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은 모르는 최고 명당, 제주 속의 제주 길따라 삶따라

제주시내 사라봉 별도봉
제주시내 사라봉·별도봉, ‘짧지만 긴’ 길
제주도의 모든 역사가 주변에 얽히설키

 
img_01.jpg

 
제주도 여행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독특한 자연경관이다. 360여개에 이르는 오름들과 울창한 숲으로 덮인 곶자왈지대, 주상절리 등 기암괴석들 우거진 바닷가 경치들이 사철 내륙의 여행자들을 끌어들인다. 제주도의 특이한 자연경관은, 몇년 전 한라산, 거문오름과 용암동굴계, 성산 일출봉 등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며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최근엔 전세계 누리꾼 투표 등으로 선정하는 ‘세계 7대 자연경관’의 최종 후보지(28곳)에 이름을 올려 관심을 끌고 있다(2011년말까지 결선 투표). 반면, 자연 경관의 위용에 가려져 제 빛을 드러내지 못해온 볼거리들도 있다. 멋진 경관을 자랑하는 오름들 사이사이, 바닷가 기암괴석들 주변에 서린 선인들의 삶의 발자취들이다.
 

 
정상까지 10분…‘S’자, ‘8’자로 느릿느릿 돌면 서너 시간
 
제주시 북동쪽 해안에 아담한 오름 두개가 나란히 솟았다. 건입동의 사라봉(146m)과 화북동의 별도봉(베리오름·135m). 제주시민들이 아끼고 자랑하는 도심 속 휴식처이자, 운동·산책 공간이다. 뭍에서 들어온 관광객들의 발길은 거의 없다. 평범해 보이는 작은 봉우리들인데, 보고 느낄거리는 예상을 뛰어넘는다. 제주도 역사의 거의 모든 시대에 걸친 이야기들이 이 봉우리 주변에 얽히고 설켰다. 한나절 산길 바닷길을 거니는 동안 산자락에, 해안절벽에, 포구에 깔린 제주도 선인들 삶의 면면이 뭉클하게 다가온다. 빼어난 전망과 해안 경관, 거닐기 좋은 산책길은 기본이다.

“여기가 제주도 최고 명당이오. 관광객들이 이걸 모르고 명소만 찾고 있으니 참.” 사라봉과 별도봉 사잇길을 산책하던 60대 주민(건입동)은 두 봉우리 경치가 “제주도 최고”라고 자랑했다. 12년째 별도봉 정상을 지키는 산불감시요원 김호진(66)씨도 말했다. “한라산 보이지, 오름 보이지, 바다 보이지, 제주시내 다 보이지, 세계를 다 가봤다는 사람도 이렇게 좋은 산책로는 못 봤다고 합디다.”

 
주민들의 애향심 넘치는 자랑으로만 듣고 말기엔, 실제 경치가 용납하지 않는다. 이토록 멋진 두 봉우리 꼭대기까지 오르는 데 얼마나 걸릴까. 각각 10여분이면 족하다. 사라봉과 별도봉은 별도로 오를 필요가 없다. 두 봉우리를 잇는 산책로가 정상을 따라 ‘S’자로 이어지고 해안을 따라 ‘8’자로도 이어진다. 그냥 한바퀴 걸으면 2시간, 구경하고 들여다보아도 서너시간이면 된다. 

 
img_02.jpg
 
‘의로운 여성’의 표상이 된 김만덕의 자취
 
사라봉 남서쪽 주차장 식수대 옆으로 산책로 들머리가 있다. 나무계단을 따라 오르는 동안 산비탈에 검게 입을 벌린 동굴을 만난다. 일제강점기 말기 일본이 마지막 발악을 하며 주민들을 강제동원해 판 진지동굴이다. 이런 진지동굴이 사라봉과 별도봉 자락에 무수히 뚫려 있다. 잠시 오르면 제주항 쪽 바다가 보이는 능선에 이른다. 능선길은 벚나무들 사이로 낸 시멘트길, 오른쪽 산자락은 울창한 해송 숲이다. 사라봉 해송 숲은 올해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생명의 숲 선정)으로 뽑히기도 한 멋진 소나무숲이다.

정상의 팔각정(망양정)에 오르면 제주항과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바라보는 노을이 아름다워, ‘영주(제주) 10경’ 중 하나(제4경 사봉낙조)로 꼽혀 왔다. 한낮 경치도 뒤지지 않는다. 뜨고 내리는 비행기와 들고 나는 배들, 흰구름 쓴 한라산과 먹구름 벗은 제주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자 옆엔 옛날 봉홧불을 올리던 봉수대가 있다.

