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일제 영광과 수난 ‘지붕 없는 박물관’ 길따라 삶따라

   
    강화읍 도심걷기
 ‘동양-서양 오랑캐’ 침략 때마다 역사 전면에
 관우·유비·장비, 미륵보살과 단군이 오손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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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 할아버지의 영광부터 일제강점기 수모까지 들어 있다. 한강·임진강·예성강 들머리인 뱃길 요충지 강화도(江華島). 선사시대와 삼국시대의 치열한 영토다툼을 거쳐, ‘동양 오랑캐’ ‘서양 오랑캐’ 침략 때마다 우리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던 섬이다. 섬엔 통한의 역사, 고난 속 선인들의 발자취가 빼곡하다. ‘지붕없는 박물관’ ‘한반도의 축소판’으로 불리는 강화도로 간다. 강화군청에서 걷기를 시작해 용흥궁·고려궁터와 서문 거쳐 남문까지 걷는다. 강화산성 내성 안 도심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도는 골목 여행이다.
 
 20여 년 정통만두집 앞 골목길 입부터 ‘구수’
 
 군청 주차장(30분에 600원, 15분마다 300원 추가)에 차를 대고 경찰서 지나 용흥궁 골목으로 간다. 20여년째 만두를 쪄온 정통만두집 앞 골목길이 구수하다. 옛 한옥 담벽을 돌면 용흥궁 솟을대문이 열린다. ‘용이 일어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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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25대 임금 철종(1849~1863년 재위)이 즉위 전 19살까지 농사 짓고 나무 하며 살던 잠저(왕세자가 아닌 사람이 임금으로 추대되기 전 살던 집)다. ‘강화도령’ 이원범이다. 조선 말기 권력을 장악한 안동 김씨 일파가 헌종 뒤를 이을 왕족이 없자, 선대부터 귀양와 살던, 헌종의 7촌 숙부인 그를 후왕으로 지명해 데려갔다. 당시 강화도령을 모시러 온 왕실 행렬을 그린 12폭 ‘강화행렬도’를 강화역사관에서 볼 수 있다. 집은 애초 세칸짜리 초가였으나, 철종 즉위 4년 뒤 안채 별채를 갖춘 한옥으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붙였다.
 용흥궁 앞 대문 옆에 2기의 비석이 서 있다. 오른쪽 비석이 강화도령을 모셔가는 책임을 맡았던 정원용(우의정을 지낸 문신으로 72년간 쓴 일기 <경산일록>을 남겼다)을 기려 세운 것이다.
 용흥궁공원으로 간다. 옛 심도직물 공장터다. 일제강점기 이래 강화읍에선 인조견을 만드는 직물공장이 번성했다. 60~70년대엔 직물공장이 20개에 이를 정도였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일부 터만 남아 있다. 공원 한쪽에 당시의 굴뚝을 그 흔적으로 남겨두었다. 심도직물에서 50년을 일했다는 이남식(75)씨가 말했다. “국민학교 졸업하고 바로 들어가서 평생을 주로 직포부에서 일했죠. 저 굴뚝 자리에 염색부가 있었어요.”
 굴뚝 옆에 비각이 있다. 청의 침입(병자호란)으로 강화성이 함락되자 남문에서 폭약에 불을 붙여 순절한 김상용 선생을 기려 세운 2기의 비다. 왼쪽 비는 1700년에, 오른쪽은 비문이 마모돼 1817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남문 쪽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 비각 맞은편엔 ‘강화3·1만세기념비’가 있다. 1919년 3월7일 강화읍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던 곳이다.
 
