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저민 꿀단지 800만개, ‘떫은 마음’도 방그레 길따라 삶따라
2009.11.27 17:16 너브내 Edit
논산 양촌 곶감마을
집집마다 주황빛이 주렁주렁, 서까래 휘어질라
식초로 와인으로 변신 “좌우지간 무쟈게 진혀”
강원 산간엔 눈발이 날리고, 남도 숲길 나무들은 마지막 단풍잎을 흩뿌리며 가을빛을 마무리하는 때다. 아직도 늦가을 정취가 물씬한 충남 논산의 ‘양짓마을’로 간다. 울타리 안팎의 감나무들엔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점점이 박힌 주황빛 까치밥들이 눈부시다. 일년 내내 따스한 햇살이 든다는 양촌면 곶감마을이다. 집 안팎으로 내걸어 말리는 곶감이 졸깃졸깃 익어가고 있다.
알몸으로 얼고 녹고 마르고…‘눈웃음’ 짓는 까치들
충남·전북의 경계를 이루고 솟은 대둔산 서북쪽. 양촌면은 면 전체가 감 마을이다. 17개 리, 42개 마을에 감나무 없는 집이 없다. 30~50년생 감나무가 주류인데, 해마다 새로 감나무를 심어 요즘엔 논·밭이 온통 감나무 밭으로 바뀐 마을이 많다. 감 수확은 상강(10월23일) 무렵부터 20여일간 이어진다. 수확한 곶감은 바로 기계로 깎아 덕장에 내건다. 감나무가 흔하고 감이 흔하니, 나무들엔 미처 따지 못한 감들이 지금도 주렁주렁 달려 있다. 얼며 녹으며 말랑말랑한 홍시로 익어갈 때까지 주민들이 수시로 따 먹고 까치도 먹는다.
곶감을 말리는 덕장(감덕, 감막)도 눈부시다. 집마다 마을마다 주황색 주렴 행렬이 이어진다. 감나무 가지가 휠 정도로 열렸던 감들은 이제 곶감 덕장의 서까래가 휘도록 매달려 곶감으로 익어가고 있다. 옛날엔 실이나 새끼줄에 꿰어 달았으나, 요즘은 “모양이 잘 나오고, 통풍도 잘되며, 위생적으로 마르게” 개발한 플라스틱 곶감걸이에 꿰어 연결해 말린다. 마을마다 공동으로 곶감을 말리는 대형 덕장이 마련돼 있다.
11월 초부터 12월 중순까지 한달 반 동안, 알몸의 감들은 햇빛에 마르고 얼고 녹기를 거듭한 끝에 꿀보다 달다는 ‘양촌 곶감’으로 태어난다. 당도가 높고 타닌 함량이 많다는 ‘월하(두리감)’ 품종으로 만든 곶감이다. 지금 양촌면을 찾는다면 어느 마을에서든 나무에서 갓 따낸 홍시와 말랑말랑하게 익어가는 곶감을 함께 맛볼 수 있다.
산세가 중이 바랑을 메고 가는 형상인 바랑산 밑 오산리 햇빛촌 바랑산마을 체험장에 모인 어르신들이 양촌 곶감 자랑을 늘어놨다.
“꿀보다 달디야. 어느 도시 사람헌티 물어봐두 이것보다 더 단 건 읍다는겨.”
“왜 다냐? 고목감이라서 그랴. 오래된 나무에서 난 감이 훨씬 달다니께에.”
“뭣보담두 유황 피워서니 급속도루 말리지 않구, 순수 햇빛으루다가 말리니께 그런 겨어.”

체험마을 주민 최동환(67)씨가 옆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산이 짜개봉인데, 옛날 배가 감과 대추를 가득 싣고 저 산을 넘어오다 그만 부딪친겨.” 양촌면이 감 마을이 된 이유가 “배가 부딪친 산은 짜개지고, 감과 대추는 튀어나갔는데, 무거운 감은 가까운 양촌면에 떨어지고 가벼운 대추는 연산면까지 날아가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연산면은 이름난 대추 산지다.
12월12~13일 곶감 축제…감 깎아 걸기·씨 멀리 뱉기
양촌면에선 지난해 800동(1동은 1만개)의 곶감을 생산해 50억여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주먹만 해 보이는 감을 말리고 나면 크기·무게는 3분의 1로 줄어들지만 떫은맛은 쏙 빠지고 당도는 치솟는다. 양촌면 주민들은 해마다 늦가을 양촌 곶감 축제를 벌여 관광객들을 불러들인다. 올해엔 곶감이 다 익는 시기에 맞춰 12월12~13일, 면소재지인 인천리 논산천 둔치에서 감 깎아 걸기, 곶감씨 멀리 뱉기, 감와인 만들기 등 체험행사를 곁들인 제7회 양촌 곶감축제를 진행한다.
100년 이상 된 전통 감 고장 양촌면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극심한 반목과 대립을 겪었다. “인민군과 국방군이 밤낮으로 번갈아가며 휩쓸어 인심이 흉흉하고 살벌했던 고장”이다. 전쟁 막바지에 빨치산들이 지리산에서 덕유산 거쳐 대둔산 자락으로 모여들며 국방군과 격전을 벌인 곳이다.

