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으로 돌아온 여행의 끝, 나는 아바타였다 황라연의 남미 배낭여행

 <21> 혼자, 진짜 홀로
 그 내가 나인지 지금 내가 나인지, 몸과 마음 따로
 반은 현재, 반은 과거 헤매며 다시 낯선 공기 꿈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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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6개월간의 여행이 끝났다. 무거운 짐을 마중 나와 주신 부모님과 나눠 들고 익숙한 계단을 올라 문을 열었다. 익숙한 냄새가 났다. 너무나도 익숙해 오히려 낯선 우리 집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가장 그리워했던 몽글몽글 부드러운 고양이가 멀리서 내 발걸음 소리를 듣고 현관에 오똑 앉아 있었나보다. 와락 안으려고 하니 오랜만에 보는 내가 낯선지 깜짝 놀라 피한다. 그래도 멀리서 지켜보다 슬금슬금 다가와 다리에 제 머리를 비벼대기도 했다. 
 
 너무 익숙해 되레 낯선 우리집…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익숙한 이불을 덮고 눈을 붙였다. 시차적응이 안 돼 혼자 새벽에 일어나 밥을 차려먹는다고 하던 먼저 여행을 끝낸 친구의 말을 떠올리면서. 시차적응을 할 여유도 없이 학기가 시작됐다. 최대한 남미에서 오래 머물러 있고 싶은 욕심에 2월27일 한국에 도착하는 비행기를 탔기 때문이다. 당연히 수업시간에는 꾸벅꾸벅 졸았고, 교수님들은 그만 좀 자라며 나를 깨우시곤 했다.
 너무나도 익숙하게 내 체취가 옮아 있는 이불을 덮고 잠이 든다. 수압 높은 샤워기에선 뜨거운 물이 쏟아지고 샴푸를 펌핑해서 머리를 감는다. 자연스레 선반의 수건을 꺼내 물기를 닦는다. 낮은 수압과 나오지 않는 뜨거운 물에 불평할 일도 없고 옷가지와 샤워도구들을 일일이 씻을 때마다 챙길 필요도 없다. 울퉁불퉁한 보도블록 위를 수업에 늦을까봐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일정한 높이로 세워진 아파트 숲 사이를 뛰어간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처음부터 그 어딘가도 가지 않고 계속 이곳에 있었던 것처럼. 친구들을 만나고 수업을 듣고 여행 이야기를 하고 사진을 정리하고. 꿈을 되새김질하며 시간이 흘러갔다.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 여행을 다녀온 건지 모르겠다고 하는 나에게 친구는 네 눈은 다른 곳을 보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정신은 육체보다 더 느리게 움직인다던데, 그때 내 정신은 태평양 즈음 건너오고 있었겠지.
 한국에 돌아오기 전 페루에서 하던 일을 모두 정리하고 함께 세계 일주를 떠나온 부부를 만났다. 그 부부는 여행의 끝을 두려워하는 나에게 웃으며 말해주었다. 라연씨는 아직 학생이니까 돌아가면 그대로 원래의 삶 속에 다시 퐁당 빠져버리면 되는 거라고. 자신들은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돼서 막막하다고. 그 말 대로 원래의 내 자리에 돌아왔다.
  
 얻은 것은 무엇일까? 일 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답 못 찾아
 
 불투명한 베일에 쌓여있는 것 같은 몽롱한 내 추억들은 이따금씩 소리 없이 찾아왔다. 시리도록 푸른 호수가 눈앞에 나타나고 들이마시면 폐 속까지 맑아지는 추운 공기가 느껴질 때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그리움에 꺽꺽거렸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슬픈 건지, 다른 사람들도 여행을 마치면 이렇게 애잔한 건지, 나만 이상한 건지.
 여행은 자신을 알기 위해 간다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 간다고들 한다. 무언가 얻으러 가는 것이라고. 여행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닌, 여행에서 무엇을 얻었나가 중요한 거라고. 벌써 일 년이 지났다. 여행 끝에 얻은 것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렇다 할 답이 나오진 않는다. 위기 대처능력?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패기? 그런 면접용 답들을 두고 “저는 이번 여행에서 이런 능력치를 쌓았습니다!”라고 하기엔 가슴이 먹먹해진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잠이 오지 않아 영화 아바타를 보았다. 주인공은 현실의 자신과 아바타를 오가며 점점 진짜 자신이 어느 것인지 혼란스러워진다. 딱 그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어느 것이 현실인지 모르겠다고. 어느 것도 다 현실이고 그저 시간의 선 위에서 나는 계속되고 있는 것뿐인데 여행을 다니던 나와 서울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나는 전혀 다른 인물로 느껴지기도 했다.
 여행의 시간들은 꿈꾸듯 몽롱하게 지나가지만 결국 현실과 맞닿아 있다. 여행이라는 것이 항상 낭만적일 수만은 없다. 낭만에 푹 젖어 있다가 다시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오면 그동안 외면했던 일들이 한꺼번에 닥쳐오기 때문이다. 후폭풍을 아직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벌써 돌아온 지 일 년이 지났다. 일 년 동안 몇 번인가 꿈속에선 푸른 호수와 눈 덮인 산이 나와 잊을 만하면 그리워지게끔 만들었다.
 
