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체험?, 예스러움 그대로 ‘푹 묵으시요잉!’ 마을을 찾아서

고택 돌담 등 온통 정원…두터운 세월 냄새 가득
‘불편하고 성가신’ 유혹…‘민속촌 개발’에 뒤숭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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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골마을 운영위원장 이정민(46)씨의 주장은 단호했다.

 

“구석구석 선조의 숨결이 살아 있고, 손때가 남아 있는 전통마을입니다. 관광 수입을 내세워 상술이 판치고, 박제화 된 또 하나의 민속마을로 치장해선 안 됩니다.”

 

강골마을(오봉 4리)은 전남 보성군 득량면에 있다.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군량미를 확보했다는, 득량 땅 바닷가 인접 마을이다. 400년 전 광주 이씨가 들어와 살며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독특한 건축미를 자랑하는 옛집들과 돌담길, 대숲과 정자 등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때 타지 않은’ 몇 안 되는 전통마을로 평가된다.

 

“상술 판치는 관광지대신 고치고 다듬어 전통 살아 숨쉬게“

 

Untitled-8 copy.jpg개발 바람을 비켜간, 고리타분하고도 아름다운 집들과 선인들의 생활 유적들이 생생하다. 중요민속자료 네 집을 포함한 25집에 평균 나이 70살이 넘는 주민 50명이 산다. 국회의원도 나고, 판사도 나고, 대법원장도 난 마을이다.

 

전쟁의 포화에서도 벗어나 있던 이 마을이 요즘 뒤숭숭하다. 3년 전부터 추진되고 있는 ‘강골 전통마을 조성사업 계획’ 때문이다. 보성군이 용역을 주어 펴낸 ‘기본계획’에 따르면 2015년까지 강골마을과 마을 주변에 숙박·휴식시설을 갖춘 대규모 한옥촌과 문화 체험장·저잣거리·박물관·국악공연장을 갖춘 민속촌이 들어서게 된다. 

 

이에 대해 이정민씨는 “전통마을 보전은 겉치레에 있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옛 모습과 정신을 온전히 지키는 데 있다”며 “요란하게 인위적인 민속촌을 건설해 관광지로 만들겠다는 건 시대에 역행하는, 한심한 발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강골마을은 조상들의 문화·생활 흔적과 정취가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마을로, 요즘 각광받는 슬로시티 개념으로 다가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씨는 어르신들만 남은 강골마을에서 번거로운 일들을 도맡아 하는 일꾼이자 마을 지킴이다. 수백억원을 퍼부어 관광지를 만들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비용으로 빈집·낡은 집들을 고치고 다듬는 작업만으로도 살아 숨 쉬는 전통마을을 지키고 가꿀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씨를 비롯한 마을 주민들이 애써 지키고자 하는 강골마을은 어떤 마을인가. 한마디로, 구닥다리 옛 마을의 모습이 ‘제대로 방치돼’ 있는 매혹적인 마을이다.

 

낡았으나 위엄 있고 위엄은 있으되 정감어린 고택들과 돌담, 대숲 사이로 난 마을길, 마을길 끝의 호젓한 정자, 마을길 옆의 자그마한 연못, 연못가로 이어진 돌담길, 돌담 옆에 깊숙한 우물, 우물가의 돌절구와 뜰 앞에 나뒹구는 맷돌 등이, 오래 전부터 눌러앉은 그 자리에 그대로 편안하게 놓인 마을이다. 마을 전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자연 정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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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댁·청주댁 등 며느리 고향 따서 적은 독특한 집 문패

 

강골마을의 스물다섯 집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네 채의 조선시대 집(열화정 포함),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예닐곱 채의 한옥, 70년대 새마을운동 때 슬라브집으로 변형된 대여섯 채의 초가, 그리고 옛집을 허물고 양옥집으로 새로 지은 집 서너 채로 이뤄져 있다.

 

집 대문들엔 독특한 명패가 붙어 있다. 택호다. 청주댁·내동댁·구례댁·침동댁·수원댁·아치실댁…. 모든 집 이름은 그 집에 시집 온 며느리의 고향 이름을 따서 부른다.

