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궁 거닐다 보면 거중기 도는 소리 ‘어렴풋’ 길따라 삶따라

수원 화성 성곽 따라 걷기
정조가 야심차게 건설한 새도시, 200년 흥망 함께
혜경궁 홍씨 회갑연 장소…여기저기 웅장함 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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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동양을 대표하는 성곽이자, 조선 전통건축의 완성품으로 꼽히는 수원 화성(華城).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으로 옮긴 뒤 2년9개월(1794년 1월~1796년 9월)에 걸쳐 완성한 새도시다. 정약용·채제공 등 당대의 지식인들이 축성에 참여했다. 성곽 건축의 과학성과 예술성을 인정받아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래 수많은 탐방객들이 화성 성곽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성곽길에서 만나는 굽이치는 성벽과 좌우로 트인 전망이 압권이다. 성 안 골목길에선 무르녹은 사람살이의 흔적들이 기다린다. 화성의 남문 팔달문에서 시작해 영동시장·화홍문·화성행궁을 거쳐 다시 팔달문 앞으로 돌아온다.
 
조용필 등 유명한 가수들이라면 팔달문에서 공연
 
보물로 지정된 건축물답게 팔달문은 어느 쪽에서 바라보아도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2층 문루 지붕에도, 문 밖에 둘러쌓은 옹성에도 흰 눈이 덮여 자태가 한결 도드라진다. 팔달문 주변은 80년대까지 수원의 중심 번화가였다. 조용필 등 유명 가수들의 공연이 대부분 팔달문 위에서 열렸다고 한다. 수원 토박이인 화성연구회 사무처장 염상균씨(51)가 팔달문 옆 커피집 건물을 가리켰다. “옛 중앙극장 자리입니다. 수원 대중문화를 이끌던 곳이죠.” 도심이 영통·수원역 등으로 옮겨가면서 개관 50년여년 만인 2004년 문을 닫았다.
 
팔달문 주변엔 약국이 즐비하다. 약국이 몰려 ‘박리다매’ 경쟁을 벌이면서 한때 “전국에서 약값이 가장 싼 곳”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차량이 즐비한 ‘차량 없는 거리’를 거쳐 영동시장으로 들어선다. 1919년 개설돼, 수원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컸다는 시장이지만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팔달문 밖에 있어 문밖장으로 불리던 이곳에 수원양념갈비집으로 유명한 화춘옥이 있었다. 한복·이불집 수십곳이 남아 시장의 위상을 지킨다. 70년째 대를 이어 한복집을 열고 있는 수원주단의 구형서씨가 핏대를 올리며 말했다. “죽어가는 시장 살려달랬더니, 대책도 없이 복개천 주차장을 뜯어내 손님이 더욱 줄었어요.” 길이 좁고 차 댈 곳이 적어 “어쩌다 한번 들른 사람도 다시는 안오겠다고 이를 갈며 돌아간다”고 한다. 수원천 복개 주차장에선 하천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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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쓰지 않고도 냄새 하나 없는 첨단 무료 공중화장실 거쳐, 물길 건너 지동시장 순대타운으로 들어간다. 순대·머릿고기·곱창을 파는 식당 25곳이 모인 널찍한 실내공간이다. 뜨거운 순댓국 뚝배기 옆에 소줏잔을 곁들인 이들이 많다. 자매집도 고향집도, 엄마네도 원조엄마네도 순댓국 5천원, 소곱창 1만원 균일가다.
 
수원천 물길을 따라 거슬러 오른다. 성곽이 끊긴 지점, 수원천 물길엔 성의 남쪽 수문(남수문)이 있었으나, 1922년 대홍수 때 쓸려 내려가 버렸다. 성 안쪽 수원천 물길은 90년대 중반 시에서 전면적인 복개공사를 추진했으나, 시민단체 등의 반대로 살아남았다. 염씨는 “일부 인사는 북쪽 수문인 화홍문도 뜯어내 옮기고 복개하자는 주장까지 했다”며 “시민들이 길바닥에 드러누우며 반대해 하천 복개공사를 막았다”고 말했다.
 
‘상처 투성’ 장인의 손에서 나온 전통 꽃무늬 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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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간 노래 테이프를 파는 손수레에서 흘러나오는 “당신은 모르실 거야, 얼마나…”를 들으며 남수교 건너, 종각 쪽으로 이어진 골목길을 걷는다. 한때 이른바 룸살롱이 밀집했던 유흥가였으나, 거의 사라지고 통닭집들이 생겨나 술꾼을 불러 모으는 거리다. 연극·미술 등 문화예술단체들이 수원 문화의 도약을 꿈꾸며 세들어 모여 있는 ‘수원문화사랑’과 만두로 이름난 중국집 ‘수원’을 지나 종각인 여민각으로 간다. 여민각은 화성을 축성한 뒤 화성을 한양과 같은 도성체제로 격상하기 위해 화성행궁 앞 네거리에 설치한 종각이다. 일제때 소실됐던 것을 2008년에 새로 짓고 종도 새로 만들었다. 본디 이곳에 있던 종은 1080년 개경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가 1687년 수원 만의사 동종으로 다시 주조된 뒤, 화성 축성 때 이 종각으로 옮겨 건 것이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정오를 알리는 종으로 쓰기 위해 팔달문에 걸어 ‘팔달문 동종’(도 유형문화재)으로 불린다. 2008년 수원역사박물관으로 옮겨 보관중이다. 여민각에선 서울의 보신각 종처럼 해마다 새해를 알리는 33회 타종식을 한다.
 
