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락의 길’ 걷다 보니 60년대 풍경 ‘입구’ 길따라 삶따라

논산 강경 도심걷기여행
옥녀봉 사는 110살 옥녀 할머니 ‘근대문화유산’
팽나무 타고 올라 여고 훔쳐보던 추억 ‘슬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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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강경읍에 옥녀봉이 있다. 해발 44m의 낮은 봉우리. 아마도 전국의 옥녀봉 중에서 가장 작고 아담한 옥녀봉일 듯하다. 전망 좋고 경치도 수려해 논산8경 중 한곳으로 꼽힌다. 갈대숲을 거느리고 펼쳐진 금강 물줄기와 논산천, 강경을 감싸고 흐르는 강경천, 그리고 아담한 강경 거리가 두루 한눈에 잡힌다.
 
갱경이(강경) 포구 사람들은 이 옥녀봉 자락에 깃들어 살며 조선 팔도의 3대 명물시장 중 하나인 강경장을 일궈냈었다. 일제강점기까지 서해안 최대 포구로 번성했던 곳이다. 철로·신작로가 개설되고 금강 물길이 막히면서 옛 명성은 사그라들었지만, 산자락과 골목길·물길에 빛바래가는 그 흔적들이 남아 옛것 밝히는 나그네들을 불러들인다. 보고 느낄거리가 촘촘하다. 강경역에서 출발해 읍내 근대문화재들과 옥녀봉, 죽림서원 거쳐 황산 전망대까지 걷는다.
 
조선 3대 시장이었지만 철로 개통으로 되레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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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개설된 호남선 강경역은 강경의 쇠락과도 관련이 있다. 강경은 조선 후기까지 평양장·대구장과 함께 조선 3대 시장이었고, 원산포와 함께 2대 포구로 꼽히던 곳이다. 금강 물줄기를 따라 전국 특산물을 실은 배들이 모여들던 강경포구는 대규모 물류 수단인 철로 개통으로 타격을 입게 된다. 전국 물자가 모여들던 강경을 일제는 수탈의 전진기지로 삼아, 전기를 끌어오고 관공서를 세우고 기차역까지 개설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런 노력이 강경을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한 것이다.
 
육상교통이 발달하고, 배가 대형화하면서 금강 물길의 쓰임새가 줄어든 데다, 90년대 금강하구둑이 막히면서 강경의 포구 기능은 사라지게 된다. 강경포구의 급격한 쇠락은 개발을 더디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옛 모습을 온전히 간직한 거리로 남게 만들었다. 젓갈시장으로 명맥을 이어오던 강경장은 14년전 강경발효젓갈축제를 시작하면서 대규모 젓갈시장으로서의 위상을 되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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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역 네거리에서 복개천 다리(옛 소화다리) 건너 경찰서 로터리 쪽으로 걷는다. 곳곳에 대형 간판을 내건 젓갈집들이 눈에 띈다. 젓갈축제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젓갈가게는 소규모 가게 13개가 전부였다고 한다. 이젠 100여개가 넘는 젓갈집들이 모두 대형 간판을 내걸고 관광버스를 맞으며 성업중이다.
 
경찰서 앞엔 ‘6·25 격전지 표지석’이 있다. 전쟁때 인민군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벌이다 희생된 83명의 경찰을 추모하는 빗돌이다. 강경읍엔 논산 경찰청사와 검찰청사가 자리잡고 있다. 번성하던 옛 강경의 잔영인데, 수시로 청사 이전설이 나돌아 주민들을 긴장시킨다고 한다. 젓갈가게를 하는 한 주민이 말했다.
 
“욍긴다는 얘기 나오면 난리가 나부리지유. 전 읍민이 들고일어나 그냥 현수막 수백개를 내걸구는 결사적으루다 반대운동을 펼친다니께유. 왜 그러냐. 한번 쇠퇴의 길을 걸어본 경험 때문에 그런 거유.”
 