 영락 없는 산사 같은 이색적인 성공회 성당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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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비 뒤쪽(웃장판터·주차장과 강화읍사무소 일대)은 조선시대 군영인 진무영이 있던 곳이다. 장터(현 주차장) 자리엔, 군사훈련장(교장)을 서문 옆(외교장)으로 옮기기 전까지 연병장과 사열대 건물인 열무당이 있었다. 현 은혜교회가 열무당 자리다. 용흥궁공원 언덕 위 옛 성공회 강화성당으로 오른다. 1900년 건립된 건물로 겉모습은 한옥으로,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으로 꾸민 예배당이다. 2층 형식이지만 내부는 트여 있다. 돌계단 위에 선 대문이나 종각, 성전 네 기둥에 걸린 한문 주련이 영락없는 산사의 모습이다. 건물 뒤쪽의 사제관을 보고 뒷문으로 나가 다시 용흥궁공원으로 내려간다.
m6.jpg 강화천주교회 지나 북산(송악산) 자락 고려궁 터로 간다. 고려 고종이 1232년 몽고군 침략에 대비해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로 옮긴 뒤 지은 궁궐 터다. 39년간 고려의 수도였다가 몽고와의 강화조약 뒤 개경으로 환도할 때 몽고의 요구로 허물어야 했다. 조선 인조 때에도 이곳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불탔고, 그 뒤 강화유수부 관아건물이 들어섰지만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 침탈로 다시 불탔다. 지금은 강화유수가 근무하던 동헌과 이방청, 복원된 외규장각 등이 있다. 프랑스에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국보급 도서 등은 바로 이곳 외규장각(1782년 정조때 설치)에 있던 고서들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것이다. 약탈 현장을 지켜봤을 400살 난 회화나무가 궁터 한쪽에 서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동헌은 군청으로, 이방청은 등기소로 쓰였다. 궁터 밖엔, 궁에서 길어다 먹었다는 오래된 우물 왕자정과 넉넉한 그늘을 드리운 수령 700년의 ‘고려적’ 은행나무가 있다. 이남식씨는 “어렸을 때 은행나무 앞쪽에 뎅구알(대포알) 창고를 본 기억이 난다”며 “이방청 앞쪽으론 문이 세 개나 있었고, 주변은 온통 초가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고 말했다.
 
 개발도 보수도 않고 헐린달 헐린다 한 지가 사십년 
 
 태극무늬가 그려진 북관제묘(1892년 건립) 외삼문은 닫혀 있다. 강화읍엔 관우·유비·장비를 모신 3개의 관제묘(동·서·남)가 남아 있다. 주민들에게 ‘관제묘’를 물으면 모르는 이가 많다. ‘북간암뫼’(북관운묘), ‘남간암뫼’(남관운묘)가 어디냐고 물으면 금세 알아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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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한옥집이 꽤 남아 있는 골목을 지나 강화여고 옆 강화향교로 간다. 고려 때 처음 세워진 뒤 옮겨다니다 조선 영조 때 현위치에 자리잡았다. 경내 담옆에 선 강화유수 기적비·하마비를 보고 있는데, 담 너머에서 까르르르, 봄꽃 터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봄볕 안고 재잘대며 내달리는 강화여중·고 학생들이다.
 향교길 내려와 무너져가고 있는 옛 성일직물 공장 건물 지나 서문을 향해 걷는다. 서문안길로 들어서니 담벽도 지붕도 나지막한 오래된 집들이 손바닥만한 창들을 달고 이어진다.
 40년 넘게 서문안길에서 살았다는 이의순(75) 할머니가 40년간 쌓인 불만을 또박또박 말씀하셨다. “쟤가 서문이거던요. 여기가 옛날엔 아주 큰길이었대여. 인저 개발이 안되니까는 아주 망쪼가 붙었어. 짓는 허가두 안내주구, 허물어져두 곤치는 허가두 안내줘여. 헐린대는데, 헐린다구 한 지가 한 사십년 됐으니깐.”
 강화산성 내성의 서문(첨화루)은 1977년 복원한 문이지만, 옛빛이 서린 성벽과 우거진 나무들로 제법 묵은 맛이 느껴진다. 동락천에 걸린 세칸 홍예문(석수문)과 연무당 옛터를 만난다. 연무당은, 웃장판터에 있던 열무당과 같이 군사훈련장 사열대 구실을 하던 건물이다. 1870년 웃장판터 쪽 훈련장이 비좁아 확장이전한 새 연병장(외교장)다. 연무당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187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한 강화도강제조약이 체결된 장소가 연무당이다. 건물은 흔적 없고 터를 알리는 빗돌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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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팥죽집과 젓국갈비탕집을 지나, 콩세알식당 지나…
 
