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이 노래하고 이중섭이 소를 그린 그곳 길따라 삶따라
2009.10.30 17:00 너브내 Edit
대구 도심 걷기
어두운 시기에 좌절과 희망 읊던 문화·예술 산실
한약 냄새만 맡아도 감기 ‘뚝’ 한다는 약령시장도
대구시 중구 한복판에 대구읍성 터가 있다. 성곽 흔적은 사라졌으나 공원으로 꾸며진 옛 경상감영 자리가 남아 있다. 조선 중기부터 영남지역 행정·문화의 중심지였고, 일제강점기 이후 대구의 최대 번화가이자, 문화·예술의 중심거리로 발전해온 곳이다. 경상감영 공원을 출발해 시계 방향으로 걷는다. 성곽 주변의 과거와 현재를 들춰보는 시간여행이다.
국내 첫 음악감상실 ‘녹향’ 팻말만이 터 알려
경상감영 공원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고 관광안내소에서 지도와 자료를 챙긴다. 하마비부터 만난다. ‘절도사 이하 모든 이는 말에서 내려 걸으라’(節度使以下皆下馬碑)는 표석이다. 공원은 멀리서 가까이서 걸어온 남녀 어르신들로 가득하다. 운동하고 쉬고 대화하고 연애하는 공간이다.
경상감영은 1601년 안동에서 옮겨온 이래 일제가 침탈하기까지 300년 남짓 존재했다. 영조 때(1736년) 둘레 2.65㎞에 이르는 석성을 쌓았는데, 1906년 당시 관찰사이던 친일파 박중양이 상권을 확보하기 위해 허물어버렸다. 왕의 허락도 없이 읍성을 허문 박중양은 당시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로 불릴 정도로 호가호위하던 자였다고 한다. 도유형문화재 1호인 공원의 선화당(관찰사 집무실)과 2호인 징청각(관찰사 처소)은 현재 보수공사 중이다.
선화당 앞뜰엔 1770년 만든 측우기가 있었으나 화강석 받침돌(보물 842호)만 남아 있다. 공원 한쪽에 모아놓은 29개의 선정비 무리를 둘러보고 공원을 나서며 문화유산해설사 김종석(66)씨가 목청을 높인다. “측우기는 뭐냐카마 영조 46년에 만든 긴데, 친일파 박중양이가 일본인 인천기상관측소장한테 선물한다꼬 줘삐린 기라.”
향촌동 거리를 걷는다. 향촌동 주변은 1920년대부터 광복 전까지 ‘한강 이남 최대 번화가’였다. 광복 전까지 5만여명의 일본인이 거주하며 금융·상권을 장악했다. 광복에 이어 한국전쟁 피난기를 거치는 동안 이곳엔 숱한 예술인들이 찾아와, 밤새 잔질하고 절규하며, 좌절과 희망을 노래했다. 이런 분위기는 1970~80년대까지 이어지며 대구 문화·예술의 산실 노릇을 했다.
감영 옆 네거리 모퉁이 건물에, 국내 첫 음악감상실 ‘녹향’ 터임을 알리는 작은 팻말이 보인다. 1946년부터 60~70년대까지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 구실을 하던 곳이다. 화가 이중섭, 시인 유치환, 소설가 정비석, 국문학자 양주동 등 당대 지식인들이 들락거렸다. 시인 양명문은 이곳에서 가곡으로 유명해진 ‘명태’를 썼다. 개업 당시의 주인 이창수(88)씨는 지금도 포정동에서 녹향을 지키고 있다.