강경여중의 5월 8일 은사의 날이 ‘스승의 날’ 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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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읍사무소 지나면 학교 거리다. 왼쪽에 강경중앙초등학교가 있고, 오른쪽으론 강경고·강경여중·강경상업정보고등학교가 차례로 이어진다. 강경여중은 스승의 날 발상지다. 60년대초 학생들이 해마다 5월8일을 은사의 날로 정하고 은사를 찾아 꽃을 달아 드린 것을 계기로 1964년 스승의 날이 제정됐다. 강경고 안에 스승의날 기념탑이 있다.
 
강경여중의 김세레나씨 기증 충효탑(1980년)을 보고, 상업고의 강자로 이름을 날리던 이른바 ‘강상’(강경상고·현 강경상업정보고)으로 간다. 근대문화재로 등록된, 1931년 건립한 교장 사택이 남아 있고, 이 학교 출신인, 주벽과 기행으로 유명한 김관식(1934~1970) 시인 시비도 볼 수 있다. 강경상업정보고의 강경여중 쪽 언덕엔 오래된 팽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이 학교를 졸업한 한 어르신은 “팽나무에 올라가 이웃 강경여중고 운동장을 넘겨다 보다 선생님한테 걸려 혼쭐 난 사람이 여럿 있다”고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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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초등학교로 간다. 중앙초교는 1905년 개교한 유서깊은 학교다. 우아한 붉은벽돌 건물을 만난다. 지금도 체육관으로 쓰는, 1937년 세워진 강당 건물(등록문화재)이다. 정문 위쪽 벽에 한국전쟁 당시 포탄이 뚫고 들어간 흔적이 남아 있고, 반대편 벽엔 전투기 기총소사 흔적이 뚜렷하다. 강당 안 네 개의 문 위엔 개교 30돌을 맞아 후원회에서 강당을 지어 기증했음을 알리는 표석과 교장·졸업생들이 기념으로 기증한 휘호 표석들이 남아 있다. 지난해 100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학교를 나와 걷는 골목길은 수십년 전 거리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미장원과 교회와, 낡은 슬레이트 지붕으르 얹은 상점들과, 2층 일본식 집들이 힘을 모아 나그네 발길을 오래된 풍경 속으로 빨아들인다. 텅 빈 집, 깨어진 유리창, 먼지 낀 창틀이 도열한 거리로 어르신들은 천천히 자전거 바퀴를 굴리고, 지팡이를 옮겨 짚는다.
 
논산시 문화유산해설사 유제협(64)씨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20년 전까지도 읍내는 박제화된 생활사박물관을 방불케했지요. 골목이고 건물이고 다 일제강점기에서부터 60년대까지의 거리 모습이었어요. 그걸 보전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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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피난 갈때 홀로 남아 항아리에 자료 숨겨 묻어

 
민물고기 가게에서 우회전해 옛 강경장터로 나선다. 일제강점기 옥녀봉 밑에 있던 윗장터와 함께 인파로 들끓던 아랫장터가 이곳이다. 허름한 주택들이 들어차 옛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우나, 한편에 옛 남일당 한약방 건물(등록문화재)이 남아 옛 장터 모습의 일부를 엿보게 한다. 1923년 지은 목조건물로, 거의 완전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20년대에 남일당이었으나, 다른 이가 인수해 연수당으로 이름을 바꿨고 그 후손이 집을 관리하고 있다.
강경중앙교회 앞길을 걸어 국내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 유숙지 팻말을 만난다. 상하이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1845년 10월12일 금강을 통해 강경포구에 들어와 2주일 정도 머물렀다는 집터다. 옛집은 사라지고 새 집이 들어섰으나, 바로 옆에 더 오래됐다는 민가가 남아 있다. “(집이 지저분해서) 넘 볼까 겁난다”는 집 주인 이정열(81) 할머니가 말했다. “내가 여기 시집온 지 50년이 훨 넘는디, 우리 시아버님두 여서 혼례식을 올렸슈. 신부님이 묵었다는 집은 이 집보덤 한참 나중에 지었대유.” 마루도 기둥도 벽도 고색창연한 민가인데, 슬레이트 지붕은 이중 처마를 댄 일본식이다.
 
