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따라 쉬엄쉬엄, 온 산에 1500년 전 ‘미소’ 길따라 삶따라

봄 향기 흥건한 경주 남산 트레킹
모든 바위가 부처 처럼, 모든 부처가 바위 처럼
확인된 절집만 150여곳, 드러난 불상만 130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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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은 옛 도심 남쪽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불국사가 깃든 토함산 서쪽, 신라 화랑들 수련 장소였던 단석산의 동쪽이다. 신라의 모든 것이 아로새겨졌다는 바위투성이 산이다. 신라 건국설화가 전하는 우물 나정과, 신라가 견훤의 습격으로 종말을 고한 포석정이 남산 자락에 있다.

 
신라의 얼굴이 부처 형상으로 똬리 틀고 있는 남산 숲길을 걷는 동안 1500년 전 신라인들의 들숨 날숨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발걸음 옮길 때마다 머리 들면, 절벽에서 골짜기에서 귀퉁이에서 모퉁이에서, 앉고 서고 쓰러진 불상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산 전체가 거대한 절집이자 박물관
 

봄빛 머금은 남산 한 자락을 걸으며 신라인의 생각 한 조각을 엿보고 왔다. 삼불사에서 출발해 삼릉골로 올라 용장골로 내려오는, 경주 시민들이 애용하는 산책 코스다. 20기 가까운 불상들과 아름다운 탑들이 낡고 닳은 얼굴로 반겨준다. 쉬엄쉬엄 4시간30분 소요.

 
삼릉골 코스 출발점은 흔히 경주시 배동(배리) 삼불사에서 시작한다. 삼불사 뒤에서 ‘배리 삼존불’을 만난다. 중앙 여래상이, 양쪽에 보살상이 함께 선 석불입상이다. 주변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23년 모아 세웠다고 한다. 7세기 작품으로 여겨지는데, 가운데 여래불 미소가 은은하다고 한다. 전체 조각 솜씨는 왼쪽 보살상이 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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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각은 1988년 지었는데 빛을 막아 여래불 미소가 사라졌다며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다. 해설사가 보여준 사진에선 또렷이 드러나는 여래불의 미소 띤 표정을 찾으려, 그늘 속 여래불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미소가 느껴지지 않는다. 해설사는 “보호각이 필요하긴 하나 천장을 대폭 높여야 미소가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삼존불에서 이름이 나온 삼불사 마당엔 3개의 탑에서 나온 석재들을 모아 세운 5층석탑이 있다.

 
남산은 남쪽의 금오산(468m)과 북쪽 고위산(494m), 두 큰 봉우리로 이뤄진 산이다. 동서 4㎞, 남북 8㎞ 정도의 산세지만, 이 아담한 산에 솟은 무수한 바위벽과 40여 골짜기에 신라의 유적 670여점이 덮여 있다. 확인된 절집만 150여곳, 드러난 불상만 130여기에 이른다고 한다. 100여기의 석탑, 20여기의 석등도 흩어져 있다. 산 전체가 거대한 절집이자 박물관인 셈이다. 이 보물 덩어리 산은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연못 한가운데 세운 3층석탑이 이채로운 망월사를 들여다보고 무덤 무리를 지나 삼릉으로 간다. 삼릉은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능이다. 가운데 신덕왕릉을 발굴했는데, 이미 도굴돼 소줏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고 한다. 삼릉을 찾게 만드는 건 오히려 주변의 아름다운 솔숲이다. 구불구불 자라 오른 소나무들 사이로 솔향 머금은 잔잔한 바람이 드나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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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잘 생겼다는 석불좌상엔 색즉시공이
  

삼릉골 석조여래좌상 만나러 오르는 길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마애불 조각들과 탑재 등을 모아놓았다. 바위 위에 올라앉은, 머리·손발이 잘린 ‘석조여래좌상’도 골짜기에 쓰러져 있던 것을 발견해 옮겨 세운 것이라고 한다. 머리는 없어도, 옷자락과 매듭 무늬가 새겨진 가슴이 매우 아름다워 불상이 돋보인다.

 
왼쪽 산비탈의 마애관음보살상을 보고 내려와 다시 골짜기를 타고 올라 거대한 바위 두 곳에 새겨진 ‘선각 육존불’ 앞에 선다. 돌을 쪼아 선만으로 표현한 마애불상이다. 해설사는 “오른쪽 두 분만 발밑에 대좌를 그렸고, 왼쪽 분은 대좌가 없죠? 이 앞 바위를 훼손하지 않으려 대좌를 새기지 않은 것입니다.”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한 신라인의 태도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뒤쪽 마애불 바위 위엔 빗물받이 홈을 판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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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이든 석조불이든, 불상 앞엔 어김없이 거의 무덤 흔적이 있다. 명당이라 여겨 후대인들이 무덤을 쓴 것인데, 탐방객들의 발길에 닳아 봉분은 모습조차 없고 평지가 돼버렸다. 마애불 위쪽으로 10여분 오르면 또다른 선각여래좌상이 나온다. 선각과 돋을새김 형식이 섞인 모습인데, 남산에서 가장 후대 형식(고려 초)의 불상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내려와 남산에서 얼굴이 가장 잘생겼다는 ‘석불좌상’을 만난다. 살펴보면서 불상이 본디 허상이요, 만물이 공허하다는 걸 눈치채게 된다. 잘생겼다는 얼굴 반쪽과 뒤의 광배 일부는 최근 다시 만들어 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광배의 불꽃장식이 돋보인다.

