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뚤빼뚤 돌고 돌아 이끼 긴 돌담, 골목길만 4km 마을을 찾아서

군위 한밤마을
팔공산 자락 북향 골짜기 해가 짧아 이름도 한밤
경주 석굴암보다 100여 년  앞선 ‘원조’ 삼존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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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길이만 4㎞라예. 함 걸어 보시이소. 볼 기 차암 많니더.”(한밤마을 사무장 정기욱씨)
 거의 모든 집들이 이끼 낀 돌담을 둘렀다. 구불구불 삐뚤빼뚤, 돌담은 이어지고 끊기며 미로 같은 골목길을 만들어낸다. 돌담 위론 빨갛게 익어가는 산수유 열매, 주황빛 감들, 익어 아무렇게나 떨어져 구르는 샛노란 은행과 은행잎, 바람에 쓸리는 말라붙은 담쟁이 잎들이 다가와 자꾸 걸음을 멈추게 한다. 오랜 세월 쌓이고 또 닳아 온 돌담들이, 한사코 감싸고 있는 건 낡은 한옥 건물들이다.
 

수백년 묵은 아름드리 소나무 150그루가 길 마중
 
늦가을 정취에 흠뻑 젖어 거닐 수 있는 마을로 떠난다. 경북 군위군 부계면 한밤마을(대율리). 돌담길 따라 나뭇잎 밟으며 천천히 발길을 옮기는 동안, 흥미로운 마을 내력과 훈훈한 인정, 짭짤한 볼거리들이 두서없이 마중 나오는 마을이다.
돌담도 길고 밤도 길다. 해발 1193m의 팔공산 북서쪽 자락에 깃든 북향의 골짜기, 당연히 해 드는 시간이 짧다. 한밤이란 지명도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는 데서 나왔다는 얘기가 전한다.
 “그기도(남산리·동산리) 한밤, 여도(대율리) 한밤이라예.”(주민 홍심근씨·62)
한밤은 작게는 아랫마을 대율리(큰한밤)를 가리키지만, 넓게는 산자락의 남산·동산리까지 세 행정리를 아우르는 옛 지명이다. 본디 한밤·한밥·한바미 등으로 불리며 한자로는 대야(大夜)·대식(大食)으로 적었다. 고려가 망했을 때 충절을 지켜 벼슬길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온, 정몽주의 제자 경재 홍로가 밤 율(栗) 자를 쓰는 대율(大栗)로 고쳤다고 전해온다. 그가 평소에 좋아하던 도연명의 시에 나오는 ‘율리’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러나 밤나무보다는 사과나무·산수유·감나무가 지천인 동네다. 과실수만 지천이 아니다.
 “마 성안 송림도 안 있는교. 수백년 소나무가 대대로 내리온 기라예. 엄청난 물난리가 난리를 직여도 고마 끄떡없는 기라.”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반기는 것이 울창한 소나무숲이다. 돌담길을 닮은 구불구불한 아름드리 소나무 150그루가 길 양쪽으로 우거져 있다. 주민들은 성안 솔숲 또는 고간(곡안) 솔숲으로 부른다. 동·서·남 방향이 팔공산 줄기로 성처럼 둘러싸인 길고 우묵한 골짜기 안쪽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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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인 택호 딴 무수한 고택과 재실들엔 세월이 산다
 
소나무숲 한쪽엔 120~200년 된 느티나무 5그루가 우거져 황금빛 낙엽을 흩뿌리고 있다. 느티나무숲과 소나무숲 사잇길이 대율초등학교 진입로다. 등굣길 아이들이 솔바람·낙엽비 맞으며 재잘재잘 걷고 또 달린다. 소나무숲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신녕전투 등에서 대승을 거둔 홍천뢰 장군 추모비가 있다.


한밤마을 돌담길은 남천고택·부림홍씨종택·동천정·경의재·애연당 등 돌담 안에 숨은 무수한 고택과 재실들을 엿보는 문화유산 산책로이기도 하다. 집들은 상매댁·윤이실댁·오천댁·원기댁·성천댁 등 그 집 안주인의 출신지를 딴 택호로 불린다.


한밤마을의 대표적인 고택이 상매댁(남천고택)이다. 250년 전에 지어진 이래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친 부림 홍씨 고택이다. 본디 흥(興) 자 형으로 건물이 배치된 큰 규모의 집이었으나, 지금은 안채·사랑채·사당 등만 남아 있다. 안채 건물은 1836년 지은 것으로, 대청마루 위에 안방과 건넌방에서 계단으로 오르는 다락방이 설치된 독특한 구조다. 사당(불천위 사당) 앞엔 200여년 됐다는 잣나무 두 그루가 우뚝하다. 일부 가지가 부러졌으나 기상은 여전하다. 사랑채에 걸린 현판이 두 잣나무를 뜻하는 ‘쌍백당’이다.