 

안채 5칸, 사랑채 4칸으로 이뤄진, 1891년에 지은 이식래 가옥, 솟을대문에다 정갈하고 기품 있는 멋을 자랑하는 이용욱 가옥(1904년 건립), 아기자기한 정원에 섬세하고 소박한 멋을 지닌 이금재 가옥(1900년 전후 건립) 등 세 채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고택이다. 집 안으로 들어서면 하나같이 할아버지 냄새, 꼬질꼬질하게 손때 묻은 생활도구들 냄새, 서늘한 가부장 냄새, 섬세하고도 엄격한 시어머니 냄새, 두껍게 쌓인 세월의 냄새들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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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골마을의 고풍스런 멋과 옛 정취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정자 열화정(중요민속자료)이다. 대숲 옆으로 난 돌담길을 돌아 돌계단을 오르면, 이 마을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게 아늑하고도 고즈넉한 정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조선 헌종 때 이진만이 후진 양성을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팽나무 그늘 아래 ㄱ자로 꺾인 연못이 있고, 못 가운데엔 자그마한 탑이 놓여 있다. 누각형 마루에 올라앉으면 바람소리만 아득하다. 숲과 나무로 가려진 격리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정자 옆으론 대나무숲이 빽빽하고, 뒤쪽엔 동백나무 고목들이 울창하다. 보성땅으로 귀양 왔던 조선 말 유학자 이건창의 발자취가 서린 곳이기도 하다.

 

Untitled-6 copy.jpg열화정 오른쪽 숲길을 오르면 마을 뒷산이다. 대나무숲과 거대한 소나무들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폐가와 옛 집터들이 이어진다. 숲길을 천천히 걸으면 대나무숲에 부는 바람결에 실려 마을 내력이 전해져 오는 듯도 하다.

 

이정민씨가 말했다. “우리 마을엔 집마다 대부분 속 깊은 우물이 있고, 그 주변엔 대개 두꺼비가 산다. 기와지붕마다 와송(바위솔)이 자라는 마을인데 문화재청에서 지붕 보수를 하면서 많이 사라졌다. 또 집마다 광엔 관이 하나썩 들어 있다. 이건 자신의 죽음을 일상적으로 대비해 온 선조들의 자세를 이어받은 것이다.”

 

그는 “마을에서 1번을 꼽으라면 이것”이라며 마을 공동우물에 대해 말했다. “요것이 그랑게, 옛날에 마을을 먹여 살린 젖줄이요 근원이라요. 오래 전엔 이 우물밖에 읍었으니께.” 공동우물은 큰우물·소리나는 샘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마을의 여론이 이곳에서 생성되고 전파됐기 때문이다. 아낙네들에겐 소통의 공간이자 해방 공간이기도 했던 우물이다. 


“우풍도 시고 불도 때야 허는디 뭐달러 온다요”

 

마을 내력에는 밝고 귀는 약간 어두우신, 명봉댁의 바깥어른 이병철(78)씨가 말했다.

 

“한 40년 전까지도 마을에 한 200집이 살았는디, 인자 다 떠나고 다 비아갖고 시방 젊은이들은 몇 읍서라. 쩌그 열화정에선 어르신들이 놀고, 아낙들은 요짝 큰샘물터에서 놀았제라. 요 앞산에 옛날 만유정이 있었는디, 거그서 일제 항거 모임을 허다가 경찰 온다는 연락이 오면 열화정쪽 뒷산으로 숨어들어갔제. 순경이 쫓아오면 돌을 굴러내려 쫓았는디 거긴 늘 돌을 준비해 놨었지. 아 나도 열화정서 서당글 깨나 배왔는디, 거가 연못도 옛날엔 음청 컸어라. 근디 다 말라갖고 인자 메와지고 쬐껨하지라. 그 뒤짝으로 이정례씨 대밭이라고, 무자게 빽빽이 들어찬 대나무밭이 있었어라. 또 거긴 이런(팔을 한 아름 벌리며) 소나무들이 한 100그루쯤 꽉 들어차 있었제. 근디 해방 뒤 다 산판해갖고 실어가부렀어.”

 

Untitled-3 copy.jpg대나무숲에 오래 서 있으면 좋은 소리가 난다. 쏴아 하는 바람소리 끝에 청아하게 울리는 ‘삐이익 따다다당…’. 대나무 부딪치는 소리다. 강골 마을 이름에서 느껴지는 고집스런 뻣뻣함, 대나무숲이 가진 청아하고도 꼿꼿한 성품을 지닌 까칠한 ‘강골’이 바로 이정민 위원장이다. 그가 있어 마을의 대소사가 진행되고 전통이 유지된다.

 

“우리 마을써 묵으실라문 가족단위로 와야 한단게요. 단체는 안 받아요. 사람 많이 올까 걱정이락게요. 놀고 먹고 가는 데로 알려질까 그라요. 가족끼리 와서 조용히 쉬고 느끼고 가면 쓰것소.”

