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가 아낀 그 곳, 쓰레기 걷히고 나비 날아드네 길따라 삶따라
2009.07.02 19:20 너브내 Edit
김해 화포천 습지와 봉하마을
120톤 쓰레기 ‘오물’천, ‘생태학습장’으로 변신
수묵화 그리는 물안개…멸종위기종도 ‘수두룩’

“이 조개가 ‘대칭이’란 조개예요. 민물조개 중 제일 큰 놈이죠. 바닥에 살면서 때때로 물에 떠오르기도 해요.”
‘화포천 환경지킴이’ 사무국장 황찬선(41·회사원)씨가 조개를 건져 어린이들에게 건넸다. 지름이 10㎝나 되는 큰 조개를 받아들고 아이들은 서로 만져보며 신기해한다.
지난 20일 오전 김해시 화포천 습지. 환경지킴이들은 화포천을 찾은 늘푸른전당(창원시 삼동동)의 초등생 24명을 고무보트에 나눠 태우고 생태탐방 행사를 시작했다. 화포천지킴이는 김해시민들로 이뤄진 자원봉사단체다. 어린이들은 물길을 돌며 수면 가득 꽃을 피운 노랑어리연과 마름 등 수생식물, 대칭이와 귀이빨대칭이 등 조개류, 실잠자리·물잠자리 등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설명을 들었다.
대암면에서 발원한 낙동강 하류의 지류
김해 화포천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규모 하천 습지다. 낙동강 하류의 한 지류다. 김해시 진례면 대암산에서 발원해 한림면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20여㎞ 길이의 물줄기는 진영읍과 한림면의 경계를 이루며 드넓은 습지대를 형성한다. 무성한 갈대숲 사이로 물골이 휘돌고 고이고 흐르며 다양한 식생을 이룬다. 지대가 낮아 홍수땐 수역 전체가 물에 잠기는 곳이다.
2년 전까지도 주변 공단들에서 흘러나온 오·폐수와 버려진 쓰레기들로 “쓰레기하치장”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이랬던 화포천이 최근 생태습지 학습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지킴이들은 지난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수많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화포천에서 100여t에 이르는 쓰레기를 건져냈다. 올해도 고무보트 등을 이용해 22t의 쓰레기를 수거하는 등 다달이 습지 정화활동을 펼치고 있다.
“하천 바닥과 갈대숲 곳곳에 폐타이어·냉장고에서부터 비닐·밧줄·페트병 등까지 온갖 쓰레기들이 들어차 있었어요.” 황씨는 “수거활동과 주변 공단의 오·폐수 방류 감시활동 등을 1년여 동안 하고 나니 하천이 눈에 띄게 깨끗해졌다”고 말했다.
수달 등 동물 40여종에 식물 160여종 서식

환경연구자들의 모임인 ‘자연과 사람들’ 조사로는 화포천 습지엔 가시연 등 160여종의 식물, 수달·남생이 등 40여종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낙동강유역환경청 김병도 팀장은 “본격적인 조사가 이뤄지면 훨씬 더 많은 생물종이 드러날 것”이라며 “귀이빨대칭이·삵 등 멸종위기종도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화포천지킴이들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지난 겨울 찾아온 철새들이 정말 볼만했습니다. 노랑부리저어새·황로·왜가리 등이 무리지어 찾아와 깜짝 놀랐죠. 화포천 생태공원 가꾸기에 희망을 갖는 이유입니다.”
왕버들 드리운 갈대숲 사이 물길은 소금쟁이와 잠자리·거미·나비들 세상이다. 갈대잎에서도 노랑어리연꽃잎에서도 왕잠자리·밀잠자리들이 눈알을 굴리며 자리다툼을 벌인다. 왕버들 숲에서 개개비가 한바탕 울고 나니 화포천 습지는 다시 나른한 정적에 빠져든다. 정적을 깨는 건 가끔 튀어오르는 물고기들과 때때로 오가는 경전선 철로 열차 소리다. 자광사 앞쪽 철길 건너의 보리밭 주변과 영강사 앞 철길 건너 생태습지 표지석 부근, 그리고 ‘버드나무 다리’ 주변이 화포천 습지 감상 포인트로 꼽힌다. 일교차 큰 날 아침이면 화포천 습지대는, 피어오르는 물안개로 한 폭의 거대한 수묵화를 펼쳐 보인다.
노 대통령 퇴임 뒤 첫 공식행사로 화포천 청소