‘상매댁’은 왜관 매원리 상매마을에서 열네살 때 시집온 이귀남(5년 전 아흔넷에 작고) 할머니를 가리킨다. 안채 대청마루 벽에 상매댁이 칠십 살에 지은, 자신의 일생을 그린 창작 가사가 걸려 있다. 몇 구절 읽어보니 구구절절 절절하다.
 “산아 산아 팔공산아/흰 눈 덮인 너에 자취/단아하고 청수하다…열네살 어린 나이/시집이라 왔건만은/두려움이 앞을 서고/서글픔이 뒤섰다네/홀홀단신 나의 동생/우는 손목 뿌리치고/배꽃 피는 한밤 땅에/내 좋아 왔다건가….”
지금은 상매댁 막내아들 홍석규(55)씨 부부가 고택을 지킨다. 홍씨는 “아버지 때까지 9대가 5000석 살림을 했던 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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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 파고 또 파도 맨 돌만 나오는 돌구덕”
 
고택 옆엔 마을의 사랑방이자 어르신들 모임 장소로 쓰이는 대청(도 유형문화재)이 있다. 조선 전기에 처음 지어져 임진왜란 때 소실돼 1632년 중창된 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친 널찍한 단층 정자 건물이다. “옛날엔 기둥에 칸막이를 해 서당으로 쓰고 노인정으로도 쓰고, 양재기술도 가르치고 태권도도 가르치던 마을의 중심 건물”이었다.(한밤마을 운영위원장 홍대일씨·67) 건물 앞면에 ‘대율동중서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잃어버렸던 오래된 현판을 찾아내 탁본하여 새로 제작한 것이다. 문화해설사 류미옥씨는 “원래는 한밤마을 일대가 ‘팔만구암자’가 있었다는 대규모 절터였는데, 대청이 바로 종이 걸렸던 종각이었다고 전해온다”고 했다.


대청은 마을의 중심이어서 돌담길 산책 때 위치 파악에 도움이 된다. 한밤마을 돌담에 쓰인 돌들은 모두 큼직하고 둥근 자연석들이다. 일부는 마을 형성기(고려 말)부터 전해오는 고색창연한 돌담이다. “파고 또 파도 맨 돌만 나오는 돌구덕”에 집 짓고 개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돌담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팔공산 자락 계곡에서 오랜 세월 흘러내려와 쌓인 돌들이다. 1930년 여름 마을을 휩쓴 대홍수는 예부터 한밤마을이 돌밭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마을 어르신들 말씀은 대동소이하다.
 “그게 우예 된 기냐 하모, 경오년 여름 한밤중에 두 시간 동안 으마으마한 비가 쏟아진 기라. 저기 둔덕(남산리) 울로다 팔공산 한쪽 골짜기 전체가 꽝 하고 떨어져나와 고마 마을을 덮쳤다는 기라.”


한밤마을은 팔공산 자락에서 발원한 남천·동산계곡 물길(위천 상류)이 만나는 지점 바로 위쪽에 자리잡고 있다. 그때 산사태와 수해로 돌더미에 휩쓸려 ‘93집이 유실되고, 92명이 죽거나 다치고, 36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수해기념비)고 한다. 참사 이듬해 수해 전말을 기록해 세운 ‘수해기념비’가 대율2리 도로변에 있다.
 

“낮엔 경찰이 찾고 밤엔 뺄겡이가 찾고…”
 
img_05.jpg얼마 뒤엔 하천에 널린 돌들을 이용해, 수해가 컸던 동산계곡 물길 둔치를 따라 길이 1㎞가량의 ‘돌방천(防川)’을 쌓았다. 대율리교회 옆으로 가면, 둔치를 따라 이어진 높이 2m 정도의 사다리꼴(단면) 돌축대를 볼 수 있다. 800m가량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대율리 옛 이야기를 듣기 위해 연세 많은 어르신을 찾으니, 홍심근씨가 “요 아래 돌담다방 옆 쿵더쿵떡방아간에 가 보소. 거기 없으모 이짝 골목 드가 바른짝 움푹 꺼진 집에 있을 기요” 한다. 방앗간 주인의 부친이 고령으로 옛일을 소상히 기억한단다.