 
노란 털머위꽃 흩어진, 널찍한 소나무숲길을 따라 굽이굽이 돌아내려가면 쉼터·화장실이 있는 소공원에 이른다. 별도봉으로 오르는 갈림길이 있는 곳이다. 별도봉 오르기 전에 사라봉 자락 모충사를 둘러본다. 의녀 김만덕 묘, 의병항쟁(1909) 기념탑, 항일 독립운동가 조봉호 기념비 등이 세워진 곳이다.

만덕관에서 ‘의로운 여성’의 표상이 된 김만덕(1739~1812)의 일대기를 그린 그림들을 들여다볼 만하다. 정조 때 탐라에 모진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어나가자, 객줏집을 해 모은 1천금을 풀어, 육지에서 쌀을 사와 거저 나눠줬던 분이다. 이 일로 그는 정조를 알현하고 평생소원이던 금강산 구경도 하게 된다. 김만덕 묘비 옆엔, 반세기 뒤 제주로 유배온 추사 김정희가 그를 기려 후손에게 써준 ‘은광연세’(은혜의 빛이 온세상에 퍼진다) 편액의 글씨를 새긴 빗돌이 있다. 

 
img_03.jpg

“참 좋수다에. 이디보다 더 좋은 디 이시쿠강?”
 
별도봉 밑에 중요무형문화재 71호 ‘칠머리당 영등굿’이 행해지는 곳이 있다. ‘남당할마님·남당하르바님 신위’ 등을 새긴 세 개의 돌들이 보인다. 영등신은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시기에 찾아오는 신(바람신이자 농경신)으로, 주민들은 음력 2월 초하룻날 환영제를 하고 14일 송별제를 지낸다.

별도봉 꼭대기로 오르다 만나는 작은 언덕이 또하나의 오름 알봉이다. 알봉은 제주도에서 보기 드문 화강암 지형으로, 사라봉·별도봉보다 먼저 생겼다고 한다. 별도봉 꼭대기엔 산불감시초소와 봉수대, 오래된 무덤 하나, 운동기구 두개가 들어서 있다. 전후좌우로 한라산과 화북동 시내, 공사중인 제주외항 앞바다, 사라봉 쪽 제주시내 일부가 펼쳐진다.

 
산불감시원 김호진씨가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참 좋수다에. 이디보다 더 좋은 디 이시쿠강?(여기보다 좋은 데 있습니까?)” 김씨는 휴대전화로 직접 찍어 인화했다는 꽃 사진첩을 보여줬다. “자주색 산자고(백합과) 꽃이 깔리는 3월과 벚꽃잎 흩날리는 4월이 볼만한데, 겨울엔 탁 트인 전망에다 설경도 눈부시다”고 했다. 초소 옆 벚나무 밑엔 봉수대가 있다. 5월 말이면 벚나무에 버찌가 엄청나게 열리는데, 지난 6월 초 산책하던 사람들이 버찌를 따러 무더기로 봉수대에 올라서는 바람에 무너져 다시 쌓았다고 한다.

 
시원하게 펼쳐진 화북포 해안을 내려다보며 비탈길을 내려가면 왼쪽으로 꺾이는 갈림길 지나 또하나의 갈림길을 만난다. 먼저, 두번째 갈림길에서 왼쪽 길로 내려가 해안길 삼거리를 만난다. 오른쪽엔 ‘4·3사건’의 비극을 보여주는 곤을동이 있고, 왼쪽 해안길 끝엔 곤을동 사람들의 식수원이었던 바위밑 샘 ‘안드렁물’이 있다.
 

 
img_05.jpg

 
‘자살바위’ 앞엔 ‘다시 한번 생각하세요’ 글씨
 
700년 유래를 가진 곤을동엔 안곤을·가운뎃곤을·밧곤을 세 마을(70여가구)이 있는데, 4·3 당시 토벌대의 방화로 모두 불타고 젊은 사람들은 학살됐다. 안곤을은 그대로 방치돼, 지금도 집과 밭의 경계를 이루던 돌담과 올레, 연자방앗돌, 통시(변소) 자리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화북동주민센터 김형준씨는 “지난 6월 불탄 지 60년 만에 잡목들과 잡초를 제거했다”며 “오랜 세월 침묵 속에 있던 숲을 걷어내자 뱀들과 벌떼가 난리였다”고 전했다.

 
안드렁물은 지금도 깨끗해 식수로 쓰인다. 깎아지른 주상절리대 절벽 밑에서 솟는 샘인데, 시멘트로 서너칸의 칸막이를 해놓았다. 맨 윗물은 먹는물, 다음 물은 나물·채소 손질, 그다음 물은 빨래하는 데 썼다고 한다. 절벽 아래 서서 바다를 바라본다. 물가에선 오리발 내밀고 사라지는 해녀들의 물질이 한창인데, 먼 수평선은 내년에 완공된다는 제주외항 부두 공사장이 가로막고 있다.

