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닳은 길 따라 걸음 걸음이 ‘역사책’ 길따라 삶따라

청주 도심 걷기여행
오랜 ‘책장’ 같은 골목…길은 길로 끝없이 이어져
‘더러웠던’ 수암골, 예술인들 ‘살아있는 작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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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내륙의 고도 충북 청주. 마한시절부터 영토다툼이 치열했던 격전지이자, 중세 인쇄문화의 요람이다. 걷기엔 먼 거리인 상당산성과 고인쇄박물관, 도심을 관통하는 무심천을 제쳐두고 도심 골목으로 든다. 낡고 닳은 골목과 생생한 유적들이 나그네 발길을 끌어당긴다. 청주시청 부근 상당로 충북농협본부에서 출발한다.
 
금요일이라 농협 뒤뜰에선 농산물 장터가 열렸다. 농협매장과 별도로 매주 금요일 아침 7시부터 점심 무렵까지 ‘반짝 시장’이 열린다. 청주 주변 농가의 할머니·할아버지들이 기르고 채취한 것들을 이고지고 나와 좌판을 펼친다. 살아있는 ‘올갱이’(다슬기) 한 사발에 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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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로 길 건너 방아다리사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든다. 무심천으로 흘러드는 작은 개천을 복개한 도로다. 네거리 부근에 개천을 건너다니던 방아다리가 있었고, 다리 옆엔 오래 전에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한다. 대성여상 쪽으로 가기 전 오른쪽 골목으로 세 블록 너머엔 1980년대 청주 민주화운동의 성지인 수동성당이 있다. 굵직한 시국사건이 터질 때마다 시국미사를 열어온 곳이다.
 
대성여상 앞 골목의 청주시인력관리센터. 매일 새벽부터 인력시장이 형성되는 곳이다. 어려워진 경제상황을 반영하듯 한낮인데도 일부 구직꾼들이 서성이고 있다.
 
영암슈퍼 끼고 오른쪽 골목으로 오르면 표충사 정문이 나온다. 표충사는 조선시대 당파싸움 폐해의 한자락을 보여주는 사당이다. 영조4년(1728년) 영조와 집권 노론세력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무신란(이인좌의 난;양반·군인·상인·농민이 참여한 봉기) 때, 반군에 저항하다 희생된 충청병마절도사 이봉상 등 3인의 위패를 모셨다.
 
50~70년대 달동네 풍경, 5년 전만해도 공동변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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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 돌담을 끼고 올라 소방도로를 건너면 비탈쪽으로 그림같은 달동네 골목이 펼쳐진다. 우암산 기슭 수암골이다. 50~70년대 골목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마을에 하나뿐인 가게 삼충상회가 골목길 탐방 출발점이다. ‘삼충’이란 표충사에 모셔진 세 충신을 가리킨다. 36년째 삼충상회 주인이며 40여년 경력의 ‘가로수 정비’ 전문가이자 수암골 노인회 회장인 박만영(73)씨가 말했다.
 
“시방 여기 주민으로 말할것 같으면 말여. 70여호에 153세대밖에 안뒤야. 늙은 내우(내외)만 사는 집덜이구 그랴. 빈 집두 한 7~8집 되것구머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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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쯤 골목을 기웃거리면 동네 그림이 그려진다. 닫힌 듯 열린 녹슨 철대문, 쓰러질 듯 서로 기대 선 담벽들과 거기 대문짝 만하게 적힌 ‘근면·자조·협동’ 표어 따위들이 몸과 마음을 옛 풍경화 속으로 끌어들인다. 산비탈로 촘촘히, 손수건 만한 지붕을 쓴 손바닥 만한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그 사이를 겨우 비집고 나간 골목길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길은 어떻게든 서로들 만난다. 길 잃을 염려는 없다.
 
우암산 자락 달동네는 본디 광복 뒤 중국·일본에서 들어온 동포들이 터를 잡은 곳이었다. 한국전쟁 때 청주로 몰려든 피난민들을 이주시키며 산동네가 형성됐다. 대개 한 집에 방 두칸을 들여 두 세대가 산다. 주변 산비탈에 빼곡히 들어찼던 집들이 철거돼 사라지면서 지금은 수암골 등 일부만 남았다. 이른바 ‘수동 15통’(행정명 중앙동 15통), 옛날 수용소 터라 부르던 곳이다.
 
