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자언니도 숙언니도 사라져버린 ‘영화’속으로 길따라 삶따라
2009.06.18 02:22 너브내 Edit
군산 옛도심 여행
살아있는 근대문화유산 숲…걸어서 6㎞
서해 요충지가 겪은 일제 수탈흔적 뚜렷

군산은 거대한 근대문화유산의 창고다. 인천·목포과 함께 근대 옛도심의 사람살이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도시다. 금강 하구다. 조선 3대 시장의 하나였던 강경으로 드나드는 길목이자 서해 바닷길의 요충지였다. 군산항은 1899년 개항했다. 이곳을 통해 일제는 전북 곡창지대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날랐다. 월명동·영화동·내항 주변, 개정면·대야면 일대에 일제 수탈의 흔적들이 뚜렷이 남아 있다. 일본 냄새 물씬한 옛도심 골목 순환코스를 걷는다.
내항 뜬다리(부잔교) 옆 관광안내소에서 출발한다. 관광안내지도를 챙긴 뒤 먼저 내항을 둘러본다. 내항은 옛 군산진이 있던 곳으로, 군산산업단지 쪽 외항과 구별된다. 일제 때 일본인 소유의 토지가 가장 많았던 곳이 군산으로 알려진다. 이들이 소유한 토지의 90% 이상이 논 등 경작지였다고 한다. 군산항은 일제가 기름진 전북 평야지대에서 난 쌀을 한데 모아 반출하던 물류기지였다. 그 흔적들이 내항 주변에 가로 뻗고 모로 뻗은 철로와 물이 빠질 때도 배를 댈 수 있게 한 뜬다리 부두다. 관광안내소 옆엔 군함과 전투기를 전시한 해양테마공원도 있다.
<아리랑> 무대이기도 한 군산 째보선창

그 아래 금암동 어시장 자리는 옛날 째보선창이라 부르던 곳이다. 포구의 한쪽이 째진 것처럼 파인 모습이라 그런 이름을 얻었다는 설이 있다. 째보선창이란 이름의 포구는 목포에도 있다. 일제땐 동부어판장으로도 불렸고, 조선시대엔 죽성포구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도 군산 째보선창이 등장한다.
군산시청 학예연구사 김중규(43)씨는 “군산과 비슷한 근대사를 겪은 목포의 옛 온금동에도 째보선창이 있었다”며 “일인들의 어항과는 별도로 발달한 조선인들이 이용한 포구였다는 점 등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1999년 만든 개항 100돌 기념 백년광장으로 간다. 해망로 내항사거리 옆이다. 광장에 세워진 12개의 돌기둥이 다소 생뚱맞다. 사거리 길 건너 모퉁이엔 미두장터 빗돌이 있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도 등장하는 미곡취인소(미두장) 자리다. 미곡취인소란 현물 없이 쌀을 거래하던 곳으로, 일제의 간접적인 미곡 수탈에 이용된 곳이다. 조선인 부자들이 이곳에 손댔다가 망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옛 조선은행 건물은 복원공사중
광장 옆엔 낡고 우중충한 대형 건물이 곧 무너져내릴 듯한 모습으로 서 있다. 1923년 지은 조선은행 건물(등록문화재)이다. 당시 군산 최대 건물이었다지만, 지금은 뼈대만 남은 텅 빈 몸을 간신히 추스르고 서 있다. 유흥업소 낡은 간판들이 어지러운, 뚫어진 외벽을 통해 80여년 영욕의 세월이 다 들여다보인다. 복원공사중이다.