화포천 옆 마을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인 봉하마을이다. 화포천은 ‘바보 노무현’이 생전에 지극히 아끼고 사랑했던 생태하천이다. 퇴임 뒤 고향으로 돌아가 처음 벌인 공식행사가 바로 화포천 청소작업이었다. 평소 어릴 적에 보고 누렸던 아름다운 옛 하천 모습을 되살리는 일에 큰 애착을 가졌다. 지킴이들은 “화포천 일대를 대규모 환경생태 학습 공간으로 만드는 게 그분의 꿈이었다”고 말했다. 얼마 전 화포천 생태공원화사업 추진을 일시 중단했던 김해시는 7월 중 화포천에 친환경 관찰로(8㎞) 개설, 생태학습장 조성 등 공원화사업에 착수할 계획이다.
화포천(花浦川)의 옛 이름은 신교천(薪橋川)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 ‘교량조’). 신교란 삽교(섶다리·나무다리)였던 다리가 돌다리(石橋)로 바뀌면서 붙은 이름이다. 옛 진영 주민들은 이 다리를 건너 ‘김해부’로 오갔다. 다릿돌 하나가 진영대창초등학교 이건 기념비의 빗돌로 남아 있다.
봉하마을은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에 속한다. 1940년대까지 몇 집 살지 않았으나 50여년 전 마을 앞 습지대를 농지로 개간하면서 주민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현재 40여가구 100여명이 산다.

‘봉하’는 ‘봉수대가 있는 산 아래 마을’이란 뜻
‘봉하마을’이란 봉화산 아랫마을이다. 봉화산(140m)은 봉홧불을 올리던 봉수대(사자바위)가 있던 산이다. 본디 이름은 자암산이다. 자암이란 암자가 있던 데서 유래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봉홧불을 올리던 자암산 봉수대 기록이 나온다. 남쪽의 김해 분산 봉수대와 북쪽 밀양 남산 봉수대를 연결하던 봉수대다.
자암은 이름만 전하는 암자다. 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이 태자를 위해 창건했던 암자라고 한다. 김해시 문화유산해설사 이문수(62)씨는 “봉화산 부엉이바위 옆 쓰러진 마애불 아래 빈터가 바로 자암 터라고 알려진다”고 말했다.
봉화산 줄기엔 부엉이바위·사자바위·병풍바위 등 바위절벽들이 있다. 부엉이바위엔 실제로 수리부엉이가 둥지를 틀고 있어 저물녘이면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높아 보이는 봉화산 탐방로는 생각보다 짧다. 사자바위까지 다녀오는 데 30~40분이면 된다.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건 쓰러진 천년 마애불과 1959년 세워진 ‘호미를 든 부처상’(호미 든 관음개발성상), 불교수련원 정토원 볼거리가 있고 봉하마을과 건너편의 뱀산 산줄기, 화포천 습지 등이 내려다보이는 시원한 전망이 있기 때문이다.
‘마을 평화’기원하며 마애불 위쪽 바위 없애
봉화산 마애불에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당나라 황후의 꿈속에 한 청년이 밤마다 나타나 괴롭혔다. 신통력을 가진 스님이 청년을 신라 땅 산자락 돌 속에 가둬 마애불로 만들었다. 뒤에 확인해 보니 김해 자암산의 마애불이었다고 한다. 이 마애불이 언제 쓰러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옆으로 누운 마애불 위엔 지름 1.2m 크기의 바위가 얹혀 있었다. 없애면 마을이 평화로워진다는 전설이 있어 1984년 제거했다. 마애불은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쓰러진 마애불 바로 아래에 자암 터가 있다. 얼마 전까지도 작은 논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터 옆 바위자락으론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물줄기가 쏟아져내리고 있다. 마애불 밑 바위틈을 토굴 삼아 수행을 한다는 비구니 스님이 바위틈 옆 우뚝한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바위가 장군바위라카는 긴데, 이 쪽을 보소. 두꺼비지예? 일로도 와 보소. 새 아잉교.”
봉하마을 앞 산이 뱀산이다. 금봉마을 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긴 산줄기다. 문화유산해설사 이씨가 말했다. “내가 노 대통령께 뱀산보다는 용산으로 부르는 게 맞지 않겠냐고 했어요. 하지만 대통령은 ‘오래전부터 부르던 이름이 뱀산’이라며 끝까지 뱀산으로 불렀죠.”

