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 전통 벌꿀 따며 땀도 정도 품앗이 마을을 찾아서

[마을을 찾아서] 산골체험·벌꿀 마을 곡성군 상한리

 

섬진강 줄기와 보성강 만나 봄빛 짜 내려가는 곳
수십년전 풍경 서린 골목과 돌담 흙집 다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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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따라 가니 봄이 온다. 나른해진 물살이 속살 다 보여주고, 햇살 만난 여울은 꽃빛으로 반짝인다. 몸 비틀며 내려온 섬진강 줄기와 보성강이 만나 껴안고 구례·하동·광양으로 봄빛을 짜 내려가는 곳. 곡성군 죽곡면 봉두산(동리산) 자락에 아지랭이 흙냄새가 아찔하다.

 

봉두산 밑 첫동네 상한리(웃한배미·하늘나리마을)에 망박골, 매네미골 얼음 녹은 물이 자지러지자, 20여 가구 40여명 어르신들도 봄맞이에 나섰다. 밭이랑을 뒤집고 벌통을 살핀다. 민박집을 단장하고 고로쇠 물을 받는다.

 

23년 만에 아이 울음소리…“요것이 우리 마을 공동 손주랑게”

 

최연소 마을 주민 최호원(5)군도 네번째 봄을 맞았다. 마을 이장 김재택(69)씨가 말했다. “요것이 말이여, 우리 마을 공동 손주랑게.”

 

4년 전 상한리에, 23년 만에 아기 울음소리를 터뜨려준 복덩이다. 부산 출신 홍수진(33)씨가 시집오면서 생긴 경사다. 호원이가 돌담길, 논밭둑길을 재잘재잘 내달리면 마을이 다 환해진다.

 

상한리 어르신들은 올봄 또 ‘공동 손주’ 하나를 볼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1년 전 캄보디아에서 짠튼(26)과 싸롬(24)이 시집을 왔는데, 두 새색시 중 싸롬이 4월 출산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그들이 자꼬 울어싸야 마을이 마을답게 되아가는 것이제. 그라지 않소잉.” 노인회장 김재우(74)씨가 말했다. “두 시악시는 우리 마을 공동 메눌아가 되아부렀어야. 아, 인사도 말도 일도 음식도 담숙담숙 잘허닝께로 다 좋아하지라.” 한 달 뒤엔 또다른 캄보디아 처녀가 시집올 예정이어서 상한리 주민의 평균 나이는 지속적으로 낮아질 전망이다.

 

캄보디아 출신 ‘공동 메눌아’도 둘…집집마다 울 안에 벌통 

 

Untitled-2 copy.jpg옮겨온 이들과 주민들이 별 마찰 없이 사는 건 옛날부터 탄탄하게 다져온 공동체 의식 덕이다. 산속에서 어떻게든 살자니 무슨 일이든 품앗이 형태로 도와야 했다. 웃한배미란 마을 이름은, 땀을 빼야 먹고 사는 위쪽 논배미란 뜻이다. 다랑논에서 농사지은 곡식을 모두 지게로 져 나르느라 서로 돕고 땀을 흘려야 했다. “국방군·인민군 번갈아 들이닥쳐도 마을 사람들은 합심해 서로 입조심하고 감싸며 버텼다.”

 

주민의 선조들은 300년 전 순천 서면에서 이주해 와 마을 위 골짜기인 망박골에서 살다 지금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김재택씨가 말했다. “우리 동니가 요 근방서는 명풍(명당)인디, 쯔으기 진작부터 ‘육천기지연후 대길’(六遷基地然後大吉·터를 여섯 번 옮긴 뒤에 아주 좋아진다)이란 말이 내려온당게라.” 조상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이곳에 옮겨왔고 전쟁 때도 몇 번 마을을 비웠다가 들어왔으니, 좋은 때가 다가왔을 것이란 얘기다.