중앙교회 옆엔 신사참배 거부 선도 기념비가 있다. 1924년 10월 강경보통학교 주일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기념해 세운 빗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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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골목 돌아 덕유정(향토유적 1호)을 향해 걷는다. 덕유정은 1793년(정조 17년) 세운 활터다. 100년이 넘은 역대 사백(회장) 명단, 회원명부와 회칙, 성적, 회칙을 어긴 회원을 징계하던 용머리 방망이까지 보관돼 있는 유서깊은 국궁장이다.
 
덕유정에 이행구란 분이 있었다. 화살 주워오고 청소하던 일꾼이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활터를 비우고 모두 피난나갔을 때, 이곳을 혼자 지키면서 각종 기록과 자료들을 항아리에 숨겨 묻었다고 한다. 그 덕에 덕유정의 내력이 보전될 수 있었다. 전쟁 직후 회원들이 이 분의 공적을 기려 표창한 ‘행선장’이 건물 안의 수많은 편액들 사이에 걸려 있다. 덕유정에선 지금도 70여명의 회원들이 매일 오후 3시 활을 쏘며, 덕으로써 몸과 마음을 다스린다.
 
덕유정 옆엔 관해루란 누각이 있다. 바다를 본다는 뜻의 현판이 걸린 까닭은 이 누각이 본디 금강 물줄기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옥녀봉 봉수대 자리에 있던 것을 1883년 옮겨온 것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단층 한옥 교회 건물, 커튼 치고 남녀 따로 앉아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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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정을 나와 직진, 절 봉선사 앞을 돌아 옥녀봉 오르는 골목길을 걷는다. 단층 한옥 교회 건물로는 유일하다는 북옥감리교회(등록문화재)가 이 골목에 있다. 내부는 거의 정사각형이다. 가운데 늘어선 기둥에 커튼을 쳐서 남녀 자리를 구분했다고 한다. 지난해 5월까지 신자들이 여기서 예배를 봤다. 빈 교회 건물은 평소 닫혀 있으나, 문 손잡이 위에 적힌 전화번호로 문의하면 내부를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옥녀봉 오르는 길 옆 형제전기상사 뒤 산자락에는 옛 정자터와 샘터, 동굴 그리고 바위에 새겨진 여러 글씨들을 만날 수 있다(주인 허락 필요). 바위 밑엔 일제때 팠다는 굴이 있고, 굴 안엔 옥룡굴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굴 앞 바위엔 영천이란 글씨가 선명한데, 이 영험한 샘(우물)은 몇년전 시멘트로 메워졌다. 언덕 바위 위로 오르는 오래된 계단길 주변 바위들엔 화조월석(花朝月夕), 옥선대, 송은정 등의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10여년전 집을 사들였다는 주인은 “송은정 글씨 부근 빈터에 주춧돌 네 개가 놓여 있었다”고 말했다. 해설사 유씨는 “이 주변은 일제강점기 법원·경찰서 고위 공무원들의 사택들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Untitled-2 copy 13.jpg옥녀봉으로 오른다. 옥녀봉에는 옥녀씨가 사신다. 커다란 느티나무와 복원한 봉수대가 있는 정상에 오르기 전, 옥녀씨를 만난다. 담배패가 달린 구멍가게다. 옥녀씨를 만나려면 우선 옥례(76)씨를 만나야 한다. 송옥례 할머니는 25살에 대전서 시집와 45년째 이 집에 살고 있는 둘째 며느리다. 옥녀씨는 누군가? 옥례씨의 시어머니, 110살의 유옥녀 할머니다. 반세기 이상을 옥녀봉 자락에서 살아왔다. 입이 열릴듯 말듯, 오래 뜸을 들이던 옥녀 할머니가 이윽고 입을 여셨다. “뭔 사진을 자꾸 찍어어.” 할 말은 많으나 입 더디 열리고, 듣고 싶으나 느낌으로만 알아듣는다. 귀 어두워지고 이는 다 빠져 잇몸으로 버티시는, 한 세기를 훌쩍 넘겨 살아오신 유옥녀 할머니. 개발과 보전 사이에서 불편하게 낡아가는 근대문화유산을 닮았다. 옥례 할머니가 말했다. “된장국이든 김치찌개든 뭐든 잘 드시는데, 다 적게 드세요. 그게 오래 사시는 비결인가봐요.”
 