얼마 뒤 움푹 꺼진 집 문앞에서 만난 아흔 세살 홍이근 어르신은 놀랄만큼 정정했다. 칡을 캐오는 길인데, 배낭엔 크고작은 톱들과 갓 캐온 칡뿌리들이 가득 들었다.
 “칡이는 저 천방 너메 경부내(냇가) 옆에서 해오는 기요. 물난리? 내 열두살 때, 내 올게 아흔 셋이니 팔십일년 전에 큰 물난리가 났으예. 물난리 서너달 전에 서원(서원마을)서 석굴암(삼존석굴) 위 갖골로 이사가 살았는데, 서원 피해가 컸으요. 한 오십호 됐는데 물가 집이는 고마 싹 쓸려가 뿌린기라. 그래도 거 살다가 육니오 때 뺄겡이 등살에 고마 이리 왔으예. 하이고마 한번 걸리모 양식 돌라카고 같이 가자카고 마 죽을 염을 했다이께네. 여는 쫌 덜하다캐가 이리 와노이, 어데서 내리왔는동 몰래도 여는 더합디더. 낮엔 경찰이 찾고 밤엔 뺄겡이가 찾고, 그래가 맨 산에 돌구멍에 드가 자고 지냈다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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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움큼 더 넣어준 ‘정’, 호두알이 까르르 깨르르
 
한밤마을 여행길에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가 즐비한 문화유산들이다. 대율1리 골목길에 통일신라 때 만든 석불입상(보물)이 있고, 윗마을 남산리 학소대 절벽엔 통일신라시대 초(8세기)에 조성된 석굴사원 삼존석굴(국보 제109호)이 있다. 삼존석굴은 경주 석굴암보다 조성 연대가 100년 가까이 앞선 것이다. 높이 4.25m, 너비 3.8m의 자연석굴 안에 높이 2.9m의 본존불을 포함한 세 석불이 모셔져 있다.


석굴 앞쪽엔 9세기 말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원형은 잃었으나 역시 통일신라시대 유적인 모전석탑이 있다. 계곡 위 가까운 곳에 최근 복원한 양산서원, 경재 홍로의 충절을 기려 세운 정자 척서정도 볼만하다. 양산서원 안엔 17세기에 홍여하가, 세종 때 간행된 ‘고려사’를 간추리고 재구성해 쓴 ‘휘찬려사’의 목판본(19세기초 제작·827장)이 있다.


한밤마을은 부림 홍씨와 영천 최씨 집성촌. 전체 550여집 중 부림 홍씨가 200여집, 영천 최씨가 80여집이다. 대율2리 돌담길을 걷다가 사랑방 아궁이에 군불을 때고 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난 창녕 조씨더. 영천서 열여덟에 왔니더.” 영천 최씨 집으로 시집 온 창녕 조씨 원기댁(78)이다. 마당엔 새빨갛게 산수유를 널었고, 마당가 호두나무에서 땄다는 호두알 자루도 있다.
 “호두 한 열한 접(1접 100개) 따가 아들 좌뿌고, 돈 쫌 쓸라꼬 둬 접 놔뒀디이 고마 이래 사 가네. 호호.” 호두봉지를 들고 돌담길을 돌아나오는데, 할머니가 따라오며 한 움큼 더 넣어준 호두알들이 서로 부딪쳐 걸음 옮길 때마다 까르르 깨르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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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여행쪽지
 
-가는 길| 수도권에서 영동고속도로 원주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 만나 우회전, 대구 방향으로 가다 군위나들목에서 나간다. 5번 국도 타고 효령면소재지로 간 뒤 919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부계면소재지(창평리)로 간다. 여기서 79번 지방도 만나 우회전(한티재·대구 쪽)해 잠시 가면 여덟 팔자 모양의 조형물이 세워진 대율리 입구가 나온다.
-먹을거리| 대율2리 작은영토(간장게장·연잎밥·명태찜) (054)383-9889, 남산리 원두막식당(닭·오리·꿩) (054)383-8227, 군위읍 서부리 들국화(불고기전골) (054)383-5777, 군위읍 동부리 대발이(붕어열탕) (054)383-2112, 대율1리 부곡식당(일반 찌개류) (054)383-3934.
-주변 볼거리| 일연이 ‘삼국유사’를 지은 고로면 화북리 인각사터의 보각국사탑·보각국사비·석불좌상, 화북리 화산산성, 군위읍 상곡리 지보사 삼층석탑, 군위읍 용대리 김수환 추기경 옛집, 산성면 화본리 화본역과 급수탑.
-여행문의| 군위군청 문화관광계 (054)380-6062, 한밤마을 운영위 (054)383-0061.  


이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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