뱀산 머리 쪽 앞엔 주민들이 ‘개구리똥뫼’(개구리독뫼)라 부르는 작고 둥근 언덕이 있다. 뱀산과 독뫼(독산·돌산)의 모습은 뱀이 개구리를 노리는 형국이다. 개구리독뫼엔 ‘개구리가 홍수를 틈타 독뫼를 진례 쪽으로 옮기면 그쪽에 궁터가 생길 수 있었는데, 개구리가 실수해 못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문화재로 지정된 갈대집 세 채 둘러볼만

봉하마을에서 가까운 화포천변 한림면 장방리 영강사 밑엔 고색창연한 갈대집 세 채가 있어 둘러볼 만하다. 문화재로 지정된 한림면 장방리 갈대집이다. 두 채는 곳곳에 일부 고쳐지은 곳들이 보이고 갈대지붕도 새로 해 얹은 모습이다. 그러나 맨 아랫집(옛 청주 송씨 집안 재실)은 켜켜이 쌓인 갈대지붕 두께가 50㎝에 이르고, 마루·기둥·벽 등도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100여년 내력을 지닌 집이다.
영강사 법성(34) 스님은 “갈대지붕은 한 세대에 한번 꼴로 지붕을 얹어왔다”며 “이 재실 갈대지붕 맨 아랫단은 고조할아버지 때 얹은 갈대”라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청호 스님) 말씀을 들어보면 옛날엔 화포천 주변 대부분의 집들이 갈대집이었다”고 전했다. 화포천이 예로부터 대규모 갈대 군락지였음을 말해준다.
갈대지붕을 얹을 때는 초가지붕과 마찬가지로 이전의 낡은 갈대를 다 헐어내지는 않는다. 맨 아랫집 지붕의 경우 처마끝 갈대 모습이 자연스럽게 여러 층을 이룬 모습인데, 이는 “나중에 얹은 갈대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차례대로 밀려 내려왔기 때문”이다.
법성 스님이 말했다. “그러나 위의 두 집은 고쳐지을 때 갈대지붕 처마 모양을 아랫집 모습처럼 일부러 층을 이룬 형태로 복원한 것이지요.” 그는 “갈대지붕을 얹는 방식이 볏짚과 또 달라, 옛 방식대로 재현할 수 있는 사람도 이제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해/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120톤 쓰레기 ‘오물’천, ‘생태학습장’으로 변신
수묵화 그리는 물안개…멸종위기종도 ‘수두룩’

“이 조개가 ‘대칭이’란 조개예요. 민물조개 중 제일 큰 놈이죠. 바닥에 살면서 때때로 물에 떠오르기도 해요.”
‘화포천 환경지킴이’ 사무국장 황찬선(41·회사원)씨가 조개를 건져 어린이들에게 건넸다. 지름이 10㎝나 되는 큰 조개를 받아들고 아이들은 서로 만져보며 신기해한다.
지난 20일 오전 김해시 화포천 습지. 환경지킴이들은 화포천을 찾은 늘푸른전당(창원시 삼동동)의 초등생 24명을 고무보트에 나눠 태우고 생태탐방 행사를 시작했다. 화포천지킴이는 김해시민들로 이뤄진 자원봉사단체다. 어린이들은 물길을 돌며 수면 가득 꽃을 피운 노랑어리연과 마름 등 수생식물, 대칭이와 귀이빨대칭이 등 조개류, 실잠자리·물잠자리 등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설명을 들었다.
대암면에서 발원한 낙동강 하류의 지류

