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쇠에게 흰쌀밥 준 고운 별당 아씨가 사뿐사뿐 길따라 삶따라
2009.10.16 17:46 너브내 Edit
대전 도심 걷기
덕을 품은 도시답게 돌장승들의 미소도 ‘넉넉’
벽에 낙서하면 선비가 툭 튀어나와 “네 이놈”

대전은 1천년 선비문화가 면면이 전해오는 역사문화의 고장이다. ‘회덕분기점’의 그 회덕에 뿌리가 있다.
회덕(懷德)은 ‘덕을 품었다’는 뜻이다. 고려 태조때부터 쓰인 고을 이름이다. 지금은 대전광역시 대덕구에 속한다. ‘대덕’이란 일제때 대전과 회덕에서 한글자씩 따와 붙인 지명이다. 대전시 북동쪽 금강의 지류인 갑천과 계족산 사이가 대덕구다. 이곳 아파트숲 사이사이에 ‘덕을 품은’ 옛 고을의 자취가 뚜렷하다. 대덕문화원을 출발해 동춘당 거쳐 비래골 옥류각까지 걷는다.
덕을 품었다는 뜻의 회덕…아파트 사이사이 덕이 넘쳐
읍내동의 대덕문화원(겸 대덕문화회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먼저 문화원에 들러 여행지도와 자료를 챙긴다. 골목골목 주요 볼거리 정보도 얻을 수 있다. 문화원 주변의 조선시대 돌장승들과 비석 무리부터 만나러 간다. 길 건너 읍내사거리에서 우회전해 3분 거리 길 건너쪽에 ‘당아래 돌장승’이 있다.
당산주유소에서 돌장승을 묻자 주인은 대뜸 “아이구 또 왔네. 그걸 보러 와서 길을 묻는 사람이 1년에 꼭 열댓명은 됩디다” 하면서 친절히 가르쳐준다.
장승이라기보다는 남성 성기를 닮은 높이 76㎝의 길쭉한 돌이다. 장승 옆에서 신문·상자 등을 모아 묶던 장순애(86) 할머니는 “원래 저기 당산 아래 배배마을에 있던 걸 이리 뫼셔온 것”이라며 “음력 정월 열나흗날 밤에 북치고 장구치고들 와서 제를 지낸다”고 말했다.
다시 문화원 쪽으로 돌아와 ‘어사 홍원모 영세불망비’(1831년)를 보고 회덕동 주민센터로 간다. 정문에 회덕 유래비가 있고, 마당에는 16개나 되는, 관찰사·현감 등의 행적을 기리는 선정비·불망비가 일렬로 세워져 있다. 읍내동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을 모아놓은 것이다. 읍내동은 옛 회덕현 관아가 있던 데서 비롯한 지명이다.
회덕동 주민센터 옆골목으로 들어간다. 왼쪽 삼거리 모퉁이에 또 푸근한 한 쌍의 돌장승이 기다린다. 옛 마을 이름을 따 ‘뒷골 장승’으로 불린다. 키 큰 남장승, 키 작은 여장승 모두 정감어린 표정으로 웃고 있어 낡고 후미진 뒷골 들머리가 정겨워진다. 옛날 남장승은 논둑에, 여장승은 마을 입구에 있었는데 택지개발로 현위치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장승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기찻길 밑 굴다리 행렬이 이어진다. 100여m를 걷는 동안 무려 8개의 높고 낮고, 길고 짧은 굴다리를 통과해야 한다. 경부선 철도 대전조차장 주변이다. 마지막 굴다리는 아치형 터널로 일제강점기 때 만든 것이다. 현재는 위로 철로가 지나지 않아, 주민들은 ‘구철뚝’으로 부른다. 굴다리 사이사이에 옛 골목 풍경들이 남아 있다.