구멍가게 건물은 일제강점기 옥녀봉에 있던 신사를 관리하던 사람이 머물던 관리사였다.
 
절벽 옆 바위엔 밀물·썰물의 이치 새겨져 있어
 
옥녀봉 정상에 서면 강경이 왜 강경(江景)인지 느낌이 온다. “강경이란 지명은 바로 옥녀봉에서 바라보는 빼어난 금강 전망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게 유씨의 설명이다. 옥녀봉 주변은 온통 바위투성인데, 바위엔 온통 선인들이 새긴 글씨투성이다. 옥녀봉·영포대·잠영대·산주 등의 글씨와 옥녀봉의 내력을 적은 듯한 마모된 장문의 글도 보인다.
 
가장 눈길을 끄는 글은 정상 서쪽 절벽 ‘구암’ 옆 바위에 새겨진 ‘해조문’이다. 1860년 새긴 “밀물·썰물이 생성되는 이치와 물의 높낮이를 수치로 풀이해 놓은 글”이다. 일종의 조수표인 셈이다. 유씨는 “번역은 쉽게 되나, 적어놓은 수치의 원리까지 이해하기는 어렵다”면서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원리에 대한 자료도, 그것을 깊이있게 알고 있는 분도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거대한 바위절벽엔 바위를 떼어내기 위해 일렬로 파놓은 구멍들이 무수하다. 제방축조 등에 쓰기 위한 것인데, 구멍에 참나무 등을 깎아 박고 여러 차례 물을 부으면 나무들이 불어나 결국 바위가 떨어져 나가게 된다. 유씨는 “바위 위쪽에도 여러 겹의 바위를 떼어낸 흔적이 있다”면서 “그 바위에도 선인들이 새긴 글들이 많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국내 첫 침례교회 건물이었다는 낡은 민가(옛 강경침례교회)를 보고 옥녀봉을 내려가 금강 지류의 갑문과 배수펌프장으로 간다. 수위가 불안정한 금강 본류보다는 갑문이 설치된 지류가 안전했기 때문에 크고작은 배들이 갑문으로 드나들며 물자를 실어날랐다. 일제강점기부터 50년대까지 이 하천은 전국에서 모여든 배들로 메워지다시피했고, 길가와 산자락으론 여관·주막집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지금 그 자리는 잡풀 우거져 고요하고, 거의 바닥을 드러낸 겨울 하천엔 부레옥잠이 깔려 말라가고 있다. 갑문은 홍수때 금강물의 역류를 막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옆 도로에도 홍수 차단문이 설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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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과 가까이’…같은 모양의 정자 지은 송시열

 
일제강점기 옛 한일은행(등록문화재) 건물을 보고 부두노동조합사무실(등록문화재)로 간다. 부두노동자들은 전국에서 모여든 배들이 싣고 온 해산물 등을 내리거나, 바로 옆에 있던 다카하시 정미소에서 나온 쌀을 배에 싣는 일을 맡았다. 염천교 건너 금강 둑 쪽으로 걷는다. 제방을 따라 옛 강경포구의 명성을 증거하듯, 고깃배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한일어업협정 체결 뒤 폐선 예정이던 선박들을 사들여 전시했다고 한다(금강 물길에 뜬 배들도 전시용이다).
 