2년 전까지도 주변 공단들에서 흘러나온 오·폐수와 버려진 쓰레기들로 “쓰레기하치장”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이랬던 화포천이 최근 생태습지 학습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지킴이들은 지난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수많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화포천에서 100여t에 이르는 쓰레기를 건져냈다. 올해도 고무보트 등을 이용해 22t의 쓰레기를 수거하는 등 다달이 습지 정화활동을 펼치고 있다.
“하천 바닥과 갈대숲 곳곳에 폐타이어·냉장고에서부터 비닐·밧줄·페트병 등까지 온갖 쓰레기들이 들어차 있었어요.” 황씨는 “수거활동과 주변 공단의 오·폐수 방류 감시활동 등을 1년여 동안 하고 나니 하천이 눈에 띄게 깨끗해졌다”고 말했다.
수달 등 동물 40여종에 식물 160여종 서식

환경연구자들의 모임인 ‘자연과 사람들’ 조사로는 화포천 습지엔 가시연 등 160여종의 식물, 수달·남생이 등 40여종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낙동강유역환경청 김병도 팀장은 “본격적인 조사가 이뤄지면 훨씬 더 많은 생물종이 드러날 것”이라며 “귀이빨대칭이·삵 등 멸종위기종도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화포천지킴이들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지난 겨울 찾아온 철새들이 정말 볼만했습니다. 노랑부리저어새·황로·왜가리 등이 무리지어 찾아와 깜짝 놀랐죠. 화포천 생태공원 가꾸기에 희망을 갖는 이유입니다.”
왕버들 드리운 갈대숲 사이 물길은 소금쟁이와 잠자리·거미·나비들 세상이다. 갈대잎에서도 노랑어리연꽃잎에서도 왕잠자리·밀잠자리들이 눈알을 굴리며 자리다툼을 벌인다. 왕버들 숲에서 개개비가 한바탕 울고 나니 화포천 습지는 다시 나른한 정적에 빠져든다. 정적을 깨는 건 가끔 튀어오르는 물고기들과 때때로 오가는 경전선 철로 열차 소리다. 자광사 앞쪽 철길 건너의 보리밭 주변과 영강사 앞 철길 건너 생태습지 표지석 부근, 그리고 ‘버드나무 다리’ 주변이 화포천 습지 감상 포인트로 꼽힌다. 일교차 큰 날 아침이면 화포천 습지대는, 피어오르는 물안개로 한 폭의 거대한 수묵화를 펼쳐 보인다.
노 대통령 퇴임 뒤 첫 공식행사로 화포천 청소

화포천 옆 마을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인 봉하마을이다. 화포천은 ‘바보 노무현’이 생전에 지극히 아끼고 사랑했던 생태하천이다. 퇴임 뒤 고향으로 돌아가 처음 벌인 공식행사가 바로 화포천 청소작업이었다. 평소 어릴 적에 보고 누렸던 아름다운 옛 하천 모습을 되살리는 일에 큰 애착을 가졌다. 지킴이들은 “화포천 일대를 대규모 환경생태 학습 공간으로 만드는 게 그분의 꿈이었다”고 말했다. 얼마 전 화포천 생태공원화사업 추진을 일시 중단했던 김해시는 7월 중 화포천에 친환경 관찰로(8㎞) 개설, 생태학습장 조성 등 공원화사업에 착수할 계획이다.
화포천(花浦川)의 옛 이름은 신교천(薪橋川)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 ‘교량조’). 신교란 삽교(섶다리·나무다리)였던 다리가 돌다리(石橋)로 바뀌면서 붙은 이름이다. 옛 진영 주민들은 이 다리를 건너 ‘김해부’로 오갔다. 다릿돌 하나가 진영대창초등학교 이건 기념비의 빗돌로 남아 있다.
봉하마을은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에 속한다. 1940년대까지 몇 집 살지 않았으나 50여년 전 마을 앞 습지대를 농지로 개간하면서 주민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현재 40여가구 100여명이 산다.

‘봉하’는 ‘봉수대가 있는 산 아래 마을’이란 뜻
‘봉하마을’이란 봉화산 아랫마을이다. 봉화산(140m)은 봉홧불을 올리던 봉수대(사자바위)가 있던 산이다. 본디 이름은 자암산이다. 자암이란 암자가 있던 데서 유래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봉홧불을 올리던 자암산 봉수대 기록이 나온다. 남쪽의 김해 분산 봉수대와 북쪽 밀양 남산 봉수대를 연결하던 봉수대다.

