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 갯벌 명성 회복 밀물 조금씩 조금씩 마을을 찾아서

[마을을 찾아서] 태안 볏가리마을

 

시커먼 기름 범벅 가슴엔 그대로 남아 한숨만
동물농장·소나무숲길 명물…한때 1만명 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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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유출 사고 6개월째를 맞은 충남 태안. 농어촌 체험마을로 인기를 끌던 이원면 관1리 볏가리마을은 평화로워 보였다. 논에선 모내기 마무리 작업이, 밭에선 마늘 수확이 한창이다. 소원을 빌며 구멍을 통과하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구멍바위도, 주변의 모래밭도 갯벌도 언제 기름파도의 직격탄을 맞았나는 듯 깨끗하다. 수많은 자원봉사자들과 주민들이 추위를 견디며 돌 하나, 모래 한 줌까지 정성을 다해 닦고 씻어낸 결과다.

그러나 거리 분위기와 주민들 표정은 어두웠다. 사라진 듯이 보였던 시커먼 기름 찌꺼기는 고스란히 주민들의 가슴 속에 쌓여 있었다.

 

뭐 하나 해결된 게 있남유. 정부 쪽이구 삼성이구 그저 기다리라구만 했지 제대로 대책 하나 내놓은 게 없시유. 속 터져 못 살겄시유." 모내기를 끝낸 논을 살펴보던 볏가리마을의 테마마을 추진위원장 한원석(70)씨가 한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바닷가 접한 농촌 풍습 재현…무르익자 ‘기름 벼락’

 

볏가리마을은 2003년 주민들이 힘을 모아 농촌체험 행사를 시작한 이래 해마다 1만여명의 발길이 이어지던 곳이다. 바닷가에 접한 농촌마을의 풍습을 재현하고 염전·갯벌·농산물 수확 체험 등 각종 행사를 펼쳐 왔다. 도시민들의 방문이 급속히 늘어나던 때에 '기름 벼락'을 맞았다.

 

"아주 발길이 딱 끊어졌시유. 3월까지는 좌우간 전화 한 통화 읍더라구유." 해마다 음력 1월14일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펼쳤던 볏가리 세우기도, 염전 체험용 수차 돌리기도 중단됐다. 대를 이어 바다에서 가꾼 굴 양식장은 "딱 제철에" 만신창이가 됐다.

 

주민들은 자원봉사자들의 발길이 끊어진 뒤로도 해안의 마무리 방제작업에 몰두했다. 인건비도 나온다는 말에 다른 일 제쳐두고 방제에 매달렸다. 전 주민이 격일로 나가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걸레로 바위틈 닦는 일을 했다. 그러다 지난 5월26일, 태안 주민들은 작업을 중단했다.

 
 
4581_untitled-3_copy.jpg이원면의 한 식당 주인이 말했다. "'영국 보험사에서 인건비 다 나오니까 걱정 말고들 해라'해서 생계를 팽개치고 방제작업에 나섰는데, 몇 달째 소식이 없시유. 전기료두 못 내게 생겼는디 인자 우린 워치케 산대유." 군청과 방제업체 관계자를 만나 따졌지만, 답변이 없자 방제작업을 멈춘 것이다.

 

한원석씨는 "6개월 동안 생계지원비로 가구당 50만~300만원씩 두 차례 받은 게 전부"라고 말했다. 관1리 주민 정원영(72)씨는 "대대로 먹고 살아온 10만평 마을 굴밭이 무허가 양식장이라서 보상이 없을 수도 있다니 환장할 노릇"이라고 말했다.

 

지난 5월29일 태안군 8개 읍·면 주민 1천여명은 서산 대산읍의 삼성토탈 공장 앞으로 몰려가 삼성의 배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일관하는" 삼성 쪽에 답변을 요구했다. 태안군의회 의장과 보상대책위원장 등 주민 4명은 따로 서울 이건희 전 삼성 회장 집 앞에서 12일간 단식 농성을 하기도 했다. 지난 5일 "일주일 안으로 답변을 주겠다"는 말을 듣고 단식을 멈췄다. 태안 주민들은 "6월 중순까지 납득할 만한 답변이 없을 경우 어선을 동원한 해상 봉쇄시위를 벌이겠다"고 벼르고 있다.