송시열 송준길이 살던 곳, 효심이 깃든 곳
30년간 방아만 찧어 왔다는 ‘뒷골방아간’ 지나 큰길로 올라선다. 길 건너 소공원 옆 제월당으로 간다. 제월당은 조선 숙종때 예조판서를 지낸 ‘제월당 송규렴’이 살던 집의 별당이다. 문이 잠겨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큰길(계족로)을 두고 경부고속도로와 나란히 뒷길을 따라 걷는다. 한마음아파트 담을 따라 옛 한옥 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에 조선 후기 유학자 손우당 홍석의 아흔아홉칸 집이 있었다고 한다. 이 주변은 계족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있던 곳이다. 복개되면서 물가에 있던 ‘법천 석총’이란 글씨를 쓴 바위와 돌장승 한 쌍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지금의 법동이란 지명은 옛 절 법천사 밑의 마을인 법천동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더 오래 전엔 범적골이었다. 이 산 제당의 형상이 호랑이 모습이어서 범적골 또는 범적동이었는데, 뒤에 법천동으로 바뀐 것이다.

법동초교 쪽으로 나와 보람아파트 끼고 계족로 네거리로 가면 이 돌장승 한쌍을 만난다. 이 ‘법동 돌장승’은 남·녀 장승을 각각 작은 검은색 선돌과 함께 세운 점이 특이하다. 이 돌장승들이 옛날 법천 양쪽에 서 있던 것이다.
법동2동 주민센터 뒤로 들어가 법동시장을 통과한다. 아파트로 둘러싸인 도심 한가운데 놓인 재래시장인데, 10여년전 자연적으로 생겨났다고 한다. 시장길 끝 왼쪽에 정려각이 하나 있다. 효성이 지극했던 은진 송씨 부인을 기려 영조때 내려진 정려기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조선시대 회덕을 말할 때 은진 송씨를 빼놓곤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조선 전기의 학자 쌍청 송유가 정착한 이래 세거를 이뤄 우암 송시열, 동춘 송준길 등 빼어난 유학자를 배출했다.
유적 주위를 소공원으로…나무 우거진 곳 유심히

다시 네거리 건너면 중리동. 왼쪽으로 나무 우거진 공원이 나타난다. 송애당이다. 효종 때 충청관찰사를 지낸 송애 김경여가 지은 별당이다. 앞서 만난 정려각의 주인 은진 송씨 부인이 바로 김경여의 어머니다.
별당이란 마루와 온돌방을 갖춘 주인의 생활공간이자 손님맞이 장소이기도 한 집안 별채 건축물을 말한다. 송애당은 제월당·쌍청당·동춘당과 함께 이 지역을 대표하는 별당 건축물 중 하나다. 송애당 앞쪽에는 법천 물길에서 옮겨온 ‘법천 석총’(동춘 송준길의 글씨)이 새겨진 바위가 놓여 있다.
길은 쌍청당으로 이어진다. 쌍청은 고려말~조선초의 학자이자 은진 송씨 입향조인 송유의 호다. 세종 때 처음 지어진 별당 건물인데 단청을 한 점이 특이하다(세종때부터 민가엔 단청을 금지했다). 오래된 배롱나무들이 우거져 드리운 그늘이 그윽하다. 송유 고택 문은 평소 잠겨 있지만 벨을 눌러 탐방을 청하면 안으로 들어가 둘러볼 수 있게 해준다. 집 안 오른쪽 언덕에 쌍청당이 있다.