 
삼릉계곡 건너 생강나무 꽃망울 터져나오는 산길을 오른다. 삼릉골은 냉골로도 불린다. 찬 기운이 쏟아져나와 꽃도 늦게 핀다고 한다. 가파른 바윗길을 20분쯤 오르면 상선암에 이른다. 요사채 옆 쓰러진 마애불 바위 지나면 언덕 위 절벽에 새겨진 거대한 마애불이 나타난다. 높이 7m로, 남산의 앉은 모습 마애불 중 최대 크기라는 ‘상선암 마애불’이다. 얼굴은 또렷한 돋을새김이지만, 몸과 옷장식은 선각으로 처리했다. 턱밑 주름이 있을 정도로 살진 얼굴인데, 눈이나 입가엔 고뇌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해설사는 긍정적이다. “고개를 숙이면 어떻게 됩니까. 턱에 주름이 생긴다 아닙니까, 그죠? 이래 내리다보면서 ‘그래 내가 네 기도를 다 들어주꾸마’ 하는 표정 아닙니까, 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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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 돌며 불경을 외면, 불상도 빙그르
  

10분 더 오르면 능선길, 왼쪽 언덕 전망대인 바둑바위에 서면 서천 물길과 물 건너 태종무열왕릉이 있는 선도산 자락, 시내 일부와 여자산·망산이 내려다보인다. 바둑바위 반대편 절벽엔 옛 암자 금송정 터가 있다. 상선암 마애불이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전망바위 지나, 득남을 기원하던 산신당과 산신바위를 보고 완만한 능선길을 걷는다. 금오산 정상 부근은 산행객들이 모여 앉아 점심도 먹고 쉬는 장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교도소 인력을 동원해 닦았다는 널찍한 흙길을 걸어 통일전 쪽으로 향한다.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용장사 터로 내려간다. 일부 석탑재 흔적이 보이는 바위전망대에서 바라보면 건너편 길 위 산자락의 거대한 바위 위에 올라앉은 작은 바위가 보인다. 거기 커다란 불상이 놓였던 흔적인 연꽃무늬 좌대가 있다고 한다.

 
아득한 경주 들판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용장사곡 삼층석탑을 만난다. 남산을 기단석 삼아 세웠다는 통일신라시대 탑이다. 실제로 아래 기단석 없이 바위 위에 탑을 세운 모습이다. 용장사 터는 탑 아래쪽에 있다. 밧줄 타고 밑으로 내려가면 바위절벽에 새겨진 섬세한 마애불 앞으로, 삼륜대좌 용장사곡 석불좌상이 나타난다. 신라 때 스님이 불상 둘레를 돌며 불경을 외면, 불상도 따라 돌았다고 한다(<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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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밧줄 타고 바위 밑으로 내려와 용장사 터를 만난다. 용장사는 매월당 김시습의 발자취가 서린 곳이다. 이곳에 7년간 머물며 <금오신화>를 지었다고 한다. ‘용장산은 골이 깊어 사람 오는 것이 보이지 않네’로 시작하는 ‘용장사’란 시도 남겼다. 축대만 남은 절터엔 산죽이 무성하게 우거져, 하산길 나그네에게 맑고 푸른 바람을 끼얹는다. 새로 놓은 다리 설잠교(설잠은 김시습의 법호) 건너 물길 따라 내려간다. 물가 바위에서 올려다보면 산봉우리 끝에 솟은 삼층석탑이 아득하다.

 
남산에서 가장 긴 골짜기라는 용장골을 걸어 내려오며 해설사가 마무리 해설을 했다. “이케 다니다 보면, 남산 바위가 다 불상으로 보인다 아입니꺼. 바위는 부처로 보이고, 부처는 또 바위로 보이고요. 그죠?” 골짜기를 내려오니 은은한 향기를 두른 매화나무 한 그루가 꽃을 밝히고 서서, 남산에 봄이 시작됐음을 알려주었다.
 

경주=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 여행쪽지
 
⊙ 가는 길|  수도권에서 경부고속도로 타고 가다 경주나들목에서 나간다. 35번 국도 타고 포석정 지나 삼릉으로 간다. 경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략 30분 간격으로 있는 용장리행 시내버스를 타고 삼릉에서 내린다.

⊙ 먹을 곳|  한우고기와 시래기 된장찌개, 그리고 갓 지어 내는 밥맛이 좋기로 이름난 화산 운수대통한우가든(054-762-5353), 한정식과 곤드레나물돌솥밥에 곁들여지는 20여가지 반찬이 돋보이는 삼릉 소나무숲의 소나무정원(054-746-0020), 얼큰한 순두부를 내는 보문단지 입구 맷돌순두부(054-745-2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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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드레돌솥밥 정식(왼쪽).경주 천년마중 택시.

 
⊙ 여행정보|  남산을 둘러보는 코스는 매우 다양하다. 삼불사~삼릉~상선암~금오봉~용장사 터~용장골 코스는 4시간30분쯤 걸린다. 물·도시락 준비 필수. 초행길이라면 길을 잃기 쉬우므로 해설사의 안내를 받는 게 좋다. 경주시청 관광과에선 해설사를 운영하지 않으므로 신라문화원(054-774-1950)이나 경주남산연구소(054-771-7142)를 통해 답사 안내를 받도록 한다. 경주 유적지를 둘러볼 때 해설사 자격을 가진 택시 기사가 친절하게 곳곳을 안내하며 설명해주는 ‘천년마중 택시’(054-775-7979)를 이용하는 것도 방법. 하루 7시간 기준 10만원, 불국사·양동마을권은 12만원. 신라문화원에선 올해도 4월9일부터 매월 둘째 토요일 밤에 ‘달빛 신라 역사기행’을 진행한다(2만원). 추억의 경주 수학여행, 서울에서 케이티엑스(KTX)로 떠나는 경주여행(당일·1박2일)도 있다.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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