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 년을 거슬러, 다시 2천 년 동안 느릿느릿 길따라 삶따라

경주읍성과 옛도심
돌 한 덩이, 나무 하나, 걸음마다 유적, 문화재…
4천원 짜리 ‘원조 가정식 무한리필 한식 부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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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천년고도 경주. 고려에 합병되기까지 992년간 신라의 왕도였다. 시 안팎에 가득한 신라 유적들로 경주는 곧 신라로 통한다. 하지만 최근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린 조선시대 전통마을 양동마을이 그렇듯이, 경주에 ‘신라’만 있는 건 아니다. 고려시대에 영남지역의 행정중심인 안동도호부가, 조선시대엔 경상좌도 감영이 설치됐던 중요 거점도시였다.
 
신라 유적의 눈부신 광채 뒤에서, 또다른 선인들이 남긴 크고 작은 유적들이 반짝이고 있다. 안간힘을 다해 반짝여도, 찾는 이는 거의 없는 ‘한가한’ 유적들이다. 경주문화원에서 시작해 경주읍성 흔적을 뒤적이며 옛 도심을 한바퀴 돌아 성동시장까지 걷는다.


스웨덴 황태자이자 고고학자인 구스타프 아돌프 6세 발굴 동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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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원 주변은 고려·조선에 걸쳐 경주 관아가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문화원 건물 옆엔 경주 부윤의 살림집인 내아가 있었다. 문화원 경내에서 향토사료관과 읍성 북문 쪽에서 옮겨온 양무당(옛 병영관리소), 향토문화연구소 도서실 건물, 국보 제29호인 성덕대왕신종(봉덕사종·에밀레종)을 걸었던 종각 등 네 채의 옛 건물을 만난다. 건물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 등 석물들은 대부분 신라 때 처음 다듬어진 것들이라고 한다.
 
img_06.jpg오래된 건축물이긴 하나, 문화재 지정이 안돼 건물에 대한 안내문이 없다. 경주문화원 고복우 사무국장은 “문화재로 등록하려 했지만, 헐린 여러 건물들 자재로 지어 원형이 훼손됐고, 용도도 불명확해 등록이 안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종각 건물은 읍성 남문 밖 봉황대 옆에 세워져 성덕대왕 신종을 걸고 있던 규모 있는 건물이다. 1915년 종과 함께 현 위치로 옮긴 뒤 1975년 종은 경주박물관으로 가고 건물만 남았다. 종각 건물로는 가장 오래되고(1700년대 말 추정) 규모가 큰 것이라고 한다. 종은 본디 신라때 절 봉덕사에 있다가 조선초 영묘사를 거쳐 1506년 봉황대로 옮겨졌다.

일제강점기에 향토사료관과 양무당은 경주박물관 전시실이었다. 1926년 일본 방문중이던 스웨덴 황태자이자 고고학자인 구스타프 아돌프 6세가 찾아와 참여해 발굴한 서봉총에서 나온 금관이 박물관 설립 계기가 됐다. 당시 일제는 금관을 총독부로 가져가려 했으나 경주시민들이 반대하고 나서 이곳에 금관고(사료관과 양무당 옆 터)를 짓고 보관하게 됐다. 향토사료관 앞엔 서봉총 발굴 뒤 구스타프 공작이 당시 박물관 앞에 기념식수한 큼직한 전나무가 있다. 오른쪽 또하나의 전나무는 일본인이 심은 것이라고 한다. 경주에서 봄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다는 오래된 산수유나무(300살 추정)도 사료관 앞에 있다.
 

500살 넘은 두 그루의 은행나무에선 만추의 음악제
 
더 오래된 나무는 사료관 뒤뜰에 선, 500살 넘은 두 그루의 은행나무다. 모두 큼직큼직한 은행알들을 무수히 달고 있는 건강한 암나무다. 은행이 얼마나 많이 열리는지, 10여년 전까지는 아예 입찰을 통해 은행을 사가도록 했다고 한다. 고 사무국장은 “10월말 은행잎이 휘날려 노란 카페트처럼 깔릴 무렵, 나무 밑에서 고유제와 함께 멋진 은행나무 음악회가 진행된다”고 소개했다.
 