한물간 번화가에 들어서면 펼쳐지는 흑백 사진
해설사 김씨가 맞은편 모퉁이의 세탁소를 가리켰다. “저 곳이 옛날엔 백구세탁소였는데, 청마 유치환이 세들어 살던 집입니다. 가까이 사니까 녹향에 자주 들렀겠죠.”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서 대구로 옮겨와 문을 열었던 음악감상실 르네상스도 근처 골목 안쪽에 있었다. 수제화 전문 구두점이 즐비한 길에서 왼쪽 비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르네상스가 있던 집이 나타난다.
음악소리 요란한, 어르신들이 드나드는 ‘성인텍’ 골목으로 나선다. 70~80년대까지 “이 골목에 오려면 돈 좀 쥐고 있어야” 했던 고급 음식점 거리였다. 인텔리 쌍과부가 운영하던 백록다방, 제일모직 노동자 출신 마담이 운영했던 호수다방이 이 골목에 있었다. 이중섭·백기만 등이 와서 죽치던 백록다방은 이중섭의 은박지 소 그림이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대구 중심 번화가를 상징하던 이 골목은 이제 주도권을 길 하나 건너 동성로 쪽에 넘겨준 채 낡아가고 있다.
옛 북쪽 성곽 자리인 북성로로 나선다. 이 길은 ‘순종 황제 어가길’로도 불린다. 1909년 일제의 권유로 첫 지방 순행에 나선 순종 황제가 부산 오가는 길에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등과 함께 이곳에 들렀다. 대구역에서 옥교(임금이 타는 가마)를 타고 선화당으로 갈 때 이 길을 지났다. 당시 관찰사 박중양은 길옆 민가를 부수고 길을 넓혔다고 한다. 이 길에 일본인들이 밀집해 살면서 일제강점기 대구의 상업 중심지로 떠올랐다. 당시 상권을 주도하던 미나카이백화점 건물이 1990년대 초까지 있었으나 철거됐다.

중앙로 길 건너 동성로로 접어든다. 거리 분위기는 앞서 향촌동 쪽과 확연하게 구분된다. 향촌동이 중장년의 거리, 국밥집의 거리, 옛 정취만이 쓸쓸하게 떠도는 한물간 거리라면, 동성로 쪽은 청춘의 거리, 패스트푸드의 거리, 최첨단 패션이 난무하는 떠오르는 거리다. 옛 성곽의 동문인 진동문 터를 지나 지하도를 건너 한일극장 옆 골목으로 들자 젊은 남녀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지하철 중앙로역에서 큰길 건너 진골목(긴골목)으로 든다. 분위기는 다시 확 바뀐다. 식당도 극장도 중앙로를 사이에 두고 흥하고 망해가는 모습이 뚜렷하다. 낡은 집들이 즐비한 진골목은 이를테면 서울의 피맛골과 같은 뒷골목이다. 1907년 골목 안에 살던 7명의 부인들이 금붙이 등 패물을 모아 헌납하며 여성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한 곳이다. 과거엔 달성 서씨들이 모여 살던 부자 동네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심은 뽕나무가 뽕나무골목의 유래
대구지역 첫 양옥집(1930년대)이라는 정소아과의원과 은퇴 지식인들이 즐겨 찾는다는 미도다방을 거쳐, 20년째 육개장으로 성가를 올리는 진골목식당의 70년 된 한옥, 대청영남제일관 표지석을 볼 수 있다.
한약방과 약재상이 즐비한 남성로를 따라 옛 대구제일교회 쪽으로 걷는 동안 은은한 한약 내음이 온몸을 감싸온다. 약전골목은 본디 옛 대구읍성 객사 마당에서 열리던 약령시가 옮겨와 형성됐다. 350년 역사를 지녔다. 1658년 처음 개설돼 250년 간 전국 최대 약령시로 명성을 얻었다. 1907년 성곽과 객사가 헐리면서 남성로가 새로운 약전골목으로 자리잡게 됐다. 골목 안의 옛 대구제일교회 건물은 1933년 화교 건축업자가 지은 것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1990년 교회가 동산 지역으로 옮긴 뒤 지금은 선교관으로 쓰인다.
약령전시관 앞 골목으로 드니 구수하고 훈훈한 한약 내음이 한결 짙어진다. 그저 걸어다니기만 해도 “한약 냄새에 초기 감기는 바로 떨어진다”는 골목이다. 제환·제탕업소가 몰린 곳인데, 청도에서 팔조령 넘어와 이곳을 거쳐 문경·충주 쪽으로 이어지던 옛 영남대로의 한 구간이기도 하다.
이 골목과 계산동 성당 뒤 네거리 주변은 뽕나무골목으로 불린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과 함께 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 뒤 이곳에 정착해 뽕나무를 심고 살았던 데서 비롯한 이름이다. 우리 근현대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골목이기도 하다. 민족시인 이상화가 살던 고택과 그의 형인 독립운동가 이상정의 고택, 국채보상운동 주창자 서상돈 고택 등이 이 골목에 몰려 있다.