길 건너 화성박물관으로 간다. 세계문화유산 화성의 축성 과정과 문화적 가치를 깊이 있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축성 전모가 담겨 있는 <화성성역의궤>, 사도세자가 내린 명령서, 축성을 지휘한 채제공의 초상 등을 만난다. 야외전시장에선 성돌을 들어 올리는 데 썼던 거중기와 녹로의 모형, 선정비 무리를 볼 수 있다. 입장료 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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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매향교) 건너 불교 진각종 옆길에 경기도 무형문화재인 김순기(70) 소목장(창호)의 작업실과 전시관이 있다. 14살 때부터 줄곧 창호 작업을 해왔다는 김씨의 작업실과 전시관에서 아름다운 전통 꽃무늬 창호를 감상할 수 있다. 김씨가 작업실 벽에 걸린 대패 등 연장들을 가리켰다. “저 대패들이 우리 집 가보여. 누가 연장이 몇개나 되냐며 셔보라래서 한번 셔봤더니, 한 400개는 되더라구.” 기사식당 고향집 한켠에서 막걸리 잔술을 든 그의 손. 상처 없는 자리가 없고, 몇 손가락은 잘려 뭉툭하다. 외길을 달려온 삶의 흔적이다. 고향식당과 묵은지찜으로 이름난 골목집 사잇길 안쪽에, 젊은 지역 예술가들의 전시공간 ‘눈 갤러리’가 있다. 그러나 2월말까지 휴관한다는 팻말을 내걸었다.
 
Untitled-4 copy.jpg일곱개의 무지개형 수문이 아름다운 화홍문(북수문)으로 간다. 눈 덮인 화홍문과 뒤쪽으로 보이는 방화수류정 자태가 그림같다. 화홍문은 지폐 도안에 등장한 국내 최초의 문화재다. 1909년 한국은행에서 화홍문 도안을 넣은 1원짜리 지폐를 발행했으나 한일강제합병으로 유통되지는 않았다. 방화수류정 밖엔 용연이란 연못이 있어 경관을 감상할 만하다. 수원천 건너편엔 단청·소목장·무용·굿 등 전통 무형문화재들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무형문화재전수회관이 있다.
 
고층빌딩 들어설 뻔한 행궁 터 시민 힘으로 지켜    
 
성곽을 따라 장안문 쪽으로 걷는다. 성곽 안 북수동엔 대규모 우시장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크게 번성하다 성 밖 영화동으로 옮겨가 60년대까지 소를 거래하며 수원양념갈비가 명성을 얻게 된 밑바탕을 이뤘다. 장안문 옆 성곽의 치성(북동치)과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문 좌우 성곽에 설치했던 적대(북동적대)를 보고 장안문 옆구리로 들어간다. 장안문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다. 한국전쟁 때 미군 폭격으로 파괴됐던 것을 1970년대 복원했다.
 
화성행궁을 향해 걷는다. 행궁 전에 화령전부터 만난다. 화령전은 1801년 순조가 정조의 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화령전 담 옆엔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문인인 나혜석(1896~1948) 생가터 표지석이 있다. 그를 기리는 ‘나혜석 거리’가 팔달구 인계동에 조성돼 있다. 화령전 옆 신풍초등학교는 1896년 개교한 수원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다. 개교 전엔 화성 관아의 객사(우화관)가 있던 곳이다. 신풍초교 뒤, 행궁으로 드는 정문 신풍루 앞 좌우엔 거대한 느티나무들이 맞아준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내려와 임시거처하던 별궁이다. 총 44동 576칸 규모의 행궁으로, 정조는 모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이곳에서 열었다. 일제강점기 대부분 철거되고 과거시험을 치렀던 낙남헌만이 남았으나, 최근 대대적인 복원공사로 본디 모습을 찾았다. 애초 행궁 터엔 경기도립 수원병원 고층빌딩이 들어설 계획이었다. 지역민들의 거센 반대로 병원은 정자동으로 옮겨가고 대대적인 행궁터 발굴작업을 통해 옛 모습을 되찾게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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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주를 철거하고 간판도 전통 그림을 넣어 새로 내건 ‘레지던스 길’을 지나 큰길로 나서자 다시 팔달문의 웅장한 자태가 다가온다. 길 건너 공예품 상설전시장인 가빈 갤러리(대표 조성진·화성연구회 이사)에 들어가 언 몸을 녹였다. 갤러리 2층에선 1월16일부터 2월3일까지 성 안 홀몸 어르신들을 돕는 자선바자회가 열린다. 여기까지 약 5㎞를 걸었다.
 
 
<수원 여행 정보> 
손수운전=경부고속도로 수원나들복이나 영동고속도로 북수원나들목, 동수원나들목에서 나가 수원으로 간다. 서울에서 1번 국도 타고 의왕 거쳐 가도 된다. 팔달문 부근에 팔달주차타워 등 주차장이 있다.
대중교통=강남역사거리에서 10분 간격(3000, 3001, 3009번 버스), 잠실역에서 20분 간격(1007-1, 1007번), 사당역에서 10분 간격(7000, 7770번) 버스 운행. 전철 1호선 10분 간격 운행.
연락처=수원관광안내소 (031)228-4672, 수원화성연구회 (031)226-7223, 수원화성박물관 (031)228-4205. 골목집(묵은지찌개·생선조림·홍어회) (031)245-9158, 연포갈비 (031)255-1337, 청산갈비찜 (031)243-8177.
수원/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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