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파먹던 재주가 보배가 될 줄이야 마을을 찾아서

[마을을 찾아서] 김천 장뜰 옛날솜씨마을


태풍 휩쓴 폐허에 그래도 남은 건 어르신 ‘지혜’
농사짓고 밥해먹고 놀던 그대로 도시인 정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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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풀공예 담당 김홍배(74)씨가 가르치기의 어려움에 대해 말했다.

 

“새끼를 이래 꽈옇고 요래요래 묶어 요짝조짝 다시 꽈옇고 해서 맨드는 긴데, 한 시간을 갈콰줘도 몬 하는 기라. 계란꾸리미, 짚신 삼기도 이래 애려운데 멍석 짜기를 우예 갈치노, 고마.”

 

노인회장 최병욱(77)씨가 배우기의 어려움에 대해 말했다.

 

“고래 복잡시럽게 하모 우예 알아듣노. 저짝(방문객) 따라하기 좋쿠러 쉽게 지대로 갈차야지.”

 

경북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장뜰마을 마을회관. 방문객 체험행사 발전 방안에 대한 토의가 한창이다. 평일 밥상을 물리고 나면 가마솥 찐빵 담당, 전통 식혜 담당, 강정 담당, 옛날이야기 담당 할아버지·할머니들이 모여들어 이야기를 나눈다. 물론 국수도 삶고 화투판도 벌인다.

 

망연자실한 채 처음엔 “무슨 사업이냐” 시큰둥

 

장뜰은 평범한 농촌 마을이다. 마을 한복판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정겹고, 집마다 울타리 안팎엔 호두나무·감나무·벚나무 고목들이 즐비하다. 여느 마을처럼 아기 울음소리가 조금도 들리지 않고, 호호백발 어르신들만 고목들처럼 자리 잡고 계신다. 주민 50명 중 40여명이 60대 이상이다. 다른 점은 마을에 활기가 넘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증산면은 북으로 가묵재, 서로 가랫재, 남으론 해발 1317m의 수도산 줄기가 둘러싼 산속 평지 마을이다. 평촌리 장뜰은 수도계곡 들머리에 있다.

 

태풍 루사와 매미가 이태 연속(2002∼2003년) 마을을 휩쓸었다. “김천서 둘째 가라카마 섭한 계곡이 말해자문 수도 계곡인데, 고마 뻬만 남고 다 씰려내리가 삤어.” 세간도 가축도 떠내려가고, 집 안팎으로 돌과 모래가 가득 쌓였다.

 

시름에 잠긴 마을에 희미한 희망가가 들려왔다. 농촌진흥청이 지원하는 전통테마마을 사업. 처음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옛 관광농원사업 실패의 기억이 생생한 터에, 젊은이도 없는 산골에서 또 무슨 사업이냐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추진위원장 이보영(76)씨가 화합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했다. “저마다 땅만 파먹고 살던 사람들이 모여서 낯간지럽게 무슨 사업이냐며 시큰둥해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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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도 마 요런 재주 있다” 하나둘씩 보태 보람과 소득 ‘꿩 먹고 알 먹고’

 

재주라곤 농사짓고 밥 해먹고 놀고 이야기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재주가 보배였다. 주민 각자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모았다. 도시민을 상대로 농촌 체험행사를 벌이기로 했다. 산골의 자질구레한 일상생활 자체가, 도시민들에게 고향의 정을 느끼고 배우게 하는 ‘솜씨’로 거듭났다.

 

처음 겨우 여섯 가구를 참여시켜 시작한 일이 조금씩 굴러가게 되자, “내도 마 요런 재주는 있다 안 카나” 하며 하나 둘 다가왔다. 4년 넘은 지금은 각 분야 솜씨꾼을 비롯한 주민 대부분이 팔을 걷어붙이고 참가해 판을 키워가고 있다. 연간 6천여명의 가족·단체 체험객이 찾아와 정을 나누고 전통문화를 배우며 어르신들에게 보람과 짭짤한 소득을 안겨준다.

 

이 마을에서 즐기고 맛볼 수 있는 솜씨는 이런 것들이다. 마을에 전해오는 전통 식혜인 석감주와 약단술 만들기, 가마솥 찐빵 만들기, 짚신·바구니 등 짚과 풀로 생활용품 만들기, 밤새 마을의 옛이야기를 들으며 감자·고구마 구워먹기, 맷돌로 콩 갈아 순두부 해먹기, 옛 농기구 알아보고 직접 써보기, 나물 캐기·수확하기, 썰매타기·쥐불놀이·널뛰기·비석치기 하며 놀기 …. 야생화 터널도 만들고, 전통 차 체험도 시작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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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천여명 발길 “언제든 와가 얘기 듣자카마 밤을 새라캐도 샌다”

 

주민들이 새단장한 방에서 묵으며 그 집 안주인이 정성껏 준비한 시골 밥상을 받는 건 물론이다. 아침엔 아름다운 절집 청암사로 산책을 나서거나 수도계곡을 따라 올라 수도암까지 가벼운 산행을 할 수도 있다. 계곡엔 용소폭포·와룡암 등 좋은 경치가 숨어 있다.