그림에 ‘주렁주렁’ 열린 감이 가을빛으로 다가와
이상화 고택 문 위엔 이상정과 이상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지낸 이상백, 대한사격연맹 회장을 지낸 이상오 등 4형제를 가리키는 ‘용봉인학’(龍鳳麟鶴) 네 글자를 쓴 액자가 걸려 있고, 마당엔 가을빛으로 물든 감나무·석류나무가 서 있다. 감나무는 이상화가 살 때부터 있던 나무다.
영남대 전신인 청구대학 설립자 최청해의 고택 터 옆 골목을 나와 계산오거리의 대로를 만나 계산동 성당 정문으로 걷는다. 성당 담벽 길에선 1920년대 성당 모습을 아트타일 벽화로 장식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계산동 성당 건물은 1902~1918년에 걸쳐 지어진 대구지역의 첫 고딕 양식 건물(사적 290호)이다. 고 김수환 추기경이 신부 서품을 받은 곳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성당 옆 마당엔 ‘이인성 나무’가 있다. 대구 출신 화가 이인성이 1930년대 그린 ‘계산동 성당’의 배경이 된 감나무다. 성당 뾰족탑과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이 나무는 주황빛 감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환하게 서 있다.
성당을 나와 큰길 건너 제일교회 왼쪽 계단길(3·1계단)로 오른다. 담벽엔 일제 때 항일운동 관련 사진과 옛 마을 모습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교회 주변엔 선교박물관·전시관으로 쓰이는, 서양 선교사들이 머물던 아름다운 옛 사택들을 만날 수 있다. 맷돌과 방아확 등을 길과 정원 주변에 깔아놓은 모습이 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70년 됐다는, 오래된 사과나무도 만난다. 1898년 미국의 우드 오 존슨 선교사가 이곳에 부임해 올 때 70여그루의 사과나무를 들여와 심었는데, 이것이 한국에 사과가 들어오게 된 시초라고 한다. 당시 나무들은 모두 죽었으나, 그 아들나무가 하나 살아남아 지금도 작고 빨간 능금알들을 달고 서 있다.
여기까지 3㎞ 남짓, 중구청에서 닦은 골목 탐방길 두 코스의 일부를 이어서 걸었다.

대구/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어두운 시기에 좌절과 희망 읊던 문화·예술 산실
한약 냄새만 맡아도 감기 ‘뚝’ 한다는 약령시장도
대구시 중구 한복판에 대구읍성 터가 있다. 성곽 흔적은 사라졌으나 공원으로 꾸며진 옛 경상감영 자리가 남아 있다. 조선 중기부터 영남지역 행정·문화의 중심지였고, 일제강점기 이후 대구의 최대 번화가이자, 문화·예술의 중심거리로 발전해온 곳이다. 경상감영 공원을 출발해 시계 방향으로 걷는다. 성곽 주변의 과거와 현재를 들춰보는 시간여행이다.
국내 첫 음악감상실 ‘녹향’ 팻말만이 터 알려