 

가족단위로 가면 마을 한옥에서 하루 묵으며, 투박하면서도 따뜻한, 고집스러우면서도 정감 있는 주민들의 안내를 받아 마을을 구석구석 둘러볼 수 있다. 이씨는 “불편하고 성가신” 숙박체험을 즐기려는 도시민들이 부쩍 늘고 있다고 말했다. 한번 묵어간 가족단위 방문객의 재방문율이 80%를 넘는다고 한다. 한번 묵어간 이들의 대부분이 강골마을의 민속촌 개발에 반대 뜻을 표시하고 간 건 물론이다. 이씨가 덧붙였다.

 

“죄송허게도 우리 마을엔 도시사람들 위한 편의시설이 없소잉. 군불도 본인이 직접 때야 헌게로 불편허고 성가시고 깝깝할 것이요. 그게 시골 아니것소.” 

 

보성/글·사진 이병학 한겨레 여행전문기자 leebh99@hani.co.kr

◈ 여행쪽지

 

▷강골마을 체험

1박에 2끼 식사, 체험비, 여행자보험 포함해 어른 1인 4만원, 어린이 3만7천원. 조미료를 일체 쓰지 않는 식사를 하고, 방바닥은 뜨끈하고 ‘우풍’은 센 낡은 한옥에서 잠을 잔 뒤 새벽 녹차밭 감상, 갯벌 체험을 즐길 수 있다. 정보화마을 홈페이지(dr.invil.org)나 전화로 예약해야 한다. 하루 3~4인 가족 10가구까지 수용할 수 있다. 이중재 가옥, 이용욱 가옥, 소천댁, 아치실댁 등에서 묵을 수 있다. (061)853-2885. 이정민 위원장 010-6211-5777.

 

▷가는 길

수도권에서 갈 경우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 동광주나들목에서 나간다. 29번 국도 따라 화순 거쳐 보성으로 간다. 보성읍내에서 2번 국도 타고 벌교·순천 쪽으로 가다 군두사거리에서 득량 쪽으로 우회전(845번 지방도)한다. 득량 삼거리 주유소 앞에서 좌회전(851번 지방도)한 뒤 1킬로미터쯤 가다가 오봉역전에서 강골마을 팻말 보고 좌회전해 들어가다 작은 네거리 만나 직진(강골마을 팻말이 있다)한다. 좁은 시멘트길 따라 오르다 산밑에서 좌회전, 녹슨 철문 앞에서 우회전, 좁은 대나무숲길로 들어서면 강골마을이다.

 

▷칼바위·용추폭포

강골마을(오봉4리) 남쪽에 마을의 상징 산인 오봉산이 있다. 줄기에 다섯 개의 봉우리를 거느렸다 해서 오봉산이다. 주민들이 부르는 오봉산 말고도 지도에 표시된 오봉산이 또 하나 있다. 더 남쪽에 자리한, 수려한 바위경치를 자랑하는 칼바위와 용이 살았다는 용추폭포를 거느린 산이다. 칼바위가 있는 오봉산에 올라볼 만하다. 정상에 칼처럼 휘어진 바위를 비롯한 거대한 바위 무리들이 장관을 이룬다. 바위 사이로 깊은 동굴들이 형성돼 있다.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산 정상에 오르면 득량만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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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흥사 터

두 오봉산 사이쯤에 도촌저수지가 있다. 저수지 보를 건너 좌회전해 물길을 따라 오르면 빽빽한 삼나무숲 사이로 무수한 돌담 흔적이 흩어져 있다. 고려 초기의 절터로 알려지는데, 기록으로 전하는 것은 없다. 골짜기 쪽에 쌓아진 높이 7~8m에 이르는 석축은 고색창연한 성곽의 모습이다. 계곡 물길을 사이에 두고 돌담 흔적들과 깨진 기왓장, 사기그릇 들이 무수히 발견된다. 압권은 골짜기 물길의 한 지류에 쌓아올린 석축이다. 골짜기 물길에 돌을 쌓아 위에 평지를 만들고 밑에 하수구와도 같은 물길을 만들었다. 이 주변에서도 무수한 기왓장과 그릇 파편들이 발견된다. 이 절터에서 일제 강점기 때 순금불상 등 불상 3기와 철마 2기, 돌 도가니 등이 발견됐다고 전해진다.

 

보성군에 따르면 사유지인 이곳에 45만평 규모의 골프·승마·레저 단지인 ‘시니어 타운’ 건설이 추진돼 논란이 일고 있다. 강골마을 이정민씨는 “숙박시설만 900세대가 들어선다는데, 이 석축 유적들이 제대로 발굴도 되지 않은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질 판”이라고 말했다.

 

이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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