정려공원으로 간다. 대전 문화유산해설사 박은숙(40)씨가 말했다. “아파트·상가 건물들 숲에서 문화유적을 찾으려면 나무 우거진 곳을 눈여겨 보면 됩니다. 유적 주위를 소공원으로 꾸몄기 때문이죠.”
정려공원엔 송유의 어머니인 고흥 류씨 부인 정려각과 정려비가 있다. 정려비의 비문은 송준길이 짓고 송시열이 쓴 것이다.
송촌동 골목들엔 음식점이 즐비하다.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종목의 음식점들이 몰려 있는 곳이다. 손두부집 뒤 큰길 옆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상하송촌리 삼강려(上下宋村里 三綱閭)’라 쓰인 옛 아래·위 송촌마을 들머리에 있었으나, 택지 개발로 이곳에 옮겨졌다. 충신·효자·열녀를 모두 배출한 마을이란 뜻이다.
길 건너 골목으로 들어가면 충신 이시직 정려각이 있는 작은 공원으로 이어진다. 이시직은 병자호란 때 동향 출신 송시영과 강화도로 갔다가 강화가 함락되자 함께 자결했다. 이시직은 뒤에 이조판서로 추증됐다.
수학여행이 경주라면 대전 학생들의 소풍은 동춘당
소방서 네거리에서 길 건너 조경 공사중인 동춘당으로 간다. 회덕 별당 건축물 탐방의 하이라이트가 동춘당이다. 대전이 자랑하는 보물(209호)이자, 지역 역사문화 교육의 기본이 되는 유적이다. “지역 주민들이 초·중·고생 때 꼭 한번씩은 거쳐가는 곳”이다. 아파트 단지들에 둘러싸인 동춘당공원에선 ‘동춘당 옛 모습 찾기 조경공사’가 한창이다.
동춘당공원엔 효종때 이조·병조판서를 지낸 송준길(1606~1672)의 별당 동춘당과 고택, 사당, 그리고 송준길의 손자인 송병하가 살던 ‘송용억 가옥’이 있다. 사당은 4대조를 모시는 오른쪽의 가묘와, 동춘 송준길의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왼쪽 별묘로 이뤄져 있다.
동춘당은 온돌방과 대청마루로 이뤄진 정면 3칸, 옆면 2칸의 건물로 주요 문들은 들어올릴 수 있도록 돼 있다. 굴뚝을 세우지 않고 벽 아래 네모난 구멍만 뚫어놓은 게 특이하다. 현판은 송준길과 숙질 사이로, 한살 아래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송준길 사후(1678년)에 쓴 것이다. 현판의 원본은 종중 사무실에 있다.
키다리 소나무와 오동나무·감나무, 거대한 팽나무 들이 동춘당 담 안팎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벽오동나무도 한 그루 있다. 마당에 흩어진 열매를 주워 까먹어 보니 고소한 맛이 난다.
송준길 고택 사랑채 문 위에 적힌 ‘백세청풍(百世淸風)’ 글씨가 호방하다. 안으로 들면 내외담 옆에 세워진 굴뚝을 눈여겨볼 만하다. 기왓장 조각으로 태극과 팔괘를 그려 굴뚝을 장식한 모습이 이채롭다.
‘호연재 김씨부인 시비’, 4월이면 “300년 된 영산홍이 불타오르듯 꽃을 피운다”는 송용억 가옥, ‘송씨3세 효자 정려구허비’ 등을 차례로 둘러볼 수 있다. 송용억 가의 전통 가양주가 송순주다. 솔순으로 만드는 송순주는 각 지역에 전해 내려온다. 은진송씨 집안에는 <주식시의> 등 대대로 전해오는 필사본 음식책이 있는데, 여기에 송순주를 비롯한 다양한 술 제조법도 전한다고 한다.
이 집 앞에 놓인 넙적한 바위가 부근의 옛 물길 쪽에 있었다는 금암(琴岩)이다. 땅에 묻혀 있어 ‘금(琴)’ 자만 보인다. 길 건너 송촌중학교에선 해마다 벌이는 축제 이름이 금바위축제다. 금암은 이곳에 살던 송몽인의 호이기도 하다.
갈라진 산줄기 모습이 닭의 발을 닮아 계족산

동춘당공원을 나와 담을 끼고 돌아 선비마을 아파트 4단지, 5단지 사이로 오른다. 경부고속도로 밑 굴다리를 통과하면 계족산 산자락마을 비래골이다. 고성 이씨 집성촌이다. 먼저 반기는 것이 570년 됐다는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와,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덮개식 고인돌 둘이다. 정월 열나흗날 밤 느티나무에 당산제를 지낸다.
매봉(응봉)을 바라보며 비래암으로 오른다. 길은 포장공사중이다. 절고개로 이어지는 계족산 등산로다. 계족산은 대전의 진산이다. 봉황산으로도 불린다. 봉황산을 일제가 계족산으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대덕문화원 임창웅 사무국장은 “계족산이란 이름도 조선 초기부터 써온 이름”이라며 “갈라진 산줄기 모습이 닭의 발을 닮았다”고 말했다.
잠시 오르면 길옆 바위에 송준길이 썼다는 ‘초연물외’ 글씨가 보이고, 계곡 물길에 올라앉은 옥류각이 모습을 드러낸다. 수량이 늘면 옥류각 밑으로 흘러 바위로 떨어져내리는 물줄기가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옥류각은 제월당 송규렴 등이 1693년 동춘 송준길이 강학하던 장소를 기념해 세운 누각이다. 비래암 마당을 거쳐 옥류각으로 들어갈 수 있다. 옥류각 안에 걸린 여러 글 중엔 ‘공부하러 온 학생들은 벽에 낙서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내용도 있다. 동춘 송준길이 종이에 써서 비래암 벽에 붙였던 것을, 후학들이 나무에 새겨 옥류각을 지은 뒤 걸어둔 것이다. 비래암 현판 밑에 걸린, 우암 송시열이 쓴 글 ‘비래암 고사기’에 이런 이야기와 함께, 동춘과 어울렸던 모임을 추억하며 아쉬워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내려와 비래골의 한 손두부집에서 허기진 배를 달랬다. 대덕문화원에서 비래암까지 7km를 걸었다. 4시간 반 넘게 걸렸다. 다소 먼 거리여서 회덕동 일대와 송촌동 일대를 나눠 걷는 것도 좋겠다.
대전/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덕을 품은 도시답게 돌장승들의 미소도 ‘넉넉’
벽에 낙서하면 선비가 툭 튀어나와 “네 이놈”

