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비운 인연 따라 마음길 느릿느릿 길따라 삶따라

가을 숲길 걷기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에 온몸 씻고
올라야만 맛인가, 돌고 돌아 처음처럼
 
 
Untitled-8 copy.jpg

가을을 가을답게 즐기는 가장 눈부신 방법은 숲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숲 안에 다 들어 있다. 빛도 어둠도, 청춘도 사랑도 가득하다. 가을 숲에 드는 순간 다 반짝인다. 우수수 흩날리는 나그네도, 바스락거리는 연인도, 푹신하게 둘러앉은 가족도 깨끗한 빛을 발한다. 숲이 가을에 더 아름다운 건 이렇게 눈부신 여러 길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창문 맑은 날 하루 찍어, 마음 둔 이 손 잡아끌어 가까운 숲으로 들어가 보라. 여름내 얽히고설켰던 나무들, 비워내고 털어내는 인연들, 쌓이고 젖어 함께 내디딜 때마다 향기로워질 터다.
 
휴양림과 수목원에도 그득한 향기, 눈·귀 열고 받아들여
 
Untitled-9 copy.jpg

가을빛이 막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때다. 정상을 향해 치달아 올라가는 ‘등산’이 아닌, 숲과 길을 즐기는 숲 탐방을 해보자. 가을은 단풍놀이, 단풍산행, 붉게 타오르는 산줄기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가까운 공원 숲에서도, 이웃한 마을 숲에서도 저마다 가을빛을 내뿜는 나무들이 있고 또 낙엽이 쌓인다. 가을 향기는 어느 숲에서나 짙고 그윽하다.
 
숲길이 아름답기로는 수목원·휴양림이 첫째다. 너무 흔하게 보고 들은 것들이라, 멋진 숲과 숲길은 따로 있는 줄 아는 이들도 있다. 수목원·휴양림이야말로 자연 훼손을 최소화하면서 최대한 숲을 즐기며 쉬도록 가꿔놓은 정말 멋진 휴식처들이다. 이런 곳엔 크고 작은 물길이 딸려 있고, 물길을 따라 이어진 길고 짧은 산책로들엔 붉고 노란 가을 이파리들이 내려앉고 있기 마련이다. 쉼터와 간이의자, 안내판들을 곳곳에 배치해 놓아, 눈·귀 열고 오래 머물며 숨쉬기 좋다.
 
휴양림 하면 통나무집, 통나무집 하면 하룻밤 숙박을 떠올리겠지만, 휴양림 숲도 꼭 묵어야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휴양림이 매달 초 다음달치 숙박 예약을 한꺼번에 받는 까닭에 예약도 쉽지 않다. 휴양림에선 그날그날 당일 입장객도 받는다. 한나절 숲길을 거닐고 물소리 듣고 오기에 이만한 곳도 드물다.
 
날짜·시간을 정해 숲 해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도 많다. 대부분의 휴양림·수목원들은 침엽수·활엽수 등이 고루 분포하고 아름드리 거목도 즐비하다. 휴양림은 산림청에서 운영하는 곳(37곳·국유림), 자치단체 등에서 운영하는 곳(59곳·공유림), 개인이 운영하는 곳(17곳·사유림)으로 나뉜다. 산림청 홈페이지(www.foa.go.kr)에 들어가면 국내 전체 휴양림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숲길을 걸을 땐 무리해서 쏘다니지 마시오
 
Untitled-10 copy.jpg

각 단체들이 진행하는 숲 탐방 행사에 참가하는 것도 숲을 제대로 만나는 방법이다. 일부 지자체들과 환경·생태·숲을 보전하고 가꾸는 데 힘써 온 단체들에선 정기적인 숲 탐방 행사를 벌인다. 이런 단체들은 여러 해 동안 행사를 진행하면서 쌓아온 각 지역 숲과 특징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다. 이런 행사들에 참가하면 호젓한 분위기는 덜하지만, 무엇보다 숲을 즐기는 법을 알고, 체계적인 자연공부를 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전문가의 안내를 받아 숲길을 거닐면서 나무와 꽃의 이름과 특징, 숲의 가치, 숲의 순환과정 등을 배운다. 알고 나면 숲이 달라 보인다.
 
좀 멀리 떠나 물 맑은 골짜기를 낀 숲길 따라 호젓한 트레킹도 즐겨볼 만하다. 높은 산꼭대기까지 기어오를 필요는 없다. 큰 산은 대개 그 발치에 평탄하고 울창한 숲길과 깨끗한 물길을 갖춘 곳이 많다. 이런 곳엔 대개 선인들의 발자취가 서려 있어, 숲길 산책을 한결 풍성하게 해준다.
 