향토사료관엔 경주읍성 옛 지도와 모형, 옛 경주 거리 사진, 고지도 자료, 비격진천뢰와 총통 등 무기류 모형들이 전시돼 있다. 경주읍성을 소개한 20분짜리 어린이용 영상물도 있다. 경주문화원은 토·일요일엔 문을 닫는다. 화·목요일엔 전담 해설사가 대기한다.
 
문화원을 나와 바로 옆 케이티앤지 안으로 들어간다. 경주관아의 집무실인 동헌이 있던 자리다. 동헌 건물은 노동동 법장사로 옮겨져 대웅전으로 쓰인다. 케이티앤지 왼쪽 담 옆에 발굴(1998년) 때 확인된 관아 건물터와 정자터 등을 다시 묻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경주관아 터 뒷골목에서 태어나고 자란 전직교사 김기조(82)씨는 일제강점기의 읍성 주변 모습 등을 소상히 기억하는 향토사학자다. 김씨는 “경주경찰서 민원실과 등기소 사잇길에 엄청 큰 누각이 있었다”며 “그것이 관아로 드는 문인 월성아문”이라고 말했다. 이 문은 1930년대에 헐렸다.
 
“옛날 월성군청 자리(탑마트) 동남쪽에 누각 목재를 띠가 이레 차곡차곡 쌓아둔 기라. 어릴 때 마이도 올라가 놀았다. 그기 하나하나 사라져가더니 고마 싹 다 읍어져삐릿다.”
 


병원→우체국→공화당사→경찰서→수련원 우여곡절
 

네거리 건너편엔, 일제강점기 경주 첫 서양식 의원이던 옛 야마구치병원 건물(화랑수련원)이 있다. 광복 뒤 우체국이 됐다가, 공화당 당사도 됐다가, 경찰서도 됐다가, 지금은 경찰 수련원 건물로 쓰인다. 경주경찰서 앞으로 간다. 담장 안에 부서진 석탑·탑신·옥개석 등이 즐비하게 널렸다. 깨지고 갈라진 탑과 석물들을 가까이서 들여다봐야 한다. 탑신으로 쓰였을 돌마다 돋을새김된, 잔잔하게 미소짓는 부처상들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길 건너 사회교육원(옛 교육청)으로 들어선다. 이곳 뜰에도 무수한 석조물들이 나뒹굴고 있다. 교육청 건물 뒤로 돌아가면 고색창연한 옛 건물 하나가 기다린다. 동경관. 세 채의 건물이 잇대어 있던 경주관아 객사의 왼쪽 건물(정면에서 볼때)이다. 지붕 한쪽은 팔작지붕, 다른 쪽은 맞배지붕 형식인데서 다른 객사 건물과 잇닿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디 교육청 건물 쪽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1952년 교육청 건물을 지으며 현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이런 유적 푸대접은 객사 건물에 담장을 바짝 붙여 둘러쌓아 건물을 한층 볼썽사납게 만든 데서도 엿볼 수 있다.

갈치요리가 맛있다는 금복식당 지나 읍성 성벽을 보러 간다. 몸체가 잘린 느티나무 고목에선 잔가지들이 돋아나 아우성치고 있다. 그 옆으로, 살아남은 읍성의 동쪽 성곽 일부가 펼쳐진다. 치성 모습이 뚜렷한 약 90m 길이의 성벽이 보이는데, 북쪽 부분은 새로 복원한 모습이다. 성벽 안쪽엔 성곽을 따라 도열해 있었을 거대한 느티나무들이 일부 남아 있다. 성벽 앞 잔디밭엔 주변에서 발굴된 각양각색의 석재들을 모아 놓았다. 성곽 옆 찻길은 성을 둘러싸고 있던 해자를 따라 만든 도로다. 경주시는 읍성의 동·북쪽 성곽과 문루 복원사업을 추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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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때 문무왕이 즉위식을 했던 신라 이궁 터
 
