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포 떼고 희미하게 남은 흔적 따라 타박타박 길따라 삶따라

강릉 도심걷기
문 연 지 54년 된 청탑다방의 강릉 정치 1번지
요정에서 니나노골목 거친 술꾼 천국이 꾀죄죄

 
 

img_01.jpg

 
강릉은 강원 동해안의 중심도시. 산(대관령·소금강)과 바다(경포해변·경포호·주문진·정동진) 경치가 두루 아름답고, 큰 인물들(신사임당·이율곡·허균·허난설헌)의 발자취도 널린 고장이다. 차·포 떼고 강릉 옛 도심에 희미하게 남은, 소소한(?) 볼거리와 이야깃거리를 찾아 걷는다. 이땅의 대부분의 도시가 그렇듯이, 강릉 중심부에도 일제강점기 흔적이 덕지덕지하다.

 
삼국시대에는 하슬라, 고려말 이후에는 임영
 
강릉 관아 객사문(임영관삼문·국보 51호)에서 시작한다. 케이티와 한국방송 쪽으로 오르는 길 옆이다. 고려 태조 때(936년) 처음 세웠다는 객사를 비롯한 관아 터는, 길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나뉘어 있다. 일제 때 관아를 횡단하는 도로를 냈기 때문이다. 관아 건물들은 일제 때 대부분 헐려나가 객사문과 동헌인 칠사당만 남았다. 객사 임영관은 1929년 강릉보통학교 운동장 확장공사를 하며 헐었다고 한다.

 
객사 문은 고려말 건립된, 강원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자, 도내 건축물로선 유일한 국보 문화재다. 일부 배흘림 기둥과 대들보 등은 낡고 닳은 옛것 그대로다. 객사삼문외에 중대청과 임금께 망궐례를 올리던 전대청, 순찰사 등 관료들이 머물던 동대청·서헌 등은 최근 지은 것이다.

임영관 현판 글씨는 고려 공민왕이 낙산사 행차 때 쓴 것이란 이야기도 전해온다. ‘임영’은 강릉의 별칭이다. 강릉시 문화유산해설사 심명숙씨가 말했다. “삼국시대엔 강릉을 ‘하슬라’라 불렀어요. 고려말 이후 ‘임영’이란 별칭이 쓰였죠.” 객사 오른쪽 앞엔, 임진왜란 직후 경주에 있던 조선 태조의 영정을 옮겨와 봉안했던 집경전이 있었다. 담 옆에 집경전 터 표석이 있다. 객사 서헌에 문화유산해설사들이 상주한다. 신청하면 상세한 해설을 해준다(9시30분~17시).

 
일제강점기 말 사육장이었다는 우체국을 지나 관아 정문으로 들어가 옛 강릉시청 터 옆 칠사당을 만난다. 옛 강릉부사가 집무하던 동헌 이다. 호구·농사·병무 등 일곱 가지 정사를 베푸는 곳이라 해서 칠사당이다. 1870년 화재 뒤 새로 지은 건물인데, 누마루와 처마에 세운 기둥들은 높은 초석으로 받쳐놓았다. 일제강점기엔 일본 수비대가 썼고, 광복 뒤엔 미군 관사를 거쳐 1958년까지 군수·시장의 관사로 사용됐다고 한다. 요즘은 강릉단오제 한달 전(음력 4월5일) 단오제 때 사용될 신주를 빚는 장소로 쓰인다.

