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느티나무 모든걸 알고 있다 길따라 삶따라

[도심걷기여행] 원주 강원감영과 봉산천
강원감영에서 출발해 원동성당 거쳐 풍물시장까지 6km
 
img_01.jpg

강원도는 강릉·원주를 합친 이름이다. 경상도(경주·상주), 전라도(전주·나주), 충청도(충주·청주)도 그렇다. 조선초(1395년) 행정구역 개편때 강릉도·교주도를 합해 강원도를 만들고, 원주에 감영(도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관청)을 설치했다. 1895년까지 500년간 512명의 도 관찰사가 거쳐간 강원감영의 옛 모습 일부가 원주 일산동에 남아 있다. 감영에서 걷기 시작해 시계 반대방향으로 원주 옛 도심을 한 바퀴 돈다. 볼거리는 다소 뜸하지만 얘깃거리는 많다.
 
강원감영(江原監營) 뒷길 공영주차장(1시간 1100원)에 차를 대고 감영 뒷문으로 들어간다. 무료. 먼저 600여년 풍상을 거친 거대한 느티나무가 맞아준다. 강원감영터의 상징물이다. 여러 전란을 거치며 감영이 불타고 무너지고 새로 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느라, 가지마다 울퉁불퉁 맺힌 것이 많아 보인다.
 
옛날, 아들이 없어 한 맺힌 아낙네들이 이 나무 둘레를 돌며 ‘득남’을 빌고 또 빌었다고 한다. 둘로 갈라진 나무 줄기 한쪽에 큼직하게 돌출된 부분의 생김새가 보면 볼수록 사납다. 초대형 송이버섯 같기도 하고 남성의 그것 같기도 한 모습이다.
 
감영엔 본디 40여채의 관아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2층 누문인 포정문과 중삼문·내삼문, 관찰사 집무실인 선화당, 내아 등이 복원돼 있다. 복원 전까지는 시청 별관으로 쓰였다. 해설사가 상주한다.
 
img_02.jpg

담을 따라 세워놓은 14기의 관찰사 선정비·불망비 무리 앞에서, 제천에서 왔다는 대학생 둘이 감영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에, 그러니까 이 선정비가 왜 파손됐겠습니까? 선정을 펴지 않던 관찰사가 억지로 비를 세우도록 했지만, 그가 퇴임하자마자 주민들이 때려부순 것 아니겠습니까?”
 
정문을 나서면 원일로다. 어르신들은 원일로보다 ‘에이(A) 도로’라 부르는 게 익숙하다. 차가 다니지 않는 ‘문화의 거리’ 중앙로가 비(B)도로, 봉산천(원주천) 쪽 평원로는 시(C)도로다. 해설사 정재구(71)씨는 “원래 여기가 논밭이었는데, 육이오 뒤에 철판을 깔아 군사 작전도로를 냈던 데서 나온 이름”이라며 “옛날부터 있던 길은 중앙로”라고 설명했다.
 
 
img_03.jpg

 
시인묵객들이 자주 올랐다는 추월대

 
포정문을 앞에서 보고 원주문화원 쪽으로 걷는다. 남산 자락이다. 문화원 사무실을 찾으면 원주 역사·문화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사무실 복도엔 원주 일대에서 나온 자기류와 와편 등이 전시돼 있다. 문화원 앞 명일수퍼와 칠성전 사이 골목으로 오르면 곧 추월대(秋月臺)에 이른다.
 
치악산에서 떠오르는 달이 아름다워, 시인묵객들이 자주 올라 잔질하며 읊조렸다는 곳이다. 지금은 안내판도 없이 ‘추월대’라 쓴 기념비 모양의 돌탑만 어색하게 서 있다. 빗돌 뒷면에 인조때 강원도 관찰사 이민구가 읊은 시 ‘추월대에 올라’를 새겨놓았다. 낮은 야산인데도 좌우 전망은 빼어나다. 원주 옛도심과 봉산천 건너 아담한 봉산뫼가 한눈에 보이고, 동쪽 멀리엔 치악산 줄기가 짙푸른 자태를 자랑하며 뻗어 있다.
 
img_04.jpg

‘배수지길’ 골목을 내려와 원동성당을 만난다. 근대문화유산에 등록된 건물이다. 천주교 원주교구 주교좌이자, 7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인권운동의 본산이다. 원주교구장을 지낸 인권운동가 고 지학순 주교의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열망’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성당은 1954년 재건된 석조건물이다.
 