 

옛날이야기 담당 박종수(75)씨가 대화의 소중함에 대해 말했다. “얘길 해야 서로 통하는 기라. 언제든 와가 얘기 듣자카마 내 고마 밤을 새라캐도 샌다.”

 

평촌리 주변엔 신라 때 창건된 사찰·암자가 세 곳 있다. 수도산(불령산) 자락의 청암사와 수도암, 증산면 소재지에 있던 쌍계사 터다. 청암사는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절로, 조선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가 폐비된 뒤 내려와 복위를 기원하며 4년을 머문 곳이기도 하다.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는 수도 도량이다.

 

수도암도 청암사·쌍계사와 같은 시기에 세운 암자로 전한다. 6·25 무렵엔 빨치산 불꽃사단 본거지였다. 법당 앞마당에 서면, 탁 트인 전망의 끝에 연꽃을 빼닮은 가야산 연화봉 자태가 또렷하다. 대적광전·약광전의 두 석불과 마당의 동서 한 쌍 삼층석탑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법당 규모가 엄청나게 컸다는 쌍계사는 면사무소 뒤 시루봉 밑에 있다가 6·25 때 불탔다. 주춧돌과 부도, 노송들만이 오래된 절터임을 짐작게 해준다.  
 

“조선 떈 숯으로, 왜정 땐 절 덕에, 인자는 체험으로 묵고 산다”

 

평촌리는 장뜰, 가랫재(가릇재), 평촌 세 마을을 아울러 이르는 행정지명이다. 이 지역은 전쟁 뒤까지도 주변 절집들의 절대적 영향권 아래 있었다. 청암사의 사세가 얼마나 컸던지, 증산면은 물론 이웃 대덕면 일대의 땅이 모두 청암사 소유였다고 한다. 광복 뒤 토지개혁이 이뤄지면서 주민들에게 골고루 분배됐다.

 

청암사의 위세는 쇠퇴했지만, 주민들의 생활 속엔 지금도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먹을거리에서도 절집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장뜰 주민들이 지금도 즐겨 만들어 먹는 석감주나 약단술, 강정, 정과, 차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귀한 손님들이 오면 주민들은 녹차나 반숙성차인 황차, 도라지로 만든 정과 등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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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감주는 돌을 쌓고 진흙을 발라 밀봉한 화덕에서 왕겨를 태운 불로 서서히 열을 가해 24시간 숙성시켜 만든다. 약단술은 이 지역에서 나는 7~8가지의 약초들을 달인 물을 사용해 발효시켜 만드는 식혜다.

 

마을에 얽힌 옛 이야기를 훤히 꿰고 있는 박종수씨가 말했다.

 

“내 봉께 우리 마을은 조선시대엔 참숯가마로 묵고 살고, 왜정 때까지는 고마 청암사 덕으로 묵고 살고, 그 뒤엔 거짓물(자작나무 수액. 줄기 껍질이 너덜너덜해 거지수, 거제수로 부른다) 가가 묵고 살았다. 인자는 체험마을 따미로 자알 묵고 산다 이기다.”

 

25년 전까지도 평촌리에선 해마다 큰 곡우축제

 

장뜰마을의 골짜기 이름 중엔 숯골, 숯구배기 등 숯 관련 지명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고로쇠물 채취 마을로도 이름 높았다. 25년 전까지도 평촌리에선 곡우축제라는 큰 행사가 해마다 벌어졌다고 한다. 곡우(4월20일) 전후 사흘간 나오는 고로쇠물이 약이 된다 해서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마을 입구부터 청암사 주변까지 인파와 노점들로 메워지다시피 했다고 한다.

 

평촌리 이장 김영수(48)씨가 말했다.

“당시만 해도 곡우 때까지 고로쇠물이 났다는 얘깁니다. 고로쇠물은 나무에 잎이 트면 상하기 시작합니다. 물을 받으면 거품이 나오는데 나무 안에서 이미 상한 상태가 된 거죠. 지금은 곡우 무렵 나오는 물은 먹지 못합니다. 온난화 때문이죠. 잎이 3월말이면 틉니다.”