대전은 1천년 선비문화가 면면이 전해오는 역사문화의 고장이다. ‘회덕분기점’의 그 회덕에 뿌리가 있다.
회덕(懷德)은 ‘덕을 품었다’는 뜻이다. 고려 태조때부터 쓰인 고을 이름이다. 지금은 대전광역시 대덕구에 속한다. ‘대덕’이란 일제때 대전과 회덕에서 한글자씩 따와 붙인 지명이다. 대전시 북동쪽 금강의 지류인 갑천과 계족산 사이가 대덕구다. 이곳 아파트숲 사이사이에 ‘덕을 품은’ 옛 고을의 자취가 뚜렷하다. 대덕문화원을 출발해 동춘당 거쳐 비래골 옥류각까지 걷는다.
덕을 품었다는 뜻의 회덕…아파트 사이사이 덕이 넘쳐

당산주유소에서 돌장승을 묻자 주인은 대뜸 “아이구 또 왔네. 그걸 보러 와서 길을 묻는 사람이 1년에 꼭 열댓명은 됩디다” 하면서 친절히 가르쳐준다.
장승이라기보다는 남성 성기를 닮은 높이 76㎝의 길쭉한 돌이다. 장승 옆에서 신문·상자 등을 모아 묶던 장순애(86) 할머니는 “원래 저기 당산 아래 배배마을에 있던 걸 이리 뫼셔온 것”이라며 “음력 정월 열나흗날 밤에 북치고 장구치고들 와서 제를 지낸다”고 말했다.
다시 문화원 쪽으로 돌아와 ‘어사 홍원모 영세불망비’(1831년)를 보고 회덕동 주민센터로 간다. 정문에 회덕 유래비가 있고, 마당에는 16개나 되는, 관찰사·현감 등의 행적을 기리는 선정비·불망비가 일렬로 세워져 있다. 읍내동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을 모아놓은 것이다. 읍내동은 옛 회덕현 관아가 있던 데서 비롯한 지명이다.
회덕동 주민센터 옆골목으로 들어간다. 왼쪽 삼거리 모퉁이에 또 푸근한 한 쌍의 돌장승이 기다린다. 옛 마을 이름을 따 ‘뒷골 장승’으로 불린다. 키 큰 남장승, 키 작은 여장승 모두 정감어린 표정으로 웃고 있어 낡고 후미진 뒷골 들머리가 정겨워진다. 옛날 남장승은 논둑에, 여장승은 마을 입구에 있었는데 택지개발로 현위치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장승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기찻길 밑 굴다리 행렬이 이어진다. 100여m를 걷는 동안 무려 8개의 높고 낮고, 길고 짧은 굴다리를 통과해야 한다. 경부선 철도 대전조차장 주변이다. 마지막 굴다리는 아치형 터널로 일제강점기 때 만든 것이다. 현재는 위로 철로가 지나지 않아, 주민들은 ‘구철뚝’으로 부른다. 굴다리 사이사이에 옛 골목 풍경들이 남아 있다.