중고 텔레비전 노점을 지나 동문(향일문)이 있던 자리를 가늠해 보고 점집 서너곳과 왕창막걸리 술집을 거쳐 문 닫힌 화교소학교 앞 옛 경주여중 터로 들어선다. 오른쪽 강당 건물 자리가, 조선 태조의 어진을 모셨던 집경전이 있던 곳이다. 수풀 사이로 하마비가 보인다. 집경전 앞에 있던 것이다.

김기조씨는 “하마비 옮겨다닌 종적은 내 다 안다”고 했다. 어릴 때 하마비를 “매일 말처럼 타고 놀았기 때문”이다. “화교학교 문 낸다꼬 옆으로 옮기더니 다시 이리 옮겨놨다. 그기 매일 타고 놀던 내 말이었으니 내 다 알지.” 본관 앞엔 태조 어진을 모셨던(1398년) 석실 앞쪽에, 집경전 옛터임을 알리기 위해 세웠던 ‘집경전구기’(집경전 옛터) 빗돌(정조 친필)이 있다. 학교 자리는 통일신라 때 문무왕이 즉위식을 했던 신라 이궁 터라고 한다. 이를 학생들에게 알리는 안내판이 빗돌 옆에 있다.

학교 옆 운동장은 일제강점기 우시장이 서던 곳이다. 우시장 옆엔 ‘한탕’이라 불리는 커다란 연못이 있었고, 그 둘레엔 아름드리 나무들이 즐비했다. 그 중 살아남은 한 그루를 테니스장 옆 담장 옆에서 볼 수 있다. 500여년 된 거대한 회화나무인데 오래전 일부가 불에 탔다고 한다.

돌아나와 집경전 터 뒷골목으로 간다. 태조 어진을 모셨던 석실을 만난다. 향토사료관에서 보았던 집경전구기도(18세기말)의 석실 그림 그 모습이다. 앞에 있던 비각은 1939년 동네 아이들이 새를 잡기 위해 나무의 구멍에 연기를 불어넣다 불타버렸다고 한다. 일부 주민들은 이곳을 엽전굴로 부르기도 한다. 그래선지 안내판엔 엽전을 주조하던 주전소라고 제목을 적었다. 그러나 김기조씨는 “주전소는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말했다. 야마구치병원에서 환자를 수송할 때 인력거를 부르곤 했는데, 당시 이 석실에 인력거 2대를 보관해 두기도 했다고 한다. 멀리 계림초등학교가 보인다. 구한말 “순종황제의 친위대와 일본군 수비대가 번갈아 찾아와 훈련을 하던 들판”이라고 한다.
 


큰 돈 번 부자도 나오고 장관 지낸 정치인도 나온 골목 


다시 학교 담장을 끼고 걸어 북문 쪽 골목길(봉황로 110번길 22-2)로 들어선다. 술장사로 큰돈을 번 부자도 나오고 장관을 지낸 정치인도 나온 골목이다. 북문에서 관아로 향하는 큰길로, 일제강점기엔 주변에 뽕나무밭이 많았다고 한다. 중부동 제5통 민방위대장 집을 지나 교회 뒷골목에서 왕림탕을 만난다. 목욕탕 주인은 “황남동 등에도 이런 좁은 골목길이 많아 아주 정겨웠는데, 이제 다 철거되고 경주에선 이곳밖에 안 남았다”고 말했다.