 

300년 전부터 대대로 이어받은 일이 토종벌꿀 생산이다. 지금도 집마다 울 안에 벌통 없는 집이 없다. 테마마을 추진위원장 강병조(55)씨가 말했다. “마을서 한 450군(통) 하는디, 꿀맛이 좋아부링께 단골들헌티 팔아도 모자래부립디다요잉.” 벌들이 싸리꽃, 국화, 밤꽃, 감돌개(감꽃) 등 수십 가지 꽃에서 모아 와 만든 잡꿀을 겨울철에만 뜬다. 옛날식으로, 소쿠리에 받치고 주물러 흘러내리게 해서 꿀을 받는다. 꿀은 마을의 주수입원이다.
“꿀 따는 고것이 베농사보덤 나스닝께 요로코롬 많이덜 허는 것이제.”

 

“밥상에 오른 반찬들이 다 보약 같아”

 

토종벌꿀 마을 전통은 몇 년 전 시작한 농촌체험 행사에도 주요 테마로 등장했다. 방문객들이 가장 즐기는 행사가 꿀 뜨기와 꿀벌 생태 체험, 밀랍공예 등이다. 밀랍으로 양초도 만들고 인형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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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심하는 전통도 체험행사에서 빛을 발한다. 어르신들은 다봉관(체험관)에 모여 행사를 준비하고 음식을 만든다. ‘공동 메눌아기들’도 일손을 돕고 ‘공동 손주’는 재롱을 부린다. 22가구 중 19가구에서 방마다 수세식 화장실이 딸린 민박집을 꾸며 체험객들을 맞는다. 난방엔 장작을 때는 나무보일러를 쓴다. 안양에서 찾아와 하룻밤을 지낸 김수현(57)씨 가족이 앞다퉈 한마디씩 했다.

 

“공기가 정말 좋고 밤엔 별이 쏟아져 내립디다.” “나는 나무 타는 냄새가 제일 좋았어요.” “밥상에 오른 반찬들이 다 보약 같아요.” “뭣보다도 이 훈훈한 고향 냄새지.”

 

국도변에서 굽이굽이 산길 따라 4㎞, 특별한 볼거리 없는 이 산속 마을에선 수십년 전 풍경을 간직한 골목과 돌담, 흙집들이 다 볼거리다. ‘76년 제4차 특별지원사업’으로 지어진,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고 적힌 공동 정미소 건물과, 아랫간에서 똥돼지를 키우던 2층 변소가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 노인회장 김재우씨가 정미소를 가리켰다. “쩌그서 베를 찧으문 좌간 밥맛이 겁나게 맛있었당게로.”

 

“음식 솜씨가 겁나불게 좋다”고 알려진 전 부녀회장 서애순(59)씨가 요즘 방문객들에게 차려내는, 5천원짜리 밥상에 오르는 반찬은 이런 것들이다. 다래순무침·염장두릅무침·매실장아찌·능이버섯무침·감장아찌·더덕무침·고들빼기무침·고춧잎·우엉·머웃대·호박말랭이 …. 다 땀을 빼면서 서로 도우며 가꾸고 채취한 웃한배미 농산물들이다.

 

주민들에게 요즘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해마다 섣달 그믐에 마을 당산제를 지내 왔으나 이번엔 지내지 못했다. 몇 해 전 새로 옮겨다 심은 당산나무가 시름시름 하더니 시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왜 새로 심었는가 하면 그 전에 제사 지내던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고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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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반장 허계준(65)씨가 말했다. “요것이 그랑께, 주변을 시멘트로 처발라불고 나서 그리 되아부립디다잉.”

 

옛 당산나무 주변엔 거대한 느티나무들이 많았는데 분교 터를 넓히면서 잘라내고 당산나무 주변을 시멘트로 둘러쌌다고 한다. 이장 김재택씨가 덧붙였다.

 

“아, 거시기 옛날 그 자리에 이 방 만헌 나무가 있었당게로. 수백년은 되았을 것이여, 차암 보기 좋았응게. 당제 지내면 면에서도 나와 깽메기(꽹과리) 치고 징 치고 했어라. 그란디 전쟁 때 인민군들 올란께 마을써 다 나오락애서 소개되았는디, 그 때 불에 타 넘어가부렀당게.”