해망로는 일제 때 상업 중심거리인 이른바 본정통이다. 관청·은행·상점이 즐비했다. 해망로 길 건너 동령고개로 오른다. 고개 들머리 오른쪽에 57년 됐다는 중국집 빈해원이 있다. 식당 내부가 트인 2층 구조의 중국식 건물이다. 동령고갯길은 일제 때 화교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다. 고개 넘어 영동사거리에서 패션가인 영동거리로 든다. 단층건물이 이어진 골목이지만, 없는 브랜드가 없는 옛도심 패션1번지다.
문 닫은 국도극장 앞을 지난다. 일제 때부터 희소관이란 극장이 있던 곳이다. 극장 앞 오른쪽 골목은 ‘예술의 거리’가 조성되고 있다. 아직은 썰렁하지만, 길이 150m가량의 골목 곳곳에 현재 화가 7명, 문인 2명과 음악가·사진가·디자이너 들이 화실·찻집·작업실 등을 마련해 들어와 있다. 2002년 1월 이른바 성매매업소 화재로 13명이 목숨을 잃은 개복동 골목이다. 본디 이 골목 주변은 한때 영화관이 네곳이나 됐었다. 최신식 설비를 갖춘 인근 영화관에 밀리고, 화재사건까지 빚으면서 결국 모두 문을 닫았다.
사건사고 많았던 개복동 영화관 골목길
한 떼의 젊은이들이 옛 우일극장 골목 길바닥에 둘러앉아 자장면·짬뽕을 먹고 있다. 이 골목에 새로 작업실을 얻어 입주해온 젊은 사진가들이다. 이들과 어울려 점심을 먹던 ‘개복동 예술의 거리 조성위원회’ 이상훈(39) 위원장이 말했다.
“유난히 사건·사고가 많았던 이 골목을 살아 움직이는 예술인들의 거리로 바꿔나갈 계획입니다. 아직 뚜렷한 변화가 있는 건 아니지만 조금씩 그 낌새가 보이고 있어요. 오는 8월부터는 성매매업소 화재사건과 연계한 추모 이미지작업·전시회 등 ‘꽃순이 프로젝트’를 선보일 예정입니다.”
골목을 나와 콩나물고개로 오른다. 이 길도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한 무대가 됐다. 재산 다 팔아먹고 창성동 고개 위(둔배미)의 초가집으로 이사한 정 주사가 오르내리던 길이다. 콩나물고개란 이름은 옛날 주변 주민들이 집에서 기른 콩나물을 내다 팔았던 데서 나왔다고 한다. 고개 중간에 창성동 주공아파트 단지 옆길로 오르면 선양고가교에 이른다. 일제 때 산줄기를 끊어 삼학동~명산동을 잇는 길을 냈다. 이른바 ‘산 끊어진 데’라는 곳이다. 끊어진 부분에 고가다리를 놓아 다시 이었다. 다리 위에 <탁류>의 무대임을 알리는 빗돌이 있다.
1930년대 군산부윤 관사, 식당으로 변신
114계단을 내려와 명산동 사거리 지나 왼쪽 첫 골목으로 들어가면 일본식 절 동국사(옛 금강사·등록문화재)가 있다. 1909년 일인들이 세운 절이다. 경내 정원도 종각도 석물들도 일본식이다. 학예사 김씨는 “1910년대 군산 주민의 절반 이상이 일본인(8000여명)이었다”며 “이들이 세운 6개의 절 중 동국사만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법당 안에 모신 불상은 진흙으로 만들었는데, 광복 뒤 금산사에서 옮겨온 것이다. 고은 시인도 청소년기에 이 절을 들락거렸다고 한다.
다시 큰길 왼쪽으로 오르면 지금은 식당이 된, 1930년대 군산부윤 관사를 만난다. 당시 시장 관사였던 이 건물은 최근 식당으로 꾸미면서 안팎을 개조해 겉모습만 당시 형태로 남게 됐다. 군산여고 옆 골목 안의 히로쓰가옥(등록문화재·한국제분 관사)은 안팎이 옛모습을 갖추고 있다. 주변 골목은 일제 때 부호들이 살던 주택가였다고 한다. 당시 포목상 히로쓰가 건축한 전형적인 일식 가옥이다. 영화 <장군의 아들> 촬영지다. 여기서부터 골목을 돌 때마다 담장과 정원·목조가옥 등 옛모습을 간직한 일본식 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영화동은 80년대까지 영화를 누리던 시장
월명산 자락 해망굴로 발길을 옮긴다. 군산서초등학교 지나면 흥천사 옆으로 뚫린 해망굴(등록문화재)이 나온다. 1926년 일제가 중앙로와 해망동을 잇기 위해 뚫은 높이 4.5m, 길이 131m의 굴이다. 굴을 통과해 해망동 쪽 거리에 나서자 낡은 간판을 단 몇몇 가게가 60~70년대 거리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영자미장원도 숙머리방도 굴다방도 문이 닫혔다. 해망굴 입구에서 흥천사 옆길로 오르면 서해안과 금강 하구, 강 건너 장항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수시탑에 이른다. ‘군산을 지킨다’는 뜻을 담아 1968년 세운 탑이다.

