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중세-현대 뒤섞여 걸음마다 문화유산 길따라 삶따라

 [길 따라 삶 따라] 우즈벡 부하라 유적지
 불교·조로아스터교·이슬람교 차례로 ‘세례’
 2500년 역사 고색창연한 옛 정취 고스란히


 

사마르칸트에서 부하라 가는 길에 만난 당나귀가 끄는 수레.우즈베크에선 당나귀 수레를 흔히 볼 수 있다. 030.jpg

  사마르칸트에서 부하라 가는 길에 만난 당나귀가 끄는 수레.우즈베크에선 당나귀 수레를 흔히 볼 수 있다.


 동서양 교역로이자 문명 교류 통로였던 비단길(실크로드). 6~14세기 중국의 시안(서안)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옛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잇는 험난한 육로다. 대상들이 이 길을 주파하는 데 11개월이 걸렸다. 이 길엔 신라 고승 혜초와, 고구려 출신 당나라 무장으로 위용을 떨쳤던 고선지 장군, 중앙아시아와 교류했던 고구려 사신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8세기 이후 중앙아시아 최대 이슬람 종교도시
 
나무기둥.jpg 우즈베키스탄은 비단길의 톈산북로와 톈산남로가 만나는 곳에 자리잡은 비단길의 중심지였다. 불교·조로아스터교·이슬람교의 세례를 차례로 받은 이곳엔 특히 이슬람 유적들이 즐비하다. 대상들이 펼쳤던 대규모 시장의 흔적도 뚜렷하다. 그리고 1937년 연해주에서 강제이주돼 온 ‘고려인’들의 애환이 서려 있다.
 사마르칸트·히바 등 이슬람 유적들로 덮인 우즈베키스탄의 주요 도시 중에서도 부하라는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도시로 꼽힌다. 2500년 역사를 지닌 고색창연한 도시로, 사마르칸트·히바 등 인기 관광지에 눌려 여행객들의 발길은 비교적 뜸한 곳이다. 사마르칸트가 유약을 발라 구운 하늘색 타일들로 치장된 깔끔한 유적도시라면, 부하라는 정비되지 않은 황톳빛 사막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중앙아시아의 옛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평가를 듣는다. 인구 30만명의 부하라는 1993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본디 불교사원이란 뜻을 지닌 부하라는 8세기 이후 중앙아시아 최대 이슬람 종교도시로 변신했다. 옛 사원(모스크)과 메드레세(마드라사·교육시설), 미나레트(원형 탑), 옥색으로 빛나는 돔, 성벽 등 유적들이 즐비하다. 주로 9~17세기에 건설된 것들이다. 한때는 사원이 197곳, 신학교가 167곳에 이르렀다고 한다. 발굴이 진행 중인 유적들과 복원되지 않은 허물어진 성벽, 그리고 사원들마다 입주해 카펫·목공예품·스카프·그릇·칼 등 전통 상품들을 팔고 있는 주민들 모습에서 동양과 서양, 중세와 현대 문화가 뒤섞여 조화를 이룬 모습을 살필 수 있다. 거리에는 아이를 안고 구걸을 하거나 사진을 찍게 하고 돈을 요구하는 여성들도 자주 눈에 띈다.

 

부하라 쿠겔다시 메드레세 안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

부하라 쿠겔다시 메드레세 안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젊은 여성들.


 16세기에 만들어진 남성용 사우나, 지금도 목욕탕으로


신학자 동상.jpg 유적들이 밀집돼 있어 걸어서 이동하며 둘러볼 수 있다. 시내 중심부엔 라비 하우스(인공 연못)를 가운데 두고 나지라 지반베기 메드레세와 상인들과 순례자들의 숙소였던 나지라 지반베기 하나카가 마주하고 있다. 17세기 지배자였던 나지라 지반베기가 건설한 것들이라고 한다. 운치 있는 카페가 자리잡은 연못 주위에 버텨선 수백년 묵은 뽕나무들이 이채롭다. 18세기 부하라엔 이런 연못이 100여개나 있었다고 한다.
 연못 옆엔 이슬람 신학자이자 시인이었던 핫자 나스레딘이 당나귀를 탄 채 우스꽝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동상이 있다. 이름난 재담꾼으로 우즈베키스탄뿐 아니라 터키·타지키스탄 등에서도 존경받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이 양반이 했다는 재담 한 토막.
 이슬람권에선 여성들이 히잡을 쓰고 있어 결혼 때까지 신랑이 신부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한다. 갓 결혼한 신부가 첫날밤을 지낸 뒤 신랑에게 물었다. “제 얼굴을 당신 말고 또 누구에게 보여줄 수 있나요?” 신부 얼굴을 바라보던 신랑이 말했다. “모두에게 다 보여주시오. 나만 빼고.”
 연못 옆의 쿠겔다시 메드레세는 16세기에 지어진 신학교다. 지금은 낮엔 상점으로, 저녁엔 식당 겸 연회장으로 쓰인다. 이곳에서 전통무용을 감상하며 저녁식사를 즐길 수 있다.
 시내 유적 감상의 이동로는 자연스럽게 ‘톡’으로 불리는 재래시장으로 이어진다. 16세기부터 형성된 돔형 건물 안에 자리잡은 시장이다. 실내가 네거리로 이뤄져 있어, 옛 대상들도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 했다고 한다. 16세기에 만들어진 남성용 사우나인 바냐도 만날 수 있다. 일주일에 한번 목요일 저녁에 문을 열었다는데, 지금도 목욕탕으로 쓰인다. 100년 전까지도 이런 사우나시설이 부하라에 100여곳이나 있었다고 한다. 