“저 바랑산 미역소 바우에선 인민군이 마을 주민 80명을 학살했어. 그러고 칼바우에선 또 국방군이 인민군을 몰살시켰지.”
나이 든 주민들 사이엔 얼마 전까지도 그때 쌓인 앙금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김영호 양촌면장은 “지금은 토박이와 새로 귀농한 분들이 서로 힘을 모으는 살기 좋은 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노인회도 부인회도 귀농인들도, 체험마을 행사나 홀몸노인 김장 담가 드리기 등에 앞다퉈 참가한다. 양촌엔 많은 것도 많고 없는 것도 많다.
“양촌에 햇빛은 많구 범죄는 읍지.”
“노는 사람도 읍서. 일벌레는 많구. 그러니까 경기가 도는 겨.”
“요 좁은 면 바닥에 다방이 열 개여. 다방 아가씬 100명이구.”
“을문이두 있잖여.”
을문이(밀어의 사투리)는 옛날 이 마을 효자가 한겨울에 고기를 잡아 병든 부모를 봉양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효자고기’다. 탑정호로 흘러드는 논산천 상류인 인천(인내)엔 을문이가 바글바글해, 가을에 이불 홑청을 강바닥에 깔아뒀다가 천천히 들어올리면 새카맣게 붙어 올라왔다고 한다. “뻬두 안 발리구 그대루 어죽 쒀 놓으면 딴 게 필요 읍는 겨어.”
남방식·북방식 섞인 청동기 고인돌 무리


감 생산량이 많으니, 감을 이용한 식품 개발도 앞서간다. 91년에 이미 감식초를 개발해 상품화했고, 최근엔 감농축액을 먹기 쉽게 만든 ‘감식초 비타 정’도 개발했다. 감와인 ‘추시주’도 내놨다. “좌우간 무자게 진히야.” 진한 감식초를 개발한 이봉왕(63)씨는 밀과 보릿가루로 만든 메주와 찹쌀·보리를 써서 담그는, 순한 전통 집장(즙장·등겨장·시금장)도 만든다.
산촌체험마을인 햇빛촌 바랑산마을에선 사철 다양한 체험행사를 운영한다. 예약하면 감 따기, 곶감 만들기(이상 11월 중순까지), 곶감 수확 등 감 관련 체험을 비롯해 된장 담그기, 손두부 만들기, 짚풀 공예 등을 할 수 있다.
곶감 맛을 보기 전후해, 고려 초 창건된 절 쌍계사와 ‘신기리 고인돌 무리’를 감상할 만하다. 쌍계사 대웅전(보물 제408호)의, 자연목을 그대로 살린 배흘림 기둥들이 우람하다.
정면에서 맨 왼쪽 세 번째 기둥과 오른쪽 뒤 마지막 기둥은 각각 초대형 칡덩굴과 싸리나무 줄기를 다듬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윤달에 칡덩굴 기둥을 안고 돌면 죽을 때 고통을 덜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연꽃·모란꽃을 정교하게 새긴 대웅전 정면 5칸 문살 무늬가 매우 아름답다. 절 옆 골짜기엔 ‘쌍계사 물탕’으로 불리는 찬 샘물이 있다. 물이 차서 땀띠·피부병을 낫게 해준다 해서 옻샘으로도 불린다.
신기리 괸돌마을(고암리) 농가 사이엔 10여기의 청동기시대 고인돌이 모여 있다. 남방식과 북방식이 섞인 모습이다. 전망 좋은 바랑산 등산도 해볼 만하다. 4시간·2시간짜리 코스가 마련돼 있다.