 

오랜만에 울린 어린이들 해맑은 재잘거림에 한 가닥 희망

 

태안 주민 전체가 겪는 이런 어려움 속에서 그나마 볏가리마을이 희망을 잃지 않고 있는 건 "조금씩이나마 이어지는 방문객들"이 있어서다. 볏가리마을 사무장 손영철(42)씨가 말했다. "한때는 낙담하기도 했지만, 얼마 전부터 각 단체, 학교들과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일부러 우리 마을을 찾아줘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지난 5월29일과 30일 볏가리마을에는 오랜만에 어린이들의 해맑은 재잘거림이 울려 퍼졌다. 1박2일 일정으로 이곳을 찾은 서울 상도4동 '공동육아 해와달 어린이집' 16명의 원아들이다.

 

두 명의 교사와 함께 온 어린이집 김지나(46) 원장은 "체험거리가 많고 주민들이 친절해 해마다 이곳을 찾는다"며 "이번엔 기름유출 때문에 걱정했는데 직접 와 보니 해안도 깨끗하고 모든 게 정상적이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볏가리마을에서 요즘 체험할 수 있는 행사로는 마늘 캐기, 염전 체험, 인절미 만들기, 갯벌 포장마차 타고 구멍바위와 갯벌 찾아가기, 동물농장 체험 등이 있다. 대형 식당과 세미나실도 갖췄다.

 

이 마을의 자랑거리 중 하나가 동물농장이다.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당나귀·타조·염소·양·토끼·사슴·공작·칠면조 등 23종에 이르는 동물들의 생태를 배우며 관찰하고 먹이를 준다. 동물농장 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는 거닐 만한 멋진 길이 이어진다. 소원을 적은 종이를 한지 주머니에 넣어 매달아 두는 '소원의 숲'을 거쳐 구멍바위가 있는 바닷가로 내려가는 산책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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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석 추진위원장은 "어패류 채취 체험을 빼고는 모든 체험이 가능하다"며 "이게 다 각지에서 찾아와 고생한 자원봉사자들의 눈물겨운 봉사활동 덕분"이라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펄낙지 굴로 이름 나…박속밀국낙지탕 대표음식

 

이원면은 태안반도에서 북쪽으로 다시 길게 뻗어 나온 반도로 이뤄졌다. 자연산 펄낙지와 굴로 이름난 고장이다. 반도 왼쪽 서해안으론 꾸지나무골해수욕장 등 모래밭과 바위자락이 이어지고, 오른쪽 가로림만에는 널찍한 갯벌과 염전이 펼쳐져 있다.

 

이 청정 갯벌과 여기서 자란 해산물로 관광객을 맞던 식당들이 기름유출사고의 직격탄을 맞은 건 물론이다. 원북면과 이원면에는 이 지역 전통음식인 박속밀국낙지탕을 내는 식당들이 많다. 이원면소재지의 이원식당은 지역 가정에서 만들어 먹던 박속밀국낙지탕을 가장 먼저 식당 차림표에 올려 수지맞는 장사를 해온 곳이다.

 

박속밀국낙지탕이란 낙지탕에 박의 속살을 무처럼 잘라 넣고 수제비나 칼국수를 곁들여 끓여먹는 음식이다. 박속과 야채가 들어간 국물을 끓여 낙지를 야들야들하게 익혀 먹은 뒤 수제비·칼국수를 끓여 먹으며 마무리하는, 훌륭한 술안주이자 속풀이용 해장국이다. 이원식당 주인 조형호(54)씨는 이원반도 당산리·내리 일대의 갯벌을 찾아가 주민들이 손으로 잡은 낙지를 모아 사들인 뒤 손님상에 내 왔다.

 
7899_untitled-2_copy.jpg"외지 손님은 지금두 별루 없시유. 손님이 딱 끊어지구 나서는 동네 사람들이나 와서 쪼끔 먹었는디, 1~2월엔 한 50마리를 가지구 파는 데 한달이나 걸렸시유."