   만나고 웃고 헤어지고 아프고 또 만나고, 그래 연애였구나
 
 정말이지 이건 뭐 연애도 아니고, 기승전결이 너무나도 그것과 흡사하지 않은가! 어떤 것을 느끼고 어떤 것을 보게 될지 두려움이 섞인 설렘에 가슴 떨며 시작하게 되고 빠져 있는 동안에는 행복하며 즐겁다. 물론 수많은 갈등 또한 그 속에 있을 테고 힘든 일도 많겠지만 그것마저 긍정하며 이겨낸다. 이겨냄으로써 더욱 애착이 생긴다.
 여행이나 연애나 각자 수많은 유형이 있겠지만 오랜 시간 지속되어 온 경우 끝이 다가옴을 느낄 때마다 알면서도 어쩔 줄 몰라 그저 안타까워하게 된다. 일단 마침표를 찍은 이후에는 꿈같던 나날들을 떠올리며 그리워하기를 반복하다간 다시 새로운 것을 꿈꾼다. 이렇게 둘은 서로 닮아 있다고 생각하는 건 매우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한 것일까.
 어쨌거나 일단 돌아왔다. 원래 생활에 퐁당 빠졌지만 마치 반신욕하는 것처럼 반은 현재에, 반은 과거의 추억에서 헤매며 또 다시 낯선 공기를 꿈꾼다. 이곳이, 이곳에서 펼쳐질 내 미래가 불투명할수록 낯설었던 곳에서의 과거는 선명해진다. 며칠 전 트위터에 아는 사람이 이런 글을 썼다.
 여행에서 보고 먹고 이런 것보다는 낯섦 그 자체가 가장 좋다고. 그래, 낯섦. 여행을 떠나게 되는 이유는 낯섦에 대한 막연한 끌림이다. 그 끌림을 위해 일단은 눈앞의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꼭 전자가 멋진 사람만은 아니다. 그만큼 다녀온 후의 후폭풍이 거세기 때문에. 몇 년이 지나고 내가 나라는 역사책을 다시 훑어보게 될 때, 여행으로 값진 것을 얻었구나, 생각하게 된다면 그걸로 위안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글쎄, 잘 모르겠다. 나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지. 힘든 일이 있으면 오늘은 뭘 먹고 뭘 할지에 대한 고민만 하던 그 나날들이 떠올라 자꾸만 도망치고 싶어진다. 이게 이겨내야 할 일인지, 에라 몰라 하고 보따리 들고 또 떠나버려야 하는지도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 그래도 다음을 기약하며 오늘을 산다. 타이타닉이나 가위손 돋게 마치 할머니가 옛날이야기를 하듯 친구들에게 여행 이야기를 하면서. <끝>
 
 
P2.jpg ◈ 황라연=호랑이띠. 이름인 라연을 굴려서 발음하면 Lion. 온순하나 속은 맹수와도 같은지는 잘 모르겠음. 혼자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함. 한국에서는 주기적으로 섬에 청승 떨러 감. 좋아하는 섬은 관매도. 중고등학교 시절을 일본에서 보내고 한국에 돌아와 중앙대학교에 거저 먹기라는 특례로 입학.(그래도 나름 공부 열심히 했음)

 새내기 때 “학고 한번 맞아줘야 간지”, “시험기간에 먹는 술은 꿀맛” 등의 고학번 선배들의 유혹에 넘어가 평점 0.15를 기록. 그 뒤론 정신 차리고 공부하다 촛불집회 때 미친듯이 시위하느라 성적 말아먹고 정치에 눈뜨게 됨. 2007년엔 인도로 떠났고 2009년엔 남미로 떠났음. 2010년 여름방학에는 유럽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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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왜 떠났나
2.
콜롬비아-남미에서의 첫 식사
3.에콰도르-거지가 된 사연
4.
페루①-가방은 털렸어도
5.
페루②-첫 히치하이킹
6.페루③-드디어 아마존
7.
페루④-정글속 대도시
8.페루⑤-숙제같은 마추피추
9.볼리비아①-무지개가 떴다
10.볼리비아②-에보 모랄레스(선거일 풍경)
11.볼리비아③-사하마의 트럭운전수
12.볼리비아④-체 게바라와 고양이
13.볼리비아⑤-크리스마스,그리고 새해
14.볼리비아⑥-신음하는 은광
15.칠레-세상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
16.아르헨티나①-죽음보다 더 한 더위
17.아르헨티나②-그냥 가서 보시라
18.아르헨티나③-어, 민가협이?
19.아르헨티나④-여기에도 스위스가?
20.버스는 구름을 타고
21. 혼자, 진짜 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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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