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하나 바람 한 점까지도 탐나는 ‘탐라도’   길따라 삶따라

제주 도심 걷기여행 
명소만 찾다 놓친 ‘마이너 멋’, 시내 올레하며 주워
성터에서 한 숨 돌리고 온화한 미륵상 보고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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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관광지 위주의 제주도 여행에선 놓치는 게 많다. 제주도 역사와 문화유산도 그중 일부다. 구석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숱한 선인들의 발자취 에 널려 있다. 제주시 옛도심 골목에도 관광지 개발의 와중에 살아남은 제주 특유의 볼거리들이 숨어 있다. 시내 올레(집에서 거리에 이르는 골목길) 탐방이다. 제주목 관아에서 출발해 제주성터와 산지천 물길 거쳐, 온화한 미소로 반기는 복신미륵상까지 걷는다.
 
권력자 환심사려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
 
Untitled-11 copy.jpg제주관아 앞 광장을 바라보며 선 커다란 누각이 보물 322호 관덕정이다. 제주도의 대표적인 정자이자, 도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세종때 처음 군사훈련을 위해 지은 이래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눈을 부릅뜬, 18세기에 만들어진 돌하르방(우석목·무석목·벅수머리) 둘이 정자 앞 양쪽에 서서 나그네를 맞는다. 관덕정 안에선 들보 밑에 그려진 연대미상의 벽화 7점, ‘호남제일정’ ‘탐라형승’ 등 제주목사들이 쓴 대형 편액을 볼 수 있다. 관덕정은 군사훈련말고도 인재등용을 위한 시험장, 조정에 바칠 말과 귤을 점검하는 장소로 이용됐다. 해마다 입춘굿놀이가 벌어지고, 60년대 이후론 각종 집회나 선거유세가 열리는 곳이다.
 
제주목방어사의 기를 내걸던 깃대받침기둥(기간지주)과 하마비를 보고 제주목관아 안으로 들어선다(입장료 1500원). 제주목관아 주변의 옛 건물은 관덕정이 유일하고 나머지는 발굴조사를 거쳐 최근 복원한 것이다. 관아 회랑 한쪽에 마련된 <탐라순력도>(보물 652-6호·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의 관내 순시 모습을 그린 41폭 채색 화첩) 복사본을 통해 옛 관아 모습과 각 지역의 풍광들을 살펴볼 수 있다. 진본은 제주박물관에 있다.
 
망경루 옆에 늘어선 선정비·불망비들은 주로 조선말기 재임한 제주목사들을 기린 것이다. 김익수(72) 제주도 문화재위원은 “제주도엔 조선 중기 이전의 비석들을 찾아볼 수 없다”면서 “쉽게 마모되는 현무암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흥선대원군의 형인 이최응을 기려 세운 영세불망비도 있다. 고종때 제주목사를 지낸 백낙연이 당시 영의정에 오른 민비파 실권자 이최응의 환심을 사고자 세운 것인데, 대원군에 의해 이최응이 피살되면서 백낙연은 다른 벼슬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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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를 나와 우체국 옆 270년 된 녹나무와 성주청(통일신라~고려때 탐라국의 관청)터 표석을 보고 지하도 건너 골목으로 들어선다. 남문에서 관아로 이어지던 옛 큰길인 한짓골(한질골)이다. 80년대까지 문화예술인들이 북적이던 골목이다. 찻집·서점이 즐비했고, 제주문화방송도 이 골목에 있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김오순(43) 연구사가 이산저산식당 2층을 가리켰다. “저기가 옛날 소라다방 자리인데, 각종 전시회·공연이 수시로 열리던 곳입니다. 그 뒤엔 사회과학서적 전문서점이 들어서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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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째 살고 있는 도심 한복판 초가

 
제주 최초의 천주교회터 지나 조선시대 판관의 집무실 이아가 있었던 이아골로 들어선다. 이아 터엔 제주대병원이 들어서 있었는데, 병원도 얼마전 옮겨가 빈 건물만 남아 있다. 병원 옆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니 돌담 안쪽에 초가집 한채가 보인다. 도심 한복판의 초가집이다. 김오순씨가 닳고닳은 대문을 두드리며 주인을 불렀다. “이거보우다예. 삼춘(이웃이나 친지, 어르신을 부르는 호칭), 잠깐 들어가게마씸.”
 