북문 터로 나선다. 돼지오케이 식당과 서부방아간 사이가 북문(공진문) 터다. 선정비 등 비석들이 늘어서 있어 ‘비석거리’로도 불렸다. 초록반 어린이집 주변은 옛 양무당이 있던 자리다. 대로를 걸어 한양마트 지나 신라고시원 앞에서 명사마을 우방아파트로 들어간다. 한복집 지나 아파트 102동·103동 사이를 통과하면 길 건너편에 소나무숲 우거진 둥근 소공원이 보인다. 이 일대가 경주감영의 옥사 터다. 김기조씨는 “내 어렸을 때 무너져내린 감옥 담을 드나들며 놀았는데, 부서진 담 위에 누워보니 두께가 당시 내 키를 넘어섰다”고 회상했다.

아파트 정문을 나서 천년한우 식당 옆길로 든다. 안마치료원 지나 멀리 손칼국수집 간판을  향해 걷는다. 오른쪽에서 생뚱맞아보이는 높직한 목조건물 한 채가 나타난다. 일제강점기에 지은 일본식 절 서경사 건물이다. 안에선 구성지게 목청을 돋우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게 아이다. 다시 함 해바라.” 한복을 차려입은 제자의 소리를 바로잡아 주며 스승은 대걸레로 바닥을 청소하는 중이다. “정과정곡 중 ‘평농’의 한 대목입니다.” 경북도 무형문화재 제28호 가곡 예능보유자인 박덕화(기자·70)씨가 청소를 멈추고 알려준다. 제자를 지도하는 중이다. 비어 있던 건물을 전수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현대 조각작품처럼 보이는 멋진 삼랑사지 당간지주
 

img_07.jpg읍성 서쪽 성곽터(동대로)를 건너 삼랑사지 당간지주를 찾아간다. 가는 길에 골목 안 김동리 생가 터(성건한복집)를 들여다 본다. 집터는 세 집으로 분할돼 옛 모습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안내판만 서 있다. 진아슈퍼와 골프연습장을 지나 유적 발굴작업장(조선시대 군영 터) 앞에서 왼쪽 골목으로 들어선다. 널찍한 풀밭이 열리고 현대 조각작품처럼 보이는 멋진 당간지주가 나타난다. 삼랑사는 신라 진평왕 때 절이다.

홍시 식당 뒷문 간판을 보며 골목길을 걷는다. 석류나 대추나무를 키우는 집들이 많다. 중앙시장 네거리로 나선다. 중앙시장은 아랫시장(웃시장은 성동시장)으로 불리는 경주의 양대 재래시장(2·7장)이다. 중앙시장 서쪽은 오래전부터 “미나리도 안되고, 벼를 심어도 안되던 버려진 오물투성이 습지”였다고 한다. 시장권 발달로 주택가로 바뀌었다.

길 건너 옹기전길로 걷는다. 읍성 남쪽 성곽 밖의 해자 자리로 난 길이다. 옹기장수들이 몰려들어 남문 일대까지 판을 벌이던 곳이다. 옹기골포장마차·옹기전손칼국수·옹기골한정식 등 옹기 이름이 들어간 가게는 많으나 옹기가게는 2집만 남아 있다.

경주 옛 사진들을 전시한 문화의 거리를 만난다. 포항물회 식당 앞이 남문(징례문) 자리다. 경주읍성의 4대 문은 모두 일제강점기에 헐려나갔다. 남문·솥전·옹기전·관아 등 경주의 1930년대 사진들을 감상하며 문화의 거리를 따라 걷는다. 일제강점기 본정통으로 불리던 중심거리다.