해망굴에서 내려와 구영3길로 들어 영화동 시장으로 간다. 80년대까지 영화를 누리던 상설시장이다. 인근 미군부대 군인들도 이곳 술집들에 와서 들끓었다. 일제시대 일인들에 이어 광복 뒤엔 미군들이 몰려와 북적이던 이 지역은 이제 시청·법원·검찰청도 신시가지로 옮겨가고 아메리카타운도 옮겨가 썰렁해졌다. 50년 동안 시장 어귀의 구멍가게를 지켜온 대우상회 주인 고창훈(77)씨가 말했다. “인제 다 망했지 뭐. 여긴 노인들만 사니께. 대책두 지원두 없구, 죽어라 죽어라 해요.”
해망로로 다시 나서기 전에 만나는 일식 가옥의 1층엔 편의점이 들어섰다. 그러나 2층은 옛 모습 그대로다. “문화재에 대한 의식이 있는 집 주인”이 2층을 옛 모습 그대로 살리면서 집을 수리했다고 한다.

장미동은 꽃이름 아닌 일제강점기 ‘쌀 저장소’
해망로로 나선다. 길 건너면 옛모습을 간직한 반듯한 벽돌집 군산세관(등록문화재)이 보인다. 1908년 대한제국 시절 지은 서양식 단층건물이다. 지금은 내항과 세금 관련 사진과 자료를 전시한 호남관세전시관으로 쓰인다. 세관 뒤쪽엔 수덕산이 있었고 수덕산엔 군산진성(토성)이 있었다. 일제가 내항을 건설할 때 수덕산 자락을 깎아 바다를 메웠다고 한다.
나가사키18은행 건물은 1907년 세워진 서양식 건물이다. 일제 때 자본 수탈에 앞장섰던 이 은행 건물은 최근까지 대한통운 건물로 쓰이다 한때 헐릴 위기에 놓였으나 등록문화재로 인정되며 말끔히 새단장을 했다. 군산시에선 군산세관 주변부터 조선은행에 이르는 장미동 일대 땅과 건물을 사들여 근대산업유산 테마단지를 조성중이다. 박물관도 만들고 기존 건물을 복원해 문화예술인 창작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장미동이란 동네 이름도 일제 수탈의 흔적이다. 꽃 이름에서 나온 게 아니다. 일제가 내항 일대에 쌀을 쌓아뒀던 데서 나온 장미동(藏米洞)이다. 해망굴·해망로는 군산8경의 제3경 해망추월(海望秋月·해망령 전망대의 소나무 위로 떠오른 가을 달의 모습)에서 나온 이름이다.
나가사키18은행에서 한 골목 더 가면 출발했던 백년광장이다. 12개 기둥을 다시 보니 일본식도 아닌 것이 한국식도 아닌 것이 더욱 생뚱맞아 보인다. 6㎞ 남짓 걸었다.

군산=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살아있는 근대문화유산 숲…걸어서 6㎞
서해 요충지가 겪은 일제 수탈흔적 뚜렷

군산은 거대한 근대문화유산의 창고다. 인천·목포과 함께 근대 옛도심의 사람살이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도시다. 금강 하구다. 조선 3대 시장의 하나였던 강경으로 드나드는 길목이자 서해 바닷길의 요충지였다. 군산항은 1899년 개항했다. 이곳을 통해 일제는 전북 곡창지대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날랐다. 월명동·영화동·내항 주변, 개정면·대야면 일대에 일제 수탈의 흔적들이 뚜렷이 남아 있다. 일본 냄새 물씬한 옛도심 골목 순환코스를 걷는다.
내항 뜬다리(부잔교) 옆 관광안내소에서 출발한다. 관광안내지도를 챙긴 뒤 먼저 내항을 둘러본다. 내항은 옛 군산진이 있던 곳으로, 군산산업단지 쪽 외항과 구별된다. 일제 때 일본인 소유의 토지가 가장 많았던 곳이 군산으로 알려진다. 이들이 소유한 토지의 90% 이상이 논 등 경작지였다고 한다. 군산항은 일제가 기름진 전북 평야지대에서 난 쌀을 한데 모아 반출하던 물류기지였다. 그 흔적들이 내항 주변에 가로 뻗고 모로 뻗은 철로와 물이 빠질 때도 배를 댈 수 있게 한 뜬다리 부두다. 관광안내소 옆엔 군함과 전투기를 전시한 해양테마공원도 있다.
<아리랑> 무대이기도 한 군산 째보선창

그 아래 금암동 어시장 자리는 옛날 째보선창이라 부르던 곳이다. 포구의 한쪽이 째진 것처럼 파인 모습이라 그런 이름을 얻었다는 설이 있다. 째보선창이란 이름의 포구는 목포에도 있다. 일제땐 동부어판장으로도 불렸고, 조선시대엔 죽성포구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도 군산 째보선창이 등장한다.