안순생(87) 할머니와 친정에 다니러 온 딸 박순(54)씨가 문을 열어주었다. 6대째 살고 있다는 초가인데, 볏집이 아닌 새(벼과에 속하는 억새의 일종)를 엮어 이엉을 얹었다. “삥이(새)가 귀해 지난해엔 못올렸수다. 올핸 다 구해놓고 날도 받아놨수다.” 2년에 한번 이엉을 올리는데 지난해엔 새가 없어 못하고, 이달 20~25일에 얹기로 날을 잡아놨다고 한다. 뜰에 활짝 피어난 동백꽃과 익어가는 금귤, 화단의 풀꽃들이 계절을 잊게 한다. “옛날엔 안끄래(안채)·밖끄래(바깥채) 다 흙집이었수다래. 안끄래엔 앞낭강(마루)·뒤낭강허고 고팡(창고)도 있수다.” 박씨의 할아버지가 제주북군 초대 군수를 지낼 때 흙벽을 헐고 일부를 돌과 시멘트벽으로 고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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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성 남문터 표석을 보고 남문사거리로 간다. 사거리 제주성터쪽 모퉁이의 주차장 담벽이 눈길을 잡아끈다. 각양각색의 그림과 글로 장식한 작은 타일들을 붙인 벽이다. 2008년 여름 이도1동 주민 남녀노소 1천300여명이 참여해, 각자의 꿈과 소망을 담은 그림과 글을 그리고 적은 타일을 모아 벽화를 만들고, ‘아름다운 남문골 이야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한 가장의 금연 결심에서부터 청춘남녀의 사랑 고백, 의사가 되고 싶다는 초등생의 소망까지 하나하나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작품’들이다. 담 옆쪽엔 작은 돌하르방들과 솟대도 전시해놓았다.
 
세월은 물 같고 늙기는 바람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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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성터를 향해 걷는다. 제주읍성은 고려말·조선초 사이에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세운 성곽이다. 태종때(1408년) 홍수로 제주성이 침수됐다는 기록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엔 석성 규모에 대한 기록이 있다. 명종때(1565년) 성을 넓혀 둘레 약 3㎞에 이르는 성곽을 완성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성곽의 대부분과 동·서·남문(바다에 면한 북쪽 문은 없었다), 산지천 물길 위의 홍예문 2개가 철거되고 지금은 산지천 옆의 치성 등 일부만 남았다. 현무암을 다듬어 쌓은 검은빛 성벽이다. 헐어낸 성돌은 산지천 하류 포구 매립공사에 사용했다고 한다. 성지로 길옆에 170m 길이의 성곽과 치성을 복원해 놓았다. 언덕 위에 남은 유일한 옛 치성과 남수각(남쪽의 수문인 홍예문이 있던 자리) 표석을 보고 오현단으로 들어선다.
 
성벽 밑 울창한 숲 안에 자리한 오현단은 조선 중기 제주에 유배되거나 관리로 부임해 지역 발전에 공헌한 김정·송인수·김상헌·정온·송시열 등 다섯 분을 모신 곳이다. 본디 이곳의 귤림서원에 모셨으나 고종때 서원이 철폐된 뒤 서원 자리에 다섯 비를 세우고 제단을 만들었다. 김정과 송시열의 적려유허비가 있고, 무너져가는 바위벽엔 우암 송시열의 좌우명이던 ‘증주벽립(曾朱壁立)’(증자와 주자처럼 꿋꿋하게 소신대로 살겠다는 의지를 담은 글귀) 글자가 새겨져있다. 철종 때의 판관 홍경섭이 새긴 것이다(‘증주벽립’ 각자는 서울 명륜동 송시열의 옛 집터 부근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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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가기는 흐르는 물 같고, 사람이 늙기는 바람결 같구나….” 성벽 밑 향로당(경로당) 앞에 앉은 어르신의 나직한 ‘청춘가’ 한 자락을 들으며 오현단을 나와 길을 건넌다. 동문시장 쪽으로 이어진 길 담장에 전시한, 제주시내의 옛 모습 사진들이 볼만하다.
 
담장 너머 석축 밑엔 ‘가라쿳물(가락천 끝의 샘·가락샘)’ 표석이 있다. 가라쿳물은 제주 산지포구로 흘러드는 산지천의 한 지류인 가락천이 발원하는 곳에 있던 샘으로, 물이 좋기로 이름나 일제강점기 무렵엔 시내 전역에서 물허벅, 구덕을 지고 물을 받으러 오는 인파로 붐볐다고 한다. 민가들이 들어서며 샘은 묻히고 표석만 남았다.
 
