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 가려진 ‘진주’…폐허로 방치된 감동 '화석' 길따라 삶따라

로마보다 매력적인 주변 유적지
‘죽음의 도시’ 네크로폴리스. 주택처럼 뻗은 무덤 가득
기원 전 술집 메뉴까지 '고스란히'…주민 튀어 나올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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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역사문화의 요람’으로 일컫는 이탈리아 로마. 도시 거의 전체가 고대~근대 유적이다. 유럽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절반 이상이 이탈리아에, 특히 로마에 집중돼 있다. 이 한없이 넓고 깊은 문화유산의 광채에 가려 제빛을 드러내지 못하는 보석들도 로마 언저리에 널려 있다. 로마 주변의 두 폐허 유적지 체르베테리 네크로폴리스와 오스티아 안티카로 간다. 고대 이탈리아 반도 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흔적이, 각각 지상·지하의 거대한 돌무더기들에 생생히 아로새겨져 있다. 로마에서 차로 한 시간 안팎의 거리에 있으면서도 한국인 여행자들의 발길은 별로 닿지 않은 곳들이다.
 
⊙ 네크로폴리스
에트루리아인의 고대 공동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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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문화의 뿌리엔 옛 라틴 문화와, 현 라치오 북부에 존재했던 에트루리아 문화, 그리고 고대 그리스 문화가 혼재해 있다. 이 중에서 기원전 9~3세기에 번성한 에트루리아는 고대 로마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면서도 그 내용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신비의 고대국가로 일컬어진다. 기하학·건축·수로·금속세공 등 기술이 뛰어났던 철기 사회로 추정된다.
 
기원전 358년 로마 공격을 받아 도시들은 폐허로 변했고, 그 문화는 고스란히 로마가 흡수했다. 타르퀴니아와 투스카니아, 페루자, 체르베테리 등에 남아 있는 거대한 공동묘지와 유물, 일부 건축물 잔해 외에 에트루리아의 문화유적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해리포터’에도 등장한 개 형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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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남긴 아름다운 폐허 속으로 들어가 보자. 로마 서북쪽 해안가의 소도시 체르베테리에 에트루리아 융성기에 조성된 귀족·부유층의 무덤 무리가 기다린다. 네크로폴리스(죽음의 도시)로 불리는, 에트루리아의 거대한 고분군 유적이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일부 외국 여행안내서엔 에트루리아 유적지가 “이탈리아에서 가장 황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시간 속에 사라진 것들, 구체적인 내용을 숨긴 채 그 얼개만을 겨우 드러내는 삶과 죽음의 자취들이 나그네에게 상상의 나래를 펼칠 공간을 제공해 준다.
 
고대 신라나 백제의 고분을 떠올리게 하는, 1000여개에 이르는 대형 무덤들이 촘촘하게 이어진다. 무덤 주위엔 아름드리 소나무들까지 우거져, 한국적 정취를 북돋운다. 소나무는 옛날부터 이탈리아에 지천이었다. 고대 로마에서 화산 폭발 장면을 보고 “마치 구름이 소나무처럼 피어올랐다”고 표현했을 정도다.
 
네크로폴리스의 총넓이는 40여㏊에 이른다. 이 중 10㏊ 정도를 관광객들에게 개방해, 주요 고분들의 석실 안까지 들어가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화산암(투파)을 다듬어 깐 포장길과 작은 언덕 모양의 무덤들, 기울고 쓰러진 거대한 석조물들이 번성했던 고대 도시를 방불케 한다. 무덤들은 마치 사람들이 살던 주택처럼, 곧게 뻗은 길들을 따라 양쪽으로 자리잡고 있다. 여러 세기에 걸쳐 확장된 공동묘역이다. 무덤 안엔 주거공간을 재현해 놓고 기둥이나 벽에 무덤 주인의 생전과 사후의 생활 모습을 그리고 꾸며놓았다. 칼·항아리·동물 모양을 부조 형식으로 만들어 붙이고, 벽화로도 그렸다. 가장 큰 무덤 들머리엔 머리가 세 개 달린 개 형상물이 지키고 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죽은 이의 영혼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사후세계를 지키는 동물이다. 이 개는 <해리포터> 1편에도 등장한다.
 
