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낙엽, 갈 봄 여름 없이 ‘천의 얼굴’ 걷고 싶은 숲길

영양 일월산 대티골
낙동정맥 내륙, 해와 달이 가장 먼저 얼굴 ‘삐죽’
밤 도토리 다래 널려…이따금 멧돼지 가족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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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나는 숲, 잘 보전된 숲은 깊숙이 숨어 있어도 전문가들이 알아본다. 경북 영양군 일월면 용화2리, 일월산(1218m) 자락에 대티골 숲길이 있다. 지난달 생명의 숲이 주최한 ‘제10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숲길’ 부문에 입상한 곳이다. 낙동정맥 내륙, 해와 달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다는 일월산 북쪽 자락이다. 낙동강의 한 지류인 반변천 발원지 뿌리샘 주변으로 훼손되지 않은 청정 숲길이 뻗어 있다. 옛 마을길과 산판길, 옛 비포장 국도를 잇는 숲길이 눈부신 가을빛을 내뿜는다.
 
생태계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자연치유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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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티골 마을 머슴을 자처하는 권용인(50)씨가 말했다. “일월산은 수달·담비·삵, 깽깽이풀·노랑무늬붓꽃 등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 동식물이 많이 서식하는 곳”이라며 “생태계가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자연림”이라고 자랑했다. 권씨는 6년 전 대티골에 정착한 뒤 대티골을 ‘자연치유 마을’로 가꾸고 있다.
 
대티골 마을은 윗대티·아랫대티로 나뉜다. 대티란 옛날 봉화로 넘어가던 큰 고개를 뜻한다. 대티골 숲길 탐방로는 윗대티 마을에서 출발하는 세 가지 코스로 이뤄져 있다. 옛 국도(5㎞), 산판길(2㎞), 마을길(1㎞)은 서로 만나고 이어지며 일월산 자락에 펼쳐진다. 모두 경사가 완만하고 수목이 울창해 남녀노소 부담 없이 거닐며 숲을 즐길 수 있는 흙길이다.
 
Untitled-5 copy.jpg윗대티의 열두 농가 중 마지막 집을 지나 작은 물길(반변천 상류) 건너면서 본격적인 숲길이 시작된다. 곧 만나는 삼거리의 오른쪽 길이 순환 숲길 코스다. 참나무류 무성한 숲길은 벌써 떨어져 쌓인 낙엽으로 푹신하다. 앞서 숲길을 즐기고 내려오는 탐방객들을 만난다. 일부는 신발을 벗어 든 채 낙엽길을 밟는다. 영양 귀농학교에서 온 10여명의 교육생들이다.
 
충주 주덕읍에 산다는 문종환(47)씨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말했다. “둘러보니 정말 인위적인 손길이 별로 닿지 않은 멋진 숲입니다. 걸을수록 마음이 푸근해져 빨리 시골로 와 정착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지네요.”
 
보라색 투구꽃, 붉고 노란 물봉선, 물매화 흩어진 숲길은 한동안 “가재가 흔한” 물길과 함께 이어진다. 나무다리가 보이는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오르면 일월산 정상 쪽으로 이어지는 산판길, 오른쪽은 뿌리샘에 이르는 옛 마을길이다. 왼쪽 월자봉(일월산의 두 봉우리를 일자봉·월자봉으로 부른다) 방향으로 올라 점점 어두컴컴해지는 숲으로 든다. 숲길엔 몇해째 쌓인 낙엽더미가 두툼하다. 권용인씨는 “이 낙엽을 긁어다 퇴비로 씁니다. 밭에 뿌리면 잡초 제거 효과도 뛰어나죠”라고 말했다.
 
여기 저기 너구리 굴…금강송 무리도 쭉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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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이 산길은 흰색 바람꽃이 지천으로 깔려 눈이 부실 정도라고 한다. 권씨는 “봄이면 일자봉 뒤쪽은 큰앵초밭이 되고, 월자봉 뒤는 온통 노란 피나물밭이 된다”고 했다. 권씨가 땅에서 푸른 열매 두어 개를 주워 건넨다. 야생 다래다. 달콤새콤한 맛이 키위보다 윗길이다.
 
