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따리 이고 넘던 고갯길 ‘삶의 족적’으로 ‘푸근’ 걷고 싶은 숲길

홍천~양양 구룡령 옛길
만리 내다보이는 명당…호랑이도 뺏길세라 ‘어흥’   
정상에서 이리저리 몸 틀며 내려가니 어느새 3㎞

 
 
Untitled-9 copy.jpg

설악산과 오대산 사이, 홍천 명개리에서 양양 갈천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구룡령이다. 굽이굽이 몸틀임을 하며 이어지는 길은 승천하는 용의 모습을 닮기도 했다. 아홉마리의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이 고개를 타고 치솟아 오르다, 아녀자의 눈에 띄어 소리치는 바람에 떨어져버렸다는 얘기가 전한다.
 
56번 국도 구룡령 정상엔 산림전시관이 있고, 화장실이 있고, 백두대간구룡령이라 쓴 대형 빗돌이 있다. 빗돌 아래엔 뜨거운 차와 컵라면 등을 파는 노점들이 두세 곳 판을 벌인다. 이 주변에서 커피 한잔 들며 잠시 빈둥거리고 있다 보면 산에서 내려오고 올라가는 산꾼들과, 대형 버스를 타고 막 도착해 등산화를 조이는 산꾼들을 두루 만날 수 있다. 그 유명한 백두대간 숲길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너도 나도 올라타고 걷고 달려 훼손이 극심하다는 그 백두대간 숲길이 56번 국도를 가로질러 이어진다.
 
짚신 대신 등산화 신었지만 밟고 걷는 길은 같아
 
Untitled-1 copy.jpg

막 도착해 좌우를 둘러보는 산행객 중엔 옛날 고갯길을 찾는 이들도 끼어 있다. 국도가 뚫리기 전까지 갈천리·명개리 사람들이 농산물·생필품 이고지고 걸어넘던 구룡령 옛길을 찾는 사람들이다.
 
선인들의 삶의 애환이 녹아 있는 옛길을 따라 거닐고 싶어하는 이들이다. 구룡령 옛길은 이들에게 아름다운 숲과 나무들, 선인들의 흔적들을 하나 둘씩 내보이며 산책을 풍요롭게 해준다. 옛사람 짚신·가죽신, 말발굽·수레 자국에 시달려 길은 움푹 패어 있고 그 길로 나무들이 앞다퉈 벗어던진 낙엽들이 푹신한 이부자리처럼 깔렸다. 이런 분위기에 발맞춰 나라의 관리들은 2년전 구룡령 정상에서 양양 갈천리에 이르는 옛길의 가치와 풍광을 인정해 ‘명승’으로 지정했다.
 

Untitled-1 copy.jpg

홍천 명개리 명지거리에서 구룡령 꼭대기를 넘어 양양 갈천리에 이르는 고갯길은 6㎞가 넘는 비탈진 산길이다. 명지거리에서 옛길 꼭대기까지 3.7㎞, 정상에서 갈천리까지 2.7㎞다. 어느 쪽으로 걸어넘든, 정상 가까이는 숨차 보이는 산길이지만, 정작 실제로 걸어올라 보면 그리 힘겨운 길은 아니다. 숲과 언덕과 나무들을 감싸고 에돌아 굽이굽이 이어지는 까닭에 경사도가 훨씬 줄어든다. 숲길을 편안히 즐기며 숲에 깃든 선인들의 족적까지 생각하며 천천히 거닐고 싶다면 구룡령 정상에서 시작해 걸어내려가면 된다.
 
