 지켜봤제.”

 

짤막한 바짓가랑이가 펄렁일 뿐 그에겐 두 다리도 없었다. 그가 두 팔목으로 담배 한 개비를 꺼내더니, 허벅지 사이에 라이터를 꽂고 뭉툭한 팔목 끝으로 불을 켜 담배를 피워물었다.

 

“나? 핫핫핫, 젊어서 무분별한 삶을 살아온 결과여. 돈이구 명예구 다 헛것이란 걸 그때 알아부렀지.”

 

백바지에 백구두 신고 술과 여자에 빠져

 

김순용(61)씨. 스물여섯에 병으로 두 손과 두 다리를 잃고 35년을 휠체어에 앉은 채 살아왔다.

 

“나가 살아온 이야길 책으로 써도 이만치는 될 것이여.”

 

그는 할 말이 많았다. 차의 시동을 끄고 오자, 그가 전동휠체어의 시동을 걸었다. 그늘 쪽으로 자리를 옮기며 김씨가 말했다.

 

“나가 국민학교 육학년때 전교 회장을 혔어. 그란디 이눔으 집구석이 얼마나 가난했던지 중학교 갈 돈이 없었어.”

 

지게 지고 산에 가 나무를 해다 장에 팔아 생활비를 보탰다. 가난을 떨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 “에라 군대에나 가불자” 하는 마음으로 육군 포병학교에 입대했다. 그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엄마 젖 더 먹고 오라’는 걸 우기고 버텨서 입대해 무전병 생활을 하고 제대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제대하고 나니 “겉멋이 잔뜩 들면서” 인생이 꼬여 갔다.

 

“착실허게 넘으집살이나 했으면 좋았을 것인디 건달생활로 풀려버린 거여.”

 

속리산·지리산 등 관광지에서 관광버스 손님들을 민박집과 식당에 연결해 주는 일을 했다. 잘 생긴 얼굴에 입심까지 좋은 그는 한 철만 일해도 수십만원을 거뜬히 벌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라면 한 그릇이 이십오원, 삼십원 하던 때니께로 겁나 벌어들인 것이제잉.”

 

주머니가 두둑해지니 생활이 방탕해지기 시작했다. 김씨가 두 팔을 들어올려 어깨와 팔뚝 근육을 자랑하며 말했다. “나가 젊었을 적엔, 뭣이냐 그 아랑 드롱 요런 것들은 내 앞에서 쪽도 못쓸 정도였어야. 동네 처녀들이 줄줄 따라다녔응게.”

 

술과 여자에 빠져 살았다. 하루에도 목욕탕·이발소를 몇 차례씩 드나들며 멋을 내고, “백바지에 백구두”를 맞춰 신고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충격적인 병마가 찾아왔다. 동맥경화로 인한 합병증으로 손발이 썩어들어가는 병이었다.

 

“점점 썩어들어 오는 걸 열여섯 번이나 수술해서 요렇게 잘라내부렀어.”

 

멋을 부리는 일도, 여자 유혹하는 일도, 돈 버는 일도 모두 한순간에 끝나 있었다. 휠체어에 실린 채 ‘매산리 14번지’ 태어난 곳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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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결심도 여러 번, 그러나 ‘일용 엄니’같은 어머니 때문에…

 

몇 번이나 자살을 생각했지만, 옆에서 줄곧 지키며 보살피시는 어머니 때문에 살 수 있었다. “어머이 얼굴을 볼 때마다 ‘아, 나가 이래선 안 되것구나’ 하는 마음이 들면서 종교도 갖게 되고 마음도 차츰 편안해집디다.”

 

김씨가 몽한각 들머리에 우뚝 선 아름드리 소나무를 한참 바라본 뒤 말을 이었다.

 

“우리 어머이가 말이여. 꼭 그 ‘일용 엄니’ 비슷혀. 나가 밥을 안 묵으면 말여. ‘야 이눔아, 너그 안 묵으면 나도 안묵어부릴란다’ 해부링게.”

 

김씨는 3년 전 어머니를 여의고 혼자 살고 있다. “어머이 없으니 생활한다는 것이 참말로 천지 차이드락게. 도우미가 찾아와 밥 해주고 빨래하고 청소해 주는 덕에 그나마 살제.”

 

잠시 어두워졌던 김씨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나가 요렇게 구질구질허게 살아도, 쩌그 저놈 땜시로 외롭지 않어야. 야, 복실아아.”

 

김씨가 자신의 집 쪽으로 휠체어를 몰며 복실이를 부르자, 흰둥이 한 마리가 꼬리를 치며 그를 향해 달려나왔다. 그의 삶의 동반자이자, 집을 지켜주는 충실한 파수꾼이다. 김씨가 복실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음을 바꾸니께로 세상이 아름다워집디다. 행복이란 것이 돈 허고는 한낫도 상관없는 것이여. 적게만 여겨지던 생활비 지원금과 수당도 고놈만 갖고 사니께로 살만 혀.”

 

이것저것 갖다주는 `동상'들이 “아따, 형님 땜시 힘이 생겨부러야”

 

Untitled-1 copy.jpg한때 서울의 지하철 등을 떠돌며 구걸생활도 했다는 그가 고향에 정착하고 사는데는 주변에서 그에게 쏟는 관심과 도움이 큰 구실을 하고 있다.

 

“나가 동상들은 참말로 많어야. 여기저기서 아우들이 냉장고도 바꿔 주고, 세탁기도 농짝도 갖다 주고 하니 고맙기만 하지.”

 

그가 “뭐땀시 요렇게 자꼬 들고들 오냐”고 하면 ‘수많은 동생들’은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아따, 형님의 활기차고 유쾌한 모습을 볼 때마다 힘이 생겨부러야. 형님이 힘을 주는 덕에 사니께로 요로코롬 형님 얼굴 보러 오는 것이요.”

 

수동 휠체어를 몰던 김씨는 3년전 정부가 전동휠체어를 새로 지급하면서 이동이 한결 수월해졌다.

 

“쩐에는 바퀴 미느라 팔이 뻬빠처럼 되아부렀어야. 인자 아주 편해졌는디 요것이 또 문제여. 운동 안허고 편하게 쉽게 다녀부링게 배만 나와부러. 그랑게 사람이 너무 편해도 안되아야.”

 

그 때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왔다. 김씨는 두 팔을 손처럼 능숙하게 써서 휴대전화를 꺼내 받았다. ‘신의 손’이란 김씨의 팔을 가리킨 말이었다. 이번엔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뾰족한 철심이 달린 둥근 플라스틱을 팔에 끼고 번호를 철심으로 하나 하나 눌러 통화를 했다.

 

약속이 있어 그만 가봐야 한단다.

 

김씨가 밝고 당당한 표정으로, 한 팔을 번쩍 들어 배웅 인사를 하며 말했다.

 

“쩌그, 시상살이가 아무리 어려워도 말이여, 좌절하덜 말고, 나겉은 사람도 쫌 보구 살아라아, 요로코롬 좀 써 주씨요잉.”

 

담양/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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