Untitled-6 copy.jpg수암골에 산 지 40년 돼간다는 최인덕(75)씨는 “몇년 전까지도 화장실 없는 집이 많아 코딱지 만한 간이 공동변소들을 텃밭 옆에 지어놓고 사용했다”고 말했다. 48년 살았다는 김대연(70)씨도 말했다.
 
“이짝에 있던 아홉칸짜리 공동화장실은 아홉집이 나눠 썼지. 그땐 이 골목이 걍 또랑이여. 니야까두 제우 올라왔어. 아이구 드러워서.”
 
5년전 주택공사에서 번듯한 시멘트 공동화장실을 세워줬다. 그러나 “전기세·수도세 엄청 나오고” 관리도 안되는데다 화장실을 들인 집들이 늘면서 문을 닫아걸었다. “얼마 전까지두 한 집이서 썼는데 보니까 아 떡하니 걸어잠궈놨네. 관광객덜 위해서라두 열어놔얄 텐데말여. 관리비가 엄청 나온디야.”
 
최고 금속활자 <직지> 찍은 인쇄문화의 요람
 
“낡고 드러웠던” 골목들은 지난해 환하게 바뀌었다. 청주 예술인들의 애정과 솜씨 덕이다. 청주민예총은 ‘수동 공공예술 프로젝트-골목길 광장을 품다’라는 주제로 수암골 환경 가꾸기에 나섰다. 떼지어 붓을 들고 몰려와, 사다리 놓고 쭈그려 앉아, 금간 담벽이고 대문이고 전봇대고 쓰레기통이고 버려진 화분이고를 가리지 않고 들입다 그림을 그리고 색칠했다고 한다. 순식간에 동네 전체가 살아있는 작품으로 태어났다.
 
수암골은 지난 봄 텔레비전 드라마 <카인과 아벨>을 통해 알려지면서 방문객이 늘고 있다. 민예총은 지난 5월에도 수암골에서 다채로운 공연·전시·체험행사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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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엔 5년전 민가를 개조해 들어앉은 작은 암자 혜원정사(주지 정은 스님)가 있다. 이웃돕기 자원봉사·청소년 도우미 역을 자임하는 정은 스님은, 볼일이 급하거나 목마른 탐방객들에게 암자를 개방한다.
 
골목을 한번만 돌기엔 아쉬움이 남는다. 빈집을 사진전시관으로 꾸민 ‘수암골 사진관’을 거쳐 마을을 한 바퀴 더 돌고 내려와 소방도로 따라 오른다.
 
주차장 옆 나무계단을 타고 올라 좁은 찻길을 걸으면 청주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청소년문화의집 지나 벚나무 가로수 우거진 우암산순환로로 올라선다. 삼일공원으로 가는 숲길이 울창하다. 우암산(353m) 등산로 들머리 중 한곳이다. Untitled-3 copy.jpg3·1독립선언 33분 중엔 충북 출신이 6명인데 이중 5명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주차장 옆에 간이매점과 화장실이 있다.
 
공원에서 조금 내려오면 오른쪽에 2층짜리 조각전시장 겸 카페 브룩스가 있다. 2층 옥상에서 차를 마시며 시내를 둘러볼 만하다. 커피 5천원.
 
내려와 수동마트 사거리 지나 직진해 중앙시장앞 네거리를 건넌다. 중앙시장통을 지나면 왼쪽으로 차없는 거리가 시작된다. 들머리는 한때 헌책방이 열세 곳에 이르렀다는 옛 헌책방 거리다. 중앙서점 등 “없는 책이 없다”는 40년 된 헌책방 세 곳이 남아 있다. 청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를 찍은, 고인쇄문화의 요람이다. 길바닥에서도 거리 현수막에서도 쉽게 ‘직지(直指)’라는 글씨도 만날 수 있다.
 