1999년 만든 개항 100돌 기념 백년광장으로 간다. 해망로 내항사거리 옆이다. 광장에 세워진 12개의 돌기둥이 다소 생뚱맞다. 사거리 길 건너 모퉁이엔 미두장터 빗돌이 있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도 등장하는 미곡취인소(미두장) 자리다. 미곡취인소란 현물 없이 쌀을 거래하던 곳으로, 일제의 간접적인 미곡 수탈에 이용된 곳이다. 조선인 부자들이 이곳에 손댔다가 망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옛 조선은행 건물은 복원공사중
광장 옆엔 낡고 우중충한 대형 건물이 곧 무너져내릴 듯한 모습으로 서 있다. 1923년 지은 조선은행 건물(등록문화재)이다. 당시 군산 최대 건물이었다지만, 지금은 뼈대만 남은 텅 빈 몸을 간신히 추스르고 서 있다. 유흥업소 낡은 간판들이 어지러운, 뚫어진 외벽을 통해 80여년 영욕의 세월이 다 들여다보인다. 복원공사중이다.

해망로는 일제 때 상업 중심거리인 이른바 본정통이다. 관청·은행·상점이 즐비했다. 해망로 길 건너 동령고개로 오른다. 고개 들머리 오른쪽에 57년 됐다는 중국집 빈해원이 있다. 식당 내부가 트인 2층 구조의 중국식 건물이다. 동령고갯길은 일제 때 화교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다. 고개 넘어 영동사거리에서 패션가인 영동거리로 든다. 단층건물이 이어진 골목이지만, 없는 브랜드가 없는 옛도심 패션1번지다.
문 닫은 국도극장 앞을 지난다. 일제 때부터 희소관이란 극장이 있던 곳이다. 극장 앞 오른쪽 골목은 ‘예술의 거리’가 조성되고 있다. 아직은 썰렁하지만, 길이 150m가량의 골목 곳곳에 현재 화가 7명, 문인 2명과 음악가·사진가·디자이너 들이 화실·찻집·작업실 등을 마련해 들어와 있다. 2002년 1월 이른바 성매매업소 화재로 13명이 목숨을 잃은 개복동 골목이다. 본디 이 골목 주변은 한때 영화관이 네곳이나 됐었다. 최신식 설비를 갖춘 인근 영화관에 밀리고, 화재사건까지 빚으면서 결국 모두 문을 닫았다.
사건사고 많았던 개복동 영화관 골목길

“유난히 사건·사고가 많았던 이 골목을 살아 움직이는 예술인들의 거리로 바꿔나갈 계획입니다. 아직 뚜렷한 변화가 있는 건 아니지만 조금씩 그 낌새가 보이고 있어요. 오는 8월부터는 성매매업소 화재사건과 연계한 추모 이미지작업·전시회 등 ‘꽃순이 프로젝트’를 선보일 예정입니다.”
골목을 나와 콩나물고개로 오른다. 이 길도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한 무대가 됐다. 재산 다 팔아먹고 창성동 고개 위(둔배미)의 초가집으로 이사한 정 주사가 오르내리던 길이다. 콩나물고개란 이름은 옛날 주변 주민들이 집에서 기른 콩나물을 내다 팔았던 데서 나왔다고 한다. 고개 중간에 창성동 주공아파트 단지 옆길로 오르면 선양고가교에 이른다. 일제 때 산줄기를 끊어 삼학동~명산동을 잇는 길을 냈다. 이른바 ‘산 끊어진 데’라는 곳이다. 끊어진 부분에 고가다리를 놓아 다시 이었다. 다리 위에 <탁류>의 무대임을 알리는 빗돌이 있다.
1930년대 군산부윤 관사, 식당으로 변신