시작은 56번 국도 구룡령 정상이다. 가파른 나무계단길을 올라 능선을 타고 20분 정도 북쪽으로 걸으면 구룡령 옛길 정상에 이른다. 굵직한 엄나무·피나무·물푸레나무 가지 사이로 능선 좌우 전망이 빼어나다. 계단길을 오르기 전에 갈천리 주민 엄익환(73)씨가 미리 쐐기를 박아 놓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구룡령은 무신 구룡령. 여긴 장구목이라니까. 돈 쳐들여 길 뚫어놓고 이름이구 길이구 다 바꿔놨어. 내 이게 맘에 안들어서니 말을 안할 수가 없는 거라. 자, 이짝 구룡령이라고 떡하니 이름붙인 국도는 원래 장구목이야. 구룡령은 저짝 옛날 길 하나뿐이다. 이 말씀이요.”
 
지나던 이들의 마음자락이 길 만들어
 
Untitled-5 copy.jpg고개 밑 양양 갈천리에서 4대째 살아온 엄씨는 70~80년대까지도 구룡령 옛날 산길을 뒷산 갈천약수터에 물 뜨러 가듯 오르내린 산꾼이다. 갈천리에서 태어나 열 세살 때부터 주변 산을 훑으며 산삼·약초를 캐 온 경력 60년의 심마니다.
 
엄씨에겐 “평생을 걸어다녀 돌 하나, 나무 하나에도 손때가 묻어 있는 길”이자 “육이오 때 피난도 나갔다 오고, 장날이면 과일·고등어·장작도 지고 넘어 다녔던” 길이다. 엄씨뿐인가. 옛길엔 양쪽 마을 주민, 양양·홍천의 장꾼·약초꾼·나무꾼, 가마 타고 시집가고 조랑말 타고 장가들던 신부·신랑들의 마음자락도 아로새겨져 있다. 가파른 산길을,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편하고 완만한 쪽으로 갈고 닦아, 순하고도 아늑한 숲길을 이룩해 놓았다. 
 
옛길 정상(1089m)은 꽤 널찍하다. 양양과 홍천의 경계로, 고개를 넘던 이들이 쉬던 공간이다. 한쪽에 디딜방아 모양의 나무의자들을 만들어 놓아 쉬어 갈 수 있게 했다. 정상엔 70년대까지 산신각이 있었다. 엄씨는 “사각기둥에 산신 위패를 모신 너와집 사당이었는데 언젠가 군인들이 공비 은거를 막기 위해 불태웠다”고 말했다. 과거 보러 가던 이도, 장사하러 가던 이도 이곳에 이르면 반드시 산신각에 제를 올리고 떠났다고 한다. “다 일리 넘어다녔는데, 절 하구 간 사람과 그냥 지나간 사람이 나중에 결과를 보면 천지 차이가 났대유.” 정성껏 제를 올리고 가면 과거에도 붙고, 장사도 아주 잘 됐다고 한다. 엄씨는 사당이 없어진 뒤인 70년대말까지도 음력 8월 아흐렛날이면 동트기 전에 제물을 지게에 지고 올라와 제를 올렸다고 한다.
 
구룡령 옛길 정산은 예로부터 “능선이 천리를 달리고, 만리가 내다 보이는 명당”으로 알려져 왔다. 누군가 이곳에 묘를 쓰려고 주검을 들쳐업고 올라오면 호랑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포효하는 바람에, 줄행랑을 쳤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56번 국도쪽 구룡령 밑엔 산적 소굴이 있었는데, 옛길 정상에 숨어 있다가 오가는 사람들 물건을 강탈하는 일이 잦아, 고개를 넘기 전 마을에 10여명씩 모인 뒤에야 고개를 넘곤 했다고 한다.  
 
 말 탄채로 떨어지는 물 받아 먹었다는 ‘서서물나들’
 

Untitled-6 copy.jpg

갈천리 쪽 옛길은 선인들 삶의 족적이 푸근하고, 명개리 명지거리 쪽 산길은 물길과 함께 이어져 수려한 경치를 펼쳐 보여준다. 갈천리 쪽 길은 2년전 정비됐고, 명개리 쪽 옛길은 그동안 방치돼 숲이 무성했으나 2009년 봄 일부 구간에 밧줄을 쳐 길을 손질하고 길안내 팻말도 설치했다.
 