원일로를 걸어 남부종합시장(치악맨션)으로 간다. 70년대에 지어진 7층짜리 상가·아파트 복합건물인데, 건축 당시엔 원주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고 한다. 남부시장 사거리 주변은 비석거리로 불렸다. 옛 남문이 있던 곳으로, 길가에 선정비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옛 원주 감영으로 드는 4개의 문이 동서남북에 있었다. 그러나 성곽이 있었던 건 아니다. 원주문화원 윤병진 사무국장은 “원주를 둘러싼 주변 산에 전투에 유리한 산성이 많아, 읍성 축성의 필요성이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50년 넘게 대를 이어 보신탕을 내온 진주식당을 지나 남원로를 걷는다. 옛 연탄공장 자리(꽃집), 옛 성냥공장 자리(연세병원) 지나 향교 쪽으로 걷는다. 연세병원 자리가 애초 향교를 지으려던 터였다는 얘기가 있다. 해설가 정재구씨가 해설했다.
 
“병원 자리에서 목수들이 향교 건축에 쓸 목재를 다듬는데, 어느날 와보니 쌓여 있던 톱밥·대팻밥이 깨끗이 사라진 거야. 찾아보니 지금의 향교 자리에 그게 쌓여 있는 거라. 톱밥을 헤치니까 봉황새 세 마리가 나와 날아가더래. 그래, 아 여기가 향교 지을 터로구나 했다는 거지.”
 
img_06.jpg

향교 대성전엔 국내 18인과 중국 5인의 위패를 모셨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명륜당에선 고전 강의가 한창이다. <맹자> ‘고자(告子)편’ 강의를 듣는 주부·어르신들 얼굴이 사뭇 진지하다. 동양고전강의·서예교실·선비학당 등이 월·목요일에 운영된다.
 
향교 들머리에 홍살문과 하마비가 있으나 최근 만들어 세운 것이다. 향교 주변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수용소 자리였다. 향교를 나와 세차장 앞 미용실 옆 골목길로 들어가 50여년 두부를 만들어 팔았다는 가정집 두부공장을 지나 다시 남원로로 나선다. 아파트 신축공사 현장 왼쪽 언덕길을 넘어가면 다시 원일로다.
 
공사장 일대 산동네 이름이 궁만이(구만이·굼안이)다. 물이 굽이쳐 흐르며 활처럼 휜 지형을 이뤘다해서, 또는 우묵한 구멍이 파여 붙은 이름이다.
 
“궁만이엔 육이오때 인민군 공동묘지가 있었습니다. 원주고와 덕산아파트 일대가 당시 미군 야전병원 자린데, 성매매 여성들이 미군을 상대했던 곳이 무덤 주변입니다. 그것을 계기로 사람들 발길이 잦아지며 궁만이에 집들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어요.”(정재구씨)
 
원일로 가로공원의 인열왕후탄생지비를 만난다. 인열왕후는 조선 인조의 왕비(원주목사 한준겸의 딸)다. 본디 인동 원주교(쌍다리) 쪽에 비석과 비각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모두 사라져 이곳에 다시 세운 것이다.
 
img_05.jpg

아파트 공사장 옆골목으로 들면 일명 ‘도깨비 비’로 불리는 ‘김후선정지비’를 만난다. 본디 골목 오른쪽 담벽 부근(옛 구만이마을 입구)에 있었으나, 지금은 임시로 공사장사무실 옆으로 옮겨놓았다. 때를 잘못 만나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처지가 된 이 비석에 도깨비 관련 이야기가 전해온다. 구만이에 살던 정기원이란 이가 병사 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 담긴 이야기다.
 
“정기원이 어릴적 밤에 글을 읽다가 산책을 나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장승같은 이가 나타나 ‘병사님 향차하십니까?’ 하고 인사했다고 한다. 그뒤 금강산에 들어가 1년간 무술을 연마하고 돌아왔는데 그때도 장승이 나타나 ‘정 병사님 이제 오십니까?’ 하더란다. 그래 ‘너는 누구냐’고 물으니 ‘김공이올시다’ 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뒤 정기원은 제주목사가 됐고, 마침내 실제로 병사 직위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뒤에 정기원이 김 도깨비의 예언을 되새기고 ‘김후선정지비’를 세웠다.” 선정비는 아파트 공사가 끝나면 단지 안으로 다시 옮겨 세워질 예정이다.
 
원일로 길 건너엔 40여년째 추어탕을 해온 원주복추어탕집이 있다. 추어탕으로 점심을 먹고, 다시 남부시장사거리 거쳐 멀리 봉산뫼를 바라보며 개봉교를 건넌다. 개봉교란 개운동과 물 건너 봉산동에서 따온 이름이다. 개봉교 개운동쪽 주변은 작은 두 물길이 합쳐져 봉산천으로 흘러들던 곳이다. 물길도 물가에 있었다는 물레방아도 사라지고 복개천 위로는 차량이 질주한다.
 
