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농사 밑천된 ‘대학나무’ 연노랑 꽃안개 길따라 삶따라
2008.07.14 10:53 너브내 Edit
[길따라 삶따라] 제천 금수산 상천리 산수유마을
집마다 길섶마다 수백 년 묵은 350그루 터줏대감
동네와 더불어 돌은 시간이 되고 폭포는 전설로
산수유나무 우거진 상천리 백운동마을이 연노랑 꽃 안개에 잠겼다. 봄기운에 취해 안개 속으로 드니, 돌담길도 흙벽집도 꿈꾸는 듯 나른하다. 외양간은 비었고 경로회관 문도 닫혔는데, 개울가 아름드리 소나무 숲 그늘 의자에 한 할머니가 그림처럼 앉아 계셨다.
나무 한 그루에서만 산수유 2백 근 너끈히
“다들 일 나갔어유. 나야 힘이 없으니 여기 있지유.” 밭둑에서 냉이를 한 바구니 캐고 돌아와 쉬고 계신 최명순(87) 할머니다. 굽고 휜 몸으로 푸르고 널찍한 그늘을 드리우며 모여 선 10여 그루의 소나무들이 최씨를 닮았다. “이 소낭구들은 나이가 내보다 멫 배는 더 먹었을 거래유.” 최씨는 충주에 살다 육이오 때 “난리를 피해” 이 마을로 들어와 정착했다. 소나무들은 그 때도 아름드리였다.
“산수유나무두 엄청 났어유. 인제 주말만 돼 봐유. 그림쟁이랑 사진쟁이들이 말두 못하게 들어와유. 산수유꽃 볼라구.”
이 마을 산수유나무는 구례 상위마을처럼 빽빽하게 우거진 모습은 아니지만, 용담폭포에서 내려온 상천천 물길을 가운데 두고 집마다 길섶마다 고목들이 우거져 흔치않은 봄 풍경을 펼쳐 보인다. 100~300년 묵은 산수유나무가 350여 그루에 이른다. 여느 산수유마을이 그렇듯이 이곳 산수유나무도 옛날엔 ‘대학나무’란 별칭으로 불렸다. 산수유를 말려 약재로 팔아 자식 교육을 시켰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산수유나무는 홍원섭(71)씨 집 옆 물가에 있다. 갈래를 이뤄 뻗어 나온 굵직한 줄기들이 한눈에도 오래된 나무임을 알 수 있다. 나무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소를 세 마리나 매 기른다.
토박이 홍씨가 울타리 앞에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수백 년 됐을 거래유. 이 낭구에서만 해마둥 산수유를 이백근 넹겨 땄어유. 작년엔 별루 못 땄지만.” 옆에서 냉이를 캐던 홍씨의 부인 김길례(71)씨가 거들었다. “작년 그러껜가 저 개울에 세멘트 공구리를 하구서부터 시원찮아진 거래유.”
상천리 산수유꽃은 3월 중순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해 4월 초에 절정을 이룬다. 4월 중순 이후엔 복숭아꽃·배꽃과 산자락의 산벚나무 꽃들도 꽃 잔치를 펼칠 전망이다.
가는산 오는산 아흔아홉 골짜기
금수산(1016m)은 충북 제천과 단양의 경계에 솟아 있다. 청풍호 중류 북쪽, 월악산국립공원 끝자락이다. 가을이면 단풍이 비단처럼 곱다 해서 금수산인데, 이 산 남쪽 자락에 상천리가 있다. 금수산과 가은산 사이 골짜기에 자리한 상천리는 윗마을 초경동과 아랫마을 백운동으로 이뤄졌다.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때 왜적을 피해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들어와 “다래나무 덩굴을 쳐내고” 정착하면서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현재 초경동에 17가구, 백운동에 40여 가구가 산다.
초경동 끝 가은산 등산로 들머리에서 초경동·백운동마을을 내려다보면 풍경이 그림 같다. 좌우로 가은산과 금수산 줄기가 내달리고 멀리 청풍호 물길까지 눈에 잡힌다. 그 사이로 구불구불한 마을길과 집들과 숲이 스미고 짜이고 우거져 한참을 서서 바라보게 만든다. 풍광이 좋다보니 마을 곳곳에 새로 집을 짓고 들어와 사는 외지인들도 부쩍 늘고 있다.
백운동 마을 한가운데 오래된 소나무 숲이 있듯이 초경동 들머리엔 오래된 참나무 숲이 있다. 마을 당산나무숲이다. 가지 끝엔 겨우살이 뭉치와 까치집들이 뭉게뭉게 걸려 있다. 초경동 사는 한 어르신이 말했다.
“그 나무들 밑둥을 잘 보시유. 상처가 많은데, 그게 다 옛날 먹을 것 없을 때 도토리를 털기 위해 돌로 밑둥을 쳐대는 바람에 생긴 자국들이유.”