칠사당 마당엔 500년 넘었다는 은행나무가 서 있고, 뒤쪽 한국방송 비탈엔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언덕 위쪽에 본디 조선시대 사직단이 있었으나, 일제는 이곳에 신사를 세웠다고 한다. 객사문 네거리 한국은행 쪽엔 포도청 무기창고인 군기고가 있었고, 길건너 농협 부근엔 관아의 하나인 군기청·작청이 있었다고 한다.
 

 
img_02.jpg

일제 때 집 그대로, 18년째 손칼국수

 
제일은행 앞 길건너편 골목엔 동명극장과 함께 이름을 날렸던 강릉극장이 있었다. 제일은행 옆골목으로 들어가, 문연 지 54년 됐다는 청탑다방을 만난다. 낡은 문짝 열고 들어서니 차 마시고 담소하는 어르신들이 가득하다. 함경도에서 피난온 전직 경찰 고 이동일씨가 50년대 후반 개업했다는 다방이다. 건물도 간판도 내부장식도 거의 옛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61년부터 이 다방 단골이라는 엄성만(87) 어르신이 말했다. “이 다방은 옛날부터 나이 든 분들이 오고가며 들러 쉬고 가던 노인 사랑방이에요. 선거 때마다 후보들이 들르는 필수 코스가 돼 ‘강릉 정치1번지’로도 부르죠. 나 젊었을 땐 난로가 있는 이 안쪽 자리엔 감히 앉지도 못했어요. 어르신들 차지였지.”

 
17년전 다방을 인수했다는 전영자씨는 “하루 두세번은 기본이고, 서너번씩 들르시는 어르신도 많다”고 말했다. 전씨는 어르신들에게 아침이면 싸래기죽과 달걀을 무료 서비스하고 수시로 호박죽·군고구마 등도 대접한다. 커피 한 잔에 어르신은 1000원, 젊은이는 2000원이다. “1000원 받지만 어르신들은 커피 주문할 때마다 한 잔 더 시켜서 저도 마시도록 하니 결국 2000원에 드시는 셈이죠.”(전영자씨)

선거유세도 하고 시위도 하는 장소라는 ‘택시 차부 광장’을 건너다보며, 낡아가고 쇠퇴해가는 가구점거리로 들어간다. 강릉읍성 남문이 있었던 곳으로 행정지명이 남문동이다. 옛 건물을 단장해 농·책상·액자 등을 파는 가구점들이 길 양쪽으로 이어진다. 강릉읍성은 고려말~조선초에 축성된 이래 1800년대 말까지 남아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40년째 손칼국수를 만들어온 용비집을 지나, 골목 안에서 30년 동안 액자를 만들어 왔다는 낡은 목공소(일제 때 도정공장 건물)를 보고 18년째 손칼국수를 낸다는 남문칼국수집을 만난다. 겹처마를 댄 2층집 남문칼국수집은 일제 때 지어진 집 그대로라고 한다. “여는 다 장칼국수래요. 직접 담근 고추장을 풀어 얼큰해요. 당연히 면도 직접 하죠. 손으로 반죽해 국수 밀어 온 지가 몇년인데.”(남문칼국수집 주인)
 

img_07.jpg
 
img_03.jpg

 
강릉 1번지였던 곶감거리는 이젠 달랑 두 집만
 

골목을 나서 대로를 건너면 강릉의료원이다. 옛 강원도립병원 자리로, 1919년 4월4일 농민들이 남대천 보 공사를 위해 모였다가,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던 장소다. 길 옆에 이를 알리는 표석이 있다. 병원 장례식장 쪽 민가 옆 우묵한 곳에 수백년 묵었음직한 은행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남대천 둑길로 올라서 남산교 쪽으로 걷는다. 물길 건너편에 솟은 아담한 산이 남산이다. 관아 남쪽에 자리잡아 남산인데, 지금은 건물들에 가려졌지만 옛날엔 칠사당 마루에 앉으면 남산이 훤히 바라다보였다고 한다. “옛날 임영관 대청에선 저 건너 큰바다도 내다 보였다고 해요.”(심명숙씨) 4월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는 남산 꼭대기엔 1927년 지은 정자 오성정이 있다. 일제가 객사를 해체할 당시 정묘생 계원들이 목재와 기와 일부를 사들여 건립한 정자라고 한다. 남산 밑 남대천 둔치는 단오제(6월) 때 주행사장이 된다.