명지거리 쪽 길로 내려가면 약 1㎞ 정도 구간만 가파를 뿐 나머지 2~3㎞ 정도는 완만한 숲길이다. 이 길엔 주막이 두세곳 있었다. 정상에서 100여m 되는 지점의, 고성청이란 이가 하던 주막은 광복 직전까지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술과 음식을 팔고 말도 먹이고 하던 쉼터다. 정상 가까운 산길만 가파를 뿐 처음 물길과 만나는 지점부터는 완만한 산길이 물길을 따라 이어진다. 물길을 만나는 지점은 ‘서서물나들’이라고 불린다. 말을 타고 고개를 넘다가 말에 탄 채로 서서 바위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구룡령 등산안내인이자 숲해설가 남상수(64)씨가 흙과 돌이 드러난 길바닥을 가리켰다. “멧돼지들이 파헤친 흔적입니다. 이만한 돌더미를 파헤칠 수 있는 건 멧돼지뿐이지요.”
 
길 주변은 참으로 다양한 수종들로 덮여 있다. 키다리 전나무숲이 이어지는가 싶으면, 거대한 다래나무 덩굴이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커다란 고사리과 식물들이 우거진 숲 사이로 쓰러진 고사목들을 타고 넘기도 하며 걷는 길이다. 바짝 마른 가랑잎들이 두툼하게 쌓여 발 옮겨딛는 소리가 물소리보다 요란하다.
 
Untitled-2 copy.jpg

길안내 팻말을 곳곳에 세워 거리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팻말은 잘못됐다. 길 중간에 오래 전부터 이용돼온 영골약수란 약수터가 있는데, 이를 가리키는 팻말이 명지거리 쪽으로 20m 떨어진 곳(바위를 감싸고 자란 나무 옆)에 설치돼 있다. 영골약수터는 위쪽 물길 안 왼쪽에 있다. 물이 조금이라도 불면 약수는 물에 잠긴다. 돌무더기 흩어진 집터 지나 명지거리 마을이 보이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계단길을 올라 박달나무 조림지를 지나 갈림길에서 왼쪽 길로 내려서면 붉은 철판 지붕집 뒷길로 나오게 된다. 정상에서 여기까지 2시간. 여기서 명개리 56번 국도까지 걸어서 20~30분 거리.    
 
두 원님, 우리 고을이 더 넓게 ‘준비 땅’
 
Untitled-7 copy.jpg

갈천리 쪽 길은 푸근하다. 물푸레나무·피나무 구경하며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따라 이리저리 몸을 틀며 내려가다 보면 길이 가파르다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는다. 수백년 동안 이어진 발길에 길은 움푹 파여, 거의 키를 넘기는 흙벽 통로를 걷는 기분이 느껴질 정도다. 곳곳에서 회반쟁이·솔반쟁이·묘반쟁이 등 거리를 재기 위해 이름붙인 지명들과, 철광산·삭도 흔적들을 두루 만나게 돼 지루하지 않게 걸을 수 있다.
 
반쟁이란 ‘반정’, 두 지점의 반이 되는 지점을 가리킨다. 회반쟁이는, 산소를 모시고 땅을 다질 때 흙에 섞어 쓰던 횟가루를 채취했던 바위가 많은 데서 비롯했다. 엄씨는 “이 횟돌 가루를 야양 흙과 섞어서 쓴 무덤은 포크레인으루다 깨두 깨지지 않을 정도”라고 했다.
 
솔반쟁이는 부근에 소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이다. 곳곳에 거대한 금강송들이 키자랑을 하고 섰지만, 오히려 솔반쟁이 부근엔 밑둥만 남은 아름드리 소나무 흔적들이 널려 있다. 10여년전 경복궁 복원에 쓰기 위해 이곳에서 곧게 뻗은 금강송들을 베어갔다고 한다.
 