여주상회 옆에 봉산동 당간지주가 있다. 절에서 깃대를 세우는 데 쓰던 기둥돌이다. 자연석을 받침돌로 써서 지주를 세운 점이 특이하다. 고려시대 초기 것으로 추정된다. 지주 한쪽은 새로 만들어 세운 것인데, 남은 한쪽도 육이오 때 세 토막으로 부러져 복원한 것이다. 원주초등학교 쪽으로 걷는다.
 
원주초등학교는 100년 역사를 지닌 학교. 해설사 정씨는 “이 학교 주변이 임윤지당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라고 말했다. 임윤지당(1721~1793)이 누군가? 영·정조대의 빼어난 여성 성리학자다. 어릴적부터 오빠를 통해 각종 유교경전과 역사서적을 섭렵한 이후, 남편과 일찍 사별하면서 홀로 학문에 매진해 수많은 성리학 논설과 서평·인물평을 남겼다. <윤지당유고>가 전한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34년산 은행건물
 
각종 옻칠공예품과 옻 진액 등을 전시·판매하는 원주옻문화센터를 들여다보고 봉산천 쌍다리(원주교)로 간다. 왼쪽에 인도교로 쓰는 작은 다리가 일제강점기에 놓은 것이고 오른쪽 차량전용 다리는 육이오 뒤에 놓은 다리다. 다리 주변은 배말이라 불리는 곳인데, 일제강점기엔 이곳까지 인천에서 온 소금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봉산천 물길은 한가로워 보이지만, 왜가리·백로들은 바짝 긴장한 모습이다. 몇분이고 부동자세로 서서 물고기를 노리고 있다. 다리 건너 오른쪽 둔치 주차장은 새벽 농산물시장이다. 매일 오전 4~8시 반짝시장이 열린다.
 
원주교오거리는 감영으로 드는 동문이 있던 곳이다. 오거리 남서쪽 모퉁이엔 인열왕후탄생지비와 비각이 있었다. 행정지명이 인동인데, 동문거리·비각동으로도 불리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img_07.jpg

풍물시장이 마침 장날(2·7일)을 맞았다. 시장 안 골목마다 인파로 넘친다. 없는 게 없어 보이는, 길고 긴 시장골목을 빠져나가 평원로(C도로)를 건넌다. 평원로는 옛날 진골목으로 불렸다. 우마차를 타지 않으면 다닐 수 없었던 진흙탕길이었다.

‘문화의 거리’ 중앙로는 젊은이들이 활보하는 널찍한 보행 공간. 이곳에 일제강점기 자본 수탈의 전초기지였던 조선식산은행 원주지점 건물(현 제일은행)이 있다. 1934년 지은 원주 최초의 은행건물(2층)로,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원일로로 나서 금강제화 앞으로 길 건너 감영 옆 우체국 골목으로 들어간다.
 
우체국 자리는 본디 강원감영의 연못이었다. 안에 축대를 쌓아 섬을 만들 정도로 널찍한 사각형 못이었다. 1830년 무렵 강원도 각 읍지를 총괄해 펴낸 <관동지>에 실린 강원감영도를 보면 사각형 못 안에 2개의 정자가 표시돼 있다. 봉래각·관풍각·환선정 등 세 정자가 못 안팎에 있었다고 한다. 원주시는 곧 우체국을 이전하고 못과 정자들을 복원할 예정이다.
 
다시 감영으로 돌아와 느티나무 그늘에 앉으니, 짐작이 간다. 이 600년 거목은 옛 못가에 그늘을 드리우고 서 있었을 수십 그루의 나무 중 하나였을 것이다. 시에서 펴낸 소책자 ‘원주의 향토유적’ 표지에 실린 흑백사진(1910년 촬영 추정)에서 감영의 선화당 뒤로, 못을 둘러싸고 울창하게 우거진 숲을 볼 수 있다. 6㎞쯤 걸었다.
 


원주/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img_08.jpg
 
<원주 여행쪽지>
  
⊙ 가는 길| 수도권에서 영동고속도로 타고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남원주에서 나가 19번 국도 따라 시내로 들어가 일산동 강원감영으로 간다. 감영 뒷길에 공영주차장이 있다. 1시간 1100원. 감영 입장료는 없다.

⊙ 먹을 곳| 원주복추어탕(추어탕) (033)762-7989, 뽕순이밥(뽕잎돌솥밥) (033)747-9666, 진주식당(보신탕) (033)764-5498, 장수칼국수(장칼국수) (033)746-9179. 단계동 쪽에 모텔이 많다.
 
⊙ 여행문의| 원주시청 문화관광과 (033)737-2832, 원주문화원 (033)764-3794, 강원감영 (033)737-4767.

글 이병학 기자
 

Leave Comments


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