봉화산 줄기엔 부엉이바위·사자바위·병풍바위 등 바위절벽들이 있다. 부엉이바위엔 실제로 수리부엉이가 둥지를 틀고 있어 저물녘이면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높아 보이는 봉화산 탐방로는 생각보다 짧다. 사자바위까지 다녀오는 데 30~40분이면 된다.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건 쓰러진 천년 마애불과 1959년 세워진 ‘호미를 든 부처상’(호미 든 관음개발성상), 불교수련원 정토원 볼거리가 있고 봉하마을과 건너편의 뱀산 산줄기, 화포천 습지 등이 내려다보이는 시원한 전망이 있기 때문이다.
‘마을 평화’기원하며 마애불 위쪽 바위 없애
봉화산 마애불에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당나라 황후의 꿈속에 한 청년이 밤마다 나타나 괴롭혔다. 신통력을 가진 스님이 청년을 신라 땅 산자락 돌 속에 가둬 마애불로 만들었다. 뒤에 확인해 보니 김해 자암산의 마애불이었다고 한다. 이 마애불이 언제 쓰러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옆으로 누운 마애불 위엔 지름 1.2m 크기의 바위가 얹혀 있었다. 없애면 마을이 평화로워진다는 전설이 있어 1984년 제거했다. 마애불은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쓰러진 마애불 바로 아래에 자암 터가 있다. 얼마 전까지도 작은 논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터 옆 바위자락으론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물줄기가 쏟아져내리고 있다. 마애불 밑 바위틈을 토굴 삼아 수행을 한다는 비구니 스님이 바위틈 옆 우뚝한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바위가 장군바위라카는 긴데, 이 쪽을 보소. 두꺼비지예? 일로도 와 보소. 새 아잉교.”
봉하마을 앞 산이 뱀산이다. 금봉마을 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긴 산줄기다. 문화유산해설사 이씨가 말했다. “내가 노 대통령께 뱀산보다는 용산으로 부르는 게 맞지 않겠냐고 했어요. 하지만 대통령은 ‘오래전부터 부르던 이름이 뱀산’이라며 끝까지 뱀산으로 불렀죠.”

뱀산 머리 쪽 앞엔 주민들이 ‘개구리똥뫼’(개구리독뫼)라 부르는 작고 둥근 언덕이 있다. 뱀산과 독뫼(독산·돌산)의 모습은 뱀이 개구리를 노리는 형국이다. 개구리독뫼엔 ‘개구리가 홍수를 틈타 독뫼를 진례 쪽으로 옮기면 그쪽에 궁터가 생길 수 있었는데, 개구리가 실수해 못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문화재로 지정된 갈대집 세 채 둘러볼만

봉하마을에서 가까운 화포천변 한림면 장방리 영강사 밑엔 고색창연한 갈대집 세 채가 있어 둘러볼 만하다. 문화재로 지정된 한림면 장방리 갈대집이다. 두 채는 곳곳에 일부 고쳐지은 곳들이 보이고 갈대지붕도 새로 해 얹은 모습이다. 그러나 맨 아랫집(옛 청주 송씨 집안 재실)은 켜켜이 쌓인 갈대지붕 두께가 50㎝에 이르고, 마루·기둥·벽 등도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100여년 내력을 지닌 집이다.
영강사 법성(34) 스님은 “갈대지붕은 한 세대에 한번 꼴로 지붕을 얹어왔다”며 “이 재실 갈대지붕 맨 아랫단은 고조할아버지 때 얹은 갈대”라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청호 스님) 말씀을 들어보면 옛날엔 화포천 주변 대부분의 집들이 갈대집이었다”고 전했다. 화포천이 예로부터 대규모 갈대 군락지였음을 말해준다.
갈대지붕을 얹을 때는 초가지붕과 마찬가지로 이전의 낡은 갈대를 다 헐어내지는 않는다. 맨 아랫집 지붕의 경우 처마끝 갈대 모습이 자연스럽게 여러 층을 이룬 모습인데, 이는 “나중에 얹은 갈대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차례대로 밀려 내려왔기 때문”이다.
법성 스님이 말했다. “그러나 위의 두 집은 고쳐지을 때 갈대지붕 처마 모양을 아랫집 모습처럼 일부러 층을 이룬 형태로 복원한 것이지요.” 그는 “갈대지붕을 얹는 방식이 볏짚과 또 달라, 옛 방식대로 재현할 수 있는 사람도 이제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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