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거나 그의 손 거치면 짠!, 누구나 아하! 길에서 만난 사람

헬싱키 ‘비밀 가게’ 디자이너 아무송씨
국수 신발, 버섯 의자, 펭귄 내복, 비빔밥 가방…
졸업작품 ‘레드 드레스’ 디자인박물관 영구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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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와 숲의 나라, 사우나의 나라, 노키아 휴대폰의 나라, 백야의 나라…. 핀란드를 가리키는 표현들이다.
 
하나 더 있다. 핀란드는 ‘디자인의 나라’다. 디자인 강국으로 불리는 북유럽 나라들 중에서도 핀란드는 기능성을 살리고 원재료에 충실한 ‘친환경 디자인’으로 이릉 높다. 건물도 골목도 공원도, 호텔도 식당도 생활용품들도 반짝이는 개성과 절제된 아름다움이 잘 어우러진 모습이다.
 
헬싱키의 ‘핀란드 디자인포럼’으로 가면 핀란드 디자인 산업의 현주소를 짚어볼 수 있다. ‘디자인포럼’의 프로젝트 매니저 한나 푼노넨이 말했다. “헬싱키엔 인기있는 한국인 디자이너도 몇명 있습니다.”
 
그가 디자인 책자를 펴 사진 하나를 보여줬다. 온통 붉은 색. 중앙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가수를 중심으로 관객들이 붉은 천을 덮고 둘러앉아 감상하고 있는 모습이다. 자세히 보니 관객들이 덮은 천은 가수가 입고 있는 거대한 드레스의 한 자락이다.
 
“아무송의 ‘레드 드레스’라는 작품입니다. 유명한 디자이너죠. 중앙우체국 옆에 그의 매장이 있어요.”
 
가수가 입은 1.5t 드레스, 관객들 하나하나 휘둘러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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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송씨를 만나러 헬싱키 중앙역 부근 중앙우체국으로 발길을 옮겼다. 우체국 옆 모퉁이에 ‘살라 카우파(Sala Kauppa)’란 흰색 글씨가 쓰인 자그마한 가게가 나타났다. 보행로 옆에 들어선 한 평이나 될까 싶은 독립 가건물이다.
 
“한국 분이시네요! 오랜만에 한국말 듣네. 정말 반가워요.” 짧은 머리에 선하면서도 야무진 눈매를 가진, 소녀티가 가시지 않은 여성이 반긴다. “아주 유명한 디자이너”라고 소개받은 아무송(35)씨다. ‘레드 드레스’에 대해 물었다.
 
“2005년 처음 덴마크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에서 공연한 건데요. 공연자와 관객이 한데 어울려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다 만든 작품이죠.”
 
아무송씨의 한국 이름은 송희원이다. ‘아무’란 인칭대명사 ‘아무개’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는 서울대에서 공업디자인을 배운 뒤 1998년 헬싱키로 건너와 헬싱키디자인대학교 대학원에서 가구디자인을 공부했다. ‘레드 드레스’는 그의 대학원 졸업작품이다. 드레스 무게가 1.5t에 이르고, 이를 다 펼치려면 400평 공간이 필요한 대작이다. 이 공연을 위해 그의 아이디어를 평가한 주변 사람들이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
 
“운도 좋았죠. 좋은 천을 만드는 회사를 스폰서로 잡았고, 뛰어난 오페라 기술자도 만났어요. 덴마크의 작곡가가 이 공연을 위해 특별히 작곡을 해주기도 했고요.”
 
신선한 발상의 이 공연으로 송씨는 촉망받는 아티스트로 떠올랐다. 이 작품은 그 뒤 노르웨이와 독일에서도 공연됐다. 공연에 사용된 붉은 드레스는 헬싱키디자인박물관에 영구보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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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재미있으면 오케이!

 
“나는 재미 없으면 못해요. 전공 따지는 것도 분야를 나누는 것도 나한텐 안 맞아요.”
 
대학시절 공업디자인을 전공하면서도 조소·서양화·공예 등 온갖 미대 수업을 찾아 들었고, 심지어 수의학·물리학 공부에도 빠져들었다고 한다. 헬싱키에 와선 패션디자인·재봉기술과 스포츠의류 만들기, 신발 만들기 기술 등을 두루 배웠다. 분야를 가리지 않는 전방위적 호기심과 체험이 그의 아이디어의 원천인 듯하다.
 