 

어르신들은 새로 나무를 옮겨 심을지, 시멘트를 헐어낼지, 오래된 다른 나무를 당산나무로 정할지 의논해 다음번 당산제 진행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여름철에 산골마다 하늘나리꽃 세상

 

상한리에서 매네미골 쪽으로 난 임도를 따라 봉두산 정상까지는 왕복 4시간 거리다. 산 모습이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는데 불가에선 동리산으로 부른다. 이는 산 서쪽 기슭에 있는, 고찰 태안사 터가 오동나무의 빈 속처럼 아늑한 데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전설 속의 새 봉황은 오동나무 숲에 사는 새로 전해진다.

 

태안사는 신라 때 창건된 절집이다. 불교 구산선문 중 하나인 동리산문의 본산이다. 태안사엔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비의 머릿돌이 아름다운, 고려 때 선승 광자대사의 행적을 새긴 광자대사비(보물)와 신라 때 선승 적인선사를 기린 적인선사조륜청정탑(보물), 절집으로 드는 다리 위에 놓인 아름다운 누각 능파각(도 유형문화재) 등이 볼거리다. 

 

태안사로 가려면 섬진강변 압록리에서 18번 국도를 타고 보성강을 거슬러 오르다 태안삼거리에서 좌회전해 들어가야 한다.

 

상한리는 하늘나리마을로도 불린다. 여름철 산골마다 나리꽃의 일종인 하늘나리가 만발한다. 테마마을 추진위원장 강병조씨가 말했다. “앞으론 마을 들어오는 길을 하늘나리로 장식할랍니다. 방문객들에게 하늘나리 꽃씨도 나눠 주고요.”

 

올봄 어르신들이 새 ‘공동 메눌아기’를 맞이하고 새 ‘공동 손주’도 안아보게 될 웃한배미 마을에서 여름엔 하늘나리꽃잔치가 펼쳐질 모양이다.

 

곡성/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 곡성 상한리 하늘나리마을


예약을 받아 산골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1박과 3끼니, 체험비용을 포함해 어른 4만원, 어린이 3만원. 당일 체험(1끼니, 공예체험)은 어른 1만2천원, 어린이 1만원. (061)362-8501. 강병조 테마마을 추진위원장 011-9615-8501.

 

◆ 주변 볼거리 즐길거리

 

섬진강변에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다. 곡성읍 섬진강기차마을에서 가정역까지 오가는 관광용 증기기관열차가 하루 2회(평일)~4회(주말, 공휴일) 운행된다. 10킬로미터 편도 25분 거리. 왕복에 어른 5천원, 어린이 4천원. 기차마을에선 철로자전거도 탈 수 있다. 가정역에 내려 구름다리(두가리 현수교)를 건너면 청소년야영장에 이른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강변길을 쏘다닐 수 있다. 1인 2시간 3천원, 2인용 5천원. 섬진강천문대도 가까운 곳에 있다. 섬진강 주변엔 봉조리 농촌체험마을, 심청이야기마을, 두계리 외갓집체험마을, 압록유원지도 있다. 압록리 일대에 참게와 은어, 다슬기를 이용한 음식을 내는 식당들이 많다.    

 

◆ 상한리 가는 길

 

중부권에서 호남고속도로 타고 전주나들목에서 나가 17번 국도 따라 남원 거쳐 곡성으로 간다. 곡성읍 지나 섬진강변 17번 국도를 따라 10여킬로미터 가면 압록리다. 계속 압록교 건너 2킬로미터쯤 더 가면 오른쪽으로 식당이 몇집 있는 지점에 상한리(하늘나리마을) 들머리가 나온다. 여기서 하한리 거쳐 4킬로미터 오르면 상한리다.

 

호남고속도로 곡성나들목에서 나가 삼기삼거리에서 60번 지방도를 타고 곡성읍 거쳐 17번 국도를 만나거나, 석곡나들목을 나가 보성강변에서 18번 국도를 타고 강 따라 내려가다 압록에서 17번 국도로 갈아타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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