 
다시 올라와 별도봉 해안산책로(첫번째 갈림길)를 따라 걷는다. 탁 트인 바다를 오른쪽에 두고 절벽을 따라 이어진 빼어난 산책로다. 걷기운동을 하는 주민들은 양팔을 앞뒤로 한껏 내저으며 ‘자살바위’ 위도 지나고 ‘애기업은 돌’ 아래도 지나 비탈길을 오르내린다. 가난했던 시절, 많은 사람이 목숨을 버렸다는 바위 앞엔 ‘다시 한번 생각하세요’란 글씨를 써놓았다고 한다. 산자락은 억새들 세상이다. 차고도 맑은 초겨울 햇살에 홀려, 바닷바람에 몸을 맡긴 채 뒤집어지고 자지러진다. 공사 중인 제주 외항을 바라보며 잠시 걸으면 별도봉·사라봉 사이 소공원으로 돌아온다.
 

 
img_04.jpg

 
보이는 것마다 모두 제주도에서만 만날 수 유산
 
시간을 넉넉하게 잡는다면, 앞서 별도봉 하산길에 곧장 내려가 화북동 선인들의 발자취를 둘러보고, 곤을동 거쳐 해안 산책로를 따라 돌아올 수 있다. 화북동주민센터에서 만든 문화유적 탐방코스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차로 이동할 경우 미리 요청하면 해설사의 안내도 받을 수 있다.

 
화북포구는 이웃 조천포구와 함께 조선시대 제주도로 드는 관문이었다. 제주로 부임·이임하는 관리나 유배돼 오가는 이들이 두 포구를 이용했다. 화북포엔 정월 초 배들의 안전을 비는 용왕제를 지내는 해신사가 있고, 그 옆엔 비좁은 화북포구에 방죽을 쌓는 등 주민생활을 위해 힘쓴 영조 때의 제주목사 김정 선정비가 있다. 선정비 맞은편에 보이는 높직한 성벽이 화북진성이다. 조선 후기에 축성한 옛 모습 일부가 남아 있다.
 ‘동마을’ 바닷가엔 복원된 환해장성(별도환해장성)과 옛 통신시설인 연대가 있다. 환해장성이란 고려 때 삼별초군의 입도를 막기 위해 관군이 제주도 전체 해안을 따라 쌓은 성이다. 그러나 반듯하게 복원된 별도환해장성은 본디 모습과는 다르다고 한다.
 “옛날에는예. 장성 성담이 야파(낮아)가지고에. 검질 하는(김 매는) 사람이나 쇠로 밭 가는 사람들이 바다를 보기 좋았수다. 지금은 담이 높아부리니 답답해신디, 빨리 성담을 야푸고 씨원하게 보였으면 좋쿠다.(화북1동 청풍경로당 강천수 노인회장·75) 해안의 굴곡을 따라 거칠게 쌓인 옛 모습이 남은 장성 일부를 곤을동(밧곤을) 해안에서 만날 수 있다(곤을환해장성).

 
현무암으로 만들어져 마모가 심한 조선시대 선정비 무리, 제주도식 한옥 김석윤 와가, 제주 개벽신화와 관련한 유적인 삼사석(삼성혈에서 나온 고씨·부씨·양씨가 살 곳을 정하기 위해 쏜 화살에 맞았다는 돌. 삼성혈로 옮겨놨음) 터도 있다. 보이는 것들이 모두 제주도에서만 만날 수 있는 독특한 유산들이다.

 
제주/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제주시 사라봉·별도봉 여행쪽지
 
⊙ 가는 길| 제주공항에서 5㎞ 남짓 거리. 동문로 사라봉오거리에서 사라봉로 팻말 보고 잠시 오르면 오른쪽에 주차장이 있다. 제주공항 앞 2·3번 게이트 사이에서 100번 버스 타고 제주박물관 입구에서 내린다. 모충사 앞 지나 잠시 걸으면 사라봉 서남쪽 산책로 들머리다.

 
⊙ 먹을 곳| 자연사박물관 앞 삼대국수회관(064-759-6644) 고기(삼겹살)국수·멸치국수, 화북1동 강태공(064-755-0198) 활어조림·회, 조천읍 교래리의 도리골 토종닭(064-782-0966) 토종닭 샤브샤브, 제주시 용담3동 토끼와거북이(064-713-4444) 갈치·고등어 요리.

⊙ 여행 문의| 제주공항 관광안내소 (064)742-6052, 제주시 화북동주민센터 (064)728-4682, 제주시청 문화관광과 (064)728-2752, 제주시관광협회 (064)742-8861.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Leave Comments


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