가게에 진열된 기발한 상품들이 눈길을 끈다. 운동화끈을 국수다발처럼 부풀린 ‘국수신발’, 큰 신발 위에 작은 신발이 달린 ‘아빠와 함께 춤추는 신발’, 아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말타기 놀이를 할 수 있게 한 ‘말 머리 바지’, 밑창에 고무신을 댄 ‘고무신 운동화’, 버섯 의자, 펭귄 내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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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씨가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천으로 만든  가방을 들어올렸다. “이건 비빔밥 가방이에요. 재밌죠? 가방 속의 물건이 섞이지 않아 밖에서 만져보고 금방 찾을 수 있어요. 입구는 가방 안쪽에 있고요. 섞여 있지만 제각각의 맛이 살아 있는 비빔밥과 같죠.”
 
모두 송씨가 역시 디자이너인 남자친구 요한 올린(35)과 함께 아이디어를 내어 만든 상품들이다. 올린은 2000년 전시장의 전등조명 작업을 함께 하며 만났다. 서로의 아이디어를 높게 평가해 디자인 일도 함께 하고, 인생도 같이 디자인하고 있는 동반자다.
 
2007년엔 둘이 핀란드 전국을 돌며 “핀란드 안에는 없을 것”이라고 알려진 봉제공장 등 17개의 제조공장을 찾아내 ‘메이드 인 핀란드’라는 전시회도 열었다. 공장 주인들과 협력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상품화할 수 있었다. 2007년 가을과 지난 2월엔 한국에서 생활용품 업체들과 상품 개발 작업을 하기도 했다.
 
송씨는 요즘 대규모 음악제 세트 디자인 준비로 바쁘다. 7월26일부터 8월1일까지 헬싱키 북쪽 투술라 호수 주변 시벨리우스 생가 일대에서 열리는 ‘아우타카(도와주세요) 음악제’다. ‘지구를 도웁시다’ ‘청소년을 도웁시다’ ‘억압받는 이를 도웁시다’ ‘언론의 자유를 도웁시다’ 등 매일 다른 7개의 주제를 내걸고 진행되는 음악제다. 6번째 ‘언론의 자유를 도웁시다’ 음악제에서는 윤이상 선생의 음악도 연주될 예정이다. 아무송씨는 음악제의 5번째 주제인 ‘전쟁 피해자를 도웁시다’의 출연자 의상과 공연장 세트 디자인을 맡았다.
 
“음악제가 끝나면 8월엔 피카소 전시 관련 작업에 매달릴 계획이에요.”
 
송씨는 오는 9월18일부터 헬싱키 아테네움 박물관에서 열리는 피카소 작품전의 마지막 전시실 디자인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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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상자’ 가게에서 유명 바이올린 초청 연주도

 
너무 바쁘게 사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재미있으니까 하는 거죠. 일이 많기는 하지만 디자인 작업이 정말 즐거워요. 수입이 많고 적고는 아무 문제가 안돼요.”
 
그는 재미있는 일을 그의 작은 가게에서도 벌인다. 지난 4월엔 핀란드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페카 쿠시스토(34)를 불러다 연주회를 열었다. 10대에 이미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1등을 한 대중적이고 실험적인 연주자라고 한다. 가게 안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밖엔 스피커를 달아 듣도록 했다.
 
Untitled-20 copy.jpg가게를 개업한 건 2007년 11월이다. 본디 꽃집이었는데 주인이 바뀌면서 아이스크림집·케밥집이 차례로 들어섰다가, ‘팝니다’ 쪽지가 붙은 걸 발견하고 아무송이 곧바로 사들여 5개월 내부 공사를 마치고 문을 열었다. 12평방미터 넓이에 불과하지만 ‘비밀 가게’에 있을 건 다 있다. 화장실도 있고 바닥엔 열선도 깔아 겨울에도 따뜻하다. 커피도 끓여 판매한다.
 
그 때 네네가 찾아왔다. 네네는 송씨가 디자인한 의류·신발 등 제품 안내책자에 단골 모델로 내세우는 일본인 친구다. 둘이 춤공연을 보러가기로 했단다.
 
가게를 나서면서 송씨는 디자인과 관련해 헬싱키 시내에서 둘러볼 만한 곳을 추천해줬다.
 
“가방과 의류, 각종 천은 마리메코가 볼만하고요, 도자기나 유리제품은 이탈라, 나무가구 등은 아르테크로 가보세요. 디자인포럼이나 키아스마 현대미술관, 디자인 박물관, 아테네움 미술관도 가봐야 하고요.”
 
송씨는 “재밌는 아이디어 상품을 보려면 우리 비밀가게로 오시라”고 덧붙이며 네네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송씨는 올 10월 휴가를 내 한국을 찾을 계획이다.
 
헬싱키/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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