비림공원·망선루·압각수…, 신라의 다리까지
 
젊은이들로 활기 넘치는 패션가를 지나 성안길로 든다. 북문을 통해 청주읍성 안으로 들던 지점이다. 청주읍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점령했던 것을 관군과 의병이 치열한 전투 끝에 탈환하면서 전국에 왜적 퇴치의 자신감을 심어줬던 곳이다. 길 옆에 ‘북문터’임을 알리는 빗돌이 있다.
 
청주읍성 성곽과 동서남북의 성문은 일제 초기까지 존재했다. 일제는 성문과 성곽을 헐어 하수구 축대를 쌓는 데 쓰고, 성곽터를 따라 길을 냈다. 읍성은 사라졌지만, 성 안의 일부 유적들은 중앙공원 주변에 남아 있다. 성 안의 차없는 거리 옛 이름은 일본식 본정통이었다. 청주시민들은 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성안길이라는 아름다운 새 이름을 붙였다.
 
금융거리를 지나고 백화점거리를 지난다. 젊고 새롭고 화려한 것들이 넘치는 거리 한편에 놀랍게도, 낡고 닳은 유물 하나가 몸을 꼿꼿이 세우고 서 있다. 영프라자 뒤 광장 한가운데 우뚝 솟은 국보 41호 용두사터 철당간이다. 당간은 절 들머리에 나무나 철제 기둥을 세우고 깃발을 달아 법회 등을 알리던 일종의 깃대다. 절터는 흔적없이 사라지고 이곳에 높이 12.7m(본디 20m)의 철당간만 남았다. 당간엔 건립연대인 ‘준풍 3년’(고려 광종13년·서기 962년) 등 393자의 명문이 돋을새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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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나와 길 건너 중앙공원쪽 먹자골목으로 간다. 우동집·호떡집·떡볶이집 등 오래된 집들이 포진한 골목이다. 중앙공원으로 들어서면 도심 한가운데에 만나는 울창한 숲과 함께 즐비한 비석들에 놀란다. 청주성 탈환의 선봉장 조헌·영규대사 추모비 등 공원엔 50여개의 크고 작은 비석들이 세워져 있어 ‘비림(碑林)공원’이라고도 불린다. 충청병영의 정문이던 충청병마절도사영문과 동헌의 뒤쪽에 있던 것을 옮겨온 아름다운 누각 망선루의 위용을 만날 수 있다. 고려말 이성계에 반대해 감옥에 갇혔던 목은 이색 등이 대홍수 때 나무에 올라가 목숨을 건졌다는, 900살 먹은 은행나무 ‘압각수’도 볼거리다. 
 
중앙공원 문을 나서면 남사로와 남주로가 교차하는 지점, 옛 읍성의 남서쪽 모서리 부근이다. 4㎞ 남짓 걸었다.
 
여기서 남주상가 거쳐 걸어서 10분 거리의 육거리시장 부근 도로 밑엔 무심천을 건너다니던 옛 다리인 길이 80여m의 남석교가 묻혀 있다고 한다. 유래가 신라 때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다리다. 1900년대 초반 홍수로 물길이 바뀌어 방치되면서 차츰 땅속에 묻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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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여행쪽지
 
중부고속도로 서청주나들목에서 나가 흥덕로 따라 청주시내로 가거나, 경부고속도로 청주나들목을 나가 36번 국도 타고 직진해 사직로를 따라 간다. 청주대교 건너 상당사거리에서 좌회전해 5분쯤 가면 왼쪽에 청주시청이 있다.
 
Untitled-11 copy.jpg3대째 빵·우동을 함께 팔아온 서문우동(서문제과·043-256-3334)과 돈까스·우동을 함께 파는 공원당(043-255-3894)은 청주 우동의 양대 명가다. 남주동해장국집(043-256-8575)은 65년간 남주시장 어귀에서 선지해장국을 말아온 집. 서문오거리 부근 골목엔 올갱이(다슬기)국 전문식당이 두 집 있다. 상주할머니집(043-256-7928), 미원식당(043-256-1617).     
 ♣H6s청주=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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