신라문화원 박주연씨는 “시에서 이 거리를 서울의 인사동길 같은 문화의 거리로 조성하고 있다”며 “봉황대 쪽 노동리·노서리 고분분 공원과 이어져 거닐기 좋은 도심 산책길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길 끝에는 홍살문이 있고, 그 뒤로 봉분에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이 뿌리를 내린 거대한 고분 봉황대가 있다. 봉황대 옆에 성덕대왕 신종이 걸렸던 종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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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째 아구찜 식당, 40년째 할매 막걸리집…, 웬만하면 몇 십년

 
옷가게·카페·식당이 즐비한 골목길을 걷는다. 허름한 진영식당 앞에서 지나가던 어르신이 말했다. “하이고, 즈기 아즉도 있네. 아구찜 마이도 뭇다 아이가. 차암 오래 됐다.” 30년 됐다는 식당으로, 경주시민이면 옛날 한두번 안 가본 이가 없다고 하는 식당이다. 신라쇼핑 옛 성곽터 남동쪽 모서리로 나선다. 오른쪽으로 경주역이 바라다 보인다. 은행·생명보험사 몰린 건물 앞 도로변으로 과일·채소를 파는 노점들이 깔렸다. 성동시장 들머리다.

‘경주 성동시장 남4문, 어서 오십시오’ 간판 밑 골목으로 들어간다. 동글동글한 색색의 간판들이 터널 조명등처럼 내걸린 분식 골목이다. 재미있는 곳이 이른바 시장 뷔페다. 4천원에 밥과 국 그리고 20가지 안팎의 반찬들을 무제한으로 골라 먹을 수 있다(음식 그릇들에 뚜껑이 없는 점이 아쉽다). 성동시장에서 30여년째 이어지고 있는 뷔페식 좌판 식당가로, 14집이 한데 모여 성업중이다. 11년째 하고 있다는 박성자(56)씨와 30년이 넘었다는 이금석(70)씨가 한목소리로 말했다. “이기 바로 정통 원조 가정식 무한리필 한식 부패라. 밥 묵고 나모 요구르트도 준다.” 이씨는 “처음 시작할 땐 밥 한 상에 백원씩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뷔페식당가 옆 골목에 여든셋의 어르신이 40년째 막걸리를 팔아오는 할매집이 있다. 문에 붉은 글씨로 ‘회’라고 써놓았지만, 회는 안하고 막걸리와 잡다한 밑반찬을 안주로 낸다. 슬하에 중3짜리 증손자까지 두셨다는 할머니가 아이스박스 얼음덩이 사이에서 꺼내 따라주시는 막걸리 한 잔을 들이켜며 땀을 식혔다. 7㎞를 걸었다. 시장을 나서면 경주문화원으로 이어지는 읍성 동쪽 성곽길 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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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 여행쪽지
 
⊙ 가는길| 수도권에서 경부고속도로 타고 대구 지나 경주나들목에서 나간다. 서울역에서 경주역까지 하루 6차례 새마을호 열차가 운행된다. 7회째 막차(밤 10시35분)는 무궁화호다. 새마을호 4시간44분, 무궁화 5시간.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경주행 고속버스가 4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경주고속버스터미널 (054)741-4000. 경주역에서 경주문화원까지 걸어서 10분 거리. 문화원 주변 도로변은 유료주차장이다. 1시간 1천원. 평일엔 문화원 안쪽에 차를 댈 수 있다. 문화원은 토·일요일엔 문을 닫아 관람할 수 없다. 화·목요일엔 전담해설사가 대기한다. 
⊙ 먹을곳| 황남동 도솔마을(054-748-9232)의 정식, 서부동 골목집 가마솥손두부·추어탕(054-772-3137)의 순두부, 옹기전길 옹기골한정식(054-773-9085)의 영양돌솥밥, 밀면식당(054-749-8768), 대화만두(054-772-9972).

⊙ 묵을곳| 경주시외버스터미널 뒤쪽에 모텔들이 몰려 있다. 탑동 월암재, 배반동 수오재 등 한옥에서 묵어도 좋다. 3만~8만원, 예약 신라문화원(054-774-1950).

⊙ 여행문의| 경주문화원 (054)743-7182, 신라문화체험장 (054)777-1950, 경주시청 문화관광과 (054)779-6395.

이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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