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고택 문 여는 봄, 꽃봉오리도 얼굴 ‘쏙~’ 길따라 삶따라

청도 고택마을 신지리·임당리
기와집·서당·정자 조선말 건축물이 숲처럼 ‘빽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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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에 눈비 자욱해도 불어오는 건 봄바람이다. 비 왔다가 눈 왔다가, 추웠다가 더웠다가 하거나 말거나 겨드랑이로는 스멀스멀 봄기운이 핥고 지나간다. 나뭇가지마다 푸른 실핏줄이 돌고 돈다. 경북 남쪽 끝자락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임당리는 기와집 즐비한 고택 마을. 동창천 언덕 위의 만화정 앞뜰 산수유도, 작아서 더 자비로운 절 대비사 옆마당의 자목련도 안개비 속에 발끈 꽃봉오리를 내밀었다.
 
동창천은 낙동강의 지류다. 가지산 자락에서 발원한 물과 경주 산내면에서 흘러온 물길이 운문호에 모였다가 흘러내려 청도천을 만나 밀양강을 이룬 뒤 낙동강과 몸을 섞는다. 금천면 신지리(薪旨里·섶말·섶마리·선마리·선호)는 운문댐 아래쪽에 형성된 유서 깊은 마을이다.
 
논밭에 널린 고인돌…수백년 묵은 나무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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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밭엔 고인돌이 널렸고, 정자 우뚝한 강 언덕엔 수백년 묵은 소나무·느티나무·떡버드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조선 중기 성리학자 소요당 박하담(1479~1560)이 무오사화 등을 겪은 뒤 벼슬을 사양하고 들어와 살며 밀양 박씨 집성촌을 이룬 마을이다. 신지리의 상징처럼 된 운강고택을 비롯해 운암고택, 섬암고택, 도일고택, 명중고택과 교육기관인 선암서원(선암서당), 정자 만화정 등 조선 말에 지어진 건축물이 빽빽하다. 운치 있는 옛 한옥을 감상하려는 관광객과 건축학도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운강고택은 소요당 박하담이 서당을 지어 후학을 가르치던 터에 지어진 아름다운 한옥이다. 1824년 운강 박시묵이 크게 지으며 동창천 나루터 옆 언덕에 정자 만화정을 함께 세웠다. 지금 집은 1905년과 1912년에 중창한 88칸짜리 한옥이다. 완전히 차단된 안채와 사랑채, 여성들의 동선, 곳간과 방앗간, 부엌의 배치 등 공간의 효율적 구성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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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사랑채·중사랑채·안채는 각각 널찍한 후원을 갖췄고, 화장실도 남녀, 하인들이 따로 쓰도록 3개나 딸려 있다. 문화관광해설사 김선희씨는 “남자 어른들이 이용하는 행랑채 화장실은 측간, 하인들이 쓰던 마구간 뒤쪽 것은 통시, 부녀자들이 쓰던 안채 방앗간 뒤 화장실은 뒷간으로 각각 불렀다”고 말했다. 안채 뒤뜰엔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일곱개의 바위(칠성바위)를 배치했다.
 
운강고택 주변엔 운강의 아들들이 살던 운암고택·명중고택·섬암고택과 그의 동생이 살던 도일고택 등이 자리하고 있다. 골목 안에 자리한 운강고택을 제외한 나머지 고택들은 1990년 도로확장공사 때 사랑채 등 일부 건물을 헐어냈다고 한다. 이들 고택뿐 아니라 골목마다 줄을 잇는 돌담 안에는 일부나마 옛 모습을 간직한 한옥들이 수두룩하다.
 
피난 땐 산이고 강이고 사람들로 꽉 들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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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정은 금천면 소재지인 동곡리로 건너가는 금천교 옆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정자 뒤엔 소나무숲과 대숲이 울창하고, 앞으론 거대한 느티나무·떡버드나무들을 거느렸다. 누마루에 앉으면 옆으로 어성산 절벽 쪽으로 흐르는 동창천 물길이 바라다보인다. 누마루 들보 옆의 여의주를 문 용머리 장식과 꽃무늬 장식, 방문의 격자형 문창살, 만화정기·중수기 등 무수히 걸린 묵객들의 편액들이 눈길을 끈다.
 