논산/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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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하는 ‘교장쌤’, 서류 결재는 운동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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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으로 얼고 녹고 마르고…‘눈웃음’ 짓는 까치들

곶감을 말리는 덕장(감덕, 감막)도 눈부시다. 집마다 마을마다 주황색 주렴 행렬이 이어진다. 감나무 가지가 휠 정도로 열렸던 감들은 이제 곶감 덕장의 서까래가 휘도록 매달려 곶감으로 익어가고 있다. 옛날엔 실이나 새끼줄에 꿰어 달았으나, 요즘은 “모양이 잘 나오고, 통풍도 잘되며, 위생적으로 마르게” 개발한 플라스틱 곶감걸이에 꿰어 연결해 말린다. 마을마다 공동으로 곶감을 말리는 대형 덕장이 마련돼 있다.
11월 초부터 12월 중순까지 한달 반 동안, 알몸의 감들은 햇빛에 마르고 얼고 녹기를 거듭한 끝에 꿀보다 달다는 ‘양촌 곶감’으로 태어난다. 당도가 높고 타닌 함량이 많다는 ‘월하(두리감)’ 품종으로 만든 곶감이다. 지금 양촌면을 찾는다면 어느 마을에서든 나무에서 갓 따낸 홍시와 말랑말랑하게 익어가는 곶감을 함께 맛볼 수 있다.
산세가 중이 바랑을 메고 가는 형상인 바랑산 밑 오산리 햇빛촌 바랑산마을 체험장에 모인 어르신들이 양촌 곶감 자랑을 늘어놨다.
“꿀보다 달디야. 어느 도시 사람헌티 물어봐두 이것보다 더 단 건 읍다는겨.”
“왜 다냐? 고목감이라서 그랴. 오래된 나무에서 난 감이 훨씬 달다니께에.”
“뭣보담두 유황 피워서니 급속도루 말리지 않구, 순수 햇빛으루다가 말리니께 그런 겨어.”

체험마을 주민 최동환(67)씨가 옆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산이 짜개봉인데, 옛날 배가 감과 대추를 가득 싣고 저 산을 넘어오다 그만 부딪친겨.” 양촌면이 감 마을이 된 이유가 “배가 부딪친 산은 짜개지고, 감과 대추는 튀어나갔는데, 무거운 감은 가까운 양촌면에 떨어지고 가벼운 대추는 연산면까지 날아가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연산면은 이름난 대추 산지다.
12월12~13일 곶감 축제…감 깎아 걸기·씨 멀리 뱉기
양촌면에선 지난해 800동(1동은 1만개)의 곶감을 생산해 50억여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주먹만 해 보이는 감을 말리고 나면 크기·무게는 3분의 1로 줄어들지만 떫은맛은 쏙 빠지고 당도는 치솟는다. 양촌면 주민들은 해마다 늦가을 양촌 곶감 축제를 벌여 관광객들을 불러들인다. 올해엔 곶감이 다 익는 시기에 맞춰 12월12~13일, 면소재지인 인천리 논산천 둔치에서 감 깎아 걸기, 곶감씨 멀리 뱉기, 감와인 만들기 등 체험행사를 곁들인 제7회 양촌 곶감축제를 진행한다.
100년 이상 된 전통 감 고장 양촌면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극심한 반목과 대립을 겪었다. “인민군과 국방군이 밤낮으로 번갈아가며 휩쓸어 인심이 흉흉하고 살벌했던 고장”이다. 전쟁 막바지에 빨치산들이 지리산에서 덕유산 거쳐 대둔산 자락으로 모여들며 국방군과 격전을 벌인 곳이다.

“저 바랑산 미역소 바우에선 인민군이 마을 주민 80명을 학살했어. 그러고 칼바우에선 또 국방군이 인민군을 몰살시켰지.”

“양촌에 햇빛은 많구 범죄는 읍지.”
“노는 사람도 읍서. 일벌레는 많구. 그러니까 경기가 도는 겨.”
“요 좁은 면 바닥에 다방이 열 개여. 다방 아가씬 100명이구.”
“을문이두 있잖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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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식·북방식 섞인 청동기 고인돌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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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감 맛을 보기 전후해, 고려 초 창건된 절 쌍계사와 ‘신기리 고인돌 무리’를 감상할 만하다. 쌍계사 대웅전(보물 제408호)의, 자연목을 그대로 살린 배흘림 기둥들이 우람하다.
정면에서 맨 왼쪽 세 번째 기둥과 오른쪽 뒤 마지막 기둥은 각각 초대형 칡덩굴과 싸리나무 줄기를 다듬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윤달에 칡덩굴 기둥을 안고 돌면 죽을 때 고통을 덜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연꽃·모란꽃을 정교하게 새긴 대웅전 정면 5칸 문살 무늬가 매우 아름답다. 절 옆 골짜기엔 ‘쌍계사 물탕’으로 불리는 찬 샘물이 있다. 물이 차서 땀띠·피부병을 낫게 해준다 해서 옻샘으로도 불린다.
신기리 괸돌마을(고암리) 농가 사이엔 10여기의 청동기시대 고인돌이 모여 있다. 남방식과 북방식이 섞인 모습이다. 전망 좋은 바랑산 등산도 해볼 만하다. 4시간·2시간짜리 코스가 마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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