m3.jpg 강화대로(48번 국도) 따라 중심가로 들어서서, 옛 장터 뒷골목을 들여다 본다. 낡아 무너져가는 비좁은 집들이 격자형 골목을 따라 즐비하다. 장터를 배경으로 살아가던 주민들 삶의 먼지가 켜켜이 쌓인 골목들이다. 쓰레기봉투가 산을 이룬, ‘쓰레기 함부로 버리지 맙시다’ 글씨가 쓰인 양심거울이 서 있는 골목길을 따라 ‘남간암뫼’(남관제묘)를 물어물어 찾아간다. 안내판도 없는 골목 끝 언덕에 ‘금잡인’(禁雜人)이라 쓴 빗돌을 내세운 남관제묘가 있다. 나그네도 ‘잡인’이건만, 그곳을 지킨다는 ‘정견종사’라는 보살이 흔쾌히 문을 열어준다. 중앙에 관우·유비·장비를 모신 원성전이 있고 앞뒤로 미륵부처와 단군을 모신 작은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3개의 관제묘 중 가정 먼저 건립(1884년)됐다.
 애기보살·꽃보살, 점집 늘어선 골목길을 따라 동관제묘까지 보고 다시 중심가로 내려와 골목길을 걷는다. 30년간 팥죽을 쑤어 온 옛날팥죽집과 ‘욕실 완비’된 서울여인숙·국제여인숙 거쳐 젓국갈비탕으로 이름난 신아리랑식당, 친환경재배 콩요리 전문 콩세알식당 지나 남문쪽으로 걷는다.
 길 옆에 붙은 오래된 한옥이 기다린다. 황부자댁으로 불리는 큰 규모의 기와집이다. 하와이 이민 1세 황국현이란 분이 귀국하며 1928년 백두산에서 실어온 잣나무로 지었다고 한다. 한식·왜식 혼합식 2층 안채가 눈길을 끈다. 어릴적부터 이 집에 살았다는 관리인 이정자(59)씨는 “바깥채는 직물공장으로 사용되면서 많이 훼손됐다”면서 “동네 사람들이 길어다 먹던 우물도 있었는데 메워버렸다”고 말했다. 1947년 옛 제자를 찾아 강화도에 온 김구 선생이 안채 앞에서 일행과 찍은 사진이 강화문화원에 남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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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문로를 따라 직진하면 남문 안파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1711년 건립돼 1955년 폭우로 무너진 것을 다시 복원했다. 문 안쪽에 세워진 강화유수 민진원 불망비를 받치고 엎드린 돌거북 얼굴 표정이 재미있다. 남문 밖 길건너 성벽 위가 묵직하다. 수백년 묵은 시커먼 느티나무가 안간힘을 쓰며 매연을 견디고 있는 모습이다. 남문까지 6.5㎞를 걸었다. 여기서 군청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
 강화=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 강화읍 여행쪽지
 
가는 길=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100번) 김포나들목에서 나가 48번 국도 타고 직진 김포 통진·월곶 지나 강화대교 건너 강화읍으로 간다. 김포에서 대곶면 거쳐 초지대교 건너 84번 지방도 타고 가도 된다.
볼거리=강화대교 건너 왼쪽의 강화역사관에 들르면 강화 역사 이해에 도움이 된다. 고려궁터·덕진진·초지진·광성보·강화역사관은 각각 입장료가 900원, 5곳 일괄입장권을 사면 2천700원. 강화도시민연대 등이 마련한 ‘강화 나들길’도 마련돼 있다. 주요 역사유적지를 묶은 4개 코스. 4월10~25일 고려산과 고인돌광장 일대에서 ‘고려산 진달래 예술제’가 열린다. 겉치레행사 없이 꽃을 즐기는 축제다. 4월 중순 이후엔 강화산성 북문 쪽 벚꽃길에서도 꽃잔치가 벌어질 전망이다.
먹을거리=백반집 우리옥 (032)932-2427, 친환경재배 콩요리 전문점 콩세알식당 (032)933-5520, 젓국갈비집 신아리랑 (032)933-2025, 묵밥집 왕자정 (032)933-7807.
⊙ 여행정보=강화군청 문화관광과 (032)930-3221, 강화문화관광해설사협의회 (032)933-5441.    
  이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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