 

부하라 칼랸사원과 칼랸미나레트(앞에 보이는 원형 탑).  342.jpg

부하라 칼랸사원과 칼랸미나레트(앞에 보이는 원형 탑).


 

 1127년 만들어진 46m 거탑인 미나레트가 ‘랜드마크’
 
아르크성-어린이.jpg 미나레트는 기도할 시간을 주변에 알리기 위해 세운 높은 탑이다. 사원과 신학교 옆에 세우는데, 18세기까지 100여개의 미나레트가 남아 있었다. 칼랸(크다는 뜻) 사원 옆의, 높이 46m에 이르는 칼랸 미나레트는 부하라의 상징물이다. 1127년 만들어진 것으로 햇볕에 말린 흙벽돌을 달걀흰자와 낙타젖을 반죽해 쌓아올렸다. 위에 불을 밝히면 멀리서도 불빛이 보여 사막의 등대 구실을 했다. 한때는 사형수를 자루에 담아 떨어뜨려 죽이는 사형장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내부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가면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이 미나레트는 수많은 지진을 견뎌냈고, 13세기 칭기즈칸 침입 때도 살아남았다. 부하라 유적지 가이드 일홈(58)이 말했다.
 “칭기즈칸은 칼랸 사원에서만 700명의 어린이를 죽였을 정도로 부하라를 유린했다. 그가 말을 타고 가다 칼랸 미나레트와 마주쳤는데, 올려다보다가 그만 투구가 땅에 떨어졌다. 칭기즈칸은 ‘내가 누구 앞에서도 모자를 벗은 적이 없다. 내 모자를 벗긴 이 탑만은 무너뜨리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해서 탑이 살아남았다.”
 웅장하기로는 성벽 높이가 16~20m에 이르는 아르크성이다. 2400년 전에 처음 성이 만들어진 이래 무너지고 다시 쌓기를 거듭하다 18세기에 현재 모습을 갖췄다. 부하라 왕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780m 길이의 흙벽돌 성벽에 둘러싸인 4헥타르(㏊) 넓이의 성이다. 성문 주변의 성벽 일부만 복원됐고, 뒤쪽은 허물어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안에는 왕이 기도하던 사원과 사신들을 맞이하던 광장, 감옥 등이 있고, 부하라 유물들을 전시한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아름답기로는 포플러·뽕나무로 만든 20개의 나무기둥이 받치고 있는 사원 볼로 하우스(18세기), 18가지 형태의 흙벽돌을 다양한 모습으로 쌓아올린 이스마일 샤마니 묘 건물(9세기)이다. 정교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건축물들이다.
부하라(우즈베키스탄)/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여행쪽지

  ▷ 인천에서 타슈켄트까지 비행기로 7시간 남짓. 대한항공이 지난 9월부터 주 3회(화·금·토) 운항하고 있다.
  ▷ 우즈베키스탄은 1991년 옛소련에서 독립한 나라다. ‘~스탄’은 땅·나라를 뜻한다. 우즈베크인(80%)·러시아인(5.5%)·타지크인 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로, 인구 2800만명. 고려인은 16만명이 산다. 우즈베크어 전용정책 등 민족주의 강화로 러시아인·고려인 등은 줄어드는 추세다. 타슈켄트의 꾸일륙농산물시장의 반찬시장엔 고려인 2~3세가 운영하는 가게들이 많다.
  ▷ 여행하기 좋은 철은 봄과 가을. 낮엔 덥고 아침저녁으로 서늘하다. 화폐는 ‘숨’. 환율은 1달러에 1350숨 안팎으로 한국돈과 비슷하다. 시차는 한국보다 4시간 늦다. 주식은 ‘리뾰슈까’라 부르는 둥글넓적한 빵. 양·소·닭고기 꼬치구이(샤실릭)이나 양 기름에 볶은 쌀밥(쁠롭) 등도 한국인 입맛에 대체로 맞는 편이다. 살구나 멜론 등을 말린 건과일과 아몬드·피스타치오 등 견과류, 스카프 등 실크제품과 카펫 등이 특산물이다.
  ▷ 타슈켄트~부하라 616㎞. 국내선 비행시간 45분. 유적지마다 사진 촬영 때 1500숨 안팎의 돈을 요구한다. 화장실 이용 때도 200숨을 받는다.
  ▷ 타슈켄트 근교의 김병화 박물관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당한 고려인들의 고단한 삶의 역사를 증언하는 사진과 물품, 서류들이 전시돼 있다. 이주 1세대 중 한 분인 김병화(1905~1974) 선생은 이 지역 황무지를 일궈 옛소련내 대표적인 집단농장을 개척한 사람이다. 탄생 100돌(2005년)을 맞아 이듬해에 박물관을 짓고 동상도 세웠다. 박물관 안엔 ‘이 땅에서 나는 새로운 조국을 찾았다’고 외친 그의 생전의 말이 적혀 있고, 앞뜰 동상 아래쪽엔 ‘이중 사회주의 로력 영웅 김병화’라고 적혀 있다. 그는 옛소련 정부로부터 두 번이나 ‘노력 영웅’ 칭호를 받았다. 박물관은 김병화를 도왔던 이주 2세대 장 라지온(71)·태 에밀리아(69)씨 부부가 관리하고 있다.
 이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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