가은산을 마을 어르신들은 가는산이라고 부른다. 앞서의 최명순씨가 말했다. “고라데이(골짜기)가 많아서 산이 막 가는 것처럼 보이니 가는산이지.” 그러고 보니 첩첩이 이어지며 흘러내린 산줄기가 가는 것 같기도 하고 오는 것 같기도 하다. ‘가는산’ 줄기엔 아흔아홉 골짜기가 있는데 옛날 마고할미가 잃어버린 가락지를 찾느라 손가락으로 파서 생긴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백운동에서 ‘가는산’ 쪽을 바라보면 산자락에 비쭉 솟은 바위가 서 있다. 부르는 이름이 셋인데 뜻은 같다. 금수산쉼터 노래연습장 주인 박창호(62)씨와 상천휴게소의 박봉소씨는 ‘시계바우’라고 했고, 최명순씨는 ‘한나절바우’라고 불렀다. 지도엔 이걸 ‘정오바위’라고 표기했다. “저 바우가 한나절바우래유. 해가 저 바우 우에 오면 한나절이 지난 거니까.” 그렇다. ‘가는산’ 줄기를 따라 해와 달이 뜨고 지니 초경동·백운동의 세월도 간다.
“기우제 지내면 직빵” 금수산 제일경
상천리 주민들이 한입으로 자랑하는 볼거리가 용담폭포다. 민박집 명함에도, 숯가마 찜질방 전단에도, 휴게소 안내문에도, 노래방 사장 명함에도 어김없이 용담폭포 전경이 들어 있다. “거기서 용이 승천했는데, 폭포 위 선녀탕 옆 바위자락에 용이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과 용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고 주민들은 주장한다.
상천천 물길을 따라 20분 정도 걸어 오르면 폭포 밑에 닿는다. 금수산 정상 쪽 골짜기에서 흘러온 계곡물이 거대한 암반절벽을 만나 30m의 낙차를 두고 물줄기를 퍼붓는다. 밑에서 보는 모습도 좋지만, 바위절벽 전체와 폭포 위의 작은 폭포들, 선녀탕까지 감상하려면 폭포 맞은편 바위산 가파른 능선을 타고 올라 바위에 기대서야 한다. 폭포와 금수산 정상 쪽 산봉우리들까지 한눈에 보인다.
폭포 옆 가파른 바위산길을 타고 폭포 위쪽으로 오르면 거대한 암반 골짜기에 늘어선 작은 폭포들과, 암반에 패인 지름 4~5m의 선녀탕 2개, 암반 가운데쯤에 있는 용이 똬리를 튼 듯한 모습 등을 만난다. 사고 위험이 있어 일반인 출입을 막고 있다.
젊을 때 여름철이면 폭포 물 맞으러 다니곤 했다는 최명순씨가 말했다. “닭이나 개 잡아먹은 이는 폭포 위에 가면 클나유. 부정타서 안돼유. 그러다가 떨어지면 어쩔라구.”
박창호씨가 말했다. “가물 때 이 폭포에서 닭·돼지를 잡아 피를 뿌리고 기우제를 지내면 직빵이야. 늦어두 이삼일 안에 비가 쏟아지지.” 폭포 위 선녀탕 옆 산기슭에 기우제를 지내던 자리임을 알리는 표석이 있다.
박씨가 “실제로 있었던 얘긴데 들어볼텨?”하며 전해준 용담폭포 선녀탕 이야기 한 토막.
“내 청년기 때 얘기지. 폭포 너머 금수산 저 짝 골짜기가 얼음골이여. 여름에두 바위틈에 얼음이 얼어 있으니, 더울 때 얼음 먹으러 마이 다녔지. 한번은 내 동생뻘 되는 동네 처녀들이 모여 얼음골엘 갔어. 돌아오는 길에 더우니까 보는 사람도 없겠다, 얘들이 훌훌 벗고 선녀탕에 들어가 목욕을 한거여. 그런데 난리가 났지. 뭔지 알어? 갑자기 마른하늘에 먹구름이 덮이고 천둥이 쿵쾅 치더니 냅다 쏘내기가 쏟아지는 게라. 그래 처녀들이 혼비백산 놀래가지구 옷두 제대루 못 입구 도망쳐 내려왔다니깐. 뭔지 알어? 처녀들 중에 생리중인 처자가 있었던 거라. 신기하지.”
폭포 위 골짜기엔 동문안마을과 백운사라는 절도 있었다. 절은 육이오때 불탔다. 60년대 초반까지 10여 가구가 참숯 굽고, 벌채 일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벌채된 나무은 주민들이 지고 내려와 “제무시(지엠시) 트럭으루다” 옛 하천리 내매나루까지 실어 나른 뒤, 뗏목으로 만들어져 남한강 물길을 타고 서울 광나루나 마포나루로 운반됐다.
물길 한가운데 있는 약수터 ‘방아확’
주민들은 용담폭포 골짜기 물을 약수로 마신다. 백운동마을과 용담폭포 사이 물길 한가운데 방아확이라고 부르는 약수터가 있다. 약수라지만 그냥 계곡물이다. 어깨를 기댄 거대한 두 바위 밑바닥에, 오랜 세월 물세례를 받아 우묵하게 패인 자리다. 방아공이로 곡식을 찧는 방아확을 닮았다. 방아확은 수량이 줄 때만 모습을 드러낸다. 방아확이 물에 잠기거나 드러나거나 주민들은 이곳에 바가지를 갖춰 두고 오며가며 계곡물을 떠 마신다.
최근 이 방아확의 일부가 훼손됐다. 외지인들이 고인 물이 흐르도록 홈을 파놓은 것이다. 박창호씨가 발끈 했다. “쓸데없이 물길을 내 방아확을 망쳐놨어. 누구 짓인지 알구 있지. 원상복구시키라랠 거여.”
어느 마을이건 주민들이 아끼고 간직하고 쌓아온 생활문화가 있다. 여기에 마구 손대는 건 잘못이다.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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