숲 즐기기에 대해 말할 때 전문가들은 ‘걷기에만 치중하지 말 것’을 한목소리로 권한다. 운동만을 위해 숲에 들어오지 않은 바에야, 천천히 걷고 두리번거리며 눈과 귀를 열어두라는 것이다. 자주 쉬면서 빈둥거릴수록 새소리, 바람소리, 도토리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해맑게 들리고, 몸을 낮출수록 쑥부쟁이 삼색 물봉선이 또렷이 눈에 잡힌다. 숲의 소리와 빛, 향기는 세상 풍파를 견디느라 억세진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이리저리 떠밀리고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
 
생명의숲 정경희 간사는 “숲을 체험하고 즐기기 위해선 정상을 향해서만 치닫는 기존의 ‘등산’ 개념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자연과 교류·교감하는 통로로서의 숲길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숲 안에서 사람은 ‘손님’이다. 식물·동물이 본디 주인인 숲 탐방길엔 손님이 갖춰야 할 예의와 주의점이 따라붙는다. 지당하고도 지키기 쉬워 보이는 말씀들인데도, 오랫동안 변함없이 강조돼 오는 것들, ‘하지 마시오’다. 숲해설가협회 문종오 사무처장이 숲 탐방에 앞서 늘 설명한다는 주의점을 요약하면 이렇다.
 
-길 아닌 곳으론 가지 마세요.
-꽃과 나무는 꺾지 마세요.
-산밤이나 도토리는 동물의 먹이이니 맛이나 보고 가져가진 마세요.
-체력을 생각해 무리해서 산길을 쏘다니지 마세요.
-날씨에 신경 쓰고 방한복을 챙기세요.
-그리고 제발 큰 소리로 떠들지 마세요.
 
◇ 험하지 않으면서 계곡 끼고 있어 걷는 재미 더하는 숲길들
 
훼손되지 않은 울창한 숲은 물 맑은 계곡을 끼고 있다. 험하지 않되 단풍은 아름답고, 크고 작은 폭포와 소가 줄을 잇는 숲길이다. 대개 왕복 2~3시간이면 멋진 경치와 선인들의 발자취를 두루 감상하고 내려올 수 있는 숲길을 알아본다.
 
Untitled-11 copy.jpg⊙ 춘천 청평사 계곡 숲길 소양호에서 오봉산(779m) 자락으로 이어진, 고찰 청평사에 이르는 숲길이다. 몇년 전까지도 청평사는 소양호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 산길을 걸어 올라야 했다. 춘천시내 쪽에서 배후령 넘어 오음리 쪽에서 들어가는 새 길이 뚫려, 이젠 차를 몰고 청평사 들머리까지 갈 수 있다. 물길은 청량하고 숲길은 평탄하다. 참나무류 등 활엽수가 주종인 이 골짜기의 자랑거리는 크고 작은 폭포들이다. 높이 9m의 구성폭포가 볼만하다. 아홉 가지 소리를 낸다는 폭포다. 청평사는 고려 광종 때 창건된 절이다. 고려 때 선승 이자현을 잊지 말자. 인주 이씨(이자겸 등)의 권세를 버리고 37년간 이곳에서 도를 닦은 고승이다. 또 나옹화상, 매월당 김시습 등 훌륭한 선승들의 발자취도 곳곳에 남아 있다. 여유 있게 오가며 경치와 유적들을 감상해도 두 시간 정도면 족하다. 춘천시청 문화관광과 (033)253-3700.
 
⊙ 강릉 소금강계곡 숲길 경치가 좋아 소금강이다. 오대산국립공원 노인봉 자락이다. 13㎞ 이르는 골짜기의 경치가 작은 금강산으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대한민국 명승 1호다. 소나무와 참나무류가 섞인 숲길이 거대한 암반을 거느린 물길을 따라 이어진다. 이어지는 폭포·소·바위엔 무릉계·십자소·연화담·식당암·구룡폭포·만물상·선녀탕·백운대 등 전설이 깃든 이름이 붙어 있다. 마의태자, 율곡 이이 선생과 삼척부사를 지낸 미수 허목 선생 등의 발자취가 서린 곳들이다. 골짜기 마을 이름은 본디 청학동이었다. 노인봉도 청학산이었다. 400여년 전 율곡 선생이 이곳에 들렀다가 소금강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숲길과 계곡의 주요 경치를 감상하려면 소금강분소(삼산2리 내동마을)에서 출발해 구룡폭포나 만물상·백운대까지 4~5㎞를 왕복하면 충분하다. 3시간 정도 걸린다. 오대산국립공원사무소 소금강분소 (033)661-4161.
 