다시 큰길 왼쪽으로 오르면 지금은 식당이 된, 1930년대 군산부윤 관사를 만난다. 당시 시장 관사였던 이 건물은 최근 식당으로 꾸미면서 안팎을 개조해 겉모습만 당시 형태로 남게 됐다. 군산여고 옆 골목 안의 히로쓰가옥(등록문화재·한국제분 관사)은 안팎이 옛모습을 갖추고 있다. 주변 골목은 일제 때 부호들이 살던 주택가였다고 한다. 당시 포목상 히로쓰가 건축한 전형적인 일식 가옥이다. 영화 <장군의 아들> 촬영지다. 여기서부터 골목을 돌 때마다 담장과 정원·목조가옥 등 옛모습을 간직한 일본식 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영화동은 80년대까지 영화를 누리던 시장
월명산 자락 해망굴로 발길을 옮긴다. 군산서초등학교 지나면 흥천사 옆으로 뚫린 해망굴(등록문화재)이 나온다. 1926년 일제가 중앙로와 해망동을 잇기 위해 뚫은 높이 4.5m, 길이 131m의 굴이다. 굴을 통과해 해망동 쪽 거리에 나서자 낡은 간판을 단 몇몇 가게가 60~70년대 거리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영자미장원도 숙머리방도 굴다방도 문이 닫혔다. 해망굴 입구에서 흥천사 옆길로 오르면 서해안과 금강 하구, 강 건너 장항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수시탑에 이른다. ‘군산을 지킨다’는 뜻을 담아 1968년 세운 탑이다.

해망굴에서 내려와 구영3길로 들어 영화동 시장으로 간다. 80년대까지 영화를 누리던 상설시장이다. 인근 미군부대 군인들도 이곳 술집들에 와서 들끓었다. 일제시대 일인들에 이어 광복 뒤엔 미군들이 몰려와 북적이던 이 지역은 이제 시청·법원·검찰청도 신시가지로 옮겨가고 아메리카타운도 옮겨가 썰렁해졌다. 50년 동안 시장 어귀의 구멍가게를 지켜온 대우상회 주인 고창훈(77)씨가 말했다. “인제 다 망했지 뭐. 여긴 노인들만 사니께. 대책두 지원두 없구, 죽어라 죽어라 해요.”
해망로로 다시 나서기 전에 만나는 일식 가옥의 1층엔 편의점이 들어섰다. 그러나 2층은 옛 모습 그대로다. “문화재에 대한 의식이 있는 집 주인”이 2층을 옛 모습 그대로 살리면서 집을 수리했다고 한다.

장미동은 꽃이름 아닌 일제강점기 ‘쌀 저장소’
해망로로 나선다. 길 건너면 옛모습을 간직한 반듯한 벽돌집 군산세관(등록문화재)이 보인다. 1908년 대한제국 시절 지은 서양식 단층건물이다. 지금은 내항과 세금 관련 사진과 자료를 전시한 호남관세전시관으로 쓰인다. 세관 뒤쪽엔 수덕산이 있었고 수덕산엔 군산진성(토성)이 있었다. 일제가 내항을 건설할 때 수덕산 자락을 깎아 바다를 메웠다고 한다.
나가사키18은행 건물은 1907년 세워진 서양식 건물이다. 일제 때 자본 수탈에 앞장섰던 이 은행 건물은 최근까지 대한통운 건물로 쓰이다 한때 헐릴 위기에 놓였으나 등록문화재로 인정되며 말끔히 새단장을 했다. 군산시에선 군산세관 주변부터 조선은행에 이르는 장미동 일대 땅과 건물을 사들여 근대산업유산 테마단지를 조성중이다. 박물관도 만들고 기존 건물을 복원해 문화예술인 창작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장미동이란 동네 이름도 일제 수탈의 흔적이다. 꽃 이름에서 나온 게 아니다. 일제가 내항 일대에 쌀을 쌓아뒀던 데서 나온 장미동(藏米洞)이다. 해망굴·해망로는 군산8경의 제3경 해망추월(海望秋月·해망령 전망대의 소나무 위로 떠오른 가을 달의 모습)에서 나온 이름이다.
나가사키18은행에서 한 골목 더 가면 출발했던 백년광장이다. 12개 기둥을 다시 보니 일본식도 아닌 것이 한국식도 아닌 것이 더욱 생뚱맞아 보인다. 6㎞ 남짓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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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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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많이 변했군요 20년전에 군산외항 매립하면서 매립지에 축협 사료공장 지을때 설비관계로 한 일년정도를 군산에서 지냈었지요 군대 제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었던때여서 일무서운줄 모르고 납기에 맞추느라고 철야도 마다않고 일하던 시절이었읍니다. 물론 추억도 좀 있었읍니다만.... 얼마전 다시가본 군산은 너무나 많이 변했더군요 구시가지의 모습도 약간은 변화가 있어보이지만 신도시쪽으로 모든게 이전한 덕에 거의 변한게 없어 보이더군요. 기사를 보노라니 20년전 젊었었던 시절의 기억이 새록해서 잠시 옛날을 반추할수 있었읍니다. 물론 다시가본 군산은 여전히 아름다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