라치오 북부지역을 지배했던 에트루리아는 12개의 주요 도시로 이뤄진 느슨한 연방체제 국가였다. 당시 이름은 카에레(Caere)였는데, 체르베테리란 현 지명은 옛 카에레를 가리키는 ‘카에레 베투스’에서 비롯했다. 도시들이 번성하면서 마을 주변에 만들어진 공동묘지가 네크로폴리스다. 가장 융성했던 시기엔 거주 인구가 35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초기엔 지배계급 없는 평등사회였으나, 기원전 8세기 이후 지배계층이 생기며 무덤 형식도 대리석으로 테를 둘러 장식한 초대형 고분으로 변해간 것으로 추정된다.
 
하늘로 더 가까이 가까이, 화장 문화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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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주변엔 돌절구처럼 생긴 석조물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화산암의 밑을 둥글게 다듬고 위에 구멍을 판 형식인데, 주검을 화장한 뒤 안치하는 데 쓰인 것이다. 신성한 불을 통해 하늘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믿어 특히 남자들을 화장했다고 한다. 초기의 이런 장례 방식은, 지배계층이 자리 잡으면서 소규모 석곽분의 형식을 거쳐 거대한 분묘 형식으로 바뀌었다. 무덤 안에선 화장과 매장 형식이 혼재된 모습, 여러 명의 주검을 함께 안치한 가족묘 형식도 흔하게 보인다.
 
무덤 안에선 식기류·거울·금장식품·청동세공품과 부부상·말상 등이 출토됐다. 체르베테리박물관과 로마 발레 줄리아 에트루리아박물관 등에 보관돼 있다. 한 무덤의 석관 위에 장식돼 있던, 비스듬히 누워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부부상이 대표적인 유물인데, 일정상 직접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안고, 여자는 손으로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모습의 섬세한 조각상이다.
 
로마 캄피돌리오 언덕에 있던 늑대상도 에트루리아의 유물로 알려졌다. 로마를 상징하는 동물이 늑대다. 로마 기원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레무스 형제에 의해 시작된다. 형인 로물루스가 팔라티노 언덕에 처음 로마를 세웠다. 이 청동 늑대상은 두 형제가 젖을 먹고 있는 모습으로 현재 캄피돌리오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본디 늑대상 뿐이었으나, 젖 먹는 형제 모습이 르네상스 시대에 보태졌다고 한다. 기원전 5세기께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늑대상에 대해 최근엔 에트루리아인의 작품이 아니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로마의 정복과 도시 말살로 에트루리아 유적은 거의 사라졌지만, 건축양식·금속세공기술 등 로마 문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로마 북쪽의 도시 토스카나의 지명은 에트루리아인을 뜻하는 에트루스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에트루리아인이 이탈리아의 토착민인지 외부 세력인지도 정확하게 구명되지 않은 상태다. 왕정시대 로마의 마지막 세 왕은 에트루리아 계통이었다.
 
⊙ 오스티아 안티카
생생한 고대도시 흔적에 ‘혹 폼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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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내를 관통해 지중해로 흘러드는 테베레강 하구 삼각주에 2000여년 전의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오스티아 안티카가 있다. 초대형 모자이크로 바닥이 장식된 목욕탕, 술독과 대리석 바와 메뉴 그림이 남아 있는 술집, 수세식 공중변소, 3000명을 수용하는 반원형극장, 주택과 상가, 하수도 등의 모습이 거의 원형대로 남은 고대 도시다. 너무도 생생한 모습에 여행자들은 흔히 화산폭발로 묻힌 폼페이 유적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오스티아 유적은 한순간에 매몰된 것이 아니다. 전쟁과 지진·수해 등으로 파괴된 뒤 오랜 기간 방치된 결과물이다.
 