경상감영은 1601년 안동에서 옮겨온 이래 일제가 침탈하기까지 300년 남짓 존재했다. 영조 때(1736년) 둘레 2.65㎞에 이르는 석성을 쌓았는데, 1906년 당시 관찰사이던 친일파 박중양이 상권을 확보하기 위해 허물어버렸다. 왕의 허락도 없이 읍성을 허문 박중양은 당시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로 불릴 정도로 호가호위하던 자였다고 한다. 도유형문화재 1호인 공원의 선화당(관찰사 집무실)과 2호인 징청각(관찰사 처소)은 현재 보수공사 중이다.
선화당 앞뜰엔 1770년 만든 측우기가 있었으나 화강석 받침돌(보물 842호)만 남아 있다. 공원 한쪽에 모아놓은 29개의 선정비 무리를 둘러보고 공원을 나서며 문화유산해설사 김종석(66)씨가 목청을 높인다. “측우기는 뭐냐카마 영조 46년에 만든 긴데, 친일파 박중양이가 일본인 인천기상관측소장한테 선물한다꼬 줘삐린 기라.”
향촌동 거리를 걷는다. 향촌동 주변은 1920년대부터 광복 전까지 ‘한강 이남 최대 번화가’였다. 광복 전까지 5만여명의 일본인이 거주하며 금융·상권을 장악했다. 광복에 이어 한국전쟁 피난기를 거치는 동안 이곳엔 숱한 예술인들이 찾아와, 밤새 잔질하고 절규하며, 좌절과 희망을 노래했다. 이런 분위기는 1970~80년대까지 이어지며 대구 문화·예술의 산실 노릇을 했다.
감영 옆 네거리 모퉁이 건물에, 국내 첫 음악감상실 ‘녹향’ 터임을 알리는 작은 팻말이 보인다. 1946년부터 60~70년대까지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 구실을 하던 곳이다. 화가 이중섭, 시인 유치환, 소설가 정비석, 국문학자 양주동 등 당대 지식인들이 들락거렸다. 시인 양명문은 이곳에서 가곡으로 유명해진 ‘명태’를 썼다. 개업 당시의 주인 이창수(88)씨는 지금도 포정동에서 녹향을 지키고 있다.

한물간 번화가에 들어서면 펼쳐지는 흑백 사진
해설사 김씨가 맞은편 모퉁이의 세탁소를 가리켰다. “저 곳이 옛날엔 백구세탁소였는데, 청마 유치환이 세들어 살던 집입니다. 가까이 사니까 녹향에 자주 들렀겠죠.”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서 대구로 옮겨와 문을 열었던 음악감상실 르네상스도 근처 골목 안쪽에 있었다. 수제화 전문 구두점이 즐비한 길에서 왼쪽 비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르네상스가 있던 집이 나타난다.
음악소리 요란한, 어르신들이 드나드는 ‘성인텍’ 골목으로 나선다. 70~80년대까지 “이 골목에 오려면 돈 좀 쥐고 있어야” 했던 고급 음식점 거리였다. 인텔리 쌍과부가 운영하던 백록다방, 제일모직 노동자 출신 마담이 운영했던 호수다방이 이 골목에 있었다. 이중섭·백기만 등이 와서 죽치던 백록다방은 이중섭의 은박지 소 그림이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대구 중심 번화가를 상징하던 이 골목은 이제 주도권을 길 하나 건너 동성로 쪽에 넘겨준 채 낡아가고 있다.
옛 북쪽 성곽 자리인 북성로로 나선다. 이 길은 ‘순종 황제 어가길’로도 불린다. 1909년 일제의 권유로 첫 지방 순행에 나선 순종 황제가 부산 오가는 길에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등과 함께 이곳에 들렀다. 대구역에서 옥교(임금이 타는 가마)를 타고 선화당으로 갈 때 이 길을 지났다. 당시 관찰사 박중양은 길옆 민가를 부수고 길을 넓혔다고 한다. 이 길에 일본인들이 밀집해 살면서 일제강점기 대구의 상업 중심지로 떠올랐다. 당시 상권을 주도하던 미나카이백화점 건물이 1990년대 초까지 있었으나 철거됐다.