 

지금 평촌리의 고로쇠물 채취는 예전 같지 않지만, 지금도 20여 가구가 참여하는 고로쇠작목반이 있다. 1월말 폭설로 그간 작업을 못했지만 눈이 어느 정도 녹으면 곧바로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엄청나게 큰 절집’ 쌍계사 얘기는 너도나도 한마디씩

 

50015.jpg장뜰마을 어르신들이 모이면 자주 하는 옛 이야기 중에 ‘엄청나게 큰 절집’ 쌍계사 얘기가 있다.

 

증산면 사무소 자리에 있다가 육이오 때 불타버린 절집의 규모에 관한 얘기다.

“에, 말해자문 어릴 때 절 마당에 가서 마이도 놀았는데, 그래 큰 법당은 내 평생 보질 몬했다.”

“누가 그카대. 우리나라 최대가 아이고 동양 최대라카대.”

“내는 법당 안에 드가 뛰어다니며 놀았다. 불상이 셋인데 그 뒤짝에 보마 음청하게 큰 구시(구유)가 있다 말이다. 기럭지가 10여 미터는 될낀데 하마 백명 분은 밥을 퍼담았을 기라.”

“괘불이 을매나 큰지 아나. 기우제 지낼라카마 두루마리를 내걸어도 다 펼치질 몬했그등. 그래가 부처님 아랫도리는 고마 보지도 몬하고 제를 지냈다 말이다. 그래도 제 끝나고 오는데 비는 억수로 쏟아지대.”

 

옛 이야기에 밝은 박봉수씨도 법당 크기에 대해 말했다.

“법당 앞마당서 장정들이 돌팔매 내기를 했그등. 법당 당마리(지붕마루) 넹기는 내긴데 아무도 몬 넹기는기라. 아무리 팔매질을 해도 당마리 앞에만 수북이 쌓여삐는 기라.”

 

어쨌거나 지금 시루봉 밑 쌍계사 터엔 법당 주춧돌·부도 등 절간의 자취만 남아 있다. 시멘트로 다른 건물을 지었던 흔적도 있다. 주춧돌 크기는 매우 크지만, 놓인 자리로 볼 때 법당 건물이 그렇게 컸는지는 의문이다. 어린 시절의 눈높이로 봤던 기억 때문일까. 주춧돌이 놓인 장방형 터 한가운데엔 연꽃무늬가 새겨진 네모난 돌이 놓여 있다. 안내판 하나 없는 버려진 신라시대 절터다.

 

절터를 둘러보고 면사무소 앞으로 나오다 만난 한 어르신에게 다시 쌍계사를 물었다.

“에, 쌍계사라. 커도 엄청 컸지. 으리으리 하그등. 내 평생에 아직도 그래 큰 법당은 몬봤다.”
 
 김천=글·사진 한겨레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 평촌리 장뜰-옛날솜씨마을

사철 도시민을 상대로 농촌체험행사를 펼친다. 체험비용은 당일 1인 1만5천원(점심 포함), 1박에 어른 3만5천원(3끼 포함) 어린이 3만원. 1가족만의 체험행사는 받지 않고 따로 날을 잡아 다른 가족과 함께 모아 운영한다. 15명 이상 모이면 가능하다. (054)437-0150. 이보영 추진위원장 018-780-0150.
 
◆ 먹을 곳

평촌리 청암사 들머리에 흑염소 고기 요리로 이름난 평촌식당(054-437-0018)과 50년째 순두부를 해오며 유명해진 할매식당(054-437-0017)이 있다. 두 집에선 청국장, 김치찌개 등도 한다. 장뜰마을 안에도 식당이 4곳 있다.

 

◆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김천나들목에서 나가자마자 514번 지방도 만나 좌회전 거창행 3번국도 표지판을 따라 간다. 구성면 지나 20여분 가면 지례면 여배2리(속수)가 나온다. 여기서 903번 지방도로 좌회전해 산길을 오른다. 가묵재(부항령) 고갯길(옛날 아흔아홉구비였다는 고개. 고개를 알리는 팻말 없음)을 넘어 내려가면 황항리 동안리 지나 증산면소재지인 옥동에 이른다. 여기서 30번 국도를 만나 우회전해 1.5킬로미터쯤 가면 청암사 표지석이 보이는 평촌리가 나온다.

 

앞서 여배리에서 3번 국도로 그대로 직진한 뒤 대덕삼거리에서 30번 국도로 좌회전해 가랫재를 넘어가도 된다.

 

더 앞서, 수도권에서 갈 경우 영동고속도로 타고 원주 쪽으로 가다 여주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우회전해 충주~문경~선산 지나 김천분기점에서 경부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추풍령 쪽으로 가다 김천나들목에서 나가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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