송시열 송준길이 살던 곳, 효심이 깃든 곳
30년간 방아만 찧어 왔다는 ‘뒷골방아간’ 지나 큰길로 올라선다. 길 건너 소공원 옆 제월당으로 간다. 제월당은 조선 숙종때 예조판서를 지낸 ‘제월당 송규렴’이 살던 집의 별당이다. 문이 잠겨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큰길(계족로)을 두고 경부고속도로와 나란히 뒷길을 따라 걷는다. 한마음아파트 담을 따라 옛 한옥 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에 조선 후기 유학자 손우당 홍석의 아흔아홉칸 집이 있었다고 한다. 이 주변은 계족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있던 곳이다. 복개되면서 물가에 있던 ‘법천 석총’이란 글씨를 쓴 바위와 돌장승 한 쌍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지금의 법동이란 지명은 옛 절 법천사 밑의 마을인 법천동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더 오래 전엔 범적골이었다. 이 산 제당의 형상이 호랑이 모습이어서 범적골 또는 범적동이었는데, 뒤에 법천동으로 바뀐 것이다.

법동초교 쪽으로 나와 보람아파트 끼고 계족로 네거리로 가면 이 돌장승 한쌍을 만난다. 이 ‘법동 돌장승’은 남·녀 장승을 각각 작은 검은색 선돌과 함께 세운 점이 특이하다. 이 돌장승들이 옛날 법천 양쪽에 서 있던 것이다.
법동2동 주민센터 뒤로 들어가 법동시장을 통과한다. 아파트로 둘러싸인 도심 한가운데 놓인 재래시장인데, 10여년전 자연적으로 생겨났다고 한다. 시장길 끝 왼쪽에 정려각이 하나 있다. 효성이 지극했던 은진 송씨 부인을 기려 영조때 내려진 정려기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조선시대 회덕을 말할 때 은진 송씨를 빼놓곤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조선 전기의 학자 쌍청 송유가 정착한 이래 세거를 이뤄 우암 송시열, 동춘 송준길 등 빼어난 유학자를 배출했다.
유적 주위를 소공원으로…나무 우거진 곳 유심히

다시 네거리 건너면 중리동. 왼쪽으로 나무 우거진 공원이 나타난다. 송애당이다. 효종 때 충청관찰사를 지낸 송애 김경여가 지은 별당이다. 앞서 만난 정려각의 주인 은진 송씨 부인이 바로 김경여의 어머니다.
별당이란 마루와 온돌방을 갖춘 주인의 생활공간이자 손님맞이 장소이기도 한 집안 별채 건축물을 말한다. 송애당은 제월당·쌍청당·동춘당과 함께 이 지역을 대표하는 별당 건축물 중 하나다. 송애당 앞쪽에는 법천 물길에서 옮겨온 ‘법천 석총’(동춘 송준길의 글씨)이 새겨진 바위가 놓여 있다.
길은 쌍청당으로 이어진다. 쌍청은 고려말~조선초의 학자이자 은진 송씨 입향조인 송유의 호다. 세종 때 처음 지어진 별당 건물인데 단청을 한 점이 특이하다(세종때부터 민가엔 단청을 금지했다). 오래된 배롱나무들이 우거져 드리운 그늘이 그윽하다. 송유 고택 문은 평소 잠겨 있지만 벨을 눌러 탐방을 청하면 안으로 들어가 둘러볼 수 있게 해준다. 집 안 오른쪽 언덕에 쌍청당이 있다.


정려공원으로 간다. 대전 문화유산해설사 박은숙(40)씨가 말했다. “아파트·상가 건물들 숲에서 문화유적을 찾으려면 나무 우거진 곳을 눈여겨 보면 됩니다. 유적 주위를 소공원으로 꾸몄기 때문이죠.”
정려공원엔 송유의 어머니인 고흥 류씨 부인 정려각과 정려비가 있다. 정려비의 비문은 송준길이 짓고 송시열이 쓴 것이다.
송촌동 골목들엔 음식점이 즐비하다.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종목의 음식점들이 몰려 있는 곳이다. 손두부집 뒤 큰길 옆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상하송촌리 삼강려(上下宋村里 三綱閭)’라 쓰인 옛 아래·위 송촌마을 들머리에 있었으나, 택지 개발로 이곳에 옮겨졌다. 충신·효자·열녀를 모두 배출한 마을이란 뜻이다.
길 건너 골목으로 들어가면 충신 이시직 정려각이 있는 작은 공원으로 이어진다. 이시직은 병자호란 때 동향 출신 송시영과 강화도로 갔다가 강화가 함락되자 함께 자결했다. 이시직은 뒤에 이조판서로 추증됐다.
수학여행이 경주라면 대전 학생들의 소풍은 동춘당