중앙로 길 건너 동성로로 접어든다. 거리 분위기는 앞서 향촌동 쪽과 확연하게 구분된다. 향촌동이 중장년의 거리, 국밥집의 거리, 옛 정취만이 쓸쓸하게 떠도는 한물간 거리라면, 동성로 쪽은 청춘의 거리, 패스트푸드의 거리, 최첨단 패션이 난무하는 떠오르는 거리다. 옛 성곽의 동문인 진동문 터를 지나 지하도를 건너 한일극장 옆 골목으로 들자 젊은 남녀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지하철 중앙로역에서 큰길 건너 진골목(긴골목)으로 든다. 분위기는 다시 확 바뀐다. 식당도 극장도 중앙로를 사이에 두고 흥하고 망해가는 모습이 뚜렷하다. 낡은 집들이 즐비한 진골목은 이를테면 서울의 피맛골과 같은 뒷골목이다. 1907년 골목 안에 살던 7명의 부인들이 금붙이 등 패물을 모아 헌납하며 여성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한 곳이다. 과거엔 달성 서씨들이 모여 살던 부자 동네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심은 뽕나무가 뽕나무골목의 유래

한약방과 약재상이 즐비한 남성로를 따라 옛 대구제일교회 쪽으로 걷는 동안 은은한 한약 내음이 온몸을 감싸온다. 약전골목은 본디 옛 대구읍성 객사 마당에서 열리던 약령시가 옮겨와 형성됐다. 350년 역사를 지녔다. 1658년 처음 개설돼 250년 간 전국 최대 약령시로 명성을 얻었다. 1907년 성곽과 객사가 헐리면서 남성로가 새로운 약전골목으로 자리잡게 됐다. 골목 안의 옛 대구제일교회 건물은 1933년 화교 건축업자가 지은 것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1990년 교회가 동산 지역으로 옮긴 뒤 지금은 선교관으로 쓰인다.
약령전시관 앞 골목으로 드니 구수하고 훈훈한 한약 내음이 한결 짙어진다. 그저 걸어다니기만 해도 “한약 냄새에 초기 감기는 바로 떨어진다”는 골목이다. 제환·제탕업소가 몰린 곳인데, 청도에서 팔조령 넘어와 이곳을 거쳐 문경·충주 쪽으로 이어지던 옛 영남대로의 한 구간이기도 하다.
이 골목과 계산동 성당 뒤 네거리 주변은 뽕나무골목으로 불린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과 함께 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귀화 뒤 이곳에 정착해 뽕나무를 심고 살았던 데서 비롯한 이름이다. 우리 근현대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골목이기도 하다. 민족시인 이상화가 살던 고택과 그의 형인 독립운동가 이상정의 고택, 국채보상운동 주창자 서상돈 고택 등이 이 골목에 몰려 있다.

그림에 ‘주렁주렁’ 열린 감이 가을빛으로 다가와
이상화 고택 문 위엔 이상정과 이상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지낸 이상백, 대한사격연맹 회장을 지낸 이상오 등 4형제를 가리키는 ‘용봉인학’(龍鳳麟鶴) 네 글자를 쓴 액자가 걸려 있고, 마당엔 가을빛으로 물든 감나무·석류나무가 서 있다. 감나무는 이상화가 살 때부터 있던 나무다.

성당 옆 마당엔 ‘이인성 나무’가 있다. 대구 출신 화가 이인성이 1930년대 그린 ‘계산동 성당’의 배경이 된 감나무다. 성당 뾰족탑과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이 나무는 주황빛 감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환하게 서 있다.
성당을 나와 큰길 건너 제일교회 왼쪽 계단길(3·1계단)로 오른다. 담벽엔 일제 때 항일운동 관련 사진과 옛 마을 모습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교회 주변엔 선교박물관·전시관으로 쓰이는, 서양 선교사들이 머물던 아름다운 옛 사택들을 만날 수 있다. 맷돌과 방아확 등을 길과 정원 주변에 깔아놓은 모습이 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70년 됐다는, 오래된 사과나무도 만난다. 1898년 미국의 우드 오 존슨 선교사가 이곳에 부임해 올 때 70여그루의 사과나무를 들여와 심었는데, 이것이 한국에 사과가 들어오게 된 시초라고 한다. 당시 나무들은 모두 죽었으나, 그 아들나무가 하나 살아남아 지금도 작고 빨간 능금알들을 달고 서 있다.
여기까지 3㎞ 남짓, 중구청에서 닦은 골목 탐방길 두 코스의 일부를 이어서 걸었다.

| |
대구/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