동문시장 일대는 조선시대 이래 여러 교육기관들이 생기고 사라져간 곳이다. 제주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의신학교(1907년) 터, 생원·진사 등 사마시 합격생들이 모여 공부하던 사마재(1879년) 터, 향교 창건 터 등을 알리는 표석들이 길모퉁이마다 숨어 있다. 15년째 삼형제가 보리빵·쑥빵·찐빵을 쪄 온 보리빵삼형제집에 들러 보리빵(1천원에 4개)을 사들고 40년 됐다는 꿩고기 요리 전문 골목식당을 거쳐 웃생지골(윗향교골)을 돌아 동문로 큰길로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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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기 김만덕, 재산 털어 흉년 앓는 도민 도와

 
동문로터리에 이르면 산지천 물길이 나타나고 동문시장 일부가 복개천 위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산지천 물길은 60년대에 전면적으로 복개됐으나, 2002년 다시 뜯어내 옛 모습을 되찾았다. 물고기들 노는 모습이 들여다보이는 산지천 물길을 따라 걷는다. 포구 쪽으로 광제교·북성교·산지교·용진교 등 다리가 차례로 나타난다.
 
광제교 옆 물가의 바위(경천암) 위에 조천석이라 불리는 신앙석이 있다. 홍수 등 재해가 없도록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이다. 북성교 밑과 산지교 밑에선 옛 빨래터의 흔적도 볼 수 있다. 산치천 물줄기엔 크고작은 지류가 흘러들고 샘이 솟는 곳이 있어 산짓물·노리물(나릿물) 등으로 불리는 빨래터가 형성돼 있었다고 한다.
 
용진교 건너편엔 중국 피난민선 모형이 있다. 중국 랴오닝성을 떠나 떠돌다 1950년 8월 산지포구에 도착해 몇년간 정박해 있던 난민선 해상호를 본떠 만든 배다. 주변엔 제주도의 전통 배 테우, 조운선 등도 전시해 놨다. 용진교 건너 다리 표지석 앞엔 일제강점기에 항만공사용 석재를 운반했던 궤도차 터 표석이 있고, 길 건너 공중전화 부스 옆엔 탐라국 개국설화와 관련된 건입포(건들개) 터 표석이 있다. 고씨 삼형제가 배를 처음 만들어 타고 신라에 들어가 탐라국 국호를 받아올 때 들고 난 포구가 건들개다.
 
Untitled-5 copy.jpg기린모텔 골목으로 들어가 김만덕 객주터 표석을 만난다. 빼어난 미모의 관기였던 김만덕(1739~1812)은 이곳에 객주집을 차려 재산을 모은 뒤, 흉년이 들어 도민이 굶주리자 평생 모은 재산을 털어 육지에서 곡식을 사와 나눠주었다. 그의 묘는 사라봉에, 묘비 등은 사라봉 모충사 만덕관에 전시돼 있다.
 
객주터 표석 바로 옆 빈터의 ‘구덕 짜던 집터’ 표석을 보고 언덕길을 올라 복신미륵(제주 민속자료 1호)을 만난다. 온화한 미소를 띈, 키 3m를 넘는 거대한 고려시대(추정) 미륵이다. 주민들이 동자복·자복신·자복미륵·큰어른 등으로 부르며 풍어와 안전, 복을 빌어온 신앙석이다(읍성 서문 밖에는 서자복이 있다).
 
미륵이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는 곳을 돌아보니 서부두 앞바다 위로, 공항을 막 이륙한 비행기가 속도를 더하고 있다. 사라봉까지 걸으려던 계획을 빗속에서 접었다. 관아에서 복신미륵까지 3.5㎞.
 
<제주 여행쪽지>
  
제주공항에서 제주목관아까지 차로 10분 이내 거리. 제주목관아 뒤쪽 북초등학교 옆에 무료 주차장이 있다. 관아엔 무료 문화유산해설사가 상주한다. 신청하면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제주 옛도심 탐방의 또다른 방법으로, 옛 제주읍성 터를 따라 한바퀴 돌거나, 제주목관아로 들던 옛 포구인 화북 일대를 둘러봐도 좋다. 탐방 전에 사라봉 밑 국립제주박물관을 찾으면 탐방길이 한결 풍요로워진다. 제주 역사와 문화유산들을 단번에 훑어볼 수 있다.

탐방길 주변 먹을 만한 곳으로 동문시장 골목 안의, 메밀을 두껍게 반죽해 굵직한 국수를 썰어내는 제주식 꿩고기메밀칼국수 전문 골목식당(064-757-4890), 50년째 찹쌀순대를 내는 광명식당(064-757-1872), 옛 제주대병원 입구의 35년된 해장국집 미풍해장국(064-758-7522), 일도1동 광양로터리 흥국생명 뒷길의 한방웰빙 음식점 참살이제마네(064-721-0880) 등이 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064)748-9817, 제주문화원 (064)722-0203, 제주공항 제주종합관광안내소 (064)742-6051.

제주/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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