동춘당공원엔 효종때 이조·병조판서를 지낸 송준길(1606~1672)의 별당 동춘당과 고택, 사당, 그리고 송준길의 손자인 송병하가 살던 ‘송용억 가옥’이 있다. 사당은 4대조를 모시는 오른쪽의 가묘와, 동춘 송준길의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왼쪽 별묘로 이뤄져 있다.
동춘당은 온돌방과 대청마루로 이뤄진 정면 3칸, 옆면 2칸의 건물로 주요 문들은 들어올릴 수 있도록 돼 있다. 굴뚝을 세우지 않고 벽 아래 네모난 구멍만 뚫어놓은 게 특이하다. 현판은 송준길과 숙질 사이로, 한살 아래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송준길 사후(1678년)에 쓴 것이다. 현판의 원본은 종중 사무실에 있다.
키다리 소나무와 오동나무·감나무, 거대한 팽나무 들이 동춘당 담 안팎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벽오동나무도 한 그루 있다. 마당에 흩어진 열매를 주워 까먹어 보니 고소한 맛이 난다.
송준길 고택 사랑채 문 위에 적힌 ‘백세청풍(百世淸風)’ 글씨가 호방하다. 안으로 들면 내외담 옆에 세워진 굴뚝을 눈여겨볼 만하다. 기왓장 조각으로 태극과 팔괘를 그려 굴뚝을 장식한 모습이 이채롭다.

이 집 앞에 놓인 넙적한 바위가 부근의 옛 물길 쪽에 있었다는 금암(琴岩)이다. 땅에 묻혀 있어 ‘금(琴)’ 자만 보인다. 길 건너 송촌중학교에선 해마다 벌이는 축제 이름이 금바위축제다. 금암은 이곳에 살던 송몽인의 호이기도 하다.
갈라진 산줄기 모습이 닭의 발을 닮아 계족산

동춘당공원을 나와 담을 끼고 돌아 선비마을 아파트 4단지, 5단지 사이로 오른다. 경부고속도로 밑 굴다리를 통과하면 계족산 산자락마을 비래골이다. 고성 이씨 집성촌이다. 먼저 반기는 것이 570년 됐다는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와,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덮개식 고인돌 둘이다. 정월 열나흗날 밤 느티나무에 당산제를 지낸다.
매봉(응봉)을 바라보며 비래암으로 오른다. 길은 포장공사중이다. 절고개로 이어지는 계족산 등산로다. 계족산은 대전의 진산이다. 봉황산으로도 불린다. 봉황산을 일제가 계족산으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대덕문화원 임창웅 사무국장은 “계족산이란 이름도 조선 초기부터 써온 이름”이라며 “갈라진 산줄기 모습이 닭의 발을 닮았다”고 말했다.
잠시 오르면 길옆 바위에 송준길이 썼다는 ‘초연물외’ 글씨가 보이고, 계곡 물길에 올라앉은 옥류각이 모습을 드러낸다. 수량이 늘면 옥류각 밑으로 흘러 바위로 떨어져내리는 물줄기가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옥류각은 제월당 송규렴 등이 1693년 동춘 송준길이 강학하던 장소를 기념해 세운 누각이다. 비래암 마당을 거쳐 옥류각으로 들어갈 수 있다. 옥류각 안에 걸린 여러 글 중엔 ‘공부하러 온 학생들은 벽에 낙서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내용도 있다. 동춘 송준길이 종이에 써서 비래암 벽에 붙였던 것을, 후학들이 나무에 새겨 옥류각을 지은 뒤 걸어둔 것이다. 비래암 현판 밑에 걸린, 우암 송시열이 쓴 글 ‘비래암 고사기’에 이런 이야기와 함께, 동춘과 어울렸던 모임을 추억하며 아쉬워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내려와 비래골의 한 손두부집에서 허기진 배를 달랬다. 대덕문화원에서 비래암까지 7km를 걸었다. 4시간 반 넘게 걸렸다. 다소 먼 거리여서 회덕동 일대와 송촌동 일대를 나눠 걷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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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