묘반쟁이엔 무덤이 하나 그윽하게 누워 있다. 여기 이야기가 있다. 옛날 양양과 홍천의 경계를 가를 때 두 고을 원님이 각각 같은 시각에 출발해 만나는 지점을 경계로 정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때 양양의 한 총각이 원님이 가기 좋게 미리 길을 닦았는데, 추위 속에 먹지도 못하고 2번이나 길을 오가며 닦아놓고는 지쳐 숨을 거뒀다고 한다. 그 무덤이 있는 곳이어서 묘반쟁이다.
 
“철광석 운반용 삭도, 일제 때 맹근 거 아녀“ 
 
Untitled-4 copy.jpg산길 주변엔 일제때 개발된 철광도 세 곳이나 있다. 이중 두 곳에선 70년대 초까지도 철광석을 채취했다. 60년대엔 솔반쟁이까지 ‘제무시’(지엠시)가 올라와 광석을 실어갔다고 한다. 철광 갱도로 가는 길은 차단해 놓았지만, 산길 옆에 설치된 철광석 운반용 삭도(케이블카)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이 삭도 흔적을, 일부에선 일제강점기 때 만든 것이라고 하지만 실은 광복 뒤 50년대에 설치된 것이다. 평소에 점잖으신 어르신 엄씨가 갑자기 핏대를 올리며 말했다. “내 기가 차서. 50년대에 맹긴 걸 갖구 일번넘들이 맹길었다구 하니. 아, 삭도 운전하던 이두 지금 시퍼렇게 살아 있어. 왜정 땐 삭도가 없었지. 그땐 인발구에 철광석을 싣구 밀구 나왔어.”
 
물소리가 나고 전망이 트이면 다 내려온 것이다. 물길 건너면 갈천리 마을이다. 갈천은 칠내·치래마을로도 불린다. 마을 한쪽엔 검은색 돌더미가 수북하게 쌓여 있어 철광석 생산지임을 알게 해준다. 정상에서 여기까지 1시간30분~2시간.
 
마을로 나가 아래쪽 물길을 건너 다시 산길로 800m쯤 오르면 철분이 함유된 탄산약수가 솟는 갈천약수터가 있다. 약수터에 이르는 길도 물길 따라 가는 낙엽길이어서 늦가을·초겨울 정취가 그윽하다.
 
  

■ 구룡령 여행쪽지
 
⊙ 대중교통=대중교통을 이용해 구룡령까지 가는 길은 차편이 드물고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서울 상봉터미널에서 고속버스로 홍천까지 간 뒤 1~2시간마다 있는 내면 창촌리행 버스를 탄다. 창촌에서 양양가는 버스(구룡령 정상, 갈천리 경유)는 하루에 1회(오전 9시)뿐이다. 창촌에서 목맥동가는 버스(하루 5회)를 타면 명개리까지 갈 수 있다. 양양에서 갈천리행 버스도 하루에 5회 운행한다. 첫차(오전 8시)는 홍천행.
 
⊙ 손수운전=빠른 길은 춘천고속도로를 이용해 가는 것이다. 춘천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홍천에서 나가 44번 국도 따라 인제 쪽으로 가다 구성포에서 56번 국도 따라 창촌 지나 양양 쪽으로 간다. 구룡령 정상에 등산안내인이 상주한다. 갈천리 이장 엄주현씨 011-294-2427. 갈천리의 전 이장 엄익환(73)씨는 구룡령의 내력에 밝은 토박이 주민이자, 60년 경력의 심마니다. 주변 산에 대해서도 정보가 많다. (033)673-0887.
 
갈천리에 산나물, 한방오리, 토끼요리를 내는 식당이 있다. 야생 버섯전골과 갖가지 토끼고기 요리를 내는 RK토끼농장 (033)672-1555, 한방오리·도토리 음식을 내는 치래마당 (033)673-0050. 구룡령 밑(홍천 내면 광원리) 샘골휴게소엔 두부와 청국장을 직접 만들어 내는 그리운두부(033-435-6080)가 있다.

 
구룡령(양양·홍천)/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Leave Comments


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