남산교 북단 굴다리를 지나 옛 동명극장(현 동명골프연습장) 골목으로 든다. 일제 이후 고급 요정골목에서 이른바 ‘니나노 골목’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술꾼들이 돈을 쏟아붓던 거리라고 한다. 영세한 술집들이 남은 낡은 건물과 고궁·한성관(옛 기원)·옛날집 등 한정식 식당들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애초 한약방 건물이었을, ‘중화당 대약포’란 글씨가 돋을새김된 2층 건물(옛날집)을 보고, 저팔계콧구멍·방앗간곱창구이 등 돼지고기 구이집들 지나 곶감골목으로 나온다. 80년대 초반까지 삼베와 곶감을 함께 다루는 상점들이 밀집해 있던, 120년 역사를 지닌 ‘곶감전’이다.
부친에 이어 60년째 가업으로 곶감·삼베 가게를 해온다는 선일상회 변성구(44)씨가 말했다. “장날이면 곶감 ‘미수꾸리’ 일꾼(곶감 담는 가마니 짜는 사람)만 40~50명이 몰려들어 먹고 살던 데예요. 여기가.” 곶감거리 일대는 80년대 초까지 ‘강릉 1번지’로 불리던 중심상가였다. 술집골목·국밥집골목이 들끓고, 나무전·싸전·옹기전도 성시를 이뤘었다고 한다. 지금은 선일상회 등 두 집만 남아 강릉 곶감거리의 명맥을 이어간다.

“우리 곶감은 때깔이 아주 좋아보이지는 않죠. 허연 당분 가루가 다 묻어 있어요. 이게 바로 자연건조시키기 때문에 나오는 겁니다. 딴데 때깔 좋은 유명한 곶감들은 거나 유황, 연탄불, 고추말리는 기계 같은 걸 써서 급속 건조시키는 거라구 보면 돼요.”(변성구씨)
 

 
img_06.jpg

곰치·도치처럼 ‘못생겨도 맛은 좋은’ 삼수기
 
손반죽을 치고 늘여서 면을 뽑아내는 모습이 들여다보이는 하슬라수타면 지나 성남시장·중앙시장 골목으로 들어선다. 건어물·생선·잡곡·의류·채소가게들이 뒤섞인 골목이다. 중앙시장 상가건물 2층으로 오른다. 40년 된 해성횟집 등 얼큰한 ‘삼숙이매운탕’으로 잘 알려진 식당이 두어곳 있다. 삼수기·삼식이로도 불리는 삼숙이(본명 삼세기)는 곰치·도치처럼 ‘못생겨도 맛은 좋은’ 바닷고기의 하나다. 삼수기탕 8000원. “알탕도 해요. 삼수기는 여기 동해안 산이고 명란은 수입산 써요.”

 
상가건물 반대편 출구로 내려가, 길 건너고 철교 밑 지나 거대한 은행나무를 만난다. 한 사냥꾼이 호랑이를 살려줬더니 은행알을 물어다줘 땅에 심자 자라났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나무(수컷)다. 수령이 1000년이라지만, 과장된 느낌이다. 은행나무 뒤쪽에 보진당이 있다. 조선 중기에 처음 짓고 고종 때(1867년) 불타 다시 지은, 별당식 건물이다. 안동 권씨 문중 자제들이 공부하던 곳이라고 한다.

다시 철길 건너와 비좁고 어둡고 정겨운 먹자골목으로 들어선다. 메밀부침·전병·감자전·올챙이국수·감자옹심이칼국수 등을 파는 가게들이 줄을 잇는다. 장 보러온 아주머니들, 친구 만난 어르신들이 앉고 서서 메밀전 찢고 막걸리잔을 기울인다. 먹자골목 터널을 빠져나오면 번화한 거리가 시작된다. 신영극장 앞을 지난다. 유동인구가 많아 텔레비전 방송 날씨 보도 때 단골 배경화면으로 등장하는 장소이자, 변두리로 가는 노선버스 대부분이 거친다는 중심 거리다.