만화정 앞 산수유나무는 당장이라도 터져나올 듯 노란 꽃봉오리들이 무수히 머리를 내밀고 있다. 신지리 문화유적 중에서도 주민들의 자존심이 담긴 곳이 만화정과 선암서원이다. 교직에서 물러나 낙향해 섬암고택에서 살고 있는 박성규(59)씨는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부산 동래읍성을 함락시키고 10여일 만에 청도읍성으로 쳐올라왔다”며 “당시 부자·형제·숙질 등 가족·친척 관계였던 박씨 집안 열네분의 의사가 만화정 앞 느티나무숲에 모여 왜적에 맞서 결사항전할 것을 결의하고 출전했다”고 설명했다. 14의사는 10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어성산 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왜란 뒤 14의사는 각각 1~3등 공신으로 책봉돼 그 공적을 인정받았다.
 
Untitled-21 copy.jpg한국전쟁 때엔 이승만 대통령이 피난민 격려차 방문해 만화정에서 하루를 묵고 갔다. 전쟁 때 이 지역은 전국에서 몰려든 피난민으로 말 그대로 “발 디딜 틈도 없이” 인파로 덮였다고 한다. 신지1리 경로회관에 모인 어르신들이 앞다퉈 피난시절 이야기를 쏟아냈다.
 
“들이고 산이고 강이고 빈틈 한나 없이 빽빽하게 들어찬기라.” “농사 지은 건 다 훑어가제, 콩 다 뽑아가제, 묵고 살라꼬.” “그래또 어쩔 수 없는기라. 된장도 나놔묵고 소도 잡아가 나놔묵고, 송기 껍디 비끼가 삶아묵고 그래 지냈다.” “어떤 이는 독을 달라캐가 줬디만 술을 담가가 팔아묵고 살드라.”
 
만화정 뒷문 밖 언덕은 소나무와 대나무숲이 울창하다. 박성규씨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겠다”며 뒷문을 열고 나가 소나무숲을 가로질러 물가로 안내했다. 물가 옆, 키다리 소나무 한 그루가 비쭉 솟은 언덕 위에 세심대란 정자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운강 박시묵이 만화정 중건과 함께 지었던 작은 정자다. 부랑인들의 숙소 구실을 하며 낡아 허물어져가던 정자를 40여년 전 철거했다. 물가 쪽 바위벽에 새겨진 세심대(洗心臺)·연비어약(鳶飛魚躍) 등 무수한 글씨에서 주변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심대에 있던 ‘세심대기’ 편액은 만화정 누마루 위에 걸려 있다.
 
왜장 붙잡고 뛰어내렸다는 부엉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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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교 하류 물길, 어성산(의성산)이 이룬 절벽 주변에 깊이를 알 수 없었다는 널찍한 물웅덩이 두 곳이 있다. 선암서원 옆의 용두소와 어성산 자락의 깎아지른 절벽(봉황애) 밑의 봉황담(붕디미·부엉데미)이다. 부엉데미는 14의사 중 한분인 박경선 선생이 어성산에서 왜적과 전투를 벌이다 부상당하자, 왜장을 붙잡고 함께 몸을 던져 전사했다는 곳이다.
 
용두소는 소를 감싸며 물길 쪽으로 길게 튀어나온 바위줄기 모습이 용을 닮았던 데서 비롯한 이름이다. 40여년 전 홍수 때 물길 안쪽으로 뻗어 있던 용머리 바위는 떨어져 나갔다. 용이 기어가는 쪽 물길 건너편(신지4리·옛 옹기점마을)엔 뚝뫼(똥뫼·주산·珠山)라 불리는, 소나무 울창한 둥근 언덕이 있다. 신지리 삼거리 선호슈퍼의 박용현(72)씨가 말했다.
 
“용맨쿠로 뻗친 바우 건너 쬐맨한 그 산이 구슬 주짜 쓰는 주산이라. 똥뫼라카는 이도 있긴 있어도, 우옛든동, 용이 여의주를 향해 다가가는 형상인 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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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서원은 소요당 박하담과 동시대의 유학자 삼족당 김대유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본디 매전면 쪽에 있던 사당을 1577년 이곳으로 옮기고 선암서원이라 불렀다. 현 건물은 고종 때 중건했다. 원 안엔 선암서당 현판이 걸린 강당 건물인 소요당, 안채, 사랑채인 득월정, 장판각 등이 있다. 장판각엔 보물로 지정된 ‘배자예부운락판목’과 지방문화재 ‘해동속소학판목’, ‘14의사록판목’ 등이 보관돼 있었다. 한때 도난당해 일본으로 팔려가기 직전에 되찾아, 지금은 안동 한국학진흥원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소요당 앞엔 150년 수령의 백일홍나무 두 그루가 있어, 여름이면 현란한 꽃그늘을 드리운다. 
 