 

기름유출 사고 전까지 낙지를 수백마리씩 수족관에 넣어두고 장사를 해온 조씨는 "4월까지는 종업원 월급도 안 나오는 장사를 하며 울며 겨자 먹기로 가게 문을 열어 왔다"고 말했다. 5월 들어 외지 손님들이 조금씩 오는데 "혹시 기름 묻은 갯벌서 잡은 게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낙지야 인자 여기서 잡을 수 있깐유. 얼마 전까지 목포·신안에서 소량씩 사다 썼지유. 요즘엔 천수만 갯벌서 잡은 걸 갖다 써유." 4월부터는 기름 피해가 없었던 천수만 갯벌에서 봄 낙지가 나오기 때문이다.

 

아직은 어패류 채취 금지…교묘히 섞인 중국산 속아내

 

태안 포구 어선들의 출어 허가는 났지만, 이름난 '낙지·굴·조개 바탕'인 태안 일대 갯벌은 오염을 우려해 아직까지 어패류 채취가 금지돼 있다.

 

"조사단이 나와서 환경생태 조사해 가지구 이상이 없다 해야지유. 낙지가 좋아하는 능쟁이(작은 게의 일종)·설게(속)·갯지렁이 이런 것들이 살아 있어야 허는디, 설게는 청정지역서 자라는 건데 이게 잘 안 보인다구 하데유. 자연정화가 빨리 돼서 '낙지 잡아도 된다' 할 때까지 기달려 봐야지유."

 

조씨와 주민들은 기름 피해가 더 심한 지역을 걱정했다. "우리 지역은 그래도 피해가 덜하지만 만리포·천리포 이쪽은 아주 문 닫은 데가 많어유. 보상이라두 빨리 나와야들 먹고 살텐디…."

 

조씨 등 주민들은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가로림만 안쪽 개펄이라도 이른 시일 안에 채취 허가가 나오길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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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지를 척 보면 어디서 잡은 건지 안다"는 조씨가 낙지 구별법을 몇 가지 알려줬다.

 

"낙지는 태안 것이든 목포·무안 것이든 뻘낙지가 맛과 영양에서 최고다. 갯벌에서 능쟁이·갯지렁이·조개·망둥어 등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깊은 바다에서 통발로 잡은 낙지는 맛에서도 떨어지고 때깔부터가 다르다. 뻘낙지는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것처럼 빛깔이 곱다. 때깔이 좋으면서도 몸에 조금씩 상처가 있는 경우가 많다. 갯벌을 삽으로 파고 손으로 끄집어내느라 조금씩 상처가 생긴다. 같은 뻘낙지라도 목포·신안·무안 등 남쪽 것은 머리가 작고 다리가 긴 편이다. 태안 일대 뻘낙지는 머리가 크고 다리가 짧은 편이다. 중국 것은 대체로 벌건 색을 띄고 몸집이 더 크다. 상인들 중엔 중국 것을 교묘히 섞어서 파는 이들도 있는데, 낙지를 다뤄본 사람은 척 보고 골라 빼버린다. 국내산보다 맛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볏가리마을>

 

한 가족이라도 미리 연락하면 농촌 체험행사를 진행한다. 4인 가족이 1박2일 숙박과 3끼 식사, 갯벌·염전·솟대만들기·동물농장·마늘캐기 등 체험행사 포함해 12만원이다. 식사는 주민들이 직접 준비한 향토식. 당일 4가지 체험비는 1인 7천원. 테마마을 추진위원장 한원석씨 011-9635-9356. 태안군청 문화관광과 (041)670-2433.

 

<가는 길>

 

수도권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서산나들목을 나와 32번 국도 타고 서산 거쳐 태안으로 간다. 태안 남문교차로에서 우회전한 뒤 남문 사거리에서 원북·이원 쪽으로 좌회전한다. 곧 나오는 교통광장 오거리에서 학암포·이원 쪽으로 직진, 반계리에서 이원 쪽으로 직진하면 원북면 소재지를 거쳐 이원면 소재지에 이른다. 여기서 직진해 한 굽이 넘어가면 길 왼쪽에 볏가리마을 팻말이 나온다.
   

태안/글·사진 이병학 한겨레 여행전문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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