기원전 4세기 무렵 로마가 소금과 교역항을 확보하기 위해 점령한 식민도시다. 고대 오스티아는 염전에서 생산한 소금과 곡식 교역이 활발했던 항구 도시였다. 오스티아란 입(테베레강의 들머리)을 뜻한다. 이곳에 최대 5만명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소금은 화폐로도 사용됐는데, 영어의 샐러리(급료)란 말은 소금을 가리키는 라틴어 살라리움에서 비롯했다. 로마는 당시 오스티아를 식민지로 삼아 소금을 내륙의 소규모 도시국가들에 팔아 부를 챙기며 세력을 키웠다. 그러나 주변에 다른 항구들이 개발되면서 항구로서의 기능을 잃은 데 이어 로마제국이 쇠락의 길을 걸으면서 도시는 방치되기 시작해 폐허로 변해갔다. 흙 속에 묻혀 있던 이 도시 유적은 19세기 초 처음 발굴돼 20세기 들어서 본격적인 유적 보전작업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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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직한 화산석을 다듬어 깔아 포장한 중심도로가 항구 쪽으로 1㎞ 남짓 이어지고, 좌우로 뻗은 골목길 옆으로 아름다운 벽돌과 대리석으로 장식된 건축물 벽체들이 줄을 잇는다. 그 사이사이로 서고 쓰러진 채 나뒹구는 인물 석상들과 다양한 무늬로 정교하게 조각된 석물들이 하나같이 보석 같아 눈을 떼기 어렵게 한다.
 
오스티아 안티카의 해설사 파올라(41)는 “옛 도시 입구 안쪽에 물을 마실 수 있는 분수대가 있었고, 그 옆엔 사람과 짐을 나르는 마차 승차장이 있었다”고 말했다. 마차 승차장 터 위쪽엔 운송업자 조합이 회원제로 운영하는 대형 목욕탕 흔적이 남아 있다. 곳곳에서 크고 작은 공중목욕탕과 개인 주택의 목욕탕이 발견되는데, 모두 바닥을 말·사람·돌고래 등의 모습을 그린 모자이크로 장식했다.
 
주택과 상가·술집 등의 벽면은 회반죽을 하고 그린 채색벽화로 장식했는데, 일부 남은 빛바랜 벽화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대리석에 홈을 파 물을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수세식 남성용 공중화장실(여성은 집 안에서만 볼일을 해결했다)과 두레박이 드나들며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는 공동우물 입구 받침돌도 인상적이다. 오스티아는 지진, 하상 융기 등으로 파괴된 뒤 주변에 새 항구들이 건설되면서 쇠퇴했다.
 
네크로폴리스와 오스티아 안티카 유적이 감동적인 건 모두 ‘복원’하지 않은 상태로 자연스럽게 방치해뒀다는 점이다. 로마에 30년째 살며 문화유적들을 답사해 온 건축가 정태남(54)씨는 “두 곳 모두 로마 문화의 뿌리와 고대 도시문화의 전형을 드러내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며 “무너지고 쓰러진 채 그대로 두고 최소한의 손질만 하는 유적 보전방식이 돋보이는 곳들”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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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여행 쪽지

알이탈리아항공(대한항공 좌석)이 주 3회(수·금·일요일) 인천~밀라노~로마 항공편을 운항한다. 오후 1시20분 출발. 밀라노까지 11시간30분 걸림. 밀라노에서 1시간30분 머물다 로마로 출발, 로마까지 1시간30분 걸림. 로마~인천 비행기편은 10시간30분 걸림. 시차는 8시간. 여름 서머타임 적용 땐 7시간. 사용 화폐 유로. 가을은 우기. 아침저녁으로 춥다. 두꺼운 옷 필수.
체르베테리는 로마에서 서북쪽으로 35㎞ 거리에 있다. 로마 테르미니역에서 20~30분 간격으로 있는 기차를 이용한다. 40~50분 걸림. 버스는 지하철 레판토역 부근에서 30분 간격 출발. 1시간20분 걸림. 오스티아 안티카는 로마 서쪽 20여㎞ 거리. 전철역 오스티엔세역에서 승차(기본요금 1유로). 40분 걸림.
⊙ 여행 정보 얻기 l  이탈리아 정부관광청(www.enit.or.kr) (02)775-8806, 라치오 주정부관광청(www.atlazio.it).

 
 
로마/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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