신지2리(입암·선바우·내거리) 논밭과 산자락엔 오래전 고인돌과 선돌들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 “높이가 어른 키를 훌쩍 넘기고 위에 장정 여럿이 앉을 만했던” 거대한 돌이 옛 시장터(내거리) 부근 길가에 있었는데, 20여년 전 농사에 방해된다 해서 깨버렸다. 박용현씨가 덧붙였다. “선바우니, 입암파니, 입암재실이니 카는기 다 그기서 나온 말인 기라.” 지금도 신지리와 임당리의 논이나 산자락, 민가와 우사 주변에서 덮개돌 모양의 거석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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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들여 내시 대 이은 김씨고택 담 유독 높아

 
이웃한 임당리엔 임진왜란 직전부터 약 400년간 16대에 걸쳐 내시(內侍)들이 살아온 김씨고택이 있다. 궁중내시로 봉직했던 김일준이 통정대부 정3품의 관직을 지내다 낙향한 이래 16대까지 성이 다른 내시를 양자로 들여 대를 이었다. 18대 이후엔 내시 전통이 끊겨 정상적으로 자식을 낳아 대를 이었다고 한다. 1980년대초 이 집 사당채 마루 보수공사를 하다 작은 함에 든 ‘내시가세도’가 발견되면서 가계의 전모가 알려졌다.
 
해설사 김선희씨는 “내시는 외근내시와 내근내시가 있었는데, 외근의 경우 지방에서 3개월씩 순환근무를 했다”고 설명했다. 내시를 양자로 들일 때는 선천적 성불구자는 선택 대상에서 제외했다고 한다. 후천적인 불구자를 골랐던 까닭에 매우 가난한 집에선 일부러 어린 자식을 거세시킨 뒤 소문을 내 데려가도록 했다고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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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과 친화적인 분위기를 이루기 어려운 조건임에도, 순조로운 대물림이 이뤄져 온 것은 “쌓아온 부를 바탕으로 대민 구휼과 봉사활동을 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엔 독립운동 자금도 지원했다고 알려진다. 
 
집안 구조는 철저하게 폐쇄적이다. 바깥 사랑채를 대문과 안채를 드나드는 인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각도로 배치했고, 안채 문에 딸린 중사랑채와 문 사이의 차면담 나무판자엔 문 쪽을 볼 수 있도록 나뭇잎 모양의 구멍(하트 모양이라고 하는 이도 있으나, 나무판 일부가 떨어져나가 그렇게 보일 뿐이다)들을 뚫어놓았다. 안채의 여성들을 보호하고 감시하기 위한 장치라고 한다. 사랑채엔 집안의 제일 어른이 기거했고, 중사랑채엔 양자로 들인 아들이 거주했다. 안채를 둘러싼 담도 여느 집 담보다 훨씬 높게 쌓은 모습이다.
 
해설사 김씨가 담과 건물로 사방이 막힌 안채 공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분위기가 음침하지요? 이곳에 한번 들어온 아녀자들은 평생을 대문 밖으로 나가기 어려웠습니다. 친정 부모 상을 당했을 경우 등 극히 예외적일 때만 바깥 출입이 허용됐다고 해요. 얼마나 한맺힌 생활을 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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섶마리(신지1리) 운강고택 부근 돌담 옆길로 오르면 박곡리 저수지(대비지) 지나 고찰 대비사에 이른다. 대비사는 신라 진평왕 때 한 ‘신승’이 함께 창건한 다섯개의 갑사(대작갑사·가슬갑사·천문갑사·소작갑사·소보갑사) 중 하나로 전한다. 본디 소작갑사였으나 대비갑사로 바뀐 뒤 대비사가 됐다고 한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 중앙 계단 양쪽 돌에 새겨진 구름무늬(또는 파도무늬)와 빛바래가는 단청이 아름답다.
 
얼음 녹아 흐르는 대비사 들머리 물가에선 촉촉해진 버들강아지가, 대웅전 앞마당에선 푸른 빛을 잃지 않은 동백나무와 매화·목련 꽃봉오리들이 바짝 달아올라 실눈 뜨고 봄볕을 기다리는 중이다. 
 
대비사 오르는 길은 본디 청도 쪽 주민들이 언양장을 보러 넘나들던 길이다. 통일신라시대 불상인 박곡리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물 좋다는 독종골 약수도 대비사 가는 길에 있다. 
 
청도/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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