산벚나무·굴참나무들이 줄을 잇는 숲길은 곧 일월산 등산로와 만난다. 등산로를 뒤로하고 계속 뿌리샘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내리막 숲길을 탄다. 햇살과 바람에 휩싸여 숲길을 밝히는 산벚나무·굴참나무 이파리들은 이미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다. 길은 널찍하다. “옛 산판길을 주민들이 삽과 곡괭이로 조심스레 다듬고 넓힌” 숲길이다. 길목마다 방향과 거리를 알리는 팻말도 세웠다. 요란한 새소리를 앞세우고 걷던 권씨가 길을 멈추더니 산비탈에 뚫린 작은 구멍을 가리켰다. “너구리 굴입니다. 여기 털도 보이네요.” 멧돼지·노루·고라니도 흔하단다. 간혹 대여섯 마리의 멧돼지 가족을 만나기도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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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어느새 아름드리 소나무 숲 안으로 스며든다. 곧게 뻗은 금강송 무리다. 반변천 발원지인 뿌리샘을 보고 칠밭목 농가 쪽으로 오르는데, 철망 울타리가 길을 가로막는다. 방목한 염소가 달아나지 못하게 친 울타리라고 한다. 철조망을 뛰어넘어 옛 31번 비포장 국도로 가면서 농가에 들렀다. 칠밭목은 한때 일고여덟 가구가 살던 마을이었다. 지금은 이을옥(74)씨가 지키는 농가 하나만 남아 있다.
 
마당에서 도토리를 까던 손을 멈추고 이씨가 말했다. “고추도 심고 감자도 심고 밤·도토리도 줍고 한 사십년째 삽니더.” 이씨가 권씨와 몇 마디 주고받았다. “고치는 몇 물이나 따셨니껴?” “닷 물 땄시더.” “우리보다 마이 했네.”
 
첫날밤 도망친 남편에 한 맺힌 황씨부인 전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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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밭목에서 만나 대티골로 돌아 내려오게 되는 널찍한 옛 비포장 국도는 산골 주민과 목재 운반을 위해 1980년대 초반까지 사용되던 길이다. 차량 통행이 줄면서 산길은 옛 모습을 회복해 가고 있다. 길 옆으론 아름드리 소나무가 즐비하다. 중간에 녹슬고 빛바랜 이정표가 하나 서 있다. ‘영양 28㎞.’ 옛 국도임을 알리는 유일한 흔적이다. 한 시간쯤 국도를 걸으면 윗대티 마을 쪽으로 내려서게 된다.
 
이 옛 국도길은 8월말부터 10월 말까지는 산 작물 보호를 위해 주민들이 일반인 출입을 엄격히 통제한다. 이 때는 앞서 뿌리샘 주변을 둘러본 뒤 다시 마을로 내려가야 한다. 산판길과 뿌리샘 일대 숲길을 천천히 둘러보는 데 두 시간이면 족하다.
 
Untitled-7 copy.jpg일월산은 무속인들이 많이 모여드는 산이다. 기가 강한 산으로 이름높다. 윗대티마을 들머리에도 무속인들이 머무는 집이 몇곳 있다. 일월산엔 황씨부인 사당이 있는데, 여기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둘 있다. 하나. 옛날 한 마을에 두 총각이 황씨 처녀를 좋아했는데, 결국 한 총각과 결혼했다 이 총각이 첫날밤에 문에 비친 대나무 그림자를 칼로 착각해, 다른 총각이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고 신부와 첫날밤을 치르지 못한 채 달아났다. 신부는 그 자리에 앉아 기다리다 숨을 거두었다.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낳은 자식마다 잃는 사고를 당하던 이 신랑이 훗날 돌아와 황씨사당을 짓고 신부의 원혼을 달래줬다고 한다. 둘. 100여년전 청기면에 살던 황씨 성을 가진 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해 시어머니로부터 구박을 받다가 산삼이 많이 나는 일월산으로 도망와서 숨을 거뒀다. 한 심마니가 이를 위로해 사당을 짓고 황씨부인 사당이라 했다. 그 뒤로 일월산엔 신내림을 받으러 오는 무속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고 한다.
 
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 영양 대티골 여행쪽지
 
수도권에서 영동고속도로 타고 가다 원주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 타고 내려가 풍기나들목에서 나가 36번 국도 따라 영주~봉화 거쳐 춘양 지나 어지리 삼거리에서 31번 국도를 만나 우회전한다. 봉화터널에 이어 영양터널 지나서 내려가면 오른쪽에 대티골 마을 이정표가 있다. 우회전해 마을길로 1㎞쯤 들어가면 마을 주차장이 나온다.
 
권용인씨 집에선 산마늘·산부추 등 무공해 산나물과 채소·육류를 내는 ‘풀누리 소반 코스’ 요리를 예약받아 차려낸다. 윗대티 마을엔 최근 방문객이 묵어갈 수 있는 황토흙집도 마련했다. 아랫대티 주변엔 일제강점기 제련소가 있던 자리를 이용해 가꾼 일월자생화공원, 용화삼층석탑, 선녀탕 등 볼거리가 있다. 대티골(daetigol.com) 문의 (054)683-6832.
 
이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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