 
옷집·빵집·액세서리집·공짜폰 가게들이 즐비한 ‘대학로’로 들어선다. 대학교 앞이 아니라, 대학생 등 젊은이들이 많이 몰린다 해서 대학로다. 네거리 길바닥엔 ‘솔향 강릉’ 글씨를 새긴 철판을 깔았다. 그러고 보니 강릉은 경포호 주변에도 바닷가에도 소금강에도 대관령에도 아름답고 멋진 소나무숲이 무수히 깔린 고장이다. 다시 큰길 건너 중앙동주민센터 앞길을 걷는다. 토요일 오후엔 차량통행이 금지돼, 다양한 행사들이 벌어지는 ‘문화의 거리’다.
 

강릉 시내 유일한 초가 오규환 가옥엔 붉은 꽃망울들
 

img_04.jpg

 
커피 맛 좋다는 테라로사 커피숍 거쳐, 침 잘 놓는다는 한의원 지나 우회전해 ‘오규환 가옥’을 보러 간다. 정면 3칸, 옆면 2칸의, 강릉시내에서 유일한 초가라고 한다. 네 기둥을 안쪽으로 기울게 세운 것이 특징(오금집)이다. 조선 후기 건물이라는데, 새단장한 모습에다 안팎에 온갖 살림살이들이 쌓여 있어 옛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마당의 명자나무는 찬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지마다 붉은 꽃망울들을 내밀었다.

 
임당동 길을 걸어가다 왼쪽 골목(복개천) 안에서 낡은 한옥(벌집칼국수)과 20여년 전까지 강릉에서 명성을 날리던 옛 명주병원 건물을 보고 나와 네거리로 간다. 출발점이었던 객사를 둘러싼 돌담이 내려다 보인다. 네거리 모퉁이에서 화사한 모습의 성당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1955년 지은 고딕 양식의 임당동 성당(등록문화재)이다. 웅장한 맛은 없으나 세련되고 화사한 멋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성당 동쪽 경계지역은 옛 강릉읍성의 동쪽 성벽이 지나는 자리라고 한다.

 
img_05.jpg

 
성당 네거리 건너편 용강동 일대는 일제 때 일본인 600가구가 모여 살며 상권을 형성했던 곳이다. 객사 뒤 선관위 옆골목 안에서 일본식 가옥 흔적이 남은 집들을 볼 수 있다. 1963년 지은 건물에서 45년 동안 한의원을 열어왔다는 동원한의원 지나 한국은행 네거리(객사문 네거리·우체국 네거리)로 간다. 한국은행 자리는 조선말 포도청의 병기와 군수품을 보관하던 창고인 군기고가 있던 곳이다. 길 모퉁이에 이를 알리는 표석이 있다. 여기까지 5㎞쯤 걸었다.
  
강릉=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 여행쪽지
 
⊙ 가는 길| 수도권에서 영동고속도로 타고 강릉나들목에서 나가 경강로 따라 시내로 들어간다. 객사문네거리(한국은행 네거리)에서 좌회전해 다시 좌회전하면 임영관 객사문 앞이다. 객사문 앞길에 차를 세우지 못할 경우엔 한국은행 뒷골목 무료주차장을 이용한다.
⊙ 먹을 곳| 해성횟집(삼숙이탕·알탕) (033)648-4313, 용비집(손칼국수) (033)646-2020, 남문칼국수(손칼국수·감자옹심이·감자송편) (033)643-2118, 한성관(한정식) (033)641-6121, 뚱보냉면(평양냉면·함흥냉면) (033)647-5525, 선일상회(자연건조 곶감 전문) (033)648-8520.
⊙ 경포호수 자전거 투어| 경포호수 주변 오죽헌-선교장-허난설헌 생가와 솔밭 일대를 자전거로 둘러볼 만하다. 경포해변 들머리 진안상가 앞, 경포호수 습지공원에서 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
⊙ 여행문의| 강릉시청 관광과 (033)640-5125.  
이병학 기자

Leave Comments


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