⊙ 동해 무릉계곡 숲길 강원 동해시 청옥산(1404m)과 두타산(1353m) 자락에서 굽이쳐 내려간 바위골짜기다. 골짜기 전체가 거대한 암반이다. 조선 선조 때 삼척부사를 지낸 김효원이 무릉도원에 비견된다 하여 무릉계곡이란 이름을 붙였다. 금란정 옆 강바닥으로 드넓은 무릉반석이 펼쳐지는데, 여기에 조선시대 명필 양사언의 유려한 대형 초서글씨를 비롯해 수많은 묵객들의 시와 이름이 새겨져 있다. 삼화사 지나고 선녀탕·쌍폭포 거쳐 용추폭포까지 3㎞. 비교적 평탄한 숲길이다. 3단폭포인 용추폭포 위용이 볼만하다. 10월 중순 이후 폭포는 단풍과 어우러져 멋진 경치를 선사한다. 용추폭포까지 왕복 1시간30분~2시간. 용추폭포를 보고 문간재·피마름골·하늘문·관음암을 지나 삼화사 위쪽으로 내려오는 전망 좋은 산길도 있다. 왕복 서너 시간이 걸린다. 무릉계곡 관리사무소 (033)534-7306.
 
⊙ 응봉산 덕구계곡 숲길 삼척과 울진 경계에 솟은 응봉산(999m) 동쪽 자락이다. 계곡 들머리엔 국내 유일의 자연용출 온천인 덕구온천이 자리잡고 있다. 온천지구에서 온천이 솟구치는 ‘원탕’까지 4㎞의 계곡을 따라 걸어볼 만한 숲길이 뻗어 있다. 수량이 많은 편은 아니나 물이 깨끗하고, 소나무·참나무류가 섞인 숲길이 가을이면 붉게 타오른다. 솔잎·가랑잎 두툼히 쌓인 숲길엔 낙엽 내음이 자욱하다. 골짜기를 따라 각 나라의 이름난 다리를 본뜬 13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선녀탕 위로 나타나는 용소폭포 부근의 경치가 아름답다. 용소폭포에서 50여분 숲길·물길을 번갈아 오르면 해발 500m 지점의 원탕에 이른다. 더운 김을 뿜으며 물줄기가 솟구친다. 계곡 물가엔 발을 담그고 피로를 풀 수 있는 족욕탕도 마련돼 있다. 왕복 2시간. 덕구온천호텔에선 매일 아침 해설사의 안내로 덕구계곡 숲길 탐방을 한다. 아침 6시30분 호텔 로비에 모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 등산화 신지 않아도 편하게 산책할 수 있는 마을숲길들
 
산을 오르지 않고도 몸과 마음을 재충전할 만한 빼어난 숲이 곳곳에 있다. 길은 평탄하고 수목 울창한, 마을 곁 숲길들이다.
 
Untitled-12 copy.jpg⊙ 경남 함양 상림 통일신라시대 함양 태수를 지낸 최치원이 조성했다는 오래된 숲이다. 일단 숲에 들면 하염없이 걷고 싶어지는 낙엽길이 펼쳐진다. 사철 아름다우나, 늦가을 경관이 특히 빼어나다. 참나무류가 주종인 상림 숲 전체가 붉고 노랗게 타오른다. 식당 주인에서부터 군수에 이르기까지, “상림 빼놓고 젊은 날 추억을 얘기할 수는 결코 없다”는 숲이다. 철에 따라 숲에선 꽃무릇도 자라고 물길에선 연꽃도 자란다. (055)960-5163.
 
⊙ 충남 공주 공산성 백제 고도 웅진성이 곧 공산성이다. 해발 110m 야산에 자리한 둘레 2.6㎞의 장방형 성곽이다. 동서 폭 800m, 남북 폭은 400m. 백제 유적의 향기를 맡으며 거닐 수 있는 아름다운 성곽 안의 숲길이다. 주로 참나무류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금강 전망도 빼어나다. 숲길을 거닐면서 영은사·만하루·임류각 등 유적과 수많은 옛 건물터를 만나게 된다. 공주시청 관광축제팀 (041)840-2841.
 
⊙ 경기 포천 국립수목원 국내에서 가장 잘 보전된 숲으로 꼽힌다. 500여년 유래를 지닌 유서 깊은 숲이다. 1468년 세조가 이 지역에 묻히면서(광릉) 왕실림으로 관리돼 왔다. 국립수목원답게 숲과 나무에 관한 모든 것을 갖춘 곳이다. 숲 생태 관찰로와, 숲으로 둘러싸인 호수 육림호 주변 산책로가 특히 아름답다. 일·월·공휴일 휴무. 평일·토요일에도 탐방일 닷새 전 인터넷(www.kna.go.kr)과 전화 예약을 통해 하루 입장객을 5천명(평일)·3천명(토요일)으로 제한한다. 숲해설가가 정문에 대기한다. (031)540-2000.
 
⊙ 전남 장성 축령산숲 <태백산맥> <내 마음의 풍금> 등 촬영지로 이름난 문암리 금곡마을이 축령산숲 들머리다. 산자락으로 40~50년 된 편백나무·삼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다. 피톤치드 목욕탕으로 불린다. ‘조림왕’ 춘원 임종국(1915~87) 선생이 21년에 걸쳐 일군 국내 최고의 조림숲이다. 임도를 따라 차를 몰고 들어갈 수도 있다. 숲해설가 2명이 대기한다. 영암국유림관리소 (061)471-2183.
 
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Leave Comments


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