대형 선박 모습으로 건축한 강경젓갈전시관에 볼거리가 있다. 강경 맛깔젓 협동조합 사무실과 전시실이 있는데, 강경의 옛 사진 및 젓갈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돛단배들이 밀집한 부둣가, 인파 북적이는 아랫시장 등 사진을 보면서 요즘의 한산한 강경읍 거리와 비교해볼 만하다. 옥상에 올라가면 금강 물가로 이어지는 황산 줄기가 도로 등의 의해 잘려나간 모습이 생뚱맞게 다가온다. 여기서 나온 바위를 깨 제방 쌓는데 썼다고 한다. 돌산 옆 물가의 등대처럼 보이는 흰 탑은 복원한 수위측정탑이다.
 
황산대교 쪽으로 잠시 걸으면 죽림서원에 이른다. 1626년 황산서원으로 지어져 1665년 죽림서원으로 사액을 받은 서원으로, 조광조·이퇴계·이율곡·성혼·김장생·송시열 여섯 분을 모신다. 서원 옆 계단을 오르면 전망 좋은 언덕 위에 올라앉은 아름다운 정자 임리정을 만난다. 사계 김장생이 1626년 지은 정자로 이곳에서 우암 송시열 등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서원 옆길을 따라 오르면 황산 중턱에 임리정과 똑같은 모습의 정자 팔괘정이 있다. 송시열이 스승 김장생과 가까이 있고 싶은 마음에, 이곳에 같은 모양의 정자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황산 정상엔 전망대가 있다. 92개의 계단을 올라 둘러보면 금강 너머 부여군 세도면 들판과 전북 익산 일대, 멀리론 계룡산과 대둔산 줄기까지 눈에 잡힌다. 해가 기울고 철새떼가 몰려와 하늘을 덮었다. 해는 붉어져 금강 물길을 덮더니 물살에 풀려 흘렀다. 황산 밑 주차장 옆엔 강경 출신 소설가 박범신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강경역에서 여기까지 5㎞ 남짓 걸었다.
 
<강경 여행 쪽지>
 
수도권에서 경부고속도로 타고 가다 천안~논산고속도로로 바꿔 타고 서논산나들목에서 나가 논산으로 가다 23번 국도 타고 강경 팻말 따라간다. 연무나들목에서 나가 우회전해도 멀지 않다.
 
강경 여행길에 미내다리를 보지 않을 수 없다(강경천의 옛이름인 미내는 미르내에서 온 말인 듯). 걷기엔 다소 부담스런 거리. 강경읍에서 강경천 다리 건너 좁은 강둑길 따라 1㎞쯤 차몰고 들어가면 강경천 둑 안쪽에, 물길 방향과는 상관없다는 듯, 아름다운 무지개형 다리가 세워져 있다. 세개의 홍예로 이뤄진 다리 자리는 그대로이고, 물길이 바뀌었다. 제방으로 곧게 정비된 미르내 물길이 예전엔 미르(용)처럼 굽이쳐 흘렀음을 짐작하게 한다. 1731년(영조 7년) 지역 유지들이 세운 길이 30m쯤의 단단한 홍예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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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은 젓갈 말고도 예부터 황복과 웅어회(우여회·우어회)의 본고장으로 불린다. 80여년 전통의 황복전문식당 황산옥(041-745-4836), 명복식당(041-745-1157) 등에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황복탕 1인분 1만5000원. 황복을 내는 식당들에선 웅어회도 함께 낸다. 우여회로 더 익숙한 웅어회 무침 3인분 3만원.

 
강경읍에선 오는 10월20~24일 다양한 젓갈 만들기 체험, 시식 체험을 곁들인 제14회 강경 발효젓갈축제를 연다. 강경 전통맛깔젓 사업협동조합(강경젓갈전시관 안) (041)745-1985, 강경읍사무소 (041)730-4661, 논산시청 문화